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과 대안] 2000년 6,7,8월
독일에서(유럽 기행)
3월 15일. 수.
어제 저녁부터 돈희 형 허리가 심상치 않더니만 아침에 보니 상태가 꽤 심각하다. 여권도 어제 오후 4시에 겨우 나오더니 이래 저래 말썽이다. 계란 국에 밥 한 그릇씩 뜨고 이갑용 선대본에 수행 나가 있는 연기흠 동지 차로 공항에 나갔다. 오전 9시 서울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뭔가 어수선한 출발이다. 10시에 김포공항 도착해서 국제선 1청사로 향했다. 대우조선 김정곤 동지와 오세철 대표, 원영수 동지를 만났다. 생판 처음 물밖에 나서는 사람은 돈희 형 하고 나 뿐이다. 점심 먹으면서 간단히 일정을 점검하고 환전도 마쳤다.
오후 2시 30분 프랑크프루트행 루프트한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음이 무겁다. 선거 뒤 끝도 그렇고 3말4초 투쟁에 사무실 이사에 총선도 걸린다. 혼자 남겨져서 3주를 부딪쳐야 하는 막막함과 두려움도 함께 몰려온다. 그러나 저러나 이미 기내 화장실 표시도 아는 언어가 아니다. 쉴 새 없이 먹을 게 나오는데 부지런히 많이 먹었다. 잠을 안자는 게 시차 적응이 빠르다는 말에 되도록 잠을 안자고 버텼다.
비행기가 중국 상공을 지나면서 산악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눈이 쌓여서 마치 굵은 칼로 나무를 새겨 목판화를 찍은 것처럼 선명하다. 산악지대가 끝나고 평야가 이어졌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어떻게 된 게 조그만 동산 하나 안 보인다. 땅이 넓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만큼 내가 이제껏 겪어온 땅이 좁았다는 얘기다.
12시간을 날아서 독일 시간으로 오후 6시 30분에 프랑크프루트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3시간을 기다려 오후 9시 45분 쾰른 행 비행기를 탔다. 1시간 쯤 지나 쾰른 공항에 도착하니 TIE에서 일하는 동지와 지역 노동자 한명이 마중 나와 있었다.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라인강변 유스호스텔에 도착하니 벌써 10시 반이다. 작년에 바로 이 유스호스텔에서 고생한 적이 있는 원영수 동지 안내로 짐 풀자마자 그 동네 맥주집으로 향했다. 구석에 자리잡고 독일 맥주 맛을 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동네 아가씨들 몇 명이 춤을 춘다. 시차 문제는 오대표님의 ‘탁월한’ 지도로 가볍게 극복되는 것 같다.
3월 16일. 목.
오전 7시 반 아침을 먹고 강변을 산책했다. 개나리가 독일에도 피는구나 신기하다. 돈희 형 상태가 점점 안좋다. 할 수 없이 돈희 형 빼고 오전에 보쿰대학교에 다니는 유학생 안내로 쾰른 시내에 있는 케테 콜비츠 전시관을 둘러봤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콜비츠 그림을 몇 점 내려받지 못했던 터라 못보던 그림들이 태반이다. 네명의 노동자가 손을 잡고 있는 ‘연대’라는 그림이 가장 맘에 든다. 12시 조금 넘어서 쾰른 대성당 근처에 있는 중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뭔가 ‘한국적’인 것을 기대했는데 오산이었다. 오후 4시 쾰른 대성당 앞에서 브레멘 대학교에 다니는 황선길 씨를 만났다. 쾰른이 식민지를 뜻한다는 말을 황선길 씨한테서 처음 들었다.
오후 8시 30분 TIE 회의 개회식이 열렸다. 독일 벤쯔 자동차의 현장활동가 조직 소개가 가장 관심이 갔다. 이날 밤은 황선길 씨 권유로 막걸리 같은 맥주, 바이쩬비어 맛을 봤다.
3월 17일. 금.
오전에 전체 기조 발제가 둘 있었다. 자본의 전지구적 산업별 합리화 공세에 맞서 전세계적 소산별노조 건설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과 전투적이면서도 계급성과 개성이 조화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 조직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오후에는 그룹별 워크샵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억압적 상황에 있는 노동운동 그룹에 들어갔다. 터키, 멕시코, 이란, 니콰라과 동지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란에서는 노동조합 결성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결성하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지고,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거리 시위를 벌일 경우에는 총으로 진압되어 수십명이 사망한다고 한다. 터키의 한 활동가는 한국 노동운동이 87년 이전의 비합법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합법성을 쟁취할 수 있었는지를 궁금해 했다. 브레멘에서 윤영삼 교수도 도착했다. 저녁에는 캐나다와 스리랑카 등의 사례 발표가 있었다.
3월 18일. 토.
오전에 자동차산업에서 모듈화와 외주화에 대해 토론하는 그룹에 참여했다. 발제를 맡은 킴 무디에게 질문했다. “우리의 요구가 모듈화 자체를 저지하는 것으로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듈화 도입에 따른 일자리 감소나 노동강도 강화 등의 결과들에 대한 반대여야 하는지를 묻고 싶다. 만약 후자라면 이는 방어적 요구가 아닌가? 공세적 요구를 제기한다고 했을 때 노동시간 단축 말고는 없을 것 같은데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킴 무디는 “모듈화 생산방식은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봐야 한다. 모듈화 생산방식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이미 1920년대에 도입되었다가 없어졌는데 8~90년대에 다시 도입되고 있다. 힘이 있으면 모듈 생산방식을 저지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노동시간 단축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양보교섭으로 뭔가 주고 받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물론 노동시간 단축이 유일한 요구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오후에 다이믈러-크라이슬러 토론 그룹에 참여했는데 전세계 벤쯔 공장에 있는 좌파 활동가들이 11월에 브라질에서 2주일 동안 회의를 갖기로 하고 실무적으로 논의하는 자리였다. 로버-BMW 공장 토론 그룹에도 참여했다. 영국 로버 공장이 포드에 매각되면 심각한 고용파괴가 이루어질 것이 뻔하므로 영국 로버 공장 노동자 쪽에서는 유럽 차원의 하루 총파업을 적극 제안해 들어왔다. 독일 BMW 공장의 한 활동가는 독일 금속노조의 상황이나 대중들의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영국 로버 롱비치 공장에서 먼저 행동이 있어야 하고 유럽 차원의 직장평의회에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TIE 차원에서는 우선 이 문제에 대한 공동 성명서를 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저녁에 문화행사가 열렸다. 브라질 친구가 나를 보더니 죠니워커 한 병을 내놓고 같이 마시자고 한다. 우리 한국 일행은 머리띠를 묶고 단결투쟁가를 불렀다. 당연히 박수가 컸다. 독일 카니발 노래, 터키 무리춤(군무), 미국 흑인 활동가들의 영가 풍 노래, 폴란드, 브라질, 남아공, 스리랑카, 멕시코 활동가들의 노래와 춤이 이어졌다. 마지막 독일 얀스의 제창으로 인터내셔널가를 함께 불렀다. TIE 회의의 공식 일정은 오늘로 끝이다.
3월 19일. 일.
오전에 회의의 공식 일정을 마감하고 오후 3시 30분 브레멘 행 기차를 탔다. 독일에서는 주말에 35마르크(약 2만원)면 5명까지 기차로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데 우리는 그 표로 움직였다. 오후 9시 30분에 브레멘에 도착해서 브레멘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전원호 KDI 전위원장 집에 갔다. 유길종 선배는 정말 오랜만이다. ‘브레멘 팀들’이 준비한 한국식 식사를 며칠만에 정말 배불리 잘 먹었다. 독일 소주도 처음 맛봤다.
3월 20일. 월.
오전 9시 30분 홀거 하이데 교수와 만나서 키일 행 기차를 탔다. 62세의 하이데 교수는 68 세대답게 옷차림도 수수했고 인상도 좋았다. 통역을 맡은 유순옥 씨도 함께 했는데 유순옥 씨는 간호사로 독일에 왔다가 정착한 분으로 우리를 위해 기꺼이 통역을 맡아주셨다.
키일까지 가는 기차는 중간에 함부르크에서 갈아 타게 돼 있다. 사람이 붐벼서 따로따로 기차를 탔던 우리는 그걸 정확히 몰랐는데 결국 함부르크에서 원영수 동지 하고 돈희 형, 김정곤 동지가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행히 다음 역이 종착역이라 이쪽에서 그쪽 역에 연락해서 사람을 찾아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덕분에 세명은 독일 고속열차 ICE를 탈 수 있었다.
낮 12시에 키일에 도착한 우리는 피자로 점심을 떼우며 택시로 HDW 조선소를 향했다. 미국 남부 흑인 조선 노동자들의 조직인 ‘정의를 위한 흑인 노동자’(Black Workers for Justice) 일행과 함께 HDW 조선소 직장평의회 간부의 안내를 받아 작업장을 돌아보았다. HDW 조선소는 현대중공업이나 대우조선에 견주면 규모가 작았다. 김정곤 동지는 산재추방운동연합 의장답게 작업장 구석구석 산업안전 장치나 도구들에 관심이 많았다. 잠수함 만드는 곳은 보지 못했다.
HDW를 나와서 유스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하이데 교수가 우리에게 유스호스텔 회원증을 하나씩 선물했다. 사람이 참 섬세하다. 키일 항구를 지나 시내를 걸어서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잠깐 기차 역에 들렀다. 역 매표 창구 뒤로 큰 사진이 있었는데 1919년 혁명 때 바로 이 키일 역 앞에서 봉기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오후 6시부터 회의가 시작됐다. 이 회의는 하이데 교수와 독일 현장활동가들이 주축이 돼 만든 ‘한국의 노동자를 위한 연대모임’이 주최했다. 1999년 11월 5일 유럽 전역에서 독일 금속노조와 조선산업 자본가들이 함께 벌인 반한국 시위에 대해 얘기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극복하는 국제연대를 모색하는 취지로 마련된 자리였다. 미국 남부 흑인 노동자들도 참석했기 때문에 3개 나라 말로 통역하느라 시간을 꽤 잡아먹었지만 얘기는 잘됐다. 정보를 교류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공동행동까지 나아가자고 결론을 모았다. 말미에 하이데 교수가 “정보 교류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계기로 삼는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언뜻 이해가 잘 안간다. 독일 쪽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저녁 뒷풀이 자리에서 흑맥주 맛을 봤다. 원영수 동지는 키일에 남아 볼프강이라는 친구 집에 이틀 쯤 있다가 브레멘으로 간다고 해서 우리 일행과 헤어졌다.
3월 21일. 화.
아침에 키일을 출발해서 오전 11시 30분 쯤 브레멘에 도착했다. 브레멘 역 근처에 세워둔 하이데 교수 차로 유순옥 씨 집까지 가는데 금방이라도 폐차시켜야 될 것 같은 조그만 폭스바겐 차에 6명이 낑겨 탔다. 38만KM 탄 차라는 말에 18만KM 엑셀 주인인 돈희 형이 한 코 죽는다. 유순옥 씨 집에서 라면을 먹었다. 맛이 참 ‘감동적’이다. 유순옥 씨 사는 집을 보면 거의 새 집 같은데 40년 됐다고 한다. 띵 하다.
오후에 윤영삼 교수 안내로 브레멘 공원과 시내를 둘러봤다. 마침 시내 광장에서 집회를 한다. 유치원 복지시설을 늘리라는 요구로 공공노조가 주최한 집회였는데 무슨 축제 비슷한 분위기다. 연단에는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연설을 했다. 자기가 써온 걸 읽는 것 같은데 나이 어린 학생들도 많이 연설한다. 연단 밑에서는 유인물과 뱃지를 나눠준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플랭카드도 자기가 준비해와서 몇 명이 펼쳐놓고 연설을 듣는다. 중학생 쯤 돼 보이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밴드의 노래가 집회 마지막 순서다. 나중에 합류한 황선길 씨한테 “여기는 과격한 시위는 없냐?”고 했더니 아우토노미가 시위할 때는 꽤 살벌하다고 한다.
