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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관타나모에서 포로 3명은 왜 죽었나?

[기고] '짜파구리' 뒤에 숨는 해리스 대사에게 묻는다

 

 

2006년 6월 10일 금요일, 쿠바 섬 귀퉁이에 자리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세 명의 죄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소식은 세계를 흔들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이 관타나모 기지에 개설한 관타나모 수용소는 국제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한 '인권 무법지대'로 악명이 높았다. '관타나모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폭발적으로 제기됐다.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포로 학대' 스캔들이 전 세계를 강타한데 이어 관타나모와 관련된 끔찍한 증언들이 잇따랐다. 나아가 미국이 수행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테러와의 전쟁'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 논란은 가시지 않았다. 2008년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뒤집고 2018년 관타나모 수용소를 유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을 했다.  
 
관타나모 이야기는,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미국의 민낯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의 결정권자와 수행자들이 어떤 태도로 세계의 분쟁을 대하고 있는지에 관한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2006년 관타나모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책임자가 현재 주한 미국 대사로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의지대로 관타나모 수용소가 폐지됐다면, 묻혔던 관타나모의 진실들에 접근이 수월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 길을 막았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의 충실한 군인이자, 2006년 당시 관타나모의 책임자였던 '애국자' 해리 해리스를 한국에 파견했다. 그리고 해리 해리스는 마치 트럼프의 '메신저' 처럼 주한미국대사의 본분을 넘어서는 듯한 발언으로 연일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해리 해리스는 대체 누구이고 어떤 이력을 가진 인물인가?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국인들이 조금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프레시안은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교수의 글을 싣는다. 해리 해리스에 관한 이야기다. 혹자는 '해묵은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관타나모 스캔들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해리 해리스 대사는, 관타나모에 대해 할 말이 없을까?(편집자)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둘러싸고 잠깐 논란이 있었다. 유시민이 지난 17일 "해리스 대사는 한국 총독처럼 행세하지 않느냐”며 “자기가 무슨 총독인 줄 안다”고 말한 것이 발화점이었다. 윤상현 의원은 이에 즉각 반응하며 "‘조선총독이냐’는 식의 비판은 넘으면 안 될 선을 넘는 것”이라며 유시민의 발언을 비판, 이를 둘러싼 논란이 촉발됐다. 외신은 한국인들이 해리스 대사가 일본계라 비판한다며 한국인의 '인종차별'과 '외국인혐오'의 혐의를 들먹이기도 했다.  
 
물론 그 논란의 원인은 해리스 대사 본인이 제공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개별관광 가능성을 언급하자 바로 "미국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고, 호르무즈 해협에 한국군을 파병을 공개요청하거나 주한미군방위분담금으로 50억 달러를 내야 한다고 강요하는 등 주권침해적 발언을 이어간 것이 '총독' 발언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 이뤄진 이런 논란은 매우 불완전하고 편협한 것이다. 콧수염, 일본혈통, 남북관계 등에 시선이 묶인 채 '총독' 논란에 매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과연 해리스 대사가 어떠한 인물인가, 그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해리스 대사라는 인물은 미국의 대외정책 맥락에서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해리스 대사라는 개인으로 육화된 미국의 세계정책에 대한 고민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제 '총독' 논란에서 눈을 들어 세계사적 시각으로 해리스 대사를 평가해 보도록 하자. 
 
해리 빙클리 해리스 2세. 해리스 대사의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였던 해리 빙클리 해리스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2세가 되었다. 이름뿐만 아니라 그는 해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해군의 길을 걸었다. 그만큼 그의 삶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해리 빙클리 해리스 1세는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태평양에서 일본제국 해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가한 경험이 있다. 그는 하와이 진주만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그가 승선한 항공모함 렉싱턴호가 일본의 공습 며칠 전에 출항한 덕분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렉싱턴호는 1942년 5월 최초의 항공모함 함단 교전이었던 산호해 해전에서 공습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스스로 침몰시켜야 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미국과 일본 양측은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이 전투만 놓고 보면 미국의 피해가 더 컸으므로 일본제국 해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일본군의 패배는 이 '승리'에서부터 시작됐다. 일본 해군 부대는 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전쟁이었던 미드웨이 전장에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어서 미드웨이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이 패배를 시작으로 일본의 남태평양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여 결국 패전으로 이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 것이다. 
 
