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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다! 한겨레


 

한겨레 21 최근호다.

 

월드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눈에 띄었다. 이와 함게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 를 비롯한 월드컵 광풍 논쟁으로 홍역을 치뤘던 한 인권단체 활동가의 글이 있다고 해서 맘먹고 서점에 들렀다.

 

잠시 서가에서 꺼내 들척거려보니 이것저것 다양한 사람들의 비판저인 월드컵 견해가 나와 있더라! 음, 그냥 한번 사봄직 하네! 생각을 굳히고 계산을 하는데 주인이 잊은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또 다른 책 한권을 얹어 준다.

 

일명 별책부록.......

 

이 별책부록 제목부터 가관이다.

 

나의

월드컵

        다이어리

엠파스와 함께 하는 31일간의 밤샘 지침서

 

이 정도 제목이면 할말 다 했다. 내용은 거의 날짜별로 어떤 나라와 어떤 나라가 경기를 하는지 경기 일정표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 거기에 각 나라별 상세한 정보도 놓지지 않고 수록하고 있다.

 

월드컵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월드컵의 상업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한겨레의 노력이 눈물겹고 장하기까지 하다.

 

인터넷 한겨레에 올라와 있는 자기들의 홍보문구를 보라!

월드컵 준비 3종세트


월드컵이 코앞입니다. 놀 준비 되셨습니까? 뭔 소리냐고요? 잘 놀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월드컵 준비 3종 세트를 만들었습니다. 고생깨나 했습니다. 첫째, 붉은 악마부터 인권운동가까지 10명의 월드컵 이야기. 월드컵은 하나가 아닙니다. 월드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봅니다. 둘째, 별책부록 월드컵 다이어리. 31간의 밤샘 지침서를 드립니다. 셋째, 월드컵 퀴즈. 노트북 등 푸짐한 상품을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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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영화추천 : 가족의 탄생을 보다

가족의 탄생.....

 

참 재밌게 볼만한 영화다.

 


[포스터 출처 /맥스무비]

 

가족이 자본주의 재생산의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데, 그 가족의 이데올로기는 가려지고 항상 일방적인 정당성을 강요한다. 또한 특정한 형태를 강요한다. 그 특정한 형태는 전 근대적인 가부장제, 봉건제가 결합하고 이성애 중심주의가 결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생명을 넣어주는 결혼 가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지 항상 (대략)난감이다. 동거가족이나 동성가족,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은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글쎄 왜 그럴까! 자본주의 재생산을 담당하지 못해서일까?

 

어째거나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지적하지는 못하지만 일방적인 남성 중심 가족구성에 대한 비켜가기! 여성중심의 가족구성의 가능성 친밀성 정도는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뭐 맞는지, 틀리는지 분석할 수는 없지만 재미 있던 영화다. 영화평을 하는 것이 꼭 심오해야 할 것이 아니라면 그냥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면서도 재미 있는 영화다.

 

문소리와 고두심의 연기는 일품이다.

 

남에게 영화를 봐보라고 해본적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거의 처음 있는 영화 추천(한 두 번 해봤을 수도 있지만)이다.

 

모두 투쟁에 바쁘더라도 꼭 한번 봐보시길.

 

ps 어차피 쓰면 영홍보도 되는데 저 포스터에 출처를 밝혀야 하나? 포스터 찾은 곳은 맥스부비라는 싸이트인데 포스터 저작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거지?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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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직 멀었다

KTX 농성장에 침탈 위협이 있어 잠시 다녀왔다. 긴박한 상황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 것이 못내 죄송스러웠지만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건 그렇고 잠시 머무는 동안 출산을 마치고 슬슬 활동을 다시 하는 여성동지를 만났다. 얼마 전까지 애기를 데리고 다니던 모습이 떠올라 무심코 물었다.

 

"애는 어쩌고?"

 

ㅜㅜ

 

나도 아직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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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다하지 못하는 투쟁에 대해서

붉은사랑님의 [몇가지 에피소드] 에 관련된 글.

진짜 에피소드! 집회는 왜 하는가?

 

[.....]힘 미치지 못해 쓰러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꺽이는 것을 거부한다[.....]

유명한 야스다 강당 낙서중 일부다. 원래 이 문구보다는 "연대를 구해~~~~"뭐 이런 말 전체를 쓰기는 하지만 이번엔 이 일부분이 더 현실감 있어 보인다.