오후 7시 30분부터 브레멘 지역의 좌파 활동가들과 만났다. 하이데 교수는 이번에도 말미에 주체의 자기 반성을 강조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본의 일부로 행동해왔음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난 번 키일에서 한 얘기가 무슨 얘긴지 이제 약간 감이 온다.
독일 쪽 활동가 몇 명의 뒷풀이 요구도 마다하고 우리는 황선길 씨 집으로 향했다. 나를 빼고 나머지 세 분은 마지막 밤이다.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뭔가 정리하는 자리가 필요했는데 너무 피곤들 했는지 마지막 정리가 잘 안됐다. 끝에 약간 여유를 둬야 하는데 아쉽다.
3월 22일. 수.
오 대표님과 돈희 형, 김정곤 동지가 프랑크프루트로 떠났다. 이제 혼자다. 앞으로 3주…
노기연 해외 연구원인 박종완 씨가 있는 브레멘 대학교 기숙사에서 밀린 빨래도 하고 다른 유학생들도 만났다. 그 중에는 숙소가 마땅치 않으면 기숙사 자기 방에서 자도 된다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이 ‘유방’이다.
3월 23일. 목.
키일에 있던 원영수 동지가 브레멘에 도착했다. 박종완 씨와 함께 셋이서 브레멘 시내를 가로지르는 베저 강변을 산책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강변에 사람들이 많다.
저녁에 원영수 동지와 함께 유길종 선배 집으로 향했다. 밀린 얘기들이 많아서 밤 늦게까지 잠을 못잤다.
3월 24일. 금.
아침에 나오면서 길종이 형이 혼자 유럽 돌아다닐 내가 걱정되는지 회화 책 한권을 건넨다. 언제 써먹을지…
원영수 동지는 프랑크프루트로 떠나고 이제 정말 혼자다. 혼자 시내로 나가서 카메라를 샀다. 돈희 형이 떠나면서 카메라 사오라고 200마르크 쥐어준 걸로 산 건데 이 때가 영어를 혼자 처음 해보는 거였다. 일단 카메라 파는 가게가 있어서 그냥 들어갔다. 내가 먼저 오토매틱 카메라 사고 싶다고 영어로 말했다. 점원 아줌마가 무슨 종류 어쩌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답했다. “simple.” 그랬더니 79마르크(약 4만5천원) 짜리 자동 카메라를 소개하는데 가격도 그렇고 기능도 그렇고 맘에 들어서 그냥 샀다. “아, 나도 영어가 되는구나.” 카메라가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래서 내친 김에 백화점을 물어봐서 거기서 제일 싼 15마르크 짜리 손목시계를 하나 샀다. 막상 혼자서 다닐려니 막막하고 겁도 나고 그랬는데 부딪혀 보니까 ‘할만 하다.’ 기차 역에 가서 내일 갈 베를린 행 표까지 예약했다.
저녁에 ‘노동자정치’ 그룹에서 활동하는 법률가 마티아스와 대뜸 “강수돌을 아느냐?”고 물어보는 ‘독일공산당 재건을 위한 노동자연대’ 중앙위원이자 벤쯔자동차 공장 노동자 게하르트 쿠퍼, 그의 쿠바 출신 부인, 노랑머리에 귀걸이, 코걸이, 눈썹걸이까지 한 트럭 부품공장 노동자 앙드레 카우프만과 만났다. 통역은 브레멘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박정현 씨가 맡아줬다.
먼저 꼭 맑스 젊을 때 처럼 생긴 마티아스가 ‘노동자정치’ 그룹에 대해 소개했다. “1920년대 독일공산당(KPD) 내부에서 당시 정세가 혁명적 정세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있었다. 1923년 KPD 지도부가 모스코바로부터 파면된다. 1928년 KPD 내부에서 “사민주의는 파시즘”이라는 테제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고 반대 그룹이 축출되는데 이 반대파가 2차 대전 후에 ‘노동자정치’ 그룹으로 이어진다. ‘노동자정치’는 2차 대전 뒤에 KPD와 제휴하려고 노력하지만 제휴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KPD가 금지되고 이후 DKP가 다시 결성되지만 DKP와도 소련에 대한 입장 차이로 결합하지 못하고 현재까지 독자 그룹으로 남아 있다. 현재 ‘노동자정치’는 전국적으로 1,000명 정도가 신문 배포망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지역조직들이 신문을 중심으로 배포와 조직과 토론을 수행하며 편집 또한 지역조직의 견해를 취합하는 과정을 밟는다. 직장평의회와 노조에 진출하고 있으며 벤쯔 공장 내부의 좌파적 활동가 모임이 있고 이 모임에서 신문을 내고 있다.”
쿠퍼와 앙드레가 ‘KPD 재건을 위한 노동자연대’에 대해 소개했다. “KPD는 나찌 때문에 해체됐다. 전후 우편향 때문에 KPD가 제대로 재건되지 못했다. 56년에 KPD가 금지되고 68 운동 이후에 공산주의 세력 중 일부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폐지한다면 정부에서 당을 허용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DKP를 결성한다. 독일통일 이후에 DKP 일부는 PDS로 흡수된다. DKP와 우리는 제국주의 문제에서 차이가 있다. DKP는 독일 제국주의에 대해서 소극적이다. 우리는 노동조합 안에서 노동조합을 변혁시키고자 한다. 우리는 소그룹이고 수백명대에 불과하지만 전국 주요 대도시와 지역에 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따로 기관지를 갖고 있지 않으며 대중선동에 주력하고 있다.”
공산주의운동에 대해 독일 정부와 자본가들이 적극적으로 탄압하지 않고 있는 이유를 물어봤다. 대답은 “부르조아 세력들이 현재 우리들을 위험세력으로 안보기 때문에 눈 감아주고 있는 것이고 오히려 그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적극적으로 탄압해 들어올 것이다.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고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확장된다면 탄압이 올 것은 뻔한 일이다. 실제 노동조합 안에서 공산주의적 정치조직 소속이라고 터놓고 얘기하지 못하는 입장이다. 노동조합이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간접적 탄압에 동참하고 있다. 50년대와 70년대에 공산주의 조합원 수천명이 노조에서 축출되었다.”는 것이다.
좌파 정치조직들 사이의 노동자 통일전선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쿠퍼가 대답했다. “통일전선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동독의 흡수통합 문제 같은 경우는 의견 차이가 크다. 그리고 사업장 안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라는 게 별로 없다. 브레멘 벤쯔공장 16,000명 중에 혁명적인 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전선 얘기하는 건 무의미하다. 지금이 역사적으로 독일 좌파가 가장 약한 상태다.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티아스는 70년대 그렇게 활발했던 독일의 현장조직운동이 쇠퇴하게 된 이유에 대해 68 세대들의 현장 이탈과 혁명적 전망의 상실을 들었다. 그러면서 지금 독일 좌파운동은 좌파들끼리의 연결과 정보교환 등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독일 좌파의 현재가 한국 좌파의 미래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투쟁하겠다”고 얘기하고 대담을 마쳤다.
3월 25일. 토.
아침 9시부터 브레멘 노드에서 독일금속노조 브레멘 지부 대의원대회가 열렸는데 그쪽 초청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대회 초반에 소개와 더불어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 통역은 박종완 동지가 했다.
“동지들 반갑습니다.
저는 지난 3월 20일 함께 온 한국 조선 노동자 2명과 함께 키일에서 뉴백 플랜더 조선소, 린덴나우 조선소, HDW 조선소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작년 11월 5일 독일금속노조와 조선산업 자본가들이 함께 벌인 시위에 대해서 들었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저는 11월 5일 시위가 있었을 때 플랜더 직장평의회에서 한국 금속연맹 조선분과 위원장의 연대사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린덴나우 조선소 직장평의회 의장이 “우리의 적은 한국 노동자가 아니라 독일의 자본가와 IMF”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는 사실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박수) 플랜더 직장평의회와 린덴나우 직장평의회 동지들이 실천한 연대는 협소한 민족주의를 넘어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구현한 매우 값진 행동이었습니다.(박수)
지금 한국에서는 대우자동차가 GM으로 매각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자동차산업 노동조합의 파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대우자동차 노조 위원장과 상집간부 전원이 철야농성에 들어갔고 월요일부터 전면파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은 부품사업부 이관, 시트사업부 매각, 라인 이전, 외주화, 용역화, 모듈화 등 자본의 구조조정 공세에 맞서 3월말부터 무기한 총파업을 벌일 예정입니다. 이 투쟁은 공기업 민영화 반대투쟁과 같은 다른 구조조정 반대투쟁으로 이어지면서 민주노총의 5월 총파업으로 집중될 것입니다. 금속연맹과 민주노총의 지도부가 굳건하다면 이 투쟁은 조합원 대중의 투쟁의지를 볼 때 대단히 성공적으로 치러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이곳 브레멘 불칸 조선소가 폐업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있는 울산에서도 98년 현대자동차에서 12,000명 이상이 잘려나가면서 공장 근처에 빈 집이 늘어나고 집값이 폭락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일자리를 위한 연대’는 독일 노동자와 독일 자본가가 한국 노동자를 짓밟고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독일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가 힘을 합쳐 세계화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투쟁할 때만 쟁취 가능한 것입니다.(박수)
저는 오늘 이 자리가 자본의 분열 공세를 노동자 연대로 박살내는 힘찬 결의의 장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투쟁의 인사로 제 말을 끝마치겠습니다. 투쟁!”
연설을 마치니까 지부장이 탁상용 지부 깃발과 볼펜을 선물한다. 4년만에 있는 지부장 선거가 겹쳐 있는 터라 상당히 의전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9시부터 세시간동안 쉬는 시간 없이 강행하겠다던 의사진행 발언대로 대회는 빡빡하게 진행됐다. 사업보고 마치고 대의원들의 질의가 쏟아졌다.
“보고서에는 잔뜩 써놨는데 세계화, 국제연대, 유태인 학살… 아무 것도 없다. 그런 거 안할 거면 의장 그 자리에 도대체 왜 앉아 있냐?”
“여기 불칸에서 잘난 척 하지 마라. 사업장 이전 문제 심각하다. 실업이 양산되고 있다.”
“노조가 너무 수세적이다. 계급투쟁을 복원해야 한다. 조합원이 참여하는 강력한 투쟁 벌써 오래 전부터 해본 적이 없다. 협상은 현장의 투쟁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단협 들어가면서 조합원들에게 먼저 묻지 않고 들어가는 것은 문제다. 불칸 조선소 망했을 때 노조가 강력한 거리투쟁을 벌였어야 했는데 아예 없었다. 그럴거면 노조가 뭣 때문에 있는 거냐?”
“새로운 노동자 교육정책이 필요하다.”
“벤쯔공장에서 반나찌 시위할 때 금속노조에서 왜 안왔느냐?”
“유고, 코소보 문제에 대해서 금속노조는 침묵했다. 독일 군비 확장 문제에 대해서도 금속노조는 침묵해고 무관심했다. 이래서야 되느냐?”
“지금 대의원들 너무 늙었다.(웃음) 젊은 사람들이 대의원에 많이 나와야 한다. 직업학교에 대해 보다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
집행부에 대한 노골적인 아부성 발언도 있었다.
“금속노조 덕분에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어거지 박수 유도)
“집행부를 믿어라.”
의장이 답변했다. “그래도 할만큼 했다. 구조조정, 세계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뜬 구름 잡듯이 하는 얘기는 곤란하다. 단협에서 신나찌 요구는 하나도 안들어줬다.”
집행부 쪽 다른 사람도 답변에 나섰다. “나찌 반대 집회 조합원들한테 물어보니까 집회 참석하지 말라고 하더라. 그래서 참여 안했다. 우리는 지금 68년, 74년에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지금 2000년에 살고 있다. 변화된 상황에 맞는 변화된 투쟁을 하자.”(박수)
마지막 박수는 의외였는데 가만히 보니까 60대 이상 대의원들이 굉장히 많았고 이들 대부분이 친집행부 성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베를린 행 기차 시간 때문에 점심시간에 나와야 했는데 어제 봤던 쿠퍼와 앙드레가 대의원대회가 어떤지 물어본다. “한국 같았으면 집행부가 저렇게 건방 떨면 엎어버린다”고 대답했다. 쿠퍼와 앙드레 표정이 순간 씁쓸해진다. 이번엔 내가 물어봤다. “표결로 들어가면 반대표가 어느 정도 되느냐?” 160여명의 대의원 가운데 기권을 포함해서 한 20표 된다는 게 대답이었다.
