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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는 공동체를 파괴할 자유가 아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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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입력 2026.06.12 07:10

  • 수정 2026.06.12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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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에 대해 묻다 ②]

'자유'는 보편 절대적인 권리라는 오해와 무지

극우의 혐오, 시민을 동등한 주권자로 인정 안해

민주공화정은 공동체 전체의 자유를 지향해야

민주주의 파괴 세력에까지 무제한 관용은 안돼

 

민주주의는 대등한 시민들이 형성하는 공론장의 바탕 위에서 작동한다. 극우의 혐오는 다른 시민들을 종등한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극우세력은 혐오와 조롱, 음모론과 역사왜곡조차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합니다.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곧바로 이렇게 되묻습니다. “표현의 자유도 없느냐.”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는 과연 처음부터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권리였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자유를 마치 애초부터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권리처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자유는 언제나 제한적이었습니다. 자유는 공중에 떠 있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권력과 재산, 신분과 정치적 지위 위에서 규정돼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대에서 가장 큰 자유를 누린 존재들은 결국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민주정은 흔히 민주주의의 기원처럼 이야기됩니다. 특히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429) 시기의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황금기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러나 당시 아테네 전체 인구는 약 25만~30만 명 수준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정치 참여권, 즉 정치적 자유권을 가진 성인 남성 시민은 약 3만~4만 명 수준에 불과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Mogens Herman Hansen, 『The Athenian Democracy in the Age of Demosthenes』, 1991). 여성과 노예, 외국인 거류민(metics)은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실제 민주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인구는 전체의 10~15% 수준에 불과했던 셈입니다. 당시 민주주의는 이미 존재한다고 이야기됐습니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민주주의의 기원으로 불리는 체제조차 여성과 노예, 외국인을 민주주의 바깥에 남겨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세 유럽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유는 귀족과 성직자, 도시 특권계층에게 제한적으로 허용됐습니다. 농노와 평민 다수는 영주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자유로운 이동조차 제한됐습니다. 당시 자유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특정 신분에게 부여된 특권에 가까웠습니다.

1215년 영국의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역시 흔히 자유와 권리의 상징처럼 이야기됩니다. 실제로 이것은 이후 입헌주의와 근대 자유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준 문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한하고 귀족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습니다(Encyclopaedia Britannica, “Magna Carta”). 농민과 빈민, 여성의 자유를 위한 문서는 아니었습니다. 누구의 자유가 확대된 것일까요.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피렌체 공화정 또한 비슷했습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는 『로마사 논고(Discourses on Livy, 1531)』 등에서 피렌체와 이탈리아가 외세로부터 독립한 공화정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군주 개인의 권력보다 공화정 체제가 더 안정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공화정 역시 오늘날의 보통선거를 기반으로한 민주주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15세기 피렌체 인구는 약 6만~9만 명 수준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길드(guild)에 소속된 남성 시민 중심의 극소수였습니다(John M. Najemy, 『A History of Florence 1200–1575』, 2006). 특히 메디치(Medici) 가문이 피렌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금융과 상업자본을 기반으로 한 올리가르키(oligarchy·소수 거대재산 소유 지배그룹) 성격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공화정 역시 왕과 귀족 중심 질서를 제한하려는 시도였지만, 오늘날처럼 일반 시민 전체의 평등한 정치참여를 전제한 체제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역사 속 자유는 대부분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누군가의 자유’였습니다. 왕은 왕의 자유를 말했고, 귀족은 귀족의 자유를 말했습니다. 상인은 시장의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 바깥에 놓인 사람들은 여전히 배제돼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유의 역사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자유의 확대 과정에서 누가 배제됐고, 누가 침묵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유 개념에 대한 가장 오래된 왜곡 가운데 하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유를 보편적 가치처럼 포장하면서 실제 역사 속 차별과 배제의 구조를 지워버리는 순간, 자유는 현실의 권력관계를 감추는 언어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 근대 자유주의는 누구의 자유를 확장했는가

근대 자유주의는 분명 역사적으로 중요한 진전이었습니다. 절대왕정과 신분제를 제한하고, 개인의 권리와 재산권, 계약의 자유를 보호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89)』에서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개인의 생명·자유·재산(property)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사고였습니다. 왕의 절대권력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한 한계는 존재했습니다.