 

 



5월4일 전날 대추리로 들어가지 못한 관계로 아침부터 성명서 쓰고, 다른데 필요한 원고 쓰고, 11시 국방부로 갔다. 국방부 집회를 마치고 평택으로 이동 본정리 앞에 도착하니 민주노총 방송차량을 이용한 집회가 한창이었다.

 

집회장인지 종합병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에, 이마에 붕대를 감은 사람, 팔에 깁스를 한사람. 여기저기 피멍이 든 사람 투성이었다.

 

집회 참석 중 다른 사람들과 할 이야기가 있어 정신 없이 왔다 갔다 하다보니 군사차량이 대추리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정신이 없어서 다른 일을 하고 마침 지나가는 안면 있는 두 동지들에게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우리는 못들어가는데 저차들은 왜 들어가야 하느냐? 왜 그냥 두느냐고 했다. 두 동지는 그걸로 이미 한판 했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대추리로 다시 들어간다고 해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그 때까지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순간 머리가 돌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왜 와있는가? 집회는 왜하는가?

 

유혈군사작전, 군사기지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데 군사작전차량이 옆을 버젓이 통행하고 있는데 집회는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알고 있던 동지들과 군용트럭을 막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후미에 있던 집회 참석자들도 동의하고 나섰다.

 

역시나 기동대, 정보과 등등 **같은 인간들이 왔다. "다 이야기 된 것이니 길을 열어라. 지도부와 이야기 했다."

 

물론 우리들 입에서 돌아간 말은 있는 그대로 상상하시라. 결국 3차례 협박 "연행하겠습니다. 연행하겠습니다. 연행하겠습니다"를 던진 후 돌아가자. 기동대들이 한쪽 차선으로 전진하기 시작했고 집회대오와 충돌이 생겼다.

 

다음 그림은 당연하게 민주노총 관계자분들이 오셨다. 집회를 하기 위해서 합의했다. 총연맹하고 **당하고 **단위 대표자들이 결정했다는 것이 주요한 이야기의 요지였다. 누구를 위한 합의냐? 집회를 해서 뭐햐냐? 경찰이 밀고 들어오느것 안보이냐? 등의 질문에 그분들 말씀이 차를 막으니까 경찰이 오느것 아니냐?

그러면 집회를 못하니까? 타협한것 아니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군대 차량 스스로 후진하고 돌아가서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물론 사태가 끝난 후 경찰 지휘관이 차량저지한 사람 찾아내 체포하라는 말에 긴장되긴 했지만.....

 

피범이된 황새울 들판을 지척에 두고 군사작전 차량을 들여보내는 것이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그 차량은 어디로든 들어갈 차량이고 모든 길을 우리가 막을 수도 없다. 거기서 길을 막아봤지 경찰에 의해 연행되거나 해산당할 것도 뻔하다. 그 민주노총관계자 말처럼 집회를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좌익모험주의는 한탕주의니, 장기적인 계획이 없느니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모든 것에 힘 다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도 없다. 단순하게 쇠파이프를 들었냐 안들었냐, 화염병이 나왔냐? 물리력을 써서 승리했느냐가 강력한 투쟁, 원칙적인 투쟁을 판단하는 기준은 분명 아니다.

 

그 당시 원칙적인 투쟁은 내 힘다하지 못하고, 내 눈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군사작전을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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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그 가능성에 대해서

지음님의 [고진주의자가 되다] 에 관련된 글.

지난해 읽고 나서 아직도 정리를 못하고 있다. 게시판에 "용감하게 책 읽기"를 만들고 첫 정리로 생각했는데 지음의 글을 보고야 한번 진짜 용감하게 고민을 정리해 본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읽기도 어렵게 읽고 시간도 3개월이상 이나 지났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맑스주의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책도 흥미 있는 책일 것이다.

트랜스 크리틱을 읽고 나서 칸트와 맑스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때 누군가 읽오보라고 권해준 책이다. 고진의 사상적 괘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언제 읽을 수 있을지 참 요원하다.



일단 칸트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칸트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기도 어렵다. 이런 류의 지식이 더욱 부족한 것은 맑스주의 철학도 마찬가지지만 관념주의 철학이라고 치부되던 많은 철학들이 대중적인 언어로 이해되기 쉽게 나온 것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책에서 칸트에 대한 부분이 난해함으로 다가오는 반면 맑스는 여전히 어려운 부분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맑스 이야기는 들어 봤다는 정도다. 그리고 결론에 대해서는 그 이행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책을 부정적으로 읽지는 않았다. 굉장히 흥미진지하게 읽고 생각할 지점도 많았다. 다만 내가 정리할 능력이 안되고 책을 읽고 바로 정리하지 않아서 이미 책에 대한 내용이 다 날아가 버렸을 뿐이다.