브레멘 시내로 돌아와서 베저강변 벼룩시장을 구경하고 베를린행 기차를 탔다. 하노버에서 한번 갈아타고 베를린 주우 역에 도착하니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한노정연 해외 연구원인 이상호 씨가 마중나와 있었다. 곧바로 도착한 곳이 마침 이사하는 한 유학생 집이었다. 베를린 도착하자마자 이사짐부터 날랐다. 이사짐 다 나르고 ‘한 요리’ 하는 갈현숙 씨가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베를린 유학생들과 얘기를 나눴다. 단연 화제는 한국 4.13 총선이었고 울산 북구 얘기였다. 울산 북구 얘기를 한참 했더니 “비관적이네요.” 한다.
3월 26일. 일.
이상호 씨 집에 짐을 풀고 이상호 씨 따라 베를린 시내를 구경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거리, 리프크네히트 하우스, 맑스와 엥겔스 동상, 브란덴부르크 문을 두루 봤고 사진도 찍었다. 날씨가 참 안좋다.
3월 27일. 월.
오후에 이상호 씨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는 안숙영 씨와 함께 베를린 북부 BMW 슈판다우 공장을 방문하여 TIE 회의에도 참석한 적이 있는 한스 쾨브리히를 만났다. 이 대담은 안숙영 씨가 녹취를 풀어 정리했기 때문에 그대로 싣는다.
* 자동차부문에서 활동하는 한국과 독일의 현장 활동가의 만남
언제: 2000년 3월 27일 월요일, 오후 1시 30분에서 3시 30분까지
어디서: 베를린 북부 슈판다우 구(區)에 있는 BMW 공장(BMW-Werk) 내 직장평의회 회의실
누가: 한국의 현장활동가: 이종호,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대표
독일의 현장활동가: 한스 쾨브리히(Hans Köbrich), 베를린 BMW-Werk 노조신임자회 의장
1. 독일의 기업내 조직에 대한 간략한 소개(한스 쾨브리히)
한 기업내에는 일반적으로 ‘직장평의회’(Betriebsrat)와 ‘노조신임자회‘(Vertrauensleute)라는 두 개의 조직이 있다.
1) 직장평의회: ① 기업법(Betriebsverfassungsgesetz)에 따른 기업내 대표자이다. ② 노조원인가 아닌가와는 상관없이 전 종업원이 참여한다. ③ 기업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법적인 범위내에서 해결한다. 따라서 노동시간의 문제와 같은 커다란 쟁점에서는 활동영역에 한계가 있다. ④ 사안이 중대할 경우에는, 직장평의회 차원에서 해결이 어려울 경우에는, 노조신임자회와 협의를 한다.
2) 노조신임자회: ① 기업법에 따른 대표권은 없다. ② 노조원인 경우에만 선출이 가능하다. ③ 현재 베를린 BMW에는 100명 정도의 노조신임자가 있으며, 노동자 20명당 1명의 신임자를 뽑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④ 현재 BMW에서 노조의 힘은 약한 편이다. ⑤ 직장평의회 차원에서 해결이 어려운 사안의 경우는, 직장평의회와 노조신임자회가 공동으로 대처한다. 직장평의회가 기업에 요구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해결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따라서 협상으로 해결이 안되면 조합원들의 직접적 행동이 요구된다.
2. 한국의 현장조직운동에 대한 소개(이종호)
한스: 한국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라는 두 개의 노조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민주노총내에도 노사협조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는 말인가? 한 노조내에 다양한 노선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종호: 그렇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깊게 토론을 나누었으면 한다. 매번의 노조선거에서 이 노선들이 경합을 벌이거나 서로 연합전선을 펼치기도 한다. 현재는 지역적 차원이 아니라 전국적 차원에서 각 노선의 현장 활동가 그룹들이 각각 하나의 네트웤을 형성하고 있다.
한스: 민주노총내에서 다양한 입장의 차이가 공존한다는 게 자신에게는 아주 새롭다. 1995년 민주노총이 건설될 당시 나도 그 현장에 있었는데, 민주노총은 계급적 노선을 견지한 전투적 노조라는 것이 당시의 인상이었다. 따라서 노사협조주의적 노선, 계급적 노선을 비롯한 6개의 노선이 존재한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아주 새롭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겠는가?
이종호: 1999년 2월 금속연맹 선거가 있었는데, 당시 3파전으로 진행되었다. 세 그룹에서 선거에 나왔고, 노골적인 노사협조주의는 민주노총내에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이를 제외하면 금속연맹내에서는 3파전이었다.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 민족해방주의적 노선’, ‘사민주의적 노선’, ‘좌파적, 계급지향적 노선’. 이 3파가 단위사업장 선거든, 연맹선거든, 민주노총선거든 매번 선거에서 경합을 벌이고 있으며, 민주노총내의 세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한스: 자신이 알기로는 한국노총이 노사협조주의적인데, 민주노총내의 노사협조주의와는 어떻게 다른가? 어디에 차이가 있는가? 총파업 같은 경우는 양 노총이 함께 연대하여 주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종호: 상층지도부에서는 그렇지만, 현재 한국노총의 마지막 보루인 부두노동자들의 경우도 그 내부에 민주노총 계열이 생겨나면서 현재 파업을 벌이고 있으며, 한국전력, 철도등이 한국노총의 뿌리깊은 기반인데, 거기서 지금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어, 상층과 하층의 요구가 충돌하고 있다. 한국노총의 상층 지도부와 기본 대중 사이에 괴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스: 프랑스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좌파 노조와 사민주의적 노조가 있는데, 사민주의적 노조가 때로는 전투적으로 싸우는 경우도 있다. 독일 금속노조(IG-Metall)의 경우도 강력히 사민주의화되었다. 민주노총은 언제 합법화되었는가?
이종호: 작년이다.
한스: 상층지도부의 그러한 경향에도 불구하고 노조내에 전투적 경향이 존재하고 있는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는가?
이종호: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5월투쟁이 계획되어 있다. TIE 회의에서 이미 설명했는데.
한스: 경기침체기의 노조의 역할에 대해 한국과 터키의 동료들이 발표를 했었다. TIE 회의에서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는가?
이종호: 대우자동차의 GM매각에 반대하는 투쟁에 대해 소개했다. 4개 자동차 회사의 좌파적 현장 활동가들이 모여 공동투쟁위원회를 꾸려서, 총파업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게끔, 그래서 예정되어 있는 민주노총의 5월 총파업투쟁으로 연결되게끔, 밑에서부터 독자적인 투쟁을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하는 것이다.
한스: 5월의 총파업을 이끌어나갈 주체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인가? 공동투쟁위원회는 전국적 차원의 조직인가, 그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이종호: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이다. 현대자동차 현 노조지도부는 민족해방주의적 노선을 가지고 있어서, 해외자본에 의한 매각을 반대하는 자본측과 공조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
한스: 그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은 하나의 자동차 콘체른을 가져야 한다는. GM에 의한 매각이든, 예를 들어 현대에 의한 매각이든, 구조조정은 당연히 해고를 불러온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해고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투쟁의 목적이 민족적인 자동차회사를 갖는 것에 놓여져서는 안된다.
이종호: 지도부내에 민족주의적 경향이 있으나, 현장쪽에서는 자본의 국적과 무관하게 구조조정이 들어왔을 때 그 자체로 파생될 수 밖에 없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 또다른 정리해고라든가 노동강도 강화라든가하는 문제에 대응하려 한다. 이건 비단 자동차산업뿐 아니라, 공기업 민영화 움직임도 4, 5월로 예정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반대투쟁도 계획중이다.
한스: 다이믈러-클라이슬러에서 보이듯이 자동차산업에서 기업통합의 가속화, 집중화는 일반적 경향이다. 이것은 다양한 부정적 영향을 가져온다. 이에 대응해야 한다.
3. 독일의 상황에 대한 한국 현장활동가의 질문
1) 쾰른에서의 TIE 회의에서 벤쯔 공장 현장 활동가들의 전국적 차원의 네트웤에 대해 들었다. 맞는가?
한스: 그렇다. 우리는 하나의 네트웤이라 할 수 있는 ‘협의구조(Koordination)’를 가지고 있다. 여러 메르세데스 공장에서 온 활동가 그룹들이 만나 공장 내에서의 경험들을 교환하거나 협의하고 토론한다. 이 ‘메르세데스 협의구조’(Mercedes-Koordination)도 있으며 하나의 ‘자동차 협의구조’(Auto-Koordination)도 있다. ‘자동차 협의구조’는 콘체른으로부터 독립적이다. ‘메르세데스 협의구조’의 경우 그 어느 공장보다도 많은 좌파적 활동가 그룹이 있다. 보쿰의 오펠, 베를린 BMW의 경우는 좌파적 현장활동가의 규모나 영향력이 작다. ‘자동차 협의구조’내에서 메르세데스가 가장 강력하며, 브레멘, 함부르크, 카셀, 뒤셀도르프, 만하임, 슈트트가르트 공장을 연결하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협의구조’를 가지고 있다. 브라질의 좌파 활동가들이 메르세데스 만하임지부와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는 등 이들의 ‘협의구조’는 전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작년 11월에는 노조의 건설이 어려운 미국공장에 노조를 건설, 이러한 메르세데스의 경험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것도 네크웤의 한 부분이다.
이 네크웤은 노동조합내 좌파적 경향을 가진 활동가들의 네크웤이다. 공식노조인 금속노조(IG-Metall)는 이러한 네트웤을 만들지 않는다. 공식노조는 자동차부문에서는 주로 직장평의회의 대표들을 만나며, 노동운동이 아니라 경제의 활성화가 주 관심사이다. 예를 들어, 생산입지로서의 독일의 강화와 같은. 노동조합의 국제화와 같은 이슈에는 금속노조가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있다.
2) BMW내의 네크웤은 구성원이 몇 명이며,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한스: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다. 네크웤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그룹은 일단 직장평의회의 노사협조주의에 반대하는 그룹들이다. BMW의 경우 아주 다양한 그룹들이 존재, 한달 혹은 두 달에 한 번 만나며, 공장내의 사안들을 토론하고는 했다. 그러나 직장평의회라는 공식적 구조를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데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점차로 직장평의회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다수의 좌파적 현장 활동가 그룹이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직장평의회의 과제를 떠맡으면서는 기업법의 한계내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노사협조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을 피할 수 없었다. 오늘날은 따라서 좌파적 입장이 소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좌파적 입장을 견지하려면 직장평의회의 과제를 떠맡아서는 안된다.
의사결정이 원만히 이루어지는 모범적 사례를 거론하기는 어렵다. 사안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다. ‘협의구조’내에는 직장평의회에서 만나는 그룹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우리의 경우는 한편으로는 직장평의회에서 모임을 가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조신임자의 자격으로 모임을 갖기도 한다. 서로 다른 다양한 부서에서 노조신임자의 모임이 있다. 그러나 좌파적 입장은 단지 하나의 입장에 속할 뿐 그다지 강력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3) 현장활동가의 재생산을 위한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한스: 아주 다양하다. TIE회의 자체도 교육의 담당자(Bildungstraeger)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공동의 전략을 발전시키기 위해, 직장평의회에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한다. TIE회의의 경우도 1년에 4-5개의 직장평의회세미나(Betriebsräteseminaren)가 포함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IG-Metall내에도 세미나 프로그램이 있다. 자신의 경우도 자원봉사자로 노동자의 정치화를 위해 세미나를 이끌고 있다.
이종호: 이 정도로 활동가로 성장하는게 충분한가?
