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으로 가기 위해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 택시를 탔다.

짐 챙기면서 뭐 빠뜨린 건 없는지, '아! 면도기 두고 왔다, 아! 나도 안 챙겼는데. 에이 괜찮아, 그래 빌려 쓰지 뭐' 이런 식의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택시 기사님이 동생이냐, 부부냐 물으신다.

재환이 부부라고 하자 '야~'라는 말이 나와 동생인 줄 알았다며, 남편에게 반말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그 때만 해도 '어? 그런 적 없는데... 잘못 들으셔서 오해하셨네.  뭐, 오해가 어쩌구 우리의 호칭과 말투는 어쩌구 이런 걸 설명하자니 얘기만 길어질 거 같고 그냥 대충 듣는 척하면서 상황 보내자...'하고 있는데, 기사님 당신 가족사를 풀어놓으신다.

들으면 들을 수록 이거 참... 실직에 사업실패, 아내 자식과의 갈등, 이혼과 재결합 그 과정에서의 괴로움. 가족 간의 갈등 원인을 (경제적 실패 이후) 남편을 존경하지 않는, 아버지의 권위를 아들에게 가르치지 않은 아내의 문제로 진단한 건 백 번 동의할 수 없으나 오히려 문제의 원인을 그렇게 확신하시고 있는, 그 시야에서 당신과 가족들의 상황을 볼 수 밖에 없는, 그래서 더 억울하고 괴로우신 듯한 그 분을 보니... 참... 안타깝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더라. 터미널에 도착하자 택시비까지 깍아 주시며 남편에게 반말하면 안 된다고 다시 당부에 당부. 의외로 넉살 좋게(?) 이야기를 받고 넘기고 마무리하는 재환. 터미널에 도착해서 예약한 버스표 받고, 비슷한 느낌으로 잠깐 택시 기사님 얘기 나누다가 인천공항행 시외버스를 탔다.

 

재환은 곧 잠들 기세, 난 재환 노트북을 빌려서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마감 시간 지키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고 우락부락 자료집 원고를 발송했다. 원고를 본 재환 의견도 그렇고, 내 생각에도 몇 군데 너무 거칠고 지나치게 단정적인 부분이 있다 싶긴 한데, 이렇게 넘기고 나면 자꾸 눈에 밟히고 찜찜할텐데... 그런데 다시 수정할 마음이 안 든다. 얼른 메일 발송하고 마무리하고 싶은 상태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냥 버스 안에서 메일을 보내고, 멍하게 간다

 

재환은 잔다. 난 밤을 샜는대도 잠이 안 온다. 설레이는 거와는 다른, 글쎄 보낸 원고 생각, 긴 휴가 생각, 비행기 타기 전 마지막으로 마무리해야 할 일 또는 연락 챙기기, 그리고 정말 예측이 안 되는 앞으로의 일정과 상황 그리고 마음의 흐름에 대한 막연함.

막연하다는 느낌이 불안하거나 싫은 건 아니다. 타지에서의 둘 만의 여행, 재환 가족 및 지인들과의 만남, 경험치가 없다보니 어떨지 모르겠다.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예상해 보긴 했지만 뭔가 다 어색하고, 부질없다 싶다. 그래서 일단 자연스럽게 상황 가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그렇게 지낼 요량이다. 막연하다는 느낌이 나쁘지 않은 이유다.

좋다 나쁘다 이런 게 아니라 이 느낌 그 자체로 두고, 천천히 보자 싶어 되려 출발이 가까워질 수록 기분은 차분해 진다. 심심하면 심심한대로, 한가하면 한가한대로, 초조하면 초조한대로, 막연하면 막연한대, 들뜨면 들뜨는대로 ... 그때 그때 기분을  바람직할 다른 상황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기분도 상황대로 그냥 어울렁 어울렁 보내보려고 한다. 뭐, 굉장히 단순한 얘기를 길게 했다. 여튼, 한 달 여 간의 (아마도 다시 누리기 어려울) 여행과 휴가를  맞이하는 내 자세이자, 이번 여행과 휴가의 유일한 계획이 이것이라는! 