 

오히려 이전에 해왔던 현실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부터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과 운동의 전화와 혁신을 고민하면서 토론했던 느낌이 담겨 있기도 하다.물론 여러 수준에서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그 수준이라는 것은 누구(고진과 "우리")의 지적수준이 우세하느냐가 아니다. 체제변혁적인 중심인가 관계변화적인 중심인가일 뿐이다. 그리고 이 지점도 단순하게 내가 생각하는 문제일뿐 고진의 사상을 내 맘대로 "개랑"이리 이런 언어로 평가절하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럴 문제도 아니다.

 

아무튼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다시 정리해보아야 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핵심적인 문제는-이 지점은 이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인데, 가라타니 고진의 발생인지 고진이 다른 곳에서 차용한 것인지 몰라도-코페리니쿠스적 "전회"라는 부분이다. 전회(회전, 자리바꿈)이라는 이 어렵게 쓴 쉬운 말은 칸트가 차용가능느냐, 맑스를 올바르게 해석했느냐 이전의 문제설정이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지점은 천동설 수준의 과학의 발전에서, 즉 양적전화에서 지동설이라는 질적전화로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상자체와 과학의 입장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었던 지점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고전적으로 양질전화의 법칙을 사회와 역사의 발전경향에 대한 대입으로인류 역사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목적론-경제결정론의 시각을 다시한번 교정시켜 준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안에서는 자본주의적으로 생활하고 움직이면 공산주의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는 코페리니쿠스의 전회처럼 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와 다른 체제로 "자리바꿈"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와 다르게 다른 시각으로 칸드를 돌아보고 새롭게 해석할 부분을 새롭게 해석해서 맑스와 연결시킨다고 볼 수 있다. 제목 trans와 <cri·tique

 n(문예·미술 작품 ) 비평, 평론>의 합성어인 것도 아마 이런 이유이지 않을까!

 

그런 전회를 위해서 칸트가 기존 사상에서 뛰어 넘으려 했던 지점을 그리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도덕성을 찾아 새롭게 해석하고 맑스의 상품과 자본 잉여가치에 대한 과학과 연결시키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근대 최고 과학적 성과이자 혁명적 사상을 살리는 것은 그 과학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학이 확장되고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 한다.

 

그 방편 즉, 고진이 칸트와 맑스의 자리바꿈을 통해서 얻은 결론,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 넘어서는 새로운 혁명적 자리 바꿈을 가져가는 운동으로 제시하는 것이 대안화폐운동과 노동(자)소비자 운동이다.

이것을 가능성이나 편견을 배제하고 본다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는 문제라고 본다. 자본의 축적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거치면서 형성이 되는데 상품이 생산되고 이윤이 축적되는 그리고 잉여가치가 착취되는 공간이 있다면 이런 것이 가능한 순환구조라는 시간 흐름이 있다.

우리 사회를 아주 단순한 사회구조라고 보았을 때 이런 흐름은 착취가 없는 공동체 경제라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며 상품과 자본의 시간적 순환의 고리를 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소비자 운동, 고진이 이야기하는 노동자로서 소비자운동이 무엇인지 이전에 대중적 반감과 거부감이 심한 것은 분명하다.  또 그 가능성도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다고 본다. 이와 함께 생태운동이나 다른 사회운동과 결합되면서 그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고 고진은 보는 듯 하다.

소비자라는 언급은 여러 논쟁의 여지가 있고 나 또한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나중의 문제다. 나는 혁명, 혁사, 사회주의 이런 언어적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이 느끼는 거부감과는 좀 다른 거부감이 있다. 그것은 고진이 말하려고 했던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다른 체제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소비관계만의 문제로 구축이 가능한가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축적체제)가 근본적으로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속에서 금융부문의 확장을 통해서 그것을 상쇄(왜곡 위장)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즉 고진의 말대로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순간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그 상품을 소비(구입)하는 순간 생긴다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자신을 재생산할 이윤을 상품관계에서 끌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 되면서 생산부문(물질적확장)을 통한 이윤추구는 사실상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을 더 고민해 보아야 한다.