미국의 승전 후 해리 빙클리 해리스 1세는 미 점령군의 일환으로 요코스카에 배치되었고 거기에서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 그가 현재 주대한민국 미국대사인 해리 빙클리 해리스 2세이다. 해리 빙클리 해리스 1세가 자신의 전투 경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아들에게 어떤 경험을 전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어머니가 한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Jeanette Steele, "In Pacific, 1st Asian-American fleet leader," The San Diego Union-Tribune, Jul7 12, 2014.  
원문 주소 : https://www.sandiegouniontribune.com/military/sdut-asian-american-admiral-pacific-fleet-2014jul12-story.html) 
 
그의 어머니는 고베에서 딸 넷을 둔 집의 맏딸이었다. 일본 패전후 미 해군 기지 근처에서 직장을 잡아 일을 하며 미국 남편을 찾으라는 이모 (또는 고모, 영문에는 aunt)의 조언에 따라 요코스카 미군기지의 신문사에서 사무직을 근무하다 남편이 된 해리 빙클리 해리스를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해리스 2세가 태어난 후 사세보 기지로 이사하여 살다가 테네시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성장한 해리스 2세는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완전히 미국에 동화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 ⓒ연합뉴스

해리스 2세가 자라던 보수적인 테네시 마을에서는 아마도 거의 유일한 유색인종이었던 그에게 그의 어머니가 자주 해주었던 얘기는 미군 제442연대에 관한 것이었다. 2차대전중 미국에 살던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는 와중에도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군에 자원하여 442연대 같은 부대에서 용맹을 떨쳤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2세로 구성된 442연대는 가장 훈장을 많이 받은 부대이지만 미군 부대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겪은 부대이기도 하다. 일본계 2세들은 말 그대로 자신의 피로 미국에 충성을 바침으로서 미국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린 해리스 2세는 442연대를 주제로 한 영화 <Go for Broke!>를 되풀이해서 보며 이러한 일본계 미국인을 영웅시하며 자신의 귀감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영화처럼 비록 지금은 백인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지만 '목숨을 바쳐' 미국에 충성하면 결국 백인들의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의식이 해리스 2세에 깊게 뿌리를 내리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아버지가 해군이었고, 제442연대를 영웅시하던 해리스 2세는 이미 고등학교에서 해군고등학교ROTC에 참가했다. 고등학생들에게 "시민권과 미국에 대한 봉사의 가치" "애국심" 등을 배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  해군사관학교에 진학, 미 해군 장교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 승진가도를 달렸다. 2013년에는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되었고, 2년 후에는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으로 승진하여 해군으로서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후 2018년 전역했다. 그 후 주대한민국 미국대사로 근무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러한 출세의 가도를 달리며 그는 철저하게 어느 미국인보다도 더 미국적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있던 2014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이를 자랑스럽게 천명했다.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편견은 없다. 나는 미국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본다." 그에게 아시아계 피가 있다는 것은 단지 미국의 이해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그는 솔직하게 인정한다. "아시아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시작하는데 큰 도움이 되어왔다."
 
그가 말하는 '미국의 시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그가 참여한 작전들을 보고 짐작할 뿐이다. 그는 태평양, 인도양,대서양과 지중해 등 지구상 거의 모든 해양에서 작전에 참가했다. 특히 1986년에는 리비아 공습작전에 참가했고, 1990-91년에는 걸프전쟁에 참가하여 이라크 공격에 기여했다. 이후 이라크 남부의 '비행금지구역'을 감시하는 작전에 참가하다가 2003년에는 '이라크 자유작전'으로 알려진 이라크 전쟁에서 미 해군중앙사령부 참모차장으로 해군의 작전계획과 실행을 직접적으로 책임졌다. 즉 그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아버지 부시 행정부, 아들 부시 행정부까지 이어진 미국의 중동 개입전쟁을 초지일관하게 앞장서서 수행한 인물인 것이다.  
 
