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모두, 죽었다. 버림 받은 아이들은 자라지 않은 채로, 자라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서로를 혹은 자신을 지키려다 죽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를 죽이고, 엄마가 된다.

 

<차이나타운 (한준희, 2015)>을 처음 봤을 땐 실망스러웠다. 상징이 디테일을 압도하고, 중심 사건도 지나치게 인위적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입체적일 수 있었던 영화가 너무 가볍고 얇아졌다고 느껴졌다. 석현이란 인물이 너무 뜬금없고, 그로 인해 주인공의 캐릭터도 망했다고 생각했다. '좋은 영화를 니가 말아 먹었구나' 욕하면서 봤다. 얼굴이 개연성이냐고 비아냥거린 거 미안하다, 하지만 연기는 여전히 아쉽다, 온순한 건 좋은데 상냥함은 줄였어야했다 그건 얼굴이 하니까. 두 번째 이 영화를 본 건 그 배우 때문이다. 영화 말고, 배우를 연기가 아니라 미모를 보려고 다시 찾아 봤는데 이번엔 영화가 훅 들어왔다. 왜 그 때 이해 안 되던게 이제 되는 걸까. 누나가 자신을 버렸다고 그래서 밉다고 죽이겠다고 덤비는 홍주와 그런 홍주를 막아내다 찔리고 그의 목을 꺽는 우곤, 우곤의 목에 박힌 펜을 뽑아내며 왜 이런 상황이 되어야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의 일영, 그 씬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슬펐다. '원해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태어났으니 죽을 순 없잖아요' 석현의 대사이지만 영화 속 모든 아이들의 상황이기도 했다. 버림 받은 이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쓸모를 증명하며 살아내려고 하던 그 아이들이 치도와 쏭까지도 결국은 모두 죽었다. 죽임을 당하거나, 서로를 죽이거나, 스스로 죽거나.

 

버림 받는 아이들, 죽임을 당하거나 죽어가는 아이들의 서사가 이상하게 마음에 박힌다. 2009년 1월 20일 이후, 연상되는 이미지를 봤을 때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처럼. 그렇게 내내 마음 한 구석 작지만 날카롭게 응어리진 무엇을 품게 된 것과 비슷한 듯하다. 2014년 4월 16일, 오히려 당시에는 '아이들'로 프레임이 잡히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었는데 국민을 지키지 못한 국가, 노골적으로 국민을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이 사회가 무섭고 끔찍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불쑥 마음을 치는 건 아이들의 이미지이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런 기분이 아니라. 아무도 그 무엇도 지킬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구나, 우리. 이런 절망감이 든다. 그래서인지 한국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뜬금없이 아이들 이야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하다못해 '응답하라 1988' 수학여행 씬에서 여주인공 담임교사가 수학여행인데 아이가 불안해하면 안 되잖아요 이런 비슷한 대사를 칠 때도 울컥했다, 진심 뜬금포.

 

생물학적 나이를 떠나 생존과 성장의 시기, 그 기회와 조건을 박탈 혹은 지체 당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아이들의 이야기. 학대 당했거나 버림 받았거나 부모의 부재, 혹은 부모의 범죄로 인해 자신을 의심하며 살아가는 아이들.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함께 살아갈 관계를 지켜내며, 신념을 지키며, 혹은 책임을 지며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들의 이야기... 드라마 <너를 기억해>. 결핍을 채워가며 서로를 지지하며 성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말도 안 되는 판타지여도 아니 그래서 기쁘기 보다는 서글픈 어떤 과거의 아이들 이야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아이인 상태로 머물러 있거나 부모를 죽여야만 어른으로 살 수 있는 아이의 이야기, 그러지 못해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이야기... 영화 <차이나타운>. 요즘 이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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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4 21:25 2016/01/2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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