한스: 물론 정치화의 수준은 낮은 편이다. 독일의 노동자가 전반적으로 정치화의 수준이 낮은 편이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움직이고 문제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으며, 우리도 아주 완화된 형태로만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를 하는 수준이다. 교육의 중요한 목적은 물론 노동자의 정치화이다.
이종호: 한국의 경우는 다양한 학습 소모임을 통해, 철학이나 정치경제학도 공부하고 있는데. 이외에 더 심화된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지?
한스: 우리 또한 심화된 세미나를 전개할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번 9월에 정치경제학 세미나를 계획중이다. 그러나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는 자신하기 어렵다.
4) 현장활동가 내부에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한스: 최소한의 합의는 노동자계급의 해방적 정치이다. 이 점에서는 이견이 없으며 우리들은 서로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룹들내에 차이들이나 경향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자동차산업을 예로 들면, 크게 정당지향적인 흐름과 현장지향적인 흐름이 있으며, 좌파 공산주의 계열내에는 전반적으로 6개의 경향이 존재한다(노동자정치, 공산당 재건위, KPD, MLPD, 트로츠키주의적 경향, 통합 사회주의정당).
이종호: 브레멘에서 노동자정치, 공산당재건위, MLPD 및 하이데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 노동자정치나 재건위와는 역사나 현재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나머지 그룹과도 대화를 나누고 싶다. 가능한가? 내 관심은 현장활동속에서 노동해방정치를 어떻게 실현하려고 하는지에 놓여져 있다.
한스: 베를린에 있는 그룹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갖기를 원하는가? 물론 베를린에도 일하는 그룹들이 있지만, 자동차부문에는 없다. 자동차부문의 경우는 아이제나흐의 오펠공장에 프리츠 호프만이라는 동료를 들 수 있다. 자동차부문이 아닌 경우 .베를린의 지멘스에서 활동하는 MLPD소속 동료를 소개해 줄 수 있다. 전화로 연락가능하다.
이종호: 나머지의 좌파 공산주의계열의 사람들과 접촉을 할 수 있는가?
한스: 소그룹으로 KPD가 있다. 70년대와 80년대 초에는 이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컸었다. 그밖에도 다양한 종류의 트로츠키주의적 그룹들이 있다. 공동의 사회주의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ML조직과 트로츠키주의적 조직을 통합하여 VSP(통합 사회주의 정당, Vereinigte Sozialistische Partei)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나도 일원이었다.
이종호: 시간이 되면 VSP에 대해 역사나 현장활동 중심으로 자세히 설명해줬으면 한다.
한스: VSP의 발전은 역사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공산주의적 그룹이나 정당들은 1968년 이후에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마오주의적 경향을 띤 이전의 공산당을 들 수 있다. 공식노조에서의 활동이 아니라 공장내에 다양한 세포를 건설하는데 주력을 기울였다. 다음으로는 트로츠키주의적 경향의 국제 맑스주의그룹(GIM, Gruppe Internationaler Marxisten)을 들 수 있는데, 공장에서는 그다지 강하지 않으나, 노동조합에 가까워지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야콥 모니터가 GIM의 가장 오랜 대표자인데, 80년대에 금속노조신문의 편집자였다. 그리고 WBK를 들 수 있는데, 이들 역시 마오주의적 경향의 하나로, 이후 이들 중 일부는 녹색당으로 가기도 했으며, 일부는 남아서 공산주의적 정치를 계속 추구하기도 했다. 80년대말에 공산주의적 분파내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분파, 정치적 그륩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적어도 이 세 개의 정당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우선 WBK가 KPD와 협상을 시작했지만, WBK가 트로츠키주의자와 함께 일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KPD와 GIM이 공동으로 하나의 사회주의적 정치를 지향하고자 만든 것이 VSP이다.
1987년경 상대적으로 많은 현장 활동가가 있었으나, 만남의 현실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하나의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다는 구상은 점차로 매력을 상실해갔다. 예를 들어 KPD의 경우 공장내 활동가들(Betriebsaktivisten)이 많은데, 직장평의회에서 활동하는데 시간을 쓰느라, 사회주의정당을 건설을 고민할 시간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VSP에서 점차로 소수로 변화되어갔다. BWK의 경우는 PDS로 통합되어 들어갔으나, 좌파 공산주의적 경향의 활동가들이 현재도 PDS내에서 하나의 분파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종호: 그렇다면 VSP의 성원은 얼마나 되며 오늘날 현장활동과 관련해 어떠한 활동을 하고 있는가?
한스: 전국적으로 작은 그룹들이 산재해있다. ML적 경향과 트로츠키주의적 경향의 결합이기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매력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정당인 혁명적 사회주의정당(RSP, Revolutionar Sozialistische Partei)을 따로 만들었다. 통합을 위한 노력은 따라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다.
이종호: 공장내에서 좌파 활동가들의 입지가 약화된 것은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한스: 어려운 질문이다. 자신의 경험에서만 말한다면, 통합시도의 무산에 따른 실망, 통합에 대한 상호간의 불신(예를 들면, 트로츠키주의적 노선의 Entrismus의 문제점, 일단 어딘가 들어가 입장을 확산시킨다는 전략으로, 이들은 진정한 통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확산시키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만 간주할 뿐이다), 그리고 일상정치(Tagespolitik)의 절대화, 주로 직장평의회일에만 매달리느라 사회주의적 정치를 위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홈페이지에서 다양한 그룹들에 관한 정보나 신문을 얻을 수 있다.
이종호: 한국의 경우는 17-18개 그룹의 현장활동가들이 한달에 한 번 모여 대표자회의를 한다. 가능하다면 독일에 있는 자동차부문에서의 활동가 네트웍들과 교류를 하고 싶다. 기본적인 정보교환의 방법들이 있으면 소개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한사람의 좌파로서 정치적 현장활동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현장 활동가 조직들의 규약이나, 신문, 자료를 얻을 수 있는가?
한스: 대표적으로는 Express라는 신문을 내고 있는 Express-Büro(오펜바흐에 있는 사무실)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오래된 조직이며, 새로운 조직으로는 ‘자동차 협의구조’(Auto-Koordination)을 들 수 있다. 공동의 규약은 없다. 그러나 스트라이크가 있을 경우 공동의 보조를 취하기 위해 TIE회의에서 활동가들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BMW 베를린 공장의 경우, ‘노조신임자 소식지(Vertrauensleute Info)’가 있다. 좌파적 현장 활동가로서의 어려운 점은 직장평의회와 노동조합의 일을 결합시키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3월 28일. 화.
헤겔과 브레이트, 본회퍼 목사의 무덤이 베를린 시내 같은 곳에 있었다. 본회퍼 목사 무덤에만 꽃이 있었다. 브레이트 앙상블이라는 전용 극장 앞 브레이트 동상 옆에서 사진도 찍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을 찾아 동베를린 쪽으로 넘어가는데 동독 쪽에 실업률이 극심해서 나찌도 많고 아시아 쪽 사람들에 대한 테러가 심하다고 겁을 준다. 동베를린 쪽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전체적인 도시 색깔도 우중충하고 사람들 표정도 무겁다. 은근히 그 무표정에 겁도 난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지, 사람들 표정은 어둡고 꼭 뭐에 성이 난 표정들이지… 어쨌든 별 탈 없이 사회주의자 무덤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해마다 10만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은 날을 기념해서 베를린 시내 로자가 죽은 장소에서 이곳까지 행진하는데, 그날은 독일 좌파들의 거의 모든 유인물을 볼 수 있는 날이라고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정면에 나란히 누워 있다. 꽃집이 문을 닫아서 아쉬웠는데 로자 무덤에는 이미 카네이션이 놓여 있었다. 다시 서베를린 쪽으로 넘어오는데 넘어오는 전차에서 동구 쪽에서 온 것이 분명한 한 친구가 민요를 부르고 구걸을 한다. 러시안가? 어쨌든 그 노래 가락이 어찌나 구슬픈지 잠시 가슴 한 구석이 미어진다. 이번엔 68 혁명의 기린아 드취케의 무덤이다. 드취케에 대해서는 처음 들었는데 암살로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났지만 그 후유증으로 독일을 떠나 유럽 전역을 떠돌다가 10년만에 의문사한 삶의 이력도 그렇고 68 혁명 당시 가장 뛰어난 선동가였다는 사실도 그렇고 왜 지금껏 한국에 전혀 소개가 안됐는지 모르겠다.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3월 29일. 수.
베를린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이 슈푸레강이다. 이 강 한가운데 떠있는 섬박물관에 갔다. 후발 자본주의로 출발해서 후발 제국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던 독일로서는 식민지에서 별반 가져온 게 없는 편인데 이 섬박물관에는 그래도 몇가지 뜯어온 게 보인다. 페르가몬 신전은 아예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고리끼 극장은 공사중이었다. 케테 콜비츠의 조각이 있고 맑스와 레닌이 공부했던 훔볼트 대학을 들어가봤다. 현관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 위쪽으로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가 커다랗게 적혀 있다. 사진을 찍으려다가 마침 칸트 학회 비슷한 걸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많아서 ‘쪽이 팔려’ 못찍었다. 원래가 터키 음식이라는 캐밥도 먹고 이집트 박물관도 돌아봤다. 이집트 박물관 앞으로 샬롯텐부르크 성이 있는데 이 성의 정원이 그렇게 클 수 없었다. 잘 가꿔진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날씨는 여전히 잔뜩 흐림 또는 비다.
3월 30일. 목.
오후에 이상호 씨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곽노완 씨와 함께 다이믈러-크라이슬러 마리엔펠테 공장에 있는 빌리 쾨닉을 만났다. 이 만남은 곽노완 씨가 녹취를 풀어 정리했다. 그대로 싣는다.
때: 2000년 3월 30일 목요일 오후 2시 45분-4시 30분
장소: 다임러 크라이슬러 마리엔펠데 공장(베를린)
- 다소 동문서답이나, 채 질문이 던져지기 전에 독일친구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장황하게 한 경우가 있어서 인터뷰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음. 특히 앞부분에 그런 경우가 많음. 따라서 독일친구가 말한 내용은 바꾸지 않았지만 순서는 논리적으로 재구성한 부분이 있음.
이종호: 우리나라의 대공장에는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현장조직들이 있다. 여기는 어떤가.
빌리: 우리에겐 확실히 현장지향적인 열성조합원이 있다. 그러나 정당 프랙션이 조합에 있는 것은 아니다. 조합원들이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통일적으로 움직인다. 대내적으로는 토론이 있고 다양한 견해들이 대두된다. 하지만 독일에는 하나의 조합만이 있고 우리는 하나의 조합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 공장의 경우 직장평의회 회원 모두가 금속노조 조합원이다. 8년전만해도 사용자측에 협조적인 사람들, 기독교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노조신임자나 직장평의회에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들은 없다. 그 이후 대안적 비판적 조합활동가들이 노력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직장평의회나, 금속노조에서 입장을 관철시키기가 쉽지는 않다.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독일내 벤쯔사 모든 공장의 조합지도자들(노조신임자이자 현장활동가인 사람들을 뜻함)이 공식적으로 만났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본다. 전사 직장평의회에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내가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사용자측에서 공장간 분할전략, 예를 들면 슈트트가르트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베를린 공장의 노동자들은 임금이 더 낮다는 등 생산시설을 다른 지역 공장으로 옮기겠다는 등의 방침을 갖고 얘기할 때, 벤쯔사의 전노동자들이 단결해야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벤쯔사 전체 활동가들의 만남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자메일이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이에 대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현장과의 결합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벤쯔사와 크라이슬러의 합작으로 크라이슬러의 미주 공장 노동자들과의 접촉도 필요한데, 이는 아직 비공식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사용자측이 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작년에 사비를 들여서 미국공장을 방문했다.
이종호: 현재 이 공장에 현장활동가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빌리: 회사마다 다른데, 이 공장에는 현장활동가 조직은 없다.
이종호: 그게 금지되어 있는가.