 

마지막으로 가족과 공룡에 전화로 인사. 큰 짐은 따로 부치고, 환전하고, 티켓팅에 이어 검색대를 지나는 등등 옷을 입었다 벗었다 짐을 들었다 놨다 이런 저런 출국 수속을 밟고. 걷다 서있다(무빙워크) 오르락 내리락 에어 트레인도 타고 내리고 등등 해서 게이트에 도착(영화나 드라마에서 티켓을 들고 환송하는 사람들 시야에서 미끄러져 나간 후 비행기 좌석에 우아하게 앉아있는 장면으로의 이동은 실로 엄청난 점프 컷이다. 이 사이의 과정에 품이 얼마나 많이 든다구!). 우자지간 이제야 한 숨 좀 돌리며 진짜 마지막으로 메일 확인. 우락부락 자료집 제작 담당인 강군 샘의 살뜰, 친절한 답메일 덕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래, 이제 원고 생각은 여기까지. 비행기 탑승. 이제 정말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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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로 제공되는(아니 요청하는) 맥주를 마시고, 기내식을 먹고 나니 슬슬 잠이 온다. 바로 옆 라인 좌석에서 서 너살 쯤 되어 보이는 애가 3~4시간 정도의 비행 시간 내내 징징대며 우는데, 잠결에도 '저 애 참 어지간하다' 하면서 반수면 상태로 자다깨다 하다 홍콩에 도착했다. 그러면서 좁고, 어수선하고, 건조하고, 그러면서 엄청 비싼 비행기는 역시 별로야라고 생각했으나... 이건 뉴욕행 16~18시간 비행의 서곡 정도였다고 할까.

 

홍콩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갈아 타기 위해 면세 구역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6시간 정도.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설렁설렁 면세구역 구경도 하고(뭘 먹을지 결정하기 위해), 책도 읽고, 졸기도 하고. 관절 시린 노부부마냥 서로 안마도 주고 받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 나는 이번 여행에 바우만 책을 챙겨왔다. 읽을 책은 많지만 이것 저것 챙기기에는 짐이 너무 무거워질 듯해서 짧고 굵게(?!) 한 사람 책으로하자 싶었고 마침 연초 경향신문에 기획 칼럼으로 올라온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터뷰 기사가 인상적이었던 게 기억나서 바우만 책으로 결정.  예전에 <유동하는 근대>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읽었었는데(물론, 읽었었던 것과 기억하는 건 다르다! 미리 고백한다!)  이번엔 <자유>, <유동하는 공포>,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이렇게 세 권을 챙겨왔다. <자유>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얇은 덕에 짧은 호흡으로 틈틈히 읽기에 괜찮다는! 하지만 아직 다 읽지 못했으니... 책 리뷰는 아마도 여행 말미 쯤 올릴 수 있을 거 같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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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저녁 시간이 되어 오자 매우 치밀한, 발로 뛰는 시장 조사와(면세 구역 식당가) 홍콩 공항이라는 역사/문화/지리/공간적 의미를 따져 심사숙고 후 우리가 결정한 저녁 메뉴는 대만식 요리. 쩝~ 앞의 사설, 오재환과 이혜린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뻥인 거 바로 알테고. 그렇다. 싸고, 그러면서도 국물 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을 뿐. 사실은 현지 사람들이 화장실 앞 정수기를 이용해서 컵라면을 먹는 걸 보고, 컵라면 사 보겠다고 면세구역을 기웃기웃하다 실패하고 투덜거리다가, 눈 밝은 재환 덕에 발견한 식당이 대만식 면요리점이었다. 음... 우리식으로 보면 김밥천국과 명동칼국수의 중간 쯤 되는 수준의 식당이랄까. 가격도 괜찮고, 나름 이국적인 메뉴들. 돼지고기로 맑게 국물 낸(그렇게 보였던) 만두국수 같은 거랑  연두부 튀김을 시켰다. 만두국수는 일단, 국물이 진정 이국스럽더라. 돼지고기 비린내가 그냥~~~. 한 입 먹고 바로 고추기름 대량 투하. 면은 쫄깃하지 않은 쫄면 같은 외양과 식감인데, 씹으면 툭툭 끊어지는게 나름 재밌었다. 만두는 오! 맛있었다! 속이 아주 실하고, 고기가 쫀득쫀득하니 씹으면서 계속 탄성을 자아냈고, 국물에 두둥 떠 있던 청경채도 반가웠고. 무엇보다 먹으면서 신났던 메뉴는 연두부 튀김(아! 요리 제목을 하나도 기억 못하는지라 내 멋대로 그냥 붙인 이름들임). 연두부를 손바닥 4/1 정도 크기로 잘라서 튀겨내고 간장 소스를 끼얹은 요리인데 겉은 바삭한 유부, 속은 따뜻하고 말캉한 연두부 상태로 나오는 한 접시 음식이다. 이건 다시 해 먹어보고 싶은 요리인데, 연두부 사다가 잘 튀겨내고 간장 양념장 얹어 먹으면 될 듯. 잘 튀기는 게 중요할 거 같은데, 우리~ 공룡에서 한 번 해봅시다! 

