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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울교협통신] 7호, 96.3.4

 

다시 생각하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4.11 총선이 한달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현장이 어려운데 무슨 놈의 총선이냐?"

"아니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노동자 후보를 내세워 정말 원없이 한번 싸워보자!"

여러 이야기들이 이 두 극단을 사이에 두고 나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

사실 현장과 정치가 통일되었던 예를 찾기는 어렵다. 우리는 매번 임투와 선거가 대립되는 경험을 되풀이해 왔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과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의 문제로 접근해 보자.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의 문제점은 심각하다. 현장의 문제를 중심으로, 현장 활동력을 주력으로 삼지 않는 정치운동은 언제나 현장을 대상화시키고 노동운동을 하나의 부문운동으로 협소화시킨다. 이 운동은 하청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민운동을 더 강조한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하면서 국민과 더불어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노동운동론을 주창한다. 이 운동은 "국민들이 우리에게 왕관을 씌워줄" 때까지 당선 가능한 실력을 갖추자고 설득한다. 결국 이 운동의 최고 목표치는 생존 가능한 제도 야당으로 제한된다.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의 문제 또한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장을 절대화시키는 이 운동은 일체의 정치운동을 외부세력의 음험한 개입으로 단정짓는다. 이는 이른바 바깥에 대한 극단의 피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고 협소한 노동자주의의 또다른 재판이다. 이 운동은 결국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자본가들의 선거판에 노동자를 구경꾼으로, 무력한 거수기로 묶어놓는다.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의회주의 선거정당의 건설과 등치시킨다. 이는 선거정당=정치투쟁, 노동조합=경제투쟁이라는 고색창연한 양날개론으로 후퇴하는 것이며 노동운동을 밖으로부터 계몽해야 할 하위의 운동으로 재단하는 것이다.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현장권력 장악 이후의 어떤 것으로 미뤄둔다. 그러나 정치세력화 없이 현장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본다면 이는 현장(경제)과 정치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는 단계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노동의 정치

민주노총 시대에 우리는 '천만 노동자의 단결에 복무하는 현장활동'을 요구받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앞세워 점점 더 입체화되고 고도화되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기업별 단결을 완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노력 자체가 종업원 의식을 재생산하고 협조와 참여에 기반한 노사관계의 구축으로 귀결되어가고 있는 현실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업의 생존논리를 기업의 틀 안에서 지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초토화된 현장을 복구해야 한다는 과제가 곧 산업별 단결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과 직결되게 되는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운동과 현장활동의 통일은 천만 노동자 전체의 이익을 중심으로 타계급에 대한 태도를 확정할 것(정치 의식)을 요구하며 동시에 선진 현장활동가들이 이러한 태도를 작업현장과 노동자 생활에 뿌리내린 정치활동으로 구체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란 노동자 다수의 대중 정치활동을 통해 노동계급이 우리 사회의 유력한 대안세력으로 등장하는 과정이며 자본에 맞서는 노동의 새로운 권력구조를 세워나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를 '노동의 정치'가 구체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4.11 총선을 낮은 포복으로

이번 총선은 '노동자 후보를 내세워 미래 삶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노동자의 대안을 선동하고 이를 현장에 가져와 대중투쟁과 결합시키며 선거투쟁에 참여하는 선진노동자 대중을 새롭게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또한 '독점자본의 지배가 야기하는 우리 사회의 고통과 그 결과들을 전면 폭로하고 그 원인들을 대중에게 설득하며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전체 민중의 대안세력을 조직화하는 투쟁'으로 만들어지기는 어렵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앞서 지적한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과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의 문제가 숨겨져 있다.

독자 후보를 내세우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선거과정에서 우리는 낮은 포복으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으로부터 우리는 이번에 뼈아프게 확인된 현장과 정치의 골깊은 분열을 극복하고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통일시킬 중장기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민주노총 울산시협의회에서 제안한 정치위원회의 향후 구성과 운영 속에서 그 싹을 키워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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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7:40 2005/02/14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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