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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의 화두는 자본주의 아닌 세상

[장석준 칼럼] 3중 위기의 시대, 경쟁vs연대, 소수vs다수, 축적vs삶
 

2020년대가 시작됐다. 한데 시작부터 불길하다. 아메리카 제국이 외국 정부 요인 암살이라는, 테러 단체나 할 범죄를 자행해 중동에 다시 전운이 일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기후 위기 탓에 대륙 전체가 산불에 휩싸여 있는데, 그 와중에 오늘날의 유일 제국은 첫 번째 세계 제국(페르시아)의 후예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 한다. 지난 10여 년도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혼돈의 시대였지만, 다가올 10년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것은 늘 불만에 차 있는 소수파의 기우만은 아니다. 2000년대가 시작되던 때를 떠올려보자. 세계 곳곳에서 '뉴 밀레니엄'이니, '새 천년'이니 하며 축제를 벌였다. 달력 숫자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다들 마치 새 세상이라도 열리는 듯 들썩거렸다. 지구화-금융화가 늘 호황인, 그래서 언제나 조증(躁症) 상태인 세상을 열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2010년도, 2020년도 그런 떠들썩한 새해맞이 행사와는 정반대되는 분위기 속에 시작됐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2008년(금융 위기) 이후의 세상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다음 10년대가 그저 우울하고 혼란스럽기만 한 시대일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만큼 이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 새로운 출발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2020년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천만한 선택의 순간, 즉 파멸과 반전(反轉)의 갈림길이 될지도 모른다.

'1914년 이후 시대'라는 거울에 비춰 본 '2008년 이후 시대'

이런 진단을 내리기 위해 굳이 예언서를 들추거나 신점을 칠 필요까지는 없다. 21세기 전반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주는 앞 시대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세계전쟁으로 시작해 그보다 더 끔찍한 두 번째 세계전쟁으로 마감한 한 시대, '전 지구적 위기'라는 말에 참으로 어울리는 인류사의 첫 번째 경험이자 칼 폴라니의 명저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홍기빈 옮김, 길, 2009)의 배경이 된 그 시대 말이다.

2008년에 월스트리트에서 금융 위기가 시작되자 다들 이를 1929년의 비슷한 사건과 비교했다. 그러면서 대개 가슴을 쓸어내렸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는 누가 봐도 대공황만큼 파괴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공황 때부터 축적된 거시경제 지식 및 운영 기량 덕분에 자칫 대공황보다 더 큰 붕괴로 이어졌을지 모르는 사건이 적당히 진정된 것처럼만 보였다. 1929년에 견주면, 확실히 그랬다.  

그러나 2008년을 비춰봐야 할 거울은 결코 1929년이 아니었다. 1914년이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안 사람이 바로 <붕괴: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우진하 옮김, 아카넷, 2019)의 저자 애덤 투즈다. 투즈는 <붕괴>를 내기 전에 이와 쌍을 이루는 또 다른 대표작을 발표했다. 아직 우리말로는 번역되지 않은 The Deluge: The Great War, America and the Remaking of the Global Order, 1916-1931(Penguin, 2014)이 그 책이다. 제목을 옮기면, "파국: 대전쟁, 미국과 지구 질서 재편, 1916-1931" 쯤이 될 텐데, 다름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여파를 다루고 있다. <붕괴>에서도 강조하지만, 투즈는 2008년의 의미를 1914년이라는 거울에 비춰 파악하는 것이다.  