물론 군인으로서 정부가 정책을 목숨을 걸고 집행했다는 점에서 그는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지 그에게 전쟁 결정의 책임이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소극적으로 자리만 지키면서 임무를 수행했다기 보다는, 미국의 침략적 전쟁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것이 군인으로서의 승진을 위한 '출세욕' 때문이었는지, 그의 '애국심'의 발로였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 두 가지를 분리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겠다. 
 
그의 '애국심'과 출세욕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몰두하던 2006년 위험한 경계선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그해 3월부터 관타나모 합동특무부대 사령관으로 근무하는 도중 부대 내에서 발행한 '사고'의 실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고를 대하는 해리스 2세의 태도는 그가 갖고 있는 '미국의 시각'이 무엇인지, 그 본질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9-11사태 직후인 2002년 1월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설치된 이 부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테러와의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을 관리하고 포로수용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들이 전쟁포로가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해리스 2세가 사령관으로 부임한 후인 6월 9일 관타나모 기지 캠프1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야세르 탈랄 알 자라니, 마니 샤만 투르키 알 하바디 알 우타이비, 알리 압둘라 아메드 (살라 아메드 알 살라미) 등 3명은 그날 밤 그들이 수감되어 있던 감방에서 목 매어 죽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관타나모의 죽음을 기억하며. '관타나모 가까이(Close Guantanamo)' 공동 설립자이자, 탐사 저널리스트 앤디 워싱톤이 쓴 글 ⓒ 출처 http://www.andyworthington.co.uk/2018/06/10/remembering-guantanamos-dead-12-years-after-the-three-notorious-alleged-suicides-of-june-2006/

미 국방부는 6월11일 이들의 사망을 공개하며 이들이 자살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테러리스트'라는 의심만으로 4년 넘게 구금되어 있던 460여 명 중 세 명이 스스로의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중 아메드는 알카에다의 중간급이나 고위급 간부였고 2006년 5월까지 단식투쟁을 하는 등 감옥 안에서도 저항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당시만 해도 미국 언론은 이를 그대로 중계했다. 
(Andrew Selsky, "DOD Identifies 3 Guantanamo Suicides," The Associated Press, June 11, 2006.  
원문 주소: https://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6/06/11/AR2006061100357.html) 
 
이들의 사망을 공개한 직후 해리 해리스 사령관은 이들이 '비대칭전쟁'의 일환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자포자기로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우리에 대항한 비대칭전쟁의 일환으로 저지른 것이다." 콜린 그래피 국무부 차관보도 "관심을 끌기 위한 홍보활동"이라며 "지하드 성전의 전술"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미국 TV시리즈로 잘 알려진 NCIS는 2년 이상 이 사건을 조사한 후 3명 모두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해리스 사령관의 명령으로 실시된 자체 조사는 감옥에서의 감시감독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이러한 '사고'가 발생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절차 위반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처음부터 자살이나 '비대칭전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들이 무수하게 드러났다. 시튼홀대학 법대의 정책연구센터에서 2009년 발표한 조사보고서는 이날 밤 세 명이 '자살'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행위가 모두 이뤄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Death in Camp Delta, Center for Policy & Research, Seton Hall University School of Law [2009].  
보고서는 출판연도를 명기하고 있지 않으나 이 보고서의 출판을 알리는 시튼홀 법대의 보도의뢰서는 2009년 12월 7일에 공개된 것으로 보인다.  
원문 주소 : https://law.shu.edu/about/news_events/guantanamo_report_death_camp_delta.cfm)
 
