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재환 짐이 들어온다.

큰 짐을 들이기 위해 공간들을 비워야 하기도 하고,

늘어난 살림살이에 수납 공간도 비워둬야 할 거 같아서 어제부터 집 정리 중이다. 

좁은 집은 아니지만, 구석구석 옛날 물건과 자료들이 제법이어서 이 정리만도 만만치 않다.  

 

신발장과 싱크대 수납장을 차지하던 자료들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자취를 하면서 15년 넘게 들고 이고 다녔던 자료들이 꽤 되는데

5년 이상 찾지 않았던 자료들은 과감히 버리자 마음 먹고, 눈 딱 감고 폐지처리~

 

예전에는 문건도 발제지 등도 손으로 써서 복사해서 쓰곤 했던지라

버리면 끝이란 생각에 아쉽기도 했지만, 벽처럼 쌓아만 놓고 지내는 것도 부질없다 싶어서 정리 중인데,

그래도 버리기 전에 대충이라도 한 번씩 훑어 보게 된다.

특히 손글씨로 된 자료들을 보면 사진처럼 그 때의 장면들, 사람들 생각도 나고 기분이 묘하다.

 

이런저런 메모와 편지들도 제법이다.

심지어 언젠가 써야지 하면서 하나 둘 모아둔 편지지와 봉투만 추려도 얼추 한 박스가 된다. 

국어과라는 특성도 있고,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그런지 간단한 인사나 근황부터 깊은 속 얘기까지

서로 글로 주고 받던 게 별스럽지 않았더랬다. 동기들, 선배 후배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이 참 많기도 많다. 

몇 몇 메모와 편지들은 버리고 싶지 않아서 따로 정리해 두었는데, 다시 읽어봐도 참 애틋하다. 

반면, 그 시절 그럭저럭 근사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몇 몇 순간들이 있는데

막상 이런 저런 기록들을 통해 다시 보니 꽤 민망한 구석들도 있다. 기억이란 참... 

그나저나 요즘은 어떻게 지낼까 궁금한 사람들도 있고, 어느새 관계가 틀어져 잊고 지냈던 사람들도 있고, 

그렇게 특별했는데도 10년 넘게 소식이 끊긴, 꼭 연락해 보고 싶은 친구도 보인다. 

지금은 13년차 교사이며 두 아이의 엄마인 단짝 친구의 첫 단편소설 습작 원고도 찾았는데,  

요걸 들고 그 친구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하하하~

 

이런 저런 정리에 어제 밤을 새고, 낮에 좀 자다가 다시 정리. 이제 거의 마무리다.

내일 오전에 재환 짐이 들어오고, 다시 짐 정리 좀 하고나면 이제 새로운 일상이다.

다를 게 없을 거 같으면서도 참 다르다. 

우리가 같이 사는구나라는 게, 이제는 둘이구나라는 게 이제야 실감나는 거 같다. 

 

 

20살, 대학에 오면서 1년 간 기숙사 생활했던 때 이후에는 

쪽방이더라도 집은 나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왔다. 

집과 살림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같이 사는 사람이 있으면 누릴 수 있는 게 더 많다는 걸 알지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환경이어도 그래도 혼자 사는 편을 선택했더랬다. 

어릴 적, 네 식구가 한 방에서 지낼 때도 다락이든 옷장 한 칸이든 

나만의 공간,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는데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다른 사람들의 시야으로부터 벗어나는, 나만으로 머무를 수 있는

그런 순간이 주는 편안함이, 안도감이 필요했다.  

 

이제 그와 한 집에서, 같은 공간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공부방에서 만난, 6년 여 간 지냈던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리고 공룡을 준비하던 그 즈음 마련했던 깜짝파티 때 공연을 해 주러 왔던 재환.

모임이 끝나고 우리 집으로 뒷풀이를 왔었고, 작은 상을 두고 마주 앉아 있던 그가 생각난다. 

(예전에 살던, 그 집을 난 참 좋아라했는데,  지금 집 보다 좁지만 일과 생활이 함께였던 공간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냥 그 집, 그 공간이 나를 설명해 주는 것 같아서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편안하고 그랬다. )

그 때 재환의 느낌이 참 좋았다. 

새로운 사람들과 상황들에서, 심지어 공연자들이 주인공이었던 뒤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설명해내거나 드러내려고 애쓰기 보다는 

어색해 하면서도 당신들을 알고 싶어요라는 느낌의, 살짝 한 발 내 딛는 

그의 조심스러움과 묘한 예민함이 

나에게는 또 나 나름의 긴장과 경계심을 풀게 하는 편안함이랄까. 

그렇게 나에게는,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존재감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겼었다. 

와, 그런 그와 특별한 사이가 될 줄은, 우리가 이렇게 같이 살게 될 거라곤 당시엔 상상도 못했는데 ... 와아~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기게 되는 거, 나와 다른 사람이 그런 과정이 그와는 참 자연스러웠다. 

서로의 삶에 서로가 겹쳐지는 과정이 두려움이나 이물감 없이 흘러갔고, 

지금 이렇게 함께 살게 되는 과정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 기질상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거, 같은 공간에서 일상을 함께 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다. 

앞으로 어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어떤 과정들을 둘이 겪어내야 할지, 

그런 상황들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되지도 않는다. 

내일을 기다리는 오늘의 기분도 '이렇게 사랑했던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라는 마침표가 아니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건'이란 물음표 혹은 쉼표를 찍는 기분이다. 

 

그렇게 이런 저런 여러 생각이 드는 지금이지만 

그래도 가장 명쾌한 것은 기쁨과 설렘이다.

그런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고 누리고 싶다. 

참 겁 많고 겁 많은 이혜린이, 그래도 여기만큼은이라고 붙들던 마음과 공간을

함께 하는 게 기꺼워진 당신, 그리고 이 과정들이 너무 대단해서 기억하고 싶은 거라.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어색함과 낯설음들, 

그것도 당신과는 함께 하고 싶다는... 이런 순간이 지금이란 게 행복하다는 거.

참 소중해서 기억하고 싶다. 

 

환영한다. 오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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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5 00:27 2012/02/1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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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방문자  | 2012/02/1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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