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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상처입은 '레미제라블' 십자가의 길에서 눈물 흘리다

4.3 상처입은 '레미제라블' 십자가의 길에서 눈물 흘리다

 
조현 2013. 04. 04
조회수 69추천수 0
 

부활절 앞둔 제주 4·3평화공원서
천주교 제주교구 ‘십자가의 길’ 공연
사제와 유가족 등 1천여명 함께해
 
군인 총에 숨진 소년의 죽음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아픔 담아
“비극의 기억, 교훈으로 끌어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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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천주교 제주교구 청소년사목위원회가 ‘십자가의 길’ 공연을 펼치고 있다. 예수의 고난이 1948년 4·3 당시 제주도민들의 과거와 겹쳐졌다. (왼쪽부터) 4·3 당시 군인과 희생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예수와 부둥켜안은 4·3 희생 소년과 소녀, 십자가 위의 예수를 재현한 공연 장면.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인 지난 3월29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언덕 위에 있는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 천주교 제주교구 청소년사목위원회가 준비한 ‘십자가의 길’ 공연을 보러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공원에 새겨진 4·3 희생자 비석 곁을 지나던 60대가량의 한 여인은 위령비에 머리를 비비며 “불쌍한 우리 아버지!”라며 신음을 토했다. 가톨릭 순례자들을 안내해 이곳에 도착한 이창준(68)씨도 비석에서 자기 아버지 이름을 찾아 가리켰다. 그가 5살 때 아버지 ‘이시형’씨는 33살로 세상을 떴다. 예수가 숨질 때와 같은 나이였다. 이씨는 “훗날 아버지가 산 채로 수장을 당한 사실을 들었다”며 눈물을 훔쳤다.
 
1949~54년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인 3만여명이 숨진 ‘제주 4·3사건’은 요즘 영화 <지슬>로 상영돼 재조명되고 있다. 그런데 희생자 가족들에게 ‘4·3’은 역사나 시나리오가 아닌 현실이었다.
 
한라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셌다. 하늘은 한치도 어김없이 봄을 가져다주어 제주는 벚꽃과 유채꽃이 만발했지만,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동토다. 눈 위에서 죽어가는 모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비설’(飛雪)상에서 모녀는 여전히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공원 중앙의 위령탑 주위에선 1천여명의 관객이 둘러싼 가운데 야외공연이 펼쳐졌다. 국내에 영화로 상영돼 화제를 모은 대형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연상시킬 만한 대작이다. 원래 ‘십자가의 길’은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매달린 채 숨져 무덤에 묻히기까지 머문 14곳을 차례로 순례하며 묵상하는 예루살렘의 순례길이다. 그러나 이날 ‘십자가의 길’은 예루살렘이 아닌 ‘4·3’ 죽음의 현장인 한라산에서 시작됐다. 동굴 안에 숨어 있기가 너무도 답답해 뛰쳐나간 어린 여동생을 뒤쫓아나간 소년 앞에 총을 든 군인들이 나타났다. 군인이 어린 소년을 보고 발포를 망설이자 상관이 “빨리 쏘라”며 군인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댄다. 그 순간 소년이 쓰러진다.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소년의 주검 앞에서 군인은 “나는 죽이고 싶지않았다”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예수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사형 선고를 받은 예수는 골고다 언덕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십자가를 진 예수 뒤를 따르는 이는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만이 아니었다. 죽은 소년과 그 어머니와 딸, 군인과 그 어머니 등 ‘4·3’의 희생자와 가해자들이 함께 뒤따랐다. 또 강우일 주교와 사제·수도자들, 관객들의 물결이 꼬리를 물었다.
 
이 행렬 주위로 ‘4·3’에서 희생된 이들의 비석이 줄지어 있었다. 예수가 지나는 옆 비석엔 희생자가 갓난아이였음을 보여주는 ‘1세’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로마군의 채찍에 예수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부르튼 예수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소년을 죽인 군인은 세상의 죄악과 폭력을 대신해 짊어진 예수를 향해 “주님, 저 때문이라고요? 제발 그만하세요!”라고 절규했다.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예수가 또 쓰러졌다. 쓰러진 예수를 안아일으킨 것은 ‘4·3’의 상처를 안은 소년 소녀였다. 상처 입은 예수와 4·3의 희생자들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뒤따르던 수도자들과 관객들은 남몰래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예수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머리에 씌워진 가시가 눈을 찌르고, 옷까지 벗겨진 예수는 사형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개구리처럼 예수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여전히 우리의 대지와 형제자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우리의 폭력에 관객도 가슴에 손을 댄 채 신음했다. 강우일 주교는 이 공연에서 “비극의 기억으로만 가둬둔 4·3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을 수 있게 힘차게 끌어내야만 인간의 탐욕과 무관심·인권유린·파괴·폭력·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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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현장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사제 수도자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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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인의 발을 씻어주고 있는 강우일 주교
 
 
강 주교는 전날인 28일엔 또다른 ‘고난의 현장’인 해군기지 건설 터인 강정마을 계곡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10년 전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제주도민들의 가슴에 대못이 박힌 채 뽑히지 못한 4·3의 아픔을 직시한 그였다. 1901년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으로 천주교인 수백명이 제주 원주민들에 의해 몰살당하는 박해를 받았음에도, 그는 제주 가톨릭의 대표로서 종단의 원한을 내세우기보다는 4·3 희생자의 아픔을 먼저 보듬고 나섰다. 그는 제주를 동북아시아의 상징적인 ‘평화의 섬’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기도해왔다. 그러나 강정마을엔 대못보다 더욱 거대한 쇠말뚝들이 이미 박혀 있었다. 그는 미사에서 ‘증오를 증오로, 폭력을 폭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며 ‘예수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이 득실대는 예루살렘으로 스스로 걸어가 증오를 사랑으로 이겨냈다’는 내용의 강론을 했다.
 
강론 뒤 강 주교는 이날 미사에 온 수도자와 주민들의 발을 계곡에서 씻어주었다. 세족식이었다.
모두가 부활의 눈부신 영광에 사로잡혀 있을 때,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은 고난과 죽음을 새기며 함께 눈물 흘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 눈물의 계곡에서 이들은 서로 상처와 아픔의 족적을 씻어주었다.
 
제주/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전문 휴심정(we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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