빌리: 그렇진 않다. 하지만 그게 긍정적일 수도 있지만 부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직장평의회에서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의견들이 토론되고 있다. 하지만 2차대전후 동서독이 분할되면서 공산주의, 맑스주의 등등은 직장평의회에서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이다. 조합원들도 대체로 점차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공장의 노조신임자들은 교육휴가를 활용하여 노조에 대한 교육을 하는 등 발전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반조합원들과 캐나다 노동조합, 일반적인 정치문제, 한국의 노동운동 등등에 대해 토론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노동강도의 심화 등등은 모든 조합원들과 관련되어 있어서 조합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데, 이런 주제로 조합원들을 교육시키면서 노동시간과 임금문제 등등의 교육도 결합시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직장평의회 합의사항을 주지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만약 사용자측에서 합의사항을 어기고 부당행위를 할 경우 노동자들이 직장평의회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게 보통이지만 우리공장에서는 노조신임자가 같이 사용자측을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한다. 이를 통해 노조신임자나 조합활동가들의 현장에 대한 지도력이 강화되도록 애쓰고 있다.
이종호: 좌파지향적 활동가가 노조나 노조신임자, 직장평의회에 얼마나 진출해 있는가.
빌리: 우리공장에서 6명의 노조신임자중 4명이 좌파지향적인 사람들이고 직장평의회에서는 24명중 4명이 좌파지향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각각 다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좌파신문, 예를들면 스파르타쿠스나 붉은 깃발 등은 조합원들에게 외면당하는 분위기이다.
이종호: 베를린에서 좌파 현장활동가들이 정기적인 회의를 하는가.
빌리: 매달 내지 두달에 한번 모임을 갖고 모임은 공식적인 행사로 진행된다. 세미나나 발표회등이 조직되고 교회나 공공건물의 회의실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보통 열성적인 좌파지향적 조합원들이 참가한다.
처음에는 술집등등에서 비공식적으로 만났는데, 참가자가 자꾸 줄어서 채 10명도 못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10명, 어떤때는 20-30명, 심지어 40명까지 참가한다.
이종호: 모임을 준비하는 사무국 등이 있는가.
빌리: 없다. 하지만 금속노조에서 이를 허용할 만큼 분위기가 바뀌어서 금속노조지부에서 일하는 친구들중 국제주의그룹의 한 친구(Hans)가 연락을 해주고 있다. 금속노조에서 좌파들이 매우 활동적이라서 많은 일들을 맡고 있고 금속노조에서 좌파들의 독자적인 활동을 묵인해주는 정도로 상황이 호전되었다. 그리고 이 결과 금속노조에서 좌파 스펙트럼이 형성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종호 : 좌파 현장활동가들이 금속노조 베를린 대의원 등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빌리: 몇 %인지 정확히는 모르겠고 최근들어 점점 늘고 있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점점 줄어서 0%에 가까웠다.
이종호: 브레멘에선 160명중 20명정도 된다고 들었다.
빌리: 베를린에서도 비슷한 비율일 것 같다.
이종호: 독일 전체 벤쯔공장 활동가 모임에 대해 지난 TIE회의에서 얼핏 들었는데, 얼마나 자주 열리고 어느 정도의 인원이 참가하는가, 그리고 독자적인 기관지 등은 있는가. 또 어떤 활동들을 하는가.
빌리: 정기적으로 1년에 4번 만난다. TIE회의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자동차 전체의 노조신임자중 공장당 1-2명씩 모두 3-40명 참가한다.
대안적 노동조합활동가들은 독자적인 신문을 갖고 있다.
이종호: 어떤 신문인가. 레이버넷에 뜨는가.
빌리: 레이버넷에는 뜨지 않는다. 여기 여러 종류의 신문들이 있다. 이것들이 그것이다.
이종호: 그런데 자동차모임에서 내는 독자적인 신문은 없는 것 아닌가.
빌리: TIE회의의 보고서는 매번 나오고 그 보고서가 Express에 실린다.
이종호: 이번 TIE 자동차모임과, 6월 24-5일 보쿰에서 열리는 2차 자동차모임하고의 관계는 어떤가. 그 모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빌리: 그 모임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 모임은 붉은 깃발 사람들이 주최하는 모임인 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장의 노동자들과 별 관련이 없다. 이 공장에도 붉은 깃발과 가까운 경향의 활동가가 있어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들이 머리속에 갖고 있는 이론과 공장현실간에 우주공간만한 괴리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변혁의 영구성에 대해 신념을 갖고 있지만 현장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아무도 안 듣는다. 사회변혁은 동료들이 같이 해줄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게 안되면 독재로 귀결될 것이다.
이종호: 금속노조 협상안에 현장조직이 영향을 미치고 사후에 그에 대해 영향을 행사하는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있는가.
빌리: 공장마다 상황이 다르다. 그런데 금속노조 차원의 단협에서 최저라인이 합의되면 공장의 상황에 따라 어디는 20-25%까지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고 어디는 금속노조의 최저라인만큼도 따내기에 벅찬 경우도 있다. 특히 동독지역이 그러한데, 그런 곳에선 해고가 증가하곤 한다. 어쨌든 노동자대중은 토론은 이루어지고 여기서 노동자측 임금인상안이 결정되곤 한다. 그런데 금속노조의 협상이 종결된 후 협상내용을 조합원들에 추인받는 시스템은 없다. 현장활동가들이 협상내용이 불만스러울 경우 조합원들의 항의를 조직해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노동자들이 별로 참가하지 않는다.
이종호: 베를린외에 현장활동가 모임이 이루어지는 도시가 있는가. 그러고 나아가 전국적인 네트웍이 있는지. 없다면 계획은 있는지.
빌리: 물론 있다. 보쿰은 틀림없이 있을 것 같고, 오래된 대도시에는 웬만하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전국적인 네트웍은 없고,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이를 추진할 여력이 없다. 시간과 인력이 모자란다.
이상호: 완성차업체에서 일하는 노조신임자로서 부품업체, 하청업체노조나 노동자들과의 연대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어디까지 연대가 되고 있는가.
빌리: 물론 중요하다. 지난번 프랑스의 스마트 벤쯔공장 노조와의 연대가 실현되었다. 프랑스 벤쯔공장 노조는 공산계 노조였는데 여기서 행사시 우리가 가서 국제연대를 천명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로 하였다. 이 때의 결과는 아주 좋았다. 상대적으로 벤쯔사내 공장들간에는 연대가 쉽다. 하지만 아직도 다른 부품, 하청업체와의 체계적인 연대는 미진한 상황이다. 예를 들어 중소공장의 노동자들 대부분과 대공장 노동자들중에도 상당수는 금속노조도 이미 좌파라고 생각한다. 이는 언론 등등의 배제로 인한 탓도 있다. 특히 몇백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는 공장에서 금속노조의 조합원이 10명정도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베를린은 상대적으로 조직률이 높은 편이다. 특히 대공장의 조직률은 높다. 어쨌든 연대가 무척 힘들다. 슬픈 일이지만 어제 서독지역 금속노조 임금협상이 타결된 후, 오늘 동독지역은 아직 협상중이라 지원투쟁을 나가기로 했는데, 직장평의회 24명중 8명만이 참가했다. 만약 어제 임금협상이 타결되지 않았으면 오늘 예정된 파업에 이 공장노동자들 전체(2,800명)의 80-90% 정도가 참가했을 것이다. 금속노조조합원이든 아니든. 그러나 동독지역 협상이 아직 타결되지 않았고 동독노동자들은 서독 노동자 임금의 81%만 받고 노동시간도 3시간이 길어서 우리가 오늘 지원투쟁을 조직했는데 일반노동자들은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참가할 수 없지만 시간이 되는 직장평의회 24명중 겨우 8명만이 참가한 것이다.
이상호: 아직 벤쯔 사내 현장활동가들간에 모임의 시도가 없는가.
빌리: 내가 처음에 얘기했듯이 올해 처음으로 독일내 벤쯔사 전공장의 노조지도자들(노조신임자 내지 현장활동가를 뜻함)이 공식적으로 만났다. 이는 예전에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금속노조 상층부와 전사 직장평의회에서 이를 허용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이를 처음으로 성사시켰고 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모임을 통해 사용자측의 공장간 분리전략에 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빌리: 한국에 좌파활동가들만이 아니라 일반노동자들도 읽는 노동자들의 신문이 많이 있는가.
이종호: 매우 많다. 전국적 일간지도 있고, 민주노총신문도 있으며, 많은 현장조직이나 활동가조직에서도 독자적으로 신문이나 잡지를 내고 있다.
빌리: 한가지 추천할 것이 있다. 캐나다 자동차 노조가 미국 자동차 노조의 노사협조주의에 대항하여 분리되어 나왔는데, 아주 인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레이버넷에서 포드사의 부품업체인 Saturn의 한지(Hansi?)와 접촉하면 캐나다 자동차 노조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될 것이다. 한번 접촉해 보길 바란다. 캐나다 자동차 노조는 국제연대의 한 모범사례가 된다고 생각된다. 사용자들이 공장을 이전하려고 할 때, 이 노조는 이전할 공장의 노조가입률이 100%가 되면 공장문을 닫는데 반대하지 않겠다고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종호: 오늘 얘기 고마웠고 향후 협력할 일이 있으면 서로 돕도록 하자.
면담이 끝나고 빌리는 독일금속노조 깃발을 깃대에서 기를 쓰고 떼어내서는 나한테 주었다.(이 깃발은 나중에 돈희 형한테 줬는데 돈희 형이 다시 금속산업연맹에 기증했다.) 게다가 벤쯔 자동차 모형하고 카네이션 꽃들, 그리고 2000년 메이데이 뱃지까지 챙겨주었다. 3월 29일 독일금속노조가 단협을 타결하면서, 하기로 했던 경고파업을 못하게 돼서 미안해 그런가 보다. 공장 들어오는 입구 굴다리를 막고 크게 한판 할려고 했나 본데 퍽이나 아쉬워 한다. 공장을 같이 나오면서 “활동을 하면서 뭐가 가장 힘드냐?”고 물어봤더니 “대중이 너무 보수화되어 있어서 정치적 내용을 가지고 대중활동을 하지 못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대답한다.
3월 31일. 금.
오전 10시에 이상호 씨 집에서 지멘스 공장에서 활동하는 터키인 게리를 만났다. 이어 게리와 함께 ‘독일 맑스레닌주의당’(MLPD) 베를린 지부당사를 찾아가 6월 보쿰 자동차회의 준비모임 담당자인 클라우데와 MLPD 베를린 지부 비서인 디터와 만나 얘기를 나눴다. 이날 면담들은 이상호 씨가 녹취를 풀어 정리했다. 그대로 싣는다.
3차 면담(3월 31일 오전 10시)
-게리, 지멘스 발전설비제조공장(베를린)의 노조신임자이고 MLPD의 소속원이다.
-이 종호씨의 소개
이종호: 계속 독일내 좌파 정치조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MLPD라는 정치조직에 대해 알고싶다. 특히 노동자현장조직의 활동과 정치조직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싶다.
게리: 먼저 ‘자동차노동자위원회(Automobilarbeiterratschlag: AR)’에 대해서 이야기한 후에, 종호의 질문과 관련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AR은 98년 쾰른에서 처음 모였다. 약 600명 정도의 자동차산업관련 맑스레닌주의적 노동자들이 모여서 다양한 주제와 분과를 중심으로 이틀간 회의가 진행되었다. 각 분과나 주제모임들의 의사일정 및 의견교환을 위해서 ‘조정위원회’가 이 회의를 총괄하였다. 당시에 다양한 주제 및 분과모임이 있지만, 크게 자동차산업노동자의 국제연대, 국내자동차산업 노동자의 연대, 여성 및 청년노동자문제로 나눌 수 있다. 당시에 MLPD는 ‘사고방식의 전환’이라는 기본원칙에 따라 민주적, 직접참여적인 의사결정을 이 회의속에서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종호: MLPD의 기본적인 활동목표는 무엇인가?
