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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의 추억과 <조선일보> 1면

[기자의 눈] "부울경의 호소"...지역감정 조장하는 자는 누구?
2019.05.10 19:01:38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의 호소 "IMF 때보다 어려워요. 왜 국민들 힘들게 하는 정책만 합니까"'
 
문재인 정부 출범 2주년인 10일 자 <조선일보> 1면 우측 상단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일부 인용해 본다. 
 
"본지가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을 맞아 국회 경제재정연구포럼(공동 대표 김광림 자유한국당·장병완 민주평화당 의원)과 함께 설문조사를 한 결과, 현 정부 경제정책을 'F학점' 수준의 낙제점(100점 만점에 59점 이하)으로 평가한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부·울·경(64.5%)으로 조사됐다"고 소개한다. 전국 평균(54.2%)보다 10.3%포인트 높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 항목에선, 부·울·경 주민 10명 중 9명(88.4%)이 "어렵다"(위기 국면 54.7%, 대체로 어려운 편 33.7%)고 답해, 전국 평균(80.5%)보다 8%포인트가량 높았다"고 썼다.  
 
이를 근거로 <조선일보>는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지역 경제 민심은 임계점을 향해 치닫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또한 "생계난을 호소하는 부울경 주민들"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부산 쪽은 자영업이 초토화 상태"라는 등의 글을 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 2019년 5월 10일 자 <조선일보> 1면.

의문이 드는 점들이 있다. 왜 하필 '부울경'인가. '호남의 호소'나 '충청의 호소', '강원의 호소'는 없는가? 그냥 '대한민국의 호소'라고 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다른 지역들의 "어렵다"는 응답 평균 수치 자체가 80%를 넘어서는데, 부울경이 그보다 8%포인트 높다는 게 1면에 제목으로 뽑을 만한 의미 있는 수치라고 보는 걸까?   
 
이 조사는 경기 지표도 아니고, '여론조사 결과'를 전하고 있다. '국회 경제재정포럼'이라는 단체의 이름을 내세워 권위도 부여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의원이 공동대표로 있는 단체다. 국정운영 평가도 아니고, 경기 체감도를 묻는 여론조사를 지역별로 비교하는 것이 목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부울경이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더 생계난에 시달린다'는 점을 쏙 뽑아내 신문 1면에 올릴 이유가 없다. 
 
부울경만 특별히 어렵다는 게 정말일까? 2018년 기준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2017년 기준 통계(2018년 발표)를 살펴보자. 지역별 1인당 개인소득(가계 및 가계에 봉사하는 비영리단체 총처분가능소득)에서 세종특별자치시 제외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 중 울산(1991만 2000원)이 서울(2142만 9000원) 다음으로 2위다. 부산은 5위고, 경남은 12위다. 꼴찌는 전라남도다.  
 
1인당 민간소비도 울산은 서울에 이어 2위다. 부산이 4위, 경남이 10위다. 꼴찌는 충청남도다. (나라 전체 체감 경기가 워낙 안좋다고 하니, 2년만에 지역별 순위 자체에 큰 변동이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건 무리다.) 아무리 봐도 부울경의 소득 및 소비 수준이 다른 지역에 '비교해서' 특별히 낮다고 보긴 어렵다. 부산 쪽은 다 영업이 초토화됐다면, 호남 쪽이나 서울 쪽이나 충청 쪽이나 강원 쪽은 영업이 살아나고 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는 매우 좋지 않다'고 하면 될 기사인데, 굳이 '부울경'이 최악이라는 주제를 제목으로 뽑아 든 이유는 뭘까? 
 
이 기사를 보고 퍼뜩 떠오른 기사가 있다. 대한민국 언론사에 기념비적으로 남을만한 오보다. 19년 전, <동아일보>는 김대중 정권 출범 2년 7개월, 즉 딱 임기 반환점을 돌던 시점인 2000년 9월 9일 자 신문에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는 제목의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렸다. <동아일보>의 '흑역사'다. 일부 인용한다.    
 

▲ 2000년 9월 9일 자 <동아일보> 1면.

"추석 분위기가 썰렁하다. 전국 어디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천고마비, 청명해야 할 가을하늘이 잿빛처럼 느껴진다. 소원을 빌 둥근 보름달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특히 지난달 말 지역경제를 지탱해온 우방이 부도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대구지역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부도사태와 관련된 협력업체는 1300여개, 관련 종사자만 1만3000여명. 한마디로 우방사태의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한국 제2의 도시' 부산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 경제의 지표인 어음부도율은 0.2%로 다른 지역에 비해 낮다. 그러나 '더 이상 부도날 기업이 없기 때문에 부도율이 낮다'는 아이러니는 부산을 포함한 우리 경제 전반의 '우울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날짜 신문 기사를 더 살펴보면, '신음하는 영남경제 - 대구지역 연쇄부도 공포...'추석 쇠기 겁난다'', '신음하는 영남경제 - 부산지역/실업률 6.6%...'환란 때보다 어렵다''는 제목도 눈에 띈다.  
 
과거 언론에서 '추석이 없다', '추석 쇠기 두렵다'는 주제의 기사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 기사가 놀라운 점은 딱 2000년에, 대한민국에서 딱 두 곳, 대구와 부산이 '신음'을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기사 취재 뒷이야기를 담은 <미디어오늘> 2000년 9월 21일 자 기사다. 
 
"이 기사에서 특히 눈에 띈 것은 전국 도별 부도율 표. 추석이 없을 정도로 부산·대구지역 경제가 엉망이라는 기사에 사용된 표에는 광주지역 부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배달판에서 이 표를 삭제하고 대구지역의 대표기업인 (주)우방의 부도여파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사를 수정했다. 이 기사가 나간 뒤 동아일보엔 '경제가 안 좋은 게 영남뿐이냐', '영남만 부각시키는 이유가 뭐냐'는 등의 항의성 전화가 빗발쳤다. (...)
 
기사 기획이 보도 하루 전에 이루어졌고, 경제·금융부 기자가 경제담당 에디터의 지시를 받고 부산·대구지역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쯤. 실제 취재시간은 다음날 하루도 채 안됐다는 말이 된다." 
 
'전라도 사람들이 영남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가짜뉴스가 판을 치던 시절, 이처럼 노골적인 '지역 감정 조장' 기사는 백주 대낮에 유력 일간지의 톱을 장식했다. 19년 전 IMF 환란의 '주범'인 자유한국당의 전신 한나라당은, <동아일보> 기사를 기점으로 영남 지역에서 수시로 '대중 집회'를 열고 '경제를 살리라'며 김대중 정부에 저주를 쏟아부었다.
 
그로부터 19년 후,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을 맞은 10일, <조선일보>는 '부울경의 호소'를 1면에 실었다. 공교롭게도 '대장정'에 나선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7일 부산을 방문했고, 8일 경남 거제를 방문했고, 9일 울산을 방문했다. 오늘(10일)은 대구·경북(TK)을 찾았다. 그리고 "민생현장을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어렵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날 자 <조선일보>가 특별히 '부울경' 경기 체감 민심이 좋지 않다는 기사에서 인용한 여론조사 시행 주체의 공동대표는, 다시 말하지만 자유한국당 의원이다.  
 
경기, 안 좋다. 그런데 '부울경'만 안 좋은 건 아니다. 19년째, 지역 감정을 교묘하고 악의적으로 퍼트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박세열 기자 ilys123@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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