 

검소하고 청빈한 삶, 자본주의 관계 밖으로 과감하게 탈출해서 새로운 시스템으로 살고자하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 붕괴시키는 혁명적 운동을 생활 속에서 진행할 노동자가 얼마 나 존재하지에 대한 의문도 고진의 문제의식에 동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지점 중 하나다. 그것은 노동자의 지적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운동 또한 문화적 감수성이 필요한데 노동자계급에게는 이런 문화적 감수성마저 빼앗겨서 표출하기 어려운(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점이 있다. 그래서 소수의 운동으로 제안될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노동자 민중이 펼쳐나가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다.

 

아무튼 공산주의가 미래의 도달할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운동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나로서는 여러가지 경우의 수와 비판적인 지점이 있지만 고진의 주장은 새겨볼 만하다고 본다. 현실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중요성을 주장한 댓가로 단계론을 폐기하고 단계로서의 피티독재를 폐기했지만 피티독재 자체를 폐기한 것으로 오해 받아온 시간이 있었고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내가 인정받느냐 오해를 푸느냐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어떻게 운동하고 새로운 시스템-그것이 안되면 관계라도-을 구축하려고 하느냐이다. 그것을 위해서 고진을 받들지는 않아도, 고진의 이야기에 재미를 붙여 보는 것은 많은 활동가들에게 유의미 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런 문제의식을 확장하는데 역사발전 5단계론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의 역사해석 소위 "문명사"에 대한 고민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전혀 딴 소리 같고 생소하겠지만 내 기준으로 고진의 문제의식 속에는 고진의 의도와 무관하게 맑스와 엥겔스의 5단계론을 비판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의 현실운동, 현실 가능성에 주목이 있다.

이것은 맑스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현실에서의 운동이라고 했으면서도 5단계론을 펼친 것에 대한 고민(그 조건)에서 우리 안에 있는 서구 중심 사고를 벗어나야 하는 점이기도 하다.

 

이런 지점은 문명사와 관련한 책, "총, 균, 쇠" 가 읽을만 하다고 한다. 또 유목민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목민의 역사는 여러 해석의 차이가 있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새로운 문명이 기존의 문명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역사발전이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앙과 변방에 동시대 적으로 존재하고 상호 경쟁, 투쟁하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사회가 발전하는 지 역사가 흐르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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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quot;철의기지&quot;

옛날에 좋아했던 노래

 

<철의 기지> 

무쇠바람부는 울산의 하늘아래선

육천의 전사들이 태어났다. 흩어질 줄 모르며

 

그들은 지칠 줄 모르며 그들은 배신할 줄 모르며

그들은 머무를 줄 모르는

 

그들은 자신을 가두었던 철의 감옥을 거대한 화로로 녹여

자신을 지키는 요새로 만든다.

 

무엇을 얻었는가 그대 자유와 평등과 그대의 벗들

무엇을 잃었는가 그대 폭력과 구속과 나약한 환상

 

무엇을 얻었는가 그대

무엇을 잃었는가 그대

 

그대 철의 기지 철의 용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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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번호가 지워진데도!

오늘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아무 생각없이 넘기다 무심코 이제 필요없는 전화번호가 많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일때문에 임시저장했던 전화번호, 사실 앞으로도 전화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옛친구등 몇몇을 정리했다.

 

그러다 지우지 못하고 있던 몇몇 번호들이 나왔다.

 

비두, 샤말.....

 

참 열심히 활동했던 이주노동자들이었는데 노동운동, 노동조합 하자고 해놓고 정작 그들이 가장 힘들 때는 내가 곁에 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나보다. 벌써 1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에 과감하게 지웠다.

 

그리고 아직도 지우지 못한 전화번호가 있다.

 

이젠 걸 필요도 받을 사람도 없는 전화번호다. 그걸 알면서도 목록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부질없는 집착인가보다. 예전에도 죽은 후배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한 세월을 보내다 한번은 전화까지 해본적이 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그냥 저장되어 있어야 할까보다. 죽은 선배가 전화번호가 있다고 해서 살아올리 만무하다. 내 삶이 더 성실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미 없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의 흔적을 쉽사리 날려 버리는 것이 더 어려운가보다. 손쉽게 입력과 취소가 가능한 디지털 시스템도 사람들 마음에 남아 있는 여운을 감당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다.

 

잊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는 만큼 삶에 대한 무게가 더해진다. 삶의 무게를 운동의 무게로 온전히 옮기는 일이 다른 운동과 함께 앞으로 내가 해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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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가 들어가는 말

3월 7일은 하이텍 알시디 코리아의 첫 오창투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아니 얼마 전부터 세간에 이목을 받는 투쟁 사업장들이 떠 올랐다.