왜 1914년인가? 외양만 보면, 1914년은 전쟁이 시작된 해이고 2008년은 공황이 시작된 해라 차이가 크다. 그러나 한 가지 무척 닮은 점이 있다. 1914년과 2008년 모두 인류사를 그 전과 후로 완전히 나눴다. 1914년에는, 19세기와 이어져 있던 한 시대가 돌연 중단되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낯선 새 시대로 던져졌다. 마찬가지로 2008년에는, 불과 몇 년 전까지 새 천년의 도래를 축하하던 한 시대가 갑자기 끝나 버리고 지구 행성 전체가 전혀 다른 시간대로 진입해 버렸다. 즉, 1914년과 2008년은 자본주의 문명의 한 시대가 정지하고 거대한 혼돈이 시작된 (지금껏 단 둘뿐인)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1914년 이후 한 세대의 역사는 2008년 이후 시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긴한 거울이 되어준다. 1914에 시작돼 1918년까지 계속되던 전쟁이 끝난 뒤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보자. 1917년에 러시아에, 1918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혁명이 일어나 중부 유럽이 요동쳤지만, 1920년대가 밝아오자 이 격랑은 일단 진정되는 듯 보였다. 이후 한 동안은 전쟁 이전 질서가 돌아온 것만 같았다. 가장 혼란스러웠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조차 짧은 번영을 누렸고, 심지어 미국은 '유사 이래 최대 호황'을 만끽했다.

그러나 오늘날 돌이켜 보면, 이 시대는 옛 질서로 돌아가려는 미련과 그 옛 질서를 파괴한 새로운 힘들에 대한 무지 혹은 무시 때문에 소중한 시간만 낭비한 시기였다. 구질서의 대표자 대영제국은 구질서의 경제적 기둥이던 금본위제로 돌아가려고 헛되이 시도했다. 대서양 양안의 금융 세력과 대자본은 전에 없이 거대해진 생산 기계(루이스 멈퍼드가 말한, 넓은 의미의 '기계')를 굴리면서도 여전히 전쟁 전 상식에 따라 노동자와 소비자, 그러니까 사회를 대하려 했다. 심지어는 '변혁'을 외치는 좌파정당들조차 그 구호가 20세기에는 19세기와 얼마나 다른 내용을 함축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2008년 이후 우리가 살아온 시대와 얼마나 판박이인가! 금융 위기 이후의 '긴 2010년대' 동안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에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격변에 놀라워하면서도 마치 2008년 전의 일상으로 돌아간 듯 살아왔다. 이번에는 미국이 이런 분위기를 주도했으며, 그런 노력 끝에 실제 호황까지 맞이하고 있다. 비록 과거 같으면 주류 엘리트의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을 극우 포퓰리즘이 창궐하고는 있지만, 이런 흐름을 뒷받침하는 민심 역시 주된 정조는 과거에 대한 향수다. 이렇게 여전히 2008년 이전을 그리워하며 우리는 '긴 2010년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2020년대는 '긴 2010년대'의 단순 연장일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0년이 지난 뒤에 어떤 시대가 열렸는지 보라. 1930년대다. 대공황이 일어났고, 파시즘이 승리했으며, 기어코 다음 번 세계전쟁이 시작됐다. 애써 무시하거나 아예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새로운 역사의 힘들이 드디어 지표면 위로 분명히 드러났고, 더는 제어할 수 없게 된 이 힘들에 이끌려 세계는 더 거대한 재앙을 향해 행진했다.  

슬프게도 2020년대 역시 그러한 시대가 될 운명이다. '긴 2010년대' 동안 세계인이 애써 눈 감고 고개를 돌렸던 진실들이 어지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우리의 일상을 집어삼키기 시작할 것이다. 각성과 전환이 늦어지는 데 비례해 파국의 속도와 크기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것이다. 이미 2019년에 그 전조가 생생히 나타났다. 기후 변화는 이제 기후 '위기'라 불리고 있고, 자본주의 중심부, 주변부를 가릴 것 없이 세계 곳곳에서 격렬한 가두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이러한 가공할 진실들을 다음 세 가지 위기로 정리한다. "기후 위기, 불평등 위기 그리고 민주주의 위기"(J. Stiglitz, "It's time to retire metrics like GDP. They don't measure everything that matters", The Guardian, 2019. 11. 24). 더없이 깔끔한 정리다. 그 정도로 이들 위기는 지금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뚜렷이 가시화돼 있는 것이다.