 

우자지간, 이렇게 밥도 먹고 쉬엄쉬엄 오후 시간을 보내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탑승 게이트를 찾아서 이동. 우리가 워낙 한적한 곳에서 놀아서 그랬는지, 홍콩 공항 끝에서 끝으로 이동한 느낌. 도착해서 게이트로 가기 전부터 다시 짐 검사를 하는데(가방 다 열어보면서) 짐 검사를 다시 할 거라 생각 못하고 텀블러에 물을 담아뒀는데 그 물을 비우라고 하는 거라(액체를 가져갈 수 없다네~ 폭발물질일까봐~~ 지은 죄가 많은 나라여서 그런지 하여튼 사람 들여보내는데 유난스럽게 까다롭다는. 미국!). 둘러봐도 마땅히 물 버릴 때도 없고 해서 그 자리에 서서 텀블러에 있는 물을 마시기 시작했더니 검사하던 사람이 웃으면서 바닥에 있던 비닐 봉지에 물을 대신 버려주었다. 그렇게 다시 탑승 준비. 근데 여기서도 사람들을 불러 세우더니 한참을 기다리게 하는 거라. 읽을 거리를 손 닿는 곳에 챙겨 두지 않으면 이래 저래 지루할 일 투성인 과정들, 가벼운 읽을 거리는 늘 휴대하고 있는 게 나름 팁이라면 팁일 듯. 

 

 

홍콩발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16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 비행. 재환이 미리 비행기 좌석을 나름 편할 곳으로 예약해 두었는데, 인터넷으로 미리 신고해야 하는 그 무엇인가를 공항에 와서 알고 늦게 한 바람에 둘의 좌석이 떨어져 배치 되었다. 난 영어도 못하는데, 재환과 떨어져 앉아서 그 긴 시간을 가야 하다니... 내심 아쉬웠는데 재환 건너편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께서 먼저 자리를 바꿔주시겠다고 하셔서,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자리를 바꾸고 흐뭇하게 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옆 자리는 아니지만 통로 너머로 시선이 닿을 자리에 있으니 이만해도 무척 만족이라는. 그나저나 기억들 할지 모르겠으나 홍콩으로 오는 비행기에서도 우는 아기 때문에 쳇쳇 했었는데 재환은 이번에도 아기 옆 자리다. 재환을 기준으로 옆에도 아기 1명, 뒤에도 아기 2명. 비행기에 타면서 우리 칸에 아기가 별로 보이지 않아 안심했는데, 재환에게는 아기들을 부르는 뭔가가 있는게 틀림 없다. 

비행기 출발. 재환 옆 자리의 아기 엄마로 보이는 중국인 여사님은 재환이 중국어를 못한다고 의사 표현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고 중국어로 재환에게 뭔가를 계속 이야기 하신다. 덕분에(?) 재환은 비행 내내 그 분 짐꾼이 되어 버렸으니... 짐을 올렸다 내렸다, 꺼내드렸다 넣어드렸다... 짐은 또 왜 그리 많고, 자주 옮기시는지. 불쌍하다 오재환.

