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모인 조작간첩 피해자들은 모두 4명, 이들의 징역형을 합하면 모두 30년쯤 되었다. 이들은 곤을, 화북, 삼양 등 가까운 마을 사람들로 모두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보통 조작간첩 피해자들과의 첫 만남에서는 서로 인사를 주고 받고 '나는 이러이러한 일로 억울한 사람이다' 정도만을 듣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그 자리에서 당장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날 첫 만남에서는 마음을 다해 진실규명을 함께 하겠다고 다짐하고, 국가기록원이나 검찰로부터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을 신청해 받는 방법을 공유했다. 그 후에 어떤 점이 억울한지, 재심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증거나 증인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모인 분 중 한 분이던 김평강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열었다.
막상 재심을 하려면 육지나 일본 같은 곳에 사는 증인이나 증거를 찾아 여기저기 다녀야 할 텐데 나이 든 자신들이 그런 일을 하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특히 김평강씨의 경우 불법체류로 일본에서 추방된 상태라 10년간 일본 재입국이 금지되어 있는 상태였다. 김평강씨 사건이 대부분 일본의 교포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증인이나 증거를 찾으러 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국 증인과 증거를 찾는 일을 자신이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재심 재판을 하려면 재판 비용이 들어갈 텐데 변변한 돈벌이가 없는 자신들은 그러한 능력이 되지 않으니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모인 김평강, 허간회는 70대 후반으로 직장이 없었고, 강광보는 70대 초반으로 버스 회사 주차장 야간경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자신의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니 적게는 수백만 원에 이르는 보통의 재판 비용을 생각하면 재심을 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진실규명을 시작하다
|
▲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이야기하는 김평강 |
ⓒ 한톨 |
관련사진보기
|
나는 그런 것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단체를 만든 것이고, 억울한 피해자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단체의 힘으로 하겠으니 염려 마시라 말씀드렸다. 한편으로 재판의 경우 억울한 점이 확인되면, 그래서 재심을 해야겠다고 판단되면, 일단 무료 변론해줄 변호사를 찾아보겠으니 그 점도 염려마시라 전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었다. 자신들 사건을 맡았다가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해도 원망하지 않을테니 부담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신 이렇게 말씀드렸다.
"제 손을 먼저 놓지만 않으시면, 제가 먼저 선생님 손을 놓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조작 간첩에 대한 진실규명이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2004년 12월 국정원 진실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2006년 4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위원회를 옮겨 2010년 12월까지 과거사 조사를 계속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체된 뒤에도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피해를 밝혀내는 일을 꾸준히 해왔고 지금은 국가폭력 피해자 지원단체인 '지금 여기에'에서 일하며 국가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의 진실을 규명하고 이들의 사법적 회복을 돕고 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