2020년대의 쟁점 –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 아닌 세상"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는 대위기를 낳은 구질서의 한계를 직시하고 이를 뛰어넘은 세 체제만이 1930년대를 돌파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들 체제는 1920년대 내내 무지와 무시의 대상이 됐던 진정한 쟁점을 비로소 정면으로 바라보고 각자 나름의 극복 방안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는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방향의 해법도 있었지만 말이다. 폴라니에 따르면, 그 쟁점이란 시장지상주의로 치닫는 자본주의 문명의 모순과 한계였고, 이에 도전한 세 체제는 나치 독일, 5개년 계획 이후의 소련 그리고 뉴딜을 추진한 미국이었다.

그럼 우리 시대가 대면해야 할 참된 쟁점은 무엇일까? 그리스 시리자(SYRIZA, 급진좌파연합) 정부에서 재무부장관을 역임한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새해를 앞두고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Imagining a World without Capitalism"(Common Dreams, 2019. 12. 29). 옮기면, "자본주의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바루파키스는 이 글에서 2020년대가 대결해야 할 쟁점이 '자본주의'라 지목한다.

이보다 더 명쾌할 수는 없다. 나 역시 동의한다. 스티글리츠가 인류의 생존을 좌우할 3대 위기라 정리한 바를 나는 다음과 같이 재정리하고 싶다. 기후 위기, 자본주의-민주주의 병존 체제의 위기, 지구 자본주의 질서의 헤게모니 위기. 이 3중 위기를 관통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다.  

기후 위기란 무엇인가? 화석 연료를 사용하고 탄소를 배출하며 두 세기 동안 끊임없이 확대되던 자본주의가 드디어 지구 생태계의 한계와 충돌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지구 행성이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탱하기 힘들 정도로 노쇠해버렸다. 그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지속적인 양적 성장을 바탕으로 복지국가나 자산시장 같은 제도를 활용하며 어렵사리 병존해왔지만, 이제는 복지국가나 자산시장이 작동하지 않을뿐더러 성장 자체가 벽에 부딪힌 상태다.  

이 상황에서 늙은 제국 미국과 유일한 도전국 중국 사이에 패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는 나라든 뜨는 나라든 다른 국가들이 따를만한 지적-도덕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만은 마찬가지다. 옛 패권국의 헤게모니는 와해일로에 있는데,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등장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황위 계승권자가 없는 채로 궐위기가 길어질지 모른다. 아니, 이런 상황은 장기화할 수 없다. 헤게모니 국가 없는 지구 자본주의는 헤게모니 없는 자본주의이고, 어느 체제도 이렇게 지적-도덕적 권위 없이 폭력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긴 2010년대'에는 2008년 금융 위기의 폭발에도 불구하고 이 단 하나의 근본 쟁점, 자본주의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자본주의가 낳은 문제들(가령, 스티글리츠의 3대 위기)로 고통 받으면서도 정작 그런 문제들의 원인은 마치 자연 상태처럼 당연시되다 보니 대중은 늘 해결 방안에 목말라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대중의 마음에 다가온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실현 불가능한 해법이었다. "이주민들만 돌려보내면 괜찮아진다"고 외치는 극우 포퓰리즘의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긴 2010년대'는 더 길어질 수 없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재난이 그렇게 선포하고, 중동의 새로운 전운이 그렇게 선포하며, 다른 무엇보다 '80%'가 늘 패배자가 되는 한국 사회의 이 답답한 현실이 그렇게 선포한다.  

이제는 진짜 쟁점과 대결할 때이고, 문제는 바로 자본주의다. 금융기관과 사기업의 이윤 지표가 사회의 다른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는 이 가치 서열 구조를 뒤집어야 한다. 이 구조와 결합된 또 다른 단단한 구조, 즉 자본을 독점하면서 이를 세습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권력 구조를 흔들고 허물어뜨려야 한다. 그리고 이런 구조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스스로 반복하고 있는 기존 생활 방식을 새롭게 다시 짜야 한다.

달리 말하면, 3중 위기의 시대, 2020년대에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경쟁인가, 연대인가? 소수인가, 다수인가? 축적인가, 삶인가? —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 아닌 세상인가, 아니면 세상의 파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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