△옷이나 침구를 찢어서 밧줄을 만들고; 
△인형을 만들어서 감시원에게는 침대에서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천으로 감방을 가려 안쪽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감옥 수칙 위반);
△두 발을 묶고 (한 명의 경우); 
△두 손을 묶고;
△헝겊 조각 (두 명의 경우는 양말)을 입에 밀어 넣어 목구멍을 막고;
△감방 담이나 천장의 금속 철망에 밧줄을 걸고; 
△세면대 위에 올라가서 밧줄을 목에 건 후 뛰어 내리고;
△감시원에게 2시간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목 졸려 죽은 상태로 있을 것.
 
10분에 한 번씩 해군 간수가 육안으로 감방과 포로를 확인할 정도로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던 군사감옥에서, 옆에 붙어있지도 않은 떨어진 별개의 감방에 수감되어 있던 포로 세 명이 동시에 이 모든 행위를 자행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시튼홀대학 법대의 마크 댄보스 교수 등이 작성한 보고서는 포로 세 명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죽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에 대한 미 정부의 보고서는 사실관계를 밝히기 보다는 더 많은 의문을 야기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정부 보고만으로는 이 세 명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정확히 밝힐 수 없으므로 '제대로 된 수사'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미국에서 정권이 바뀌고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도 '제대로 된 수사'가 진행되지 않자 이 보고서가 제기한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스콧 호튼이 나섰다. 변호사로서 뉴욕시 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호튼은 관타나모 포로수용소를 호위하던 육군 병장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는 외부 호위는 미 육군이, 수용소 내부 순찰과 포로 감시는 미 해군이 담당하는 체제였다)등을 인터뷰하고 여러 자료를 검토했다. 그는 2010년 3월 하퍼스에 게재한 기사에서 이 포로 세 명이 고문 도중 살해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Scott Horton, "The Guantánamo 'Suicides': A Camp Delta sergeant blows the whistle," Harper’s Magazine, January 18, 2010.  
원문 주소 : https://harpers.org/archive/2010/03/the-guantanamo-suicides/) 
 
그리고 이 사실이 부시 행정부에서 은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바마 행정부도 이러한 은폐 가능성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고, 심지어 은폐를 계속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호튼은 우선 2006년 6월 죽은 시신으로 발견된 세 명이 자살할 동기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 국방부는 야사르 탈랄 알 자라니가 탈리반의 부대에서 요리사로 일하며 전선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에 대해서는 이미 내부 검토가 있었고 사우디 아라비아로 석방될 다음 대상자였다. 사우디 정부 고위 경찰간부로 근무했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한다. "탈랄은 자신이 무죄이고 곧 석방되어 집으로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마니 알 우타이비도 이미 석방될 예정이었을 뿐더러 석방을 몇 주 앞둔 상황이었다. 살라 알 살라미의 경우는 더욱 황당하다. 2002년 파키스탄에서 생포되었지만 그 이유는 테러리스트들이 이전에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하숙집에 살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2008년 워싱턴포스트가 공개한 미 국방부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미 국방부 범죄수사전담반은 이미 그가 죽기 몇 년 전에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가 테러리스트와 관련된 훈련을 받았다던가 알카에다 네트워크의 일원이라는 믿을만한 정보는 없다."  
(Josh White, "Guards' Lapses Cited in Detainee Suicides: Probe Also Faults Lenient Policies At Guantanamo," Washington Post, August 23, 2008.  
원문 주소 : https://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8/08/22/AR2008082203083_pf.html) 
 