 

장거리 비행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두 가지. 맥주와 영화. 맥주를 실컷 먹기 위해 재환에게도 음료 서비스로 맥주를 주문해서 나에게 넘기라고 내 나름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아 눈치를 줬건만, 내가 술에 취해 난동 부릴까봐 걱정이 됐는지 ㅋㅋ 협조를 안 하더군. 음... 이런 식! 오재환, 기억하겠어!!!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아쉬운대로 승무원이 지나갈 때마다 '비어~ 플리즈'. '비어~' 뭐 이런 식으로 맥주를 득했으나. 16시간 이상의 비행 동안 내가 마실 수 있었던 맥주는 달랑 4캔! 이게 말이 되냐구!!! 엉엉~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는 내 이 설욕을 꼭 갚고야 말리라! 

 

좌석에 부착된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컨텐츠(영화, 드라마, 쇼 등등)는 다양한 편이나 한국어 지원이 안 된다.  그나마 뒤지고 뒤져서 찾은 한국어 더빙된 <프로스트 대 닉슨> 을 보고 나니 마땅히 더 볼 게 없는 상황. 프로그램이 많으면 뭐 하랴~ 그림의 떡. 그래서 자막이, 스토리가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단순한 장르를 선택! 인도영화 두 편을 보고 이 정도 약간의 영어라면 줄거리 파악은 어렵지 않겠다 싶어 팀 버튼의 애니메이션 1편을 봤다. 이랬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잠이 오지 않더라는 것. 어제부터 생리가 시작되서 허리는 아프고, 좌석은 좁아서 잠이 들어도 1~2시간 안에 무릎이 시큰거려서 다시 깨기 일쑤. 맥주도 모자라~ 영화도 모자라~ 밤 시간 비행이라(16시간 내내 밤. 탈 때도 밤. 갈 때도 밤. 내려서도 밤. 여기서부터 내 시간 감각이 꼬여 지금까지 극복을 못하고 3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책도 못 읽어~엉엉엉. 

 

몸이 붓는 게 느껴지고 관절이 뒤틀리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한계다 싶을 때, 겨우 도착. 이제 JFK 공항이다. 아니나 다를까 입국 절차, 별 것도 아니면서 또 사람을 엄청 기다리게 한다. 뭘 해도 밉상인 이 나라. 줄도 길고, 짐도 무겁고... 자정이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이고 맨 짐을 가지고는 섰다 한 두 걸음 걷다 다시 섰다 뭐 이런 식. 재환은 세관 관련 서류 챙기느라 계속 신경 쓰는 듯한데, 난 봐야 흰 건 종이 까만 건 글씨 이 수준이라 그냥 재환에게 맡기고. 짐과 옷을 바닥에 놓고 탑처럼 쌓아둔 후, 책을 보면서(역시, 가벼운 읽을 거리를 꼭 휴대하고 있어야 한다니까!) 줄이 이동할 때마다 발로 툭툭 밀면서 이동. 덕분에 덜 지루하게 공항을 나올 수 있었다. 

 

난, 뉴욕이고 그리고 JFK 공항이라 되게 으리세련될 줄 알았는데, 엄청 허름하다. 공항 안도 그렇지만 밖에 나와도 마찬가지. 공항 밖에 나와서 택시 기다릴 때 이곳의 인상은 부평역 근처 굴다리 밑, 그 정도다. 곧 예약해 둔 택시가 도착, 숙소까지 가는 길도 그냥 인천 외곽(부평 공장 지대) 정도 느낌. 밤이라 그런지, 아니면 내가 지쳐서 그런지 뉴욕이라고 뭐 그리 다른 건 보이지 않는 상황. 그래, 일단은 쉬자. 쉬어야 할 때. 내일부터는 뉴욕 관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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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 창가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야경, 외~쿡 같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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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1 19:41 2013/02/01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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