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그해 첫 학기를 난 아현동에 있는 '인우학사'란 기숙사에서 지냈다.
감리교에서 운영하던 인우학사엔 여러 대학 학생들이 살고 있었다.
고향도 여러 곳이었는데 당시 어느 저녁에 전라도 선배와 술자리를 함께 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그 형은 낮은 목소리로 '광주사태'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형 얘긴지, 그 형이 들었다는 얘긴지 지금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아무튼 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안 캐비넷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얘기를
힘겹게 이어가다가 형은 결국 엉엉 울고말았다.
그날 밤 그 무거웠던 공기와 울음소리가 지금도 기억난다.
그해 가을, 난 전북 정읍 내장산으로 무작정 '무전여행'을 떠났다.
학생증 보여주고 민박에 거저 들었는데 바로 옆방에서 두런두런 얘기소리가 들려왔다.
80년 진압군으로 광주에 갔던 공수부대 출신이 거기 있었다.
당시 무슨 얘기들이 오갔는지 지금은 기억에 거의 없지만
그 공수 출신이 무척 괴로워 하고 있었던 느낌만은 어렴풋이 남아 있다.
울산 와서 만난 전라도 출신 현장활동가.
그는 80년 당시 광주제일고에 다니던 고등학생이었다.
광주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그였지만 5월 27일 새벽에 그는 도청에 없었다.
그날 새벽 방송차에서 흘러나오던 애절한 여자의 목소리를 그는 잊지 못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당시 송원전문대 2학년에 다니던 박영순의 이 호소를 그는 하루도 잊지 못했다.
그에게 광주는 늘 무겁디 무거운 죄책감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나에게 단도직입으로 묻는다.
도청에 남을 거냐, 말 거냐?
여전히 괴로운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