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인천 재환 부모님 댁에 갔다. 재환 어머님 생신이셨고, 이틀 뒤가 아버님 칠순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재환 형 가족들은 아버님 생신에 맞춰서, 우리는 어머님 생신에 맞춰서 방문했다. 어른들은 몸도 더 편안해 보였고, 새로 고친 집도 아주 멋졌다. 두 분 생활에 맞춘 공간이라 우리 때문에 불편하셨을텐데 늘 그렇듯이 조용한 정성스러움으로 여러 가지를 챙겨주셨다.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에는 식사 준비해 놓고, 집을 비워주셔서 여행 왔을 때 같은 새로운 공간에서의 여유도 오랫만에 기억해냈다. 고마운 시간이었다.

 

재환 부모님 댁에 가면 종종 들리는 동네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좀 쉬다가 안산 부모님 댁으로 갔다. 꼭 가야하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내 마음이 무거워 그랬다. 재환도 동행해줬다. 새로 개통된 신분당선을 타고 신포역에서 환승 없이 한대앞 역까지 가고, 내려서 시내버스를 타고, 민물 매운탕을 사서 부모님 댁으로 갔다. 청주행 마지막 버스 시간 때문에 잠시 들린 정도의 방문이었는데 저녁 밥까지 먹었다. 이것저것 반찬 챙겨주고 그릇 쓰는 상차림까지 신경써주시는 아빠가 애틋하더라. 내 마음 달래려고 간 거였고, 덕분에 청주로 내려오는 마음이 나쁘지 않았다. 사려 깊게 옆에서 챙겨주는 재환이 참 고맙다.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을 쉬고, 화요일 어제 출근을 했다. 오늘도 사무실이다. 불편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기분이다. 할 수 있는, 할 일들이 차곡차곡 있는데 손이 잘 안 간다. 일에 집중이 안 되는 게 무엇보다 곤란하다. 잘 하려고 하기 보다 그냥 하는 게 중요한 시기인데, 아는데 안 된다. 다음주 상영회가 있어서 영화를 봤다. <우리는 매일 매일>이라는 다큐다. 90년대 후반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에 어떤 활동들을 했었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때의 경험과 생각들이 지금으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감독의 지인, 5명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과거와 현재 모두 페미니즘이라는 자장 안에서 긍정적인 이야기들이 중심인 서사라 두루두루 보기에 좋은 영화 같다. 한국사회의 페미니즘 운동이라는 주제로 이야기 나누기에는 논쟁적인 요소, 분파나 세대 간의 이슈 등은 피상적으로 언급되거나 또는 아예 다뤄지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면(혹은 기대한다면) 다른 틀이 필요할 거 같긴 하다. 감독도 영페미니스트라고 하는 한 세대를 대표하는 집단, 흐름들 보다는 자신의 지인 중심으로 인터뷰이를 선택했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그때의 당신들과 지금의 우리, 나에 대한 따뜻한 안부 정도의 메시지 같다. 영화 얘기로 돌아오자면 등장 인물들이 페미니즘을 접하고, 학생으로서 활동했던 시기가 나와 많이 겹치긴 한다. 당시에도 페미니즘이 내 1순위 관심사는 아니었어서 언급되는 사건들이나 상황들을 보면서 그래 그때 저런 일이 있었지, 맞아 저런 활동을 하는 그룹들이 있었어 정도의 기억이다. 등장인물들의 내적 갈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이 영화의 한계일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20대 때의 자신의 활동을 되짚어보면서 즐거웠다 재밌었다라고 기억하는 게 좋았다. 힘들고 무서웠지만 신나고 즐거웠다고 기억한다는 것. 이야기를 들으면서 곁을 내 주게 되진 않지만 그래도 멋진 사람들이네 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감응이 지금은 싫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은 인물이 한 명 있는데,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기는 하다. 사람을 대하고, 말 섞는 게 싫어서 다시 대학을 가고 수의사라는 직업을 택해서 살고 있는 인물. 그런데 그곳에서 다시 동물권을 주제로 시의원을 찾아다니며 활동을 한다는 것. 과거의 지침과 지금의 활동 사이의 이야기들이 더 듣고 싶긴 했다. 상영회 취지를 고려하면 이 영화를 통해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사회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운동의 역사나 사건 또는 현재의 이슈 등을 연결하는 건 아직 감이 잘 안 잡힌다. 영화의 결대로 페미니즘을 접했던 혹은 경유했던 각자의 경험 그 경험이 지금의 각자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 싶기도 하다. 이 영화를 가지고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는 더 생각을 해 봐야겠다.

 

재환도 나도 각자의 견딤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서로의 편이라는 신뢰, 애정과 고마움을 가지고 그래서 더 의지가 되어 주고 싶어 애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지금에서 좀 더 한 발 내딛으려면 결국 각자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 같다. 하고 싶은 일, 활동을 통해 스스로 안심하고 자신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 그게 안 되면 아마 견딤의 시간은 더 길고 지난해 질 거 같다.

 

요즘 집에 있는 안 쓰는 짐을 꾸준히 덜어내고 있다. 안 쓰는데 못 버리는 물건들을 보면서 답답하기까지 할 정도다. 박스 속 문건, 꽤 공들여 정리해 둔 비디오 테잎, 듣지 않는 CD를 정리했고 옷도 버리고 있는 중이다. 안 쓰는 전자기기, 다시 보지 않을 듯한 문건과 책도 더 버려야 한다. 당분간 일도 이렇게 해야 할 거 같다. 잘 하려고 틀어쥐고 있는 게 아니라 비워내듯 툭툭 내 놓기. 잘 하는 게 아니라 일단 하는 거 꾸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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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7 16:14 2021/03/1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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