호튼의 기사에 따르면 관타나모 수용소 인근에는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암흑의 장소'가 있고 수용소 초계임무를 맡은 보초들도 이곳을 '캠프 노 (Camp No)'라고만 부를 뿐 그곳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신원이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외부 인사가 은밀히 들락거리고, 포로가 수용소에서 그곳으로 운반된 후 밖에까지 들릴 신음소리를 내는 것으로 미루어 그곳에서 고문이 자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포로 세 명이 죽었던 날 밤에도 포로들이 '캠프 노'로 운반이 되었고, 그 후 그곳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 후 이들이 수용소 내 응급실로 운반되었지만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날 밤 경계근무 중이던 육군 보초들은 포로 수용소에서 직접 응급실로 이송된 포로는 없다고 증언하고 있어, 사망한 포로 세 명이 '캠프 노'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이 세 명이 그날 밤 '캠프 노'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시신을 돌려받은 가족들은 시신의 머리나 가슴, 손, 입 등에 멍이나 바늘자국 등이 남아 있다며 고문을 받은 증거라고 의심하고 있다. 가족의 의뢰로 시신을 검시한 의사들은 시체에서 핵심 부분이 제거된 상태라서 황당해하고 있다. 즉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인지, 제3자가 목을 졸라 죽은 것인지, 기도가 막혀 질식사한 것인지를 판단하는데 필수적인 후두, 설골, 갑상 연골 등 목 부분이 제거된 시신이 인도된 것이다. 이들은 이 상태로는 사인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며 시신의 완전한 복구를 요구했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날 밤 같은 수용소에서 있었던 샤케르 아메르의 경험은 이들이 고문을 받았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수용소에서는 가혹한 취급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이 있었고, 관타나모 합동특무부대는 단식하는 포로들을 의자에 완전히 결박시킨 후 강제급식시키고 장시간 그 상태로 방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들을 처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6월 사망한 세 명과 함께 아메르도 단식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독방에서 특별한 처우를 받았고, 6월 9일 밤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고문대에 팔다리와 머리까지 결박시킨 상태에서 코나 손가락을 비틀거나 눈을 억지로 뜨게 한 상태에서 강력한 회중전등을 들이대는 등 신체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으로 최대의 고통을 가했고, 고통에 견디지 못해 소리를 지르면 목을 조르거나 마스크를 뒤집어 씌워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스콧 호튼은 이 같은 방법이 세 명의 포로에게도 가해졌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목구멍에 양말과 같은 천조각을 밀어 넣고 입에 테이프를 붙여 질식시키는 방법은 2011년에서야 '드라이 보딩'이라는 고문기술이었음이 밝혀졌다. 9-11에 관련된 혐의로 억류되어 있던 알리 살레 알마리가 취조 과정에서 이러한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Tony Bartelme, "Memos detail Navy brig struggle," The Post and Courier, Oct 11, 2011. 
원문 주소 : https://www.postandcourier.com/news/memos-detail-navy-brig-struggle/article_6be6be6a-5ad4-55b9-9a76-497ac913f338.html) 
 
이 보도를 접한 알메린도 오예다 (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스 전미주 인권연구센터 소장)는 관타나모에서 죽은 포로 3명이 이런 고문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드라이보딩'은 이 3명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의문들을 해소한다"고 주장했다.  
(Almerindo Ojeda, "Death in Guantanamo: Suicide or Dryboarding?" Truthout, November 3 2011.  
원문 주소 : https://truthout.org/articles/death-in-guantanamo-suicide-or-dryboarding/
See also Tony Bartelme, "Do brig interrogations shed light on 3 deaths?" 
The Post and Courier, November 5, 2011.  
원문 주소 : https://www.postandcourier.com/news/do-brig-interrogations-shed-light-on-deaths/article_086b9e9c-f876-5077-94bd-208479eb1f2d.html) 
 
그는 취조원들이 알마리의 입에 양말을 밀어 넣고 테이프로 입을 봉한 후 알마리가 질식하기 직전에 이를 제거한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며, 관타나모 포로 3명 중 2명의 입에서도 양말이 발견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2010년 이들이 고문 도중 살해됐을 가능성을 제기한 스콧 호튼도 이를 확인하고 당시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는 통상적으로 포로들에게 양말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드라이보딩'의 가능성을 재확인했다.  
(Scott Horton, “'Dryboarding' and Three Unexplained Deaths at Guantánamo,” November 9, 2011.  
원문 주소 : https://harpers.org/blog/2011/11/dryboarding-and-three-unexplained-deaths-at-guantanamo/) 
 
