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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인질극 효과 체감한 의사단체, 분별력 잃은 위험한 투쟁

강경훈 기자 qa@vop.co.kr
발행 2020-09-07 18:58:32
수정 2020-09-07 22: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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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들이 4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증진개발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의대정원 원점 재논의 정책협약 이행 합의서 체결 협약식'을 막기 위해 로비에 모여 있다. 2020.09.04
전공의들이 4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증진개발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의대정원 원점 재논의 정책협약 이행 합의서 체결 협약식'을 막기 위해 로비에 모여 있다. 2020.09.04ⓒ민중의소리  
 
정부의 의사증원 정책 추진에 반발하며 지난달 21일부터 무기한 진료거부를 해왔던 전공의들이 우여곡절 끝에 8일부터 의료 현장에 복귀하기로 했지만, 의대생 국시 응시 구제를 조건으로 다시 진료거부 태세로 전환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등 여전히 위력 행사를 일삼고 있다.

7일 전공의들을 대표하는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다음 날 업무 복귀를 예고하면서 국시 응시를 거부한 의대생들 구제 여부에 따라 향후 진료거부를 재개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보름이 넘는 집단휴진 기간 동안 의료 현장이 패닉 상태에 빠지면서 국민들의 불안감이 극대화됐음에도 전공의들을 대표하는 대전협은 불과 전날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미래 이해관계에 매몰돼 그들의 요구안을 관철시키고자 국민 생명을 담보로 대정부 투쟁을 이끌어왔다.

이 과정에서 응급실 진료를 제때 받지 못한 응급 환자들의 사망 사례가 속출했으며, 종합병원들의 수술 및 외래진료 횟수가 대폭 줄었다. 그동안의 의료 공백을 정상화시키는 데에도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대책도 없이 비현실적 요구안 밀어붙인 전공의들

 전공의들이 투쟁 초기 대정부 요구안을 내세우며 집단휴진에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이번 사태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예상은 많지 않았다.

집단휴진 방침을 앞세워 전공의들의 단체행동을 부추긴 대한의사협의회는 정작 소속 개원의들의 낮은 휴진 참여율로 대정부 투쟁을 이끌어가지 못했고, 전공의들의 진료거부를 적극 지지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공공의료 정책에 반대하는 대정부 투쟁의 핵심 동력은 대전협이 됐다.

이 과정이 어떠한 정책 논의를 토대로 이뤄진 것이 아닌 만큼, 대전협은 애초에 의협이 내걸었던 구호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전공의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노동착취에 가까운 수련 환경 문제는 더이상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의사증원 등 공공의료 정책에 대한 ‘묻지마 철회’ 구호만 남았다.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서울시의사회관에서 열린 '젊은의사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식' 기자회견에서 의사들 집단휴진과 관련해 빅지현 전공의 비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2020.09.01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서울시의사회관에서 열린 '젊은의사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식' 기자회견에서 의사들 집단휴진과 관련해 빅지현 전공의 비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2020.09.01ⓒ민중의소리

전공의들의 집단휴진으로 의료현장 공백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정부는 집단휴진 나흘째인 24일부터 전공의들과 직접 협상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전공의들에 대한 대전협 수뇌부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졸지에 대정부 협상 상대로 지위가 격상된 대전협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집단휴진 참여율을 극대화했고, 이를 대정부 투쟁의 강력한 도구로 삼았다.

정부가 내세운 정책이 ‘공공의료’를 내세우기엔 부족했기에 추가적인 정책 논의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공공의료 강화 방안을 내세우며 정책 보완을 주장하는 시민단체와 달리, 대전협은 ‘정책 철회’ 아니면 ‘진료거부’라는, ‘몰수전략’으로 일관했다. 사흘간의 협상에서 정책 철회만 내세우는 대전협과의 진정성 있는 대화는 불가능해 보였다. 정부가 사실상 투항 수준의 ‘정책 추진 중단’ 안을 내놓았음에도 대전협은 ‘철회’라는 문구가 명시돼야 한다며 거부했다.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전부 아니면 전무 전략으로, 이런 전략은 사실 전쟁에서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정부는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대전협이 내세운 세부적 요구안 역시 대정부 요구안이라고 하기엔 부적절했다. 요구안의 수준 문제를 넘어서, 상당 부분이 물리적으로 정부 권한 밖에 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정부를 상대로 철회를 요구한 공공의대 설립 관련 내용은 해당 법안이 국회로 넘어간 만큼 정부 관할이 아니었으며, 한방첩약 급여화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논의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었다. 마땅히 권한도 없는 정부를 상대로 ‘절차와 권한 모두 무시하고 우리 요구를 들으라’고 윽박지르는 식이었다.