게리: 기본원칙은 ‘사고방식의 전환’과 ‘현장중심의 맑스레닌주의적 노동정치의 실현’이다. 사고방식의 전환이란 자본주의사회에 뿌리깊게 내려있는 소부르조아적 사고를 프롤레타리아적 사고로 대체하는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사회의 변화에 있다.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자계급의식의 발전에 있다. 현장중심적인 노동정치의 실현은 의회주의적 당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테리중심적인 논쟁보다는 노동자현장(공장과 지역 등)속에서 노동자의 직접적인 정치개입으로 발전시키는데 있다.
종호: MLPD의 현장활동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달라.
게리: 현장활동의 기본적 핵심은 이론으로서 맑스레닌주의적 이론과 노동현장의 실천을 결합시키는데 있다. 다른 그룹들은 이론적 경향에 많이 기울어있기 때문에, 별다른 현장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현장문제 뿐만 아니라, 청년과 여성문제에도 나름대로 개입하고 있다.
종호: MLPD의 공장내 조직들의 활동은 어떤지, 정치조직과의 관계 및 노조내 신임자, 공장내 직장평의회와의 관계를 알고 싶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게리: 나 보다는 MLPD지부 담당자와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독일에서 공장내 공산주의적 정치조직은 활동하기 무척 어렵다. 지금까지 계속 이런 활동으로 인해 많은 동료들이 공장에서 해고되고 어려움을 겪었다.
종호: 너가 알고 있는 것만이라도 이야기해다오.
게리: MLPD활동가들은 노조내, 기업내에서 노동자의 전투적 기풍을 유지확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활동가들이 기존 독일금속노조에 대해서 직접적인 반대를 조직화하지는 않는다. 이는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이러한 비타협적인 전술이 고립을 자초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조원으로 있으면서 그 내부에서 노동자의식을 계급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한 ‘능동적인’ 개입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상호: 그렇다면, 너가 근무하는 지멘스공장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해다오.
게리: 공장은 1,400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노조원은 600명이다. 노조신임자는 60명이고,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이는 7명인데, 그 중에 한명이 바로 나다. 다른 6명은 모두 직장평의회위원을 겸임하고 있다. 전체 직장평의회는 15명이다. 나 외에는 대부분 노사동반자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종호: 너가 다니고 있는 공장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내 정치조직, 특히 MLPD의 활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
게리: 이에 대한 내용은 나의 관할밖의 문제이다. 내가 그 문제에 대해서 답할 입장이 못된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베를린지부에 직접 가서 그 담당자와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 내가 안내할 수 있다.
4차 면담
1. 클라우데와의 면담
-클라우데는 베를린지부 자동차회의준비모임담당자이다.
-이 종호의 소개
종호: 현재 베를린에서 오는 6월에 있을 ‘자동차산업노동자회의(AR)’에 대해서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크라우데: MLPD 청년위원회 위원이 참가한 ‘준비모임’이 하나 있다. 약 8-10명이고, 베를린에 있는 각 자동차공장의 청년노동자나 견습공이 참가하고 있다. 주로 준비하고 있는 주제는 ‘견습공제도의 강화와 교육후 고용보장’이다. 이번 임단협의 타결내용에서 알수 있듯이 금속노조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개선하였다. 이는 바로 이러한 좌파활동가들의 움직임에 대한 노조의 대응책으로 표현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동차회의는 좌파지향적인 활동가들의 영향력들을 확대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나는 청년당담이기 때문에, 이 준비모임을 조직화하고 있다.
종호: 이 자동차회의의 주체는 누구이며, MLPD는 어떤식으로 결합하고 있는지?
크라우데: 기초에 각 지역 및 공장 ‘현장조직들’, 그리고 약 20개의 주제별 ‘준비모임’들이 있다. MLPD는 각 주제나 현장조직들을 조직하거나 참가하여 이 모임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기초위에 준비모임‘중앙’과 ‘조정위원회’가 있다. 이들이 자동차회의를 총괄한다.
종호: 98년 당시의 ‘회의’에 대해서 묻고 싶다. 조직구성 및 회의운영은 어떻게 준비되고 이루어졌나?
크라우데: MLPD가 제기하고 중심적인 회의준비그룹 중에 하나이지만, 의사결정기구는 다양한 자동차산업관련 활동가조직들이 구성하고 있는 ‘조정위원회’가 총괄한다. MLPD의 경우 약 60개의 공장조직, 20개정도의 지역조직, 3-4개의 대학조직에 각 소속원들이 있기 때문에, 각 현장모임과 준비모임에서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2. 디터와의 면담
-디터, MLPD 베를린지부의 비서이다. 그는 10년전까지 루르지역에서 노동활동가로 일했고, 통독 이후 동독지역의 조직재건을 위해서 베를린으로 이사.
-한국상황에 대한 간략한 소개, 면담목적등을 설명
종호: MLPD의 역사와 발전과정에 대해서 알고 싶다.
디터: 56년 독일공산당이 금지된다. 62년 소비에트연방의 흐루시초프의 탈냉전정책, 혹은 수정주의를 보고, 친소비에트노선에 대한 논쟁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마오주의가 어느 정도 유입되어 공산주의그룹들내 새로운 공산주의운동이 독일내에 시작된다. 68년 학생혁명이후 약 100개 이상의 중소 공산주의경향의 그룹들이 생겨난다. 대부분이 인텔리중심적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 중 노동자현장조직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루르지역그룹과 남독일그룹이 결합하여 72년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D)이 만들어진다. 약 10년간의 준비기간이 지난 후 82년 처음 MLPD(독일맑스레닌주의당)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다른 대부분의 그룹은 없어진다. 96년 5차 당대회에서 당노선을 어느 정도 혁신하는데, 기본원칙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노동자대중들과의 접촉활동을 강화한다. 99년 6차대회에서 당의 자기혁신과정이 어느 정도 완수되었고 대중영향력을 보다 확대하는 작업들을 시도할 것을 결정한다.
또한 여기서 ‘사고방식의 전환’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활동가들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소시민적 사고와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이 항상 존재한다. 이 때 노동자현장활동에서도 즉자적인 대응 보다는 의식적으로 조직화된 활동이 중요하다. AR도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 꾸려진 모임이다.
종호: ‘자동차회의’에 대해서 좀 더 알려달라.
디터: 일단 초당적인 모임이다. MLPD는 처음부터 추진체에 참가했고 계속 지원하는 입장이다. 현재 자동차공장내 노동자들간의 연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초당적인 사회주의적 노동자조직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장중심적인 노동운동과의 직접적인 결합은 6차 당대회(99년)에서 결정된 ‘밑으로의 대중결합과 영향력회복’이라는 노선과 깊이 관련된다. 중심적인 고리는 공장과 노조내 노동자들의 현장활동을 보다 확대시키는데서 찾고 있다.
종호: 당신들의 고민과 우리가 이 점에서 비슷하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MLPD의 공장현장조직과 정치운동적 활동을 알고 싶다.
디터: 독일금속노조내에는 대략 두가지 경향이 존재한다. ‘노사정’ 혹은 ‘직장평의회’로 요약할 수 있는 사회동반자적 운동노선이 있다. 다른 하나는 좌파적 전통을 지닌 다소 전투적인 노동자그룹이 있는데, 이들은 첫째노선에 반대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좌파지향적인 현장조직들은 ‘반’합법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공장에 따라, 소속노조 및 해당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장내 활동으로 한정한다면, 활동가들이 노조신임자선거, 직장평의회선거에 나가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선거에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소그룹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공식적인 노조체계조직이나 직장평의회활동을 비판하고 제어하는 활동을 한다.
종호: 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디터: 금속노조에 속하는 자동차대공장의 경우, 좌파적인 기풍이 강하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자동차회의’와 같은 큰 토론회를 꾸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펠의 아이제나흐공장의 경우 공장내 현장활동가신문이 존재하고, 보쿰에 있는 포드공장도 마찬가지다. 또한 이러한 공장내에서 MLPD는 청년노동자들의 급진적 노조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레벨’이라는 좌파청년노동자조직에 직접 결합하여 이들의 활동을 지원한다. 이 조직은 자체 신문도 있고, 조직구성은 좌파지향적인 각 그룹들이 연합으로 구성된다. 이와 달리, 좌파기풍이 낮지만, 지역조직이 존재하는 경우, 보다 공적인 대중작업들을 우선한다. 예를 들어 루르지방에 있는 겔젠킬헤라는 곳에서 오늘 지역차원에서 ‘광산노동자의 데모’가 있다. 이는 지역정부의 새로운 노동시장정책에 대한 반대가 목적이다. 이러한 과정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좌파적인 내용들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또 다른 한 방식이다.
종호: MLPD의 교육프로그램, 활동가들을 위한 교육은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활동가들은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는가?
디터: 기업, 지역 및 대학으로 조직된 각 현장조직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고, 자체교육사업을 진행한다. 당원교육은 주로 지역차원에서 공개세미나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노동자교육센터’라는 기구를 이용하여 공개적인 세미나, 강의를 조직하고 있다. 이는 약간씩 다른 경향을 지닌 사회주의적 조직들이 각 세미나 내용들을 제출하고 공동으로 이 교육단체들을 운영하고 있다.
종호: 정치적 경향이 다른 그룹들이 이러한 교육센터나 프로그램을 공유할 수 있는가?
디터: 이 교육센터는 초창기부터 MLPD와 같은 정치조직들이 깊이 서로 결합하여 교육단체를 구성하였다. 교육단체의 운영과 조직에 MLPD는 직접 참가하고 책임을 지고 있다. 아무튼 공개적인 정치교육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조직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권리를 지니고 있는 교육휴가시 이러한 교육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달에 있을 ‘노동시간 30시간단축’이라는 세미나는 나 또한 한 토론자로 참가할 예정이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노동자교육권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MLPD 베를린 지부당사는 아래층에 문구점, 서점, 식당이 있고 위층에 사무실들이 있었다. 대화중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대한 고민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디터는 폴란드에 있는 필리핀의 시손 등이 11월 뒤스부르크에서 ‘자유를 위한 국제 투쟁연대’를 제안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날 저녁에 드취케 비디오를 봤다. 눈이 정말 불탄다.
4월 1일. 토.
저녁에 새로 이사한 안숙영 씨 집에서 베를린 유학생들과 세미나를 했다. 한달에 한번씩 빠지지 않고 모이는데 성원이 10여명 된다고 한다. 이번 주제는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파업이다. 오늘로 베를린도 마지막이다. 그나저나 베를린에서 해를 본 적이 없다. 정말 이런 날씨에 사는 독일 사람들이 불쌍해 죽겠다.
4월 2일. 일.
그동안 신세 졌던 이상호 씨와 출산한지 얼마 안된 부인한테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충분히 못하고 베를린을 떠났다. TIE 회의에서 만났던 프랑스의 히르쉬라는 친구가 말을 바꾸는 바람에 프랑스 일정이 취소됐고 그 때문에 무턱대고 일단 움직였다. 유로패스 아끼느라 35마르크 짜리 주말 티켓으로 트리어까지 가는데 12시간 걸렸다.
4월 3일. 월.
맑스 생가를 찾았다. 마침 오늘이 4.3이다. 독일어로 쓰여진 공산당선언의 글자들만으로 맑스와 엥겔스의 얼굴 초상을 그려낸 포스터 한 장을 샀다.(이 포스터를 보고 싶으면 겸사겸사 울산에 오실 것)
예수 성의가 있다는 근처 돔에도 가봤다. 성의는 사진으로만 봤다.
4월 4일. 화.
모젤강과 라인강이 합쳐지는 코블렌쯔에서 만하임을 거쳐 오스트리아 알프스를 지나 이태리 베로나로, 다시 베로나에서 베네찌아로 갔다. 이제부터는 독일을 벗어나 유럽 배낭여행이다. 도착한 시간이 너무 늦어 유스호스텔로는 못들어가고 허름한 호텔을 찾아 골목 구석으로 들어갔다. 세 군데 알아보니 보통 싸게 얘기하는 게 10만 리라(대략 5만5천원)다. 네 번째 찾아간 호텔은 밖에 간판도 제대로 없는 집이었는데 9만 리라 부른다. 주인장은 이태리 말로 하고 나는 짧은 영어로 얘기하는데 뜻은 대충 통한다. 결국 식당 간이 침대에서 자고 아침 일찍 식사하자마자 나가는 조건으로 3만 리라까지 깎았다. 잠이 아주 달다.