 

하이텍

하이닉스

하이스코

 

모두 "HI-하이"가 들어가네....

 

젠장, 이명박은 hi 서울 이군.

 

내 블로그 이름과 닉네임으로 쓰이는 하이-하바를 바꿔야 하나...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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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을 살피다보니

블로그에 그다지 글을 많이 쓰지 않아서인지....

몇번 화면을 아래로 내리다보니 "고요한 새벽에"라는 글이 있다.

 

바로 그 글을 쓸때 고인인되신 조문익 선배가 옆에서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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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심장이 멈출 때 세상도 멈춰지길 바랬지만!

세상은 여전히 돌고 있다.

세상이 멈추지 않고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이 먼길로 돌아 갔을 때 우리는 세상이 다만  1주일이라도 멈춰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눈물 섞인 농담을 했다. 세상이 멈추지 않으면 우리라도 멈춰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갔는데 세상이 1주일은 멈춰야 하는 거 아니냐는 그 동지의 슬픈 농담은 방황일 수도 있고 혼돈일 수도 있고 무기력일 수도 있다. 어찌보면 한 사람에게 무던히 의지했던 무능력일 수도 있다.

 

나의 벗들은 지금  어느 사막 한 가운데 버려져 있다. 아니면 시베리아 설원을 헤메고 있다. 어쩌면 극점에서 멈추지 않고 빙글빙글 도는 나침반 같다.

 

그가 우리에게 차지하는 자리가 그 만큼 컸기 때문인가? 아니면 너무 갑자기, 정말 준비할 시간도 없이 떠 났기 때문인가? 그는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오만 때문인가? 무엇 때문에 이리 혼란스러운가?

 

나는 어쩌면 가족이 돌아간다고 해도 그 슬픔이야 더하겠지만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슬픔 이상의 슬픔이 있다.

 

그는 확실히 탁월했다. 철학, 역사, 경제, 영성 어느 것 하나 막힘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현장활동가 였다. 노동자로 생활했고 노동자가 현장에서 느끼는 갈증에 대한 답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탁월함에는 오히려 천재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항상 낮은 곳에서 대중과 현장노동자, 지역사람들과 호흡하는 사람과 지냈기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론만이 아니라 현장운동에 대한 답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었기에 이론을 원하는 사람 현장활동을 원하는 사람 누구도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벗들은 그를 꽤 일찍 만났지만 상대적으로는 나는 꽤 늦게 만났다. 나의 어떤 벗은 그와의 첫만남에서 다시 운동의 희망을 얻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등돌렸던 운동으로 직장까지 버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그를 믿는데 좀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진중한 시간을 거쳐 그를 믿었기에 그 사람만 믿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동지만큼 나는 슬프다.

 

그는 스스로를 남루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확실히 가진 것이 없었다. 변변한 집 한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부끄러웠다.

 

나는 몇 년전 나름대로 검소하게 살기위해 돌고 돌아 정가의 반값도 안되는 값으로 할인매장에서 두툼한 겨울 옷을 샀다. 그 보다 몇 년전 일부러 겨울이 다 지날 때 싼 값에 옷하나를 사두고 버리지 않고 여벌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를 보내고 나서 이번 겨울에는 그에게 꼭 옷 한벌 해주고 싶었다는 한 동지의 절규, 그가 마지막까지 입고 지내던 겨울 옷이 지난 2003년 열사투쟁으로 수배된 상태로 농성할때 다른 이가 입고 있으라고 주었던 옷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검소라는 이름으로 사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함께 살아온 아내는 그와 많이 사랑했지만 무던히 싸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많이 미웠지만 정말 하나 미워할 수 없고 존경하는 것은 사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심이 없는 그도 농촌에 살면서 아이들 교육을 도회지에서 시키는 일을 할 수 없다며 정말 똑똑한 큰 아이를 시골에서 키울 때는 가슴이 아팠으리라!

 

나는 그의 형이 "자기 동생을 존경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두번 들었다. 사석에 한번 그를 보내는 영결식에서 한번!

 

그가 우리 안에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조직의 리더로도 아니고 사상 이론의 교주로도 아니다. 남루한 활동가이자 언행일체 소박하고 가슴 따뜻한 혁명가 모습이 그가 차지하는 우리 안의 자리다.

 

그래서 그를 떠나 보내는 것이 이처럼 어렵다.

 

2006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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