별다른 출구가 없던 대전협은 지난 1일 급기야 ‘반정부 정치투쟁’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대전협 비대위는 정부의 업무개시명령 발동, 이에 응하지 않은 전공의들에 대한 고발 조치 등 처분을 두고 ‘불통’, ‘독선’, ‘폭거’ 등의 표현을 통한 정치적 공세와 함께 부동산 정책과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각종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열거하며, 청년들과 연대해 반정부 정치 투쟁을 벌이겠다는 점도 명확히 했다.

급격한 여론 악화…출구전략 없으면서 몽니만

그러나 “이땅의 청년들과 연대하겠다”는 반정부 투쟁 노선은 구호로만 그쳤고, 집단휴진이 열흘 넘게 이어지면서 애초부터 호의적이지 않았던 국민 여론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더 이상의 출구전략이 마땅찮았던 대전협은 결국 범의료계 단일안을 도출해 이를 토대로 의협이 정부와 협상에 나서는 방안을 선택했다.

지난 3일 오후부터 이어진 밤샘 협상 끝에 의협은 4일 정부 및 여당과의 합의안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박지현 대전협 비대위원장을 필두로 한 지도부의 몽니는 계속됐다. 당초 의료계에서 도출한 단일안의 ‘법안 철회’ 문구,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구조 개편과 관련한 내용 등이 빠져있다는 점을 문제 삼으며 집단휴진을 이어가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동안 투쟁 과정에서 요구해온 것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건정심 구조 개편 문제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이로써 대전협은 국민 건강권을 볼모로 사익을 추구하는 싸움을 해왔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건정심 구조 문제는, 의사단체가 위원회 내 의사 위원 몫을 늘려서 의료수가 등 이익과 관련한 각종 현안 논의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사안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 역시 7일 “건정심 구성에서 의사단체가 좀 더 많은 인원을 가져가는 문제는 의사단체가 처음 문제 삼았던 의사인력이나 공공의대 문제와는 무관한 건강보험 재정 배분에 대한 이야기”라며 “이 부분들이 핵심 쟁점이 되는 것은 결국 수익에 대한 문제로 직결되는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쟁점을 계속 주장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건정심은 건강보험의 적용 여부와 수가 책정, 보험료 등을 결정하는 건강보험법에 의한 최고 의결기구”라며 “이 구성에 대해서는 의사단체와 정부 간 일대일 협상에 의해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큰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할 부분들”이라고 못 박았다.

법정 단체인 의협에 협상권을 일임해 대정부 합의서에 서명이 된 순간부터 전공의 집단휴진의 명분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워졌다. 사회적 논의 측면에서 정책 대결이 되지 않는 데다, 사안별 주장도 번번이 가로막히면서 여론은 갈수록 악화됐고, 대전협의 내부 결속력은 상당 부분 상실됐다. 급기야 비대위원장 등 지도부 사퇴 요구가 터져 나왔고, 명분 없는 집단휴진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7일 대전협 비대위 지도부는 다음 날부터 업무에 복귀한다고 밝히면서도 언제든지 국민 건강권을 인질 삼아 집단휴진에 나설 수 있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박 위원장은 “의대생 보호는 당연한 전제”라며 “2주 내 시험을 재응시시키거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연기되지 않는다면 단체행동 강화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복지부 관계자는 “재신청을 다시 연장하거나 추가 접수를 받는 경우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이 이상은 법과 원칙에 대한 문제이며, 국가시험은 의사 시험뿐 아니라 수많은 직종과 자격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국시 응시에 응하지 않은 의대생들에 대한 구제책은 없다고 못 박았다.

강경훈 기자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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