4월 5일. 수.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는데 주인장이 잠깐 기다리라며 빵 두 개를 건넨다. 어찌나 고마운지… 내가 되게 없어 보였나 보다. 호텔서 얻은 지도를 보고 유데카 섬에 있는 오스텔로(유스호스텔 하면 잘 모른다)를 찾아가 짐을 풀어놓고 훼로바 역에서 내일 로마행 표를 예약한 다음에 베네찌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독일서 그렇게 귀하던 햇볕이 여기선 이렇게 흔하다. 이태리에선 지금이 선거 시긴가 선거 포스터가 동네 마다 붙어 있다. 지자체 선거다. 당들이 무지 많다. 공산주의 계열 당도 두 개쯤 되는 것 같다. 돌아다니다가 그 중 한 당의 선거 홍보물도 얻었다. 여긴 관광객들이 너무 많다. 비수기일 것 같은데도 휩쓸려 다닌다고 할 정도니… 되도록 정규 코스 아닌 곳 같은 데로 골라 움직여도 비슷하다. 골목마다 볼 거리고 아무 성당이나 들어가면 또 조각들에 그림들이 풍성하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수로와 골목골목을 조금씩 벗어나면 조그마한 동네 마당들이 지친 걸음을 쉬게 한다. 마당들 마다 의자도 있고 동네 수도도 있어 잠깐씩 쉬기는 그만이다. 어딜 가나 아이들 뛰어노는 건 똑같다. 참새와 비둘기들은 과자 부스러기 주어 먹느라 정신이 없다. 덩치도 크고 숫자도 많은 비둘기들이 조그만 참새한테 번번이 과자 부스러기를 빼앗긴다. ‘속도’ 차이다. 아직 갑작스러운 배낭여행 일정이 ‘정리’가 안되는지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다. 뭔가 느긋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런저런 걱정들이 자꾸 뒷꼭지를 무겁게 한다. 하루종일 말을 할 필요가 거의 없기 때문에 걷다가 보다가 쉬다가 생각하다가 뭔가 끄적대다가 다시 걷다가 하는 게 전부다.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오스텔로로 돌아왔다. 대충 씻고 누웠는데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너무 시끄럽다. 피곤하다.
4월 6일. 목.
아침에 오스텔로를 나왔다. 배 타고 성마르꼬 성당에 가서 성당이며 광장을 꼼꼼이 다시 보고 훼로바 역 근처로 와서 동네 공원서 잠시 쉰다. 베네찌아에는 숲이 적은데 이 공원도 조그맣다. 새소리만 간간히 들리고 조용하다. 베네찌아 소나무는 잎들이 길어서 우리 소나무와 생김새가 좀 다르다. 멀리서 보면 꼭 부풀린 흑인들 곱슬머리 같다. 계획을 가지거나 사전 정보를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지 고민이다. 스위스도 하루쯤 있을까? 지금 일정대로 하면 마드리드는 갈 수 있을까? 패스가 그렇게 되나? 로마엔 소매치기들 하고 좀도둑이 많다는데… 걔들 보기에 나같이 혼자 다니는 아시아 촌놈은 완전히 밥일텐데… 신발이 편해야 하는데 발에 너무 꽉 끼는 걸 신고 나와서 물집 잡히고 부르트고 엉망이다. 여행은 확실히 체력전이다. 동양인 모녀가 저쪽 벤치에 앉아서 이쪽을 잠깐 바라본다. 같은 동양인들을 보면서 느끼는 이 ‘쑥스러움’ 같은 건 또 뭘까?
훼로바 역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피렌쩨를 거쳐 로마로 향했다. 분명히 예약할 때 non smoking 했는데 흡연석으로 자리가 배정돼 있다. 그래도 음료수가 공짜로 써비스되는 게 ICE보다 낫다. 이태리도 기차길 따라 벽이며 차량에 낙서가 있기는 독일 하고 마찬가지다. 그러나 독일 낙서에 견주면 그 수가 많이 적어지고 또 훨씬 자유분방하다. 독일 낙서는 어딜 가나 틀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이태리 낙서는 파격이 크고 추상화가 과감하다. 피렌쩨 가는 길 차창 밖 이태리 북부의 풍경은 낯설지 않다. 조그만 산들이 이어지고 전봇대가 보이고 집들도 조그만 하고… 독일엔 산들이 아예 없고 전봇대도 안보이고 집들도 큼직큼직한 게 깨끗하고 그림 같긴 하지만 뭔가 변화가 없고 또 결정적으로 날씨가 우중충해서 무거워 보이는데, 이곳은 꼭 서울 출장 갔다가 울산 돌아가는 길 고속도로 차창 밖 풍경 하고 비슷하다. 완연한 봄이다. 로마 다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 된 게 유로패스에 도장을 안찍는다. 하루 버는 건가?
로마 떨어지자마자 인포매이션 가서 오스텔로 가는 길 물어보고 로마 시내 지도 한 장을 얻었다. 지하철 타고 다시 버스 타서 오스텔로를 찾아갔는데 카운터 보는 친구가 내 여권을 보더니 대뜸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한다. 한국 사람들이 어지간히 오긴 온 모양이다. 짐 풀어놓고 일단 시내로 들어갔다. 베드로 성당에서는 저녁 미사가 한창이다. 성베드로 광장을 지나 성안젤로 성 거쳐 엠마뉴엘 다리로 해서 한 바퀴 돌았다. 엠마뉴엘 다리에 있는 조각 하나가 인상적이다. 로마 군인이 가슴을 쫙펴고 서있고 그 뒤로 노예인 듯한 두명이 뭔가를 힘겹게 끌고 있는 조각인데 옛 로마를 이렇게 한 눈에 이해시키는 조각도 없을 것 같다. 마찌니 광장 거쳐서 오스텔로까지 걸어 돌아왔다. 패드 열쇠 사서 배낭 째 패드에 놓고 잠근 다음 침대에 들었다. 한 친구랑 인사를 건넸는데 벨기에 친구다. 내일 돌아볼 코스를 대충 정하고 잠을 청한다.
4월 7일. 금.
아침에 테르미니 역에 가서 내일 아침 쮜리히 행 기차를 예약했다. 역무원에게 “쮜리히” 하니까 모르고 결국 메모지에 쓴 걸 보더니 “아, 쮸리치” 한다.
역 맞은 편에 있는 로마 국립 박물관 근처부터 헤매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집시 여자 셋이서 뭐라 그러면서 다가온다. 원영수 동지한테서 노뉴단의 김명준 대표가 로마에서 집시 여자들에게 소매치기 당했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앗 뜨거 하면서 잽싸게 몸을 피했다. 이 집시 여자들, 지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지하철 타고 콜로세움으로 갔다. 콜로세움 한 바퀴를 다 돌고 바로 앞에 있는 포로 로마노로 들어간다. 부서져 없어진 부분들을 상상으로 채우며 천천히 걷는데 한 무더기 독일 관광객들 하고 일본 관광객들 하고 마주 스치면서 독일 쪽 가이드가 “사요나라” 하니까 서로 너무 좋아라 한다. 독일과 일본은 혼탕 습관도 그렇고 파시즘 경험도 그렇고 서로 비슷한 점이 꽤 있다. 괜한 비약인가? 포로 로마노를 나와서 판테온 신전까지 천천히 걸었다. 판테온의 커다란 대리석 기둥에 잠시 몸을 기댔다가 트레비 분수를 거쳐 스페인 계단까지 걸어 갔다. 트레비 분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생각보다 규모가 작다. 스페인 계단 꼭대기에서 초상화 그리는 사람들의 초상을 잠시 구경하다가 초대 기독교인들의 지하 무덤인 카타콤으로 향했다.
지하철 A노선을 타고 콜리 알바니 역에 내려서 660번 ATAC 자동버스로 종점까지 가야 카타콤이 있는 시골 마을이다. 이 시골 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다 보면 오른 편에 공사중인 성칼리스토의 카타콤이 있고 좀 더 내려오면 성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이 있다. 이 시골 길이 마음에 든다. 너무 조용하다.
이태리식 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떼우고 시내 쪽으로 돌아와 바티칸 박물관을 찾았다. 지하철 역을 잘못 내렸는지 방향이 헷갈려 지나가는 이태리 아가씨한테 박물관이 어느 방향이냐고 물어봤다. 이 아가씨, 영어 질문에 잠시 당황하더니 떠듬떠듬 “Let's go with me." 한다. 함께 걷다가 박물관 입구 쯤에서 헤어지는데 내가 자기 영어를 알아듣는 게 신기한지 너무너무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스스로가 되게 대견스러웠나 보다. 그런데 막상 박물관에 도착하니 박물관 입장 시간이 넘어서 출입이 안된단다.
높은 담 따라 난 길을 걸어 성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길래 무심코 따라 섰는데 성당 꼭대기로 올라가는 줄이다. 입장료를 내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중간에 천장 모자이크 그림들을 감상하고 내처 다시 올라가야 돔 꼭대기다. 여기서는 로마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여러 언어들과 여러 얼굴색들이 돔 꼭대기를 360도 함께 돈다.
좁은 계단을 타고 한참 내려오면 성당 안이다. 쾰른 대성당이나 베네찌아의 성마르꼬 성당을 보고 감탄했는데 성베드로 성당에 견주니까 되려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성당 안의 모든 것들이 벅차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세상에 자식 여윈 어머니의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또 있을까? 케테 콜비츠의 조각이나 그림들 중에도 자식의 주검을 부등켜 안고 있는 어머니를 소재로 한 것들이 여럿 있는데, 구원이든 혁명이든 절망과 슬픔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지 않고서야 이룰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하고 고통이 고통을 위로하는 법이다. 내 슬픔과 고통이 피에타에게서 크게 위로받는다.
성베드로 성당을 나와서 ‘진짜’ 이태리 스파게티를 먹었다. 입맛에 맞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거리에 노점판이 벌어졌는데 되게 싸다. 5,000리라 짜리 티와 6,000리라 짜리 셔츠를 한벌씩 샀다. 우리 돈으로 3,000원 안팎이니까 꽤나 싼 편이다. 로마 거리는 내가 느끼기에 매연이 좀 심한 편이다. 오토바이도 많고, 독일 하고는 틀리게 사람보다 차가 먼저다. 이 점은 우리나라랑 영락없이 닮은 꼴이다.
오스텔로로 돌아와 입구에서 맥주 한 깡통을 들이키는데 같은 방에 있는 마르꼬 프란체스카란 이태리 친구가 말을 건넨다. “어디서 왔냐?”고 하길래 “사우스 코리아”라고 했더니 대뜸 “거긴 달이 더 크냐?”고 묻는다. 땅딸막한 데다 뚱뚱하고 머리는 벗겨졌는데 수염은 덥수룩하니 꼭 산쵸 같아 보이는 친구가 달밤에 달 타령이다.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로마에도 선거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던데 이번 선거는 어느 당이 이길 것 같냐?”고 물어봤더니 잘 모르겠단다. “정당이 몇 개쯤 되냐?”고 물었더니 “무지무지 많다”고 대답한다. 서로 못하는 영어끼리는 그런대로 거의 다 통한다. 잠시 침묵. “밀라노로 해서 쮜리히 아니 쮸리치로 가는 길에 알프스가 제대로 보이느냐?”고 물었다. 이 친구, “당근이지” 하는 투로 기차가 어디 어디 거치는 것까지 잔뜩 늘어놓더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날씨 좋은 겨울에 런던행 비행기를 타 보라”면서 “아, 백설 알프스!” 혼자 감탄한다. 브레멘의 황선길 씨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추켜 세운 길인만큼 기대도 커진다. 밋밋했던 오스트리아 알프스 하고는 확실히 뭔가 다르겠지…
4월 8일. 토.