드라이보딩은 취조대상의 얼굴에 천을 씌우고 그 위에 물을 붓는 물고문 (워터 보딩)과 함께 부시 행정부에서 CIA와 미군 요원들이 사용한 '강화된 심문방법'의 일종이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이미 2005년 국제앰네스티가 '우리 시대의 굴락'으로 지정한 장소다. 
(Amnesty International Report 2005 Speech by Irene Khan at Foreign Press Association, May 25, 2005.  
원문 주소 : https://www.amnesty.org/download/Documents/88000/pol100142005en.pdf)
 
재판도 없고, 구체적인 죄목도 적시되지 않은 채 '테러리스트'라는 의심만으로 최대 779명의 포로를 무작정 구금하며 가혹하게 다뤄 등이 인권과 제네바협약, 심지어 미국 헌법마저 위반한 혐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04년 국제적십자사는 이 수용소를 방문한 후 미국 정부와 군대가 포로들에게 '고문과 다름없는' 심리적·육체적 강압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했고, 뉴욕타임즈지는 그해 11월 이를 보도했다.  
(Neil A. Lewis, "Red Cross Finds Detainee Abuse in Guantánamo," The New York Times, November 30, 2004. 
원문 주소 : https://www.nytimes.com/2004/11/30/politics/red-cross-finds-detainee-abuse-in-guantanamo.html) 
 
그해 6월에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진행된 훈련에서 포로 역할을 하던 미군이 다른 미군 4명에게 심하게 폭행을 당해 뇌손상을 입고 발작증세를 보이는 사고가 발생,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The Associated Press, "Army Now Says G.I. Was Beaten in Role," The New York Times, June 9, 2004.  
원문 주소 : https://www.nytimes.com/2004/06/09/world/army-now-says-gi-was-beaten-in-role.html) 
 
그 전인 5월에는 워싱턴포스트가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사용되는 '강화된 심문방법'이 미국 헌법 하에서 허용될 수 없는 불법적 방법이라고 지적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Dana Priest and Joe Stephens, "Pentagon Approved Tougher Interrogations," Washington Post, May 9, 2004. 원문 주소: https://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4/05/09/AR2005040206867.html) 
 

▲ 관타나모에 근무중인 해리 해리스 사령관. 2006.8.ⓒU.S.ARMY

해리스 사령관이 2006년 3월 관타나모 기지에 부임하기 이전부터 이미 꾸준하게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사고는 해리스 사령관의 임기 중 발생했다. 그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불법적, 반헌법적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지적들을 모른 채로 부임했을까? 그 이전부터 가혹한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지만 왜 유독 해리스 사령관이 부임한 직후 3명이나 목숨을 잃었을까? 해리스 사령관은 지휘관으로서 그들의 사망에 책임이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그들이 고문을 받았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없는 것일까? 더욱이 그들이 고문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면? 해리스 사령관이 그들의 고문과 사망에 직접적 책임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사망을 '자살'로 은폐했다는 의혹에서도 자유로운 것인가? 그가 스스로 명령을 내려 실시한 조사가 부실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이들 3명의 '자살' 사건은 처음부터 재조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조사보고과정도 조사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관타나모의 '자살' 사건은 무수한 의문들을 제기한다. 해리스 전 사령관은 미합중국의 대사로 대한민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조사와 수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라면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전쟁범죄로 재판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참고로 살인, 고문 및 비인도적/잔인한 대우 등은 제네바협약의 '중대한 위반'으로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사항이다. 한편 해리스 대사는 최근 '짜파구리'를 먹으며 봉준호 감독에게 아카데미상 수상을 축하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등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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