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만 아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르죠. 전쟁 이후 모든 삶이 무너졌으니까요. 하루아침에 판잣집에 살게 됐고,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죠. 아버지는 그게 한이 됐을 거예요. 빨갱이를 피해 왔는데, 또 빨갱이를 만났다고 생각하니까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했어요."
실향민이 남한 땅에서 발붙이고 살 방법은 '경찰' '군인'밖에 없어 보였다.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 인민군을 증오한다는 것을 증명하듯 남한으로 내려온 아버지의 친척들은 모두 경찰이거나 군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유로운 사람이고 싶어했다. 한국전쟁을 겪고 베트남전쟁 당시 기술자로 베트남에 살았던 아버지는 이민을 꿈꿨다.
"아버지는 북한과 남한 땅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었죠. 북한에서는 첩자 소리를 들었고, 남한에서는 간첩이라는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으니까요. 누구보다 빨갱이에 치를 떨었지만, 빨갱이라는 낙인이 떨어지지 않았던 거죠. 아버지가 자유로울 곳, 손가락질받지 않을 곳은 외국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죠. 아버지는 이민을 꿈꿨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다시 '빨갱이'라는 낙인에 무너졌다. 아버지의 비자는 번번이 거절당했다. 베트남에서는 브라질로 이민을 가려고 했지만 안됐다. 미국 이민도 실패했다. 아버지는 마흔셋에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으로 일하러 갔고,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을 알아봤지만 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어요. 처남들이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된 '빨갱이'라 여권도, 비자도 나오지 않았던 거죠. 아버지는 이룰 수 없는 꿈에 실망했고 낙담했어요. 그렇게 매일 술을 마셨어요."
신청하지 않은 이산가족찾기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이 아버지의 과거 사진을 들고 있다. "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 월남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이 아버지의 과거 사진을 들고 있다. |
ⓒ 이희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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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의 꿈이 무너지자 술과 폭력의 강도는 점점 세졌다. 얼굴에 가지 크기의 멍이 든 어머니를 마주해야 했고, 중학생이 된 남동생은 아버지를 말리며 몸싸움을 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아버지는 1950년대를 살았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전쟁의 2차 피해자였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누구든 전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잖아요. 총탄을 마주한 사람은 돌아와서 제대로 살기 힘들어요. 사회 전체가 6.25라는 총탄을 맞았어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아버지는 서운하고 억울했을 거에요. 자기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시대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남북 편을 나누고 어디서 왔는지 사람을 가르고 그렇게 차별했으니까요."
술을 마시며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버지에게서 홍 감독은 전쟁의 상흔을 봤다. 아버지는 왜 술에 의지해야 했을까. 왜 화를 냈을까. 왜 술을 마시지 않을 땐 말이 없을까. 왜 한 줌도 안되는 엄마의 뺨을 때려야 했을까.
하지만 아버지의 분풀이를 온몸으로 겪은 어머니의 원망은 한국전쟁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홍 감독에게 "6.25로 집이 망했고 오빠들이 빨갱이로 몰렸다, 집이 망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랑 선보고 결혼할 일 없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만난 걸 한국전쟁 탓으로 돌렸다. 알코올중독인 아버지랑 사는 것도,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것도, 모두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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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재희 감독 가족사진 홍재희 감독 가족사진.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는 딸이 홍 감독. |
ⓒ 홍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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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이상한 논리죠. 그런데요, 어머니는 정말 그렇게 믿었어요. 모든 게 전쟁탓이다, 다 6.25 때문이라고요. 한 때는 그런 어머니랑 싸웠죠.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한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이해해요. 부모님 세대는 자신의 삶과 인생이 역사 때문에 뒤틀린 세대예요."
2008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홍 감독은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살아서는 볼 수 없었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환한 웃음이었다. 홍 감독은 그곳이 북한 땅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드디어 당신의 어머니를 만났구나, 두고 온 동생들을 만나 한풀이를 했구나' 싶었다.
"어렸을 때 KBS에서 이산가족찾기를 했잖아요. 그때 아빠는 종일 그걸 봤어요. 여의도공원을 돌아다니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산가족찾기 신청은 죽어도 하지 않았어요. 다 죽었을 거라고 스스로 체념했죠. 금강산관광 때도 모시고 가려 했는데, 아버지가 싫다고 했어요. 빨갱이가 지배하고 있는 한 그 땅은 밟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아버지의 머릿속은 여전히 6.25 중이었던 거죠."
지긋지긋한 '빨갱이 프레임' 벗어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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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 |
ⓒ 이희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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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희 감독은 한국사회 곳곳에 6.25의 흔적이 있다고 본다. 성조기를 들고 광화문을 에워쌌던 어른들도, 북한이라는 말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에게도, 한국전쟁의 잔상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6.25를 겪어내는 게 개인의 잘못일까요. 우리는 한 번도 전쟁을 제대로 직면하고 기억하며 떠나보낸 적이 없어요. 우리 사회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어요. 항상 빠르게 성장해야 했고, 누구보다 앞서서 부지런 해야 했으니까요. 200~300년에 걸쳐 전쟁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치유했던 기억이 우리에게는 없어요. 전쟁의 상처에 시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에요."
홍 감독은 "더 열심히 더 꾸준히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홍 감독의 가족처럼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가족이 고스란히 짊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적극적으로 상처를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개인의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회는 자꾸 병들 수밖에 없어요, 태극기를 들고 보수집회에 참석하는 어르신들의 말을 우리가 제대로 듣기나 하나요?"라고 반문했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한 빨갱이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면,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 상처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열심히 들어야 해요."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이 보관 중인 아버지의 과거 사진들."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 월남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이 보관 중인 아버지의 과거 사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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