아침 일찍 서둘러 오스텔로를 떠나 8시 30분발 밀라노행 유로스타에 올라탔다. 날씨가 너무 좋다. 이태리 말의 끝 모음들은 어두운 독일 말 끝 모음들보다 훨씬 밝다. 날씨 탓일까? 이번엔 금연석이 아예 없어서 흡연석으로 예약했는데 유럽은 담배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다. 이건 좀 문제다.
바로 앞에 앉은 두 이태리 신사들, 너무 멋을 부렸다. 목소리도 잔뜩 힘을 주고 거기다 선그라스까지 끼었다. 써비스되는 음료수는 폼나게 거부하면서 쿠키는 또 받아 먹는다. 폼생폼사… 마치 마피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아니, 혹시 정말 마피아 아냐?
밀라노에 도착했다. 중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주문을 제대로 못해서 중국 아가씨한테 눈총을 받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포식했다. 뒷자리에 한국 아주머니들 몇 분이서 밥을 먹는다. 이럴 때 참 난감하다. 아는 척 하자니 멋적고 모른 척 하자니 그렇고. 트리어에서도 버스 안에서 그런 적이 있는데 아는 척 하기가 뭣해서 그냥 지나쳤다. 그나저나 이 아주머니들 대화 주제가 자녀들 교육 문제다. 어딜 가나 애들 교육이 문제다.
쮜리히 행 열차에 올라탔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가 스위스 알프스에 대한 기대감을 더 크게 한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마드리드까지는 너무 멀어서 포기해야 할 것 같고 스위스에서 하루 더 있는 게 나을 것 같다. 느긋해 진다. 참으로 오랜만에 여유라는 게 생긴다. 배도 부르고… 코모라는 도시를 지나친다. 이름이 참 맘에 든다. 산들이 조금씩 높아진다. 호수도 보이기 시작한다. 나른하다. 몸도 마음도 기분 좋게 풀어지는 느낌이다. 스위스로 들어왔다. 여기도 철로변에 낙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거의 없다시피 할만큼 낙서가 적고 만화적이다. 기차에 올라타는 분들이 대부분 할머니들이다. 그런데 다들 너무너무 씩씩하다. 그렇게 억세다는 독일 할머니들도 스위스 할머니들한테는 한 수 접힐 것 같다.
차창 밖 알프스는 정말 아름답다. 앞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 한 분한테 내가 말했다. “beautiful."
쮜리히 도착해서 유스호스텔에 짐을 풀고 저녁까지 먹고나서 시내 밤거리로 나섰다. 역전 상가로 해서 호숫가까지 한바퀴 천천히 돌았다. 어딜 가나 학생들 몰려 다니는 건 똑 같은 것 같다.
스위스 독어는 좀 다른가?
4월 9일. 일.
아래 침대에서 자는 친구 몸에서 나는 냄새 하고 코 고는 소리에 잠을 많이 설쳤는데 그래서 그런지 약간 늦게 일어났다. 베른에서 툰, 인터라켄, 브리엔쯔, 루쩨른으로 이어지는 기차 길로 중부 스위스를 가로질렀다. 루쩨른에서는 배를 타고 호수를 반 바퀴 쯤 돌았다. 루쩨른에는 아주 오래된 나무 다리가 하나 있었다. 중간에 불에 타서 일부는 새로 지었는데 고풍스러운 맛은 여전하다. 호수를 따라 잠깐 걷다 보니 동네 어른들이 무슨 쇠공놀이를 한다. 꼭 우리 동전치기 비슷한 건데 이 놀이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스필레아 빼딱’(?)이라고 한다. 독일도 그렇고 스위스도 그렇고 사람들 노는 게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양반들, 이 ‘단순’한 놀이에 너무 진지하다.
쮜리히로 돌아와서 파리행 밤기차를 탔다. 침대칸을 예약 안했더니 2등실에서 비좁게 간다.
4월 10일. 월.
눈을 뜨니 파리다. 새벽 파리는 비에 젖어 있었다. 여명인데 눈에 띄는 건 또 역시 철로변 낙서다. 파리에선 뭔가 아주 ‘예술적’인 낙서를 기대했는데 그냥 낙서다. 지금까지 본 낙서 중에 가장 낙서답다. 이스트 역에 내려 인포매이션 찾는데도 한참 힘들었는데 막상 영어로 유스호스텔 어디냐고 물으니까 안내하는 여자가 한마디로 영어 못한다고 딱 잡아뗀다. 미치겠다. 한참을 혼자 끙끙거리다가 길종이 형에게 받은 회화책 생각이 퍼뜩 나서 유스호스텔 물어보는 문장을 찾아 불어로 떠듬떠듬 읽었더니 그제서야 영어로 뭐라 그런다. 그런데 이 아가씨 하는 영어가 도대체 뭔 말인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유스호스텔 어디 있는지 아예 모르고 오전이 다 가는 건 아닌지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환전부터 일단 하자 싶어 환전 창구에서 돈을 바꾸면서 무심코 유스호스텔을 물어봤는데, 창구에 있는 친구가 파리 시내에 있는 유스호스텔들의 전화번호, 지하철역, 주소까지 인쇄되어 있는 종이를 건네준다. 이제 살았다. 지하철 매표소에서 하루짜리 티켓 끊으며 지도까지 받았다. 루브르 역에 내려 장자크 루소 거리에 있는 유스호스텔을 물어 물어 찾아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꽉 찼다. 할 수 없이 이번엔 리퍼블맄 역 근처에 있는 유스호스텔을 찾았다. 시설은 확실히 아까 유스호스텔만 못하지만 당장 방이 비어 있으니 됐다. 배낭 놔두고 파리 시내로 나섰다.
날씨가 갑자기 좋아졌다. 개선문부터 보러 갔다. 개선문 한쪽 면, 가지 말라고 말리는 아버지와 처자식을 두고 전장으로 떠나는 남자의 조각이 인상적이다. 샤일롯 궁전 거쳐 에펠탑 쪽으로 가다가 세느강 유람선을 탔다. 안내하는 여자가 불어, 독어, 영어, 이태리어를 혼자 다 한다. 물론 멘트만 외워서 하는 거겠지만 무지무지 부럽다. 에펠탑 올라가 보려니 줄이 너무 길어 엄두가 안난다. 포기하고 콩코드 광장까지 걸어갔다. 파리는 막 봄이 피어나는 중이다. 콩코드 광장 앞에는 솜사탕 장사도 있다. 버스 타고 세느 강변에 내려 노틀담 성당까지 걸었다. 강변 따라 옛날 엽서며 책이며 그림들을 파는 노점들이 즐비하다. 노틀담 성당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었다. 노틀담 남쪽으로 판테온까지 갔는데 시간이 늦어서 안에는 못들어가고 바로 근처에 있는 소르본 대학을 둘러봤다. 안으로 살짝 들어가니 좌 빅톨 위고, 우 파스퇴르가 동상으로 앉아 있다. 이번엔 몽마르뜨로 갔다. 그런데 버스 내리는 데를 헷갈려 몽마르뜨 언덕을 지나쳐 버렸다. 무턱대고 아무 버스나 타고 시내 쪽을 헤매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깡통 맥주 하나에 샌드위치 하나 사들고 세느 강변으로 나섰다. 강변 따라 무턱대고 한참을 걷다가 벤치 한쪽에 자리 잡고 사들고 간 음식을 먹었다. 밤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여직껏 유람선은 불을 밝히고 지나간다. 날 보고 유람선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난리다. 시내 밤거리를 좀 더 헤매다가 전철 타고 유스호스텔로 돌아오니 밤 11시다. 같은 방 쓰는 아르헨티나 친구 하고 독일 친구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내일 루브르 박물관 갈 계획인데 어떻드냐?” 물어보니 아르헨티나 친구 왈 “너무너무 크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봤는데도 다 못봤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넓길래 저럴까 싶다. 내가 한국서 왔다니까 “서울 말고 다른 도시를 알고 싶다”고 한다. 부산 하고 울산을 가르쳐줬다. 이 친구들 열심히 외우는 표정들이다. 둘 다 파리에서 2주일을 지낼 계획으로 왔단다. 내가 이틀이니 확실히 너무 짧다. 그나저나 이 유스호스텔은 화장실도 그렇고 샤워장도 그렇고 남녀 구분이 없어서 이래저래 불편하다.
4월 11일. 화.
아침 먹고 체크 아웃한 다음 배낭 맨 채로 루브르 박물관을 향했다. 그런데 막상 박물관 입구에 도착하니 문이 닫혀 있다. 자세히 보니 매주 화요일이 휴관이다. 잠깐 띵 해 있다가 근처에 있는 오르세 박물관으로 갔다. 드라크로와, 밀레, 루소, 드가, 마네, 모네, 르느와르, 고호, 세잔느, 몬드리안, 고갱 등의 그림들과 로뎅을 비롯한 작가들의 조각 작품이 상설 전시되어 있고, 특별전으로 파리 꼼뮨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줄이 엄청 길더니 금방 들어간다. 진품인지 모르겠지만 사진으로만 보던 그림들을 이렇게 직접 본다. 고호 그림은 역시 좋다. 야경을 그린 작품 한 점을 사진에 담았다. 파리 꼼뮨에 대해 이렇게 1차 자료들을 직접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루브르 박물관 문 닫은 덕분이다. 어제 봤던 파리 시내 거리 곳곳이 바리케이트가 쳐졌던 격전지였다. 시신 사진들을 보며 1980년 5월 광주 꼼뮨의 전사들을 떠올린다.
박물관을 나와서 곧바로 리옹 역에 갔다. 독일 브레멘 가는 밤 기차 시간을 알아보니 노드 역에서 저녁 8시 37분 출발이다. 시간도 뜨고 패스도 여유가 있어서 TGV를 한번 타 볼까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는다. 일단 노드 역으로 갔다.
파리에는 유달리 거지가 많은 것 같다. 어떤 거지는 전혀 거지답지 않게 생겼는데 지하철 타자마자 한 1분을 뭐라고 뭐라고 혼자 열심히 떠들다가 빈 손 내밀며 돌아 다닌다. 아주 당당하다. 또 다른 어떤 거지들은 지하철 역 구내에 쪼그려 앉아서 손을 내민다. 아이까지 옆에 앉혀 놓고 구걸하는 젊은 아줌마도 있다. 바이올린 하고 손풍금으로 연주하고나서 돈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악사들을 거지라고 할 수는 없겠지…
하여튼 이 도시가 점점 재미 있어지려고 하는데 금방 떠나려니 아쉽다. 파리는 한 2주일 있으면서 구석구석 볼 필요가 있는 도시 같다.
노드 역 근처를 그냥 걸었다. 한국 어느 거리를 걷는 것처럼 낯설지가 않다. 날씨가 많이 나빠져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길거리에 왠 흑인 한 명이 군밤을 판다. 얼마나 반가운지… 근데 그 친구가 날 보면서 더 반가워 한다. 거리를 더 올라가니 시장이다. 어물전에 야채 가게에 꼭 울산 월봉시장에 온 기분이다.
배낭 여행 코스도 이젠 끝이다. 그냥 이렇게 부딪히면서 이 세상에 철저히 혼자되어 낯선 곳을 돌아다닌 셈이다. 말도 설고 음식도 설고 물도 설고 사람도 선데 그 낯선 것들 속에서 낯익은 것들을 발견하는 게 ‘여행’이지 싶다.
마드리드는 어떨까? 거기서 저절로 우러나는 ‘낙천성’을 배워가야 하는 건데 그냥 이렇게 놓쳐 버리면 다음에 영 기회가 없는 건 아닐까?
아쉬우면 아쉬운대로 남길 건 남기고 줄 건 주고 떠나자. 파리여, 안녕.
4월 12일. 수.
새벽 브레멘에 도착했다. 아침 나절까지 역 앞 공원을 산책했다. 오후에는 박종완 씨와 함께 브레머 하펜에 갔다. 황량한 바다… 차가운 북해 바람에 머리를 씻고 프라하 갈 욕심을 접었다.
4월 13일. 목.
길종이 형, 황선길 씨, 박종완 씨 하고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프랑크프루트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프랑크프루트에서 서울까지 10시간, 도착하니 4월 14일 낮 12시다. 총선이 끝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