근대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말했지만, 실제로는 재산을 가진 시민의 자유에 더 가까웠습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토지와 재산, 교양을 가진 사람만이 정치적 자격과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여성과 빈민, 노예와 식민지 민중은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사회계약론 역시 현실에서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계약이라기보다 일정한 재산과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원리라고 주장되었습니다. 여기서 자유란 곧 정치적 권리이고, 한 사회집단에서 시민(사람)의 기준을 판별하는 수단으로 인식된 것입니다.

 

자유는 처음부터 모든 인간에게 허용된 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민들이 오랜 시간 권력과 특권에 맞서 확장해온 역사적 산물이었다.

프랑스혁명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절대왕정과 신분제를 무너뜨리고 시민의 자유 확대를 추구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 직후 등장한 1791년 헌법은 일정 수준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능동 시민(active citizen)’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습니다(Encyclopaedia Britannica, “French Revolution”). 혁명에 참여했던 여성과 노동자 다수는 정치 참여에서 배제됐습니다. “자유·평등·박애”를 외쳤던 혁명조차 현실에서는 재산과 계급의 장벽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제 프랑스에서 오늘날과 같은 보통선거 기반 시민권 체계가 점차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혁명 이후 오랜 혼란과 왕정복고, 제국체제를 거친 뒤인 제3공화정(1870~1940) 시기에야 이루어졌습니다(Eric Hobsbawm, 『The Age of Revolution: Europe 1789–1848』, 1962).

미국 역시 비슷했습니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미국 사회는 오랫동안 노예제를 유지했고, 여성과 흑인, 원주민은 정치적 권리에서 철저히 배제됐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격인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자유를 말했지만 동시에 600명 이상 노예를 소유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인식한계나 위선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자유주의 자체가 안고 있던 구조적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초기 자유와 독립을 주장했던 미국 건국세력에게 흑인과 여성은 과연 자신들과 동등한 시민으로 인식됐을까라는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특히 미국이 오늘날과 같은 보편적 참정권 체계에 가까워진 것은 사실상 20세기 중반 이후였습니다. 여성 참정권은 1920년 수정헌법 제19조를 통해 보장됐고, 흑인의 실질적 참정권 역시 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확대됐습니다(U.S. National Archives). 그 이전까지 미국 남부에서는 문해력 시험과 인두세(poll tax), 인종분리 정책 등을 통해 흑인 유권자들의 권리가 광범위하게 제한됐습니다. 즉 미국 역시 오랫동안 ‘모두의 자유’를 실현한 사회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 자유는 어떻게 시민의 권리가 되었는가

그러나 역사는 단순히 지배계층의 자유만 반복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권리를 확대해온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왕과 귀족, 자산가들에게 집중돼 있던 자유를 시민 전체의 권리로 확장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이후 노동운동과 여성참정권 운동, 식민지 해방운동과 시민권 운동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했습니다. 자유는 어느 날 갑자기 위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배제돼 있던 사람들이 스스로 쟁취해온 것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 요구가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1838년부터 전개된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은 보통선거와 비밀투표, 노동자 계층의 정치 참여 확대를 요구했습니다(Britannica, “Chartism”). 당시 영국 의회는 여전히 지주와 자산가 중심 구조였고, 상당수 노동자들은 선거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민주주의는 이미 존재한다고 이야기됐습니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여성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 1858~1928)는 “말이 아니라 행동(Deeds, not words)”을 외치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요구했습니다.

미국 역시 여성들이 수십 년 동안 거리 시위와 단식투쟁, 체포와 탄압을 감수한 끝에 1920년 수정헌법 제19조를 통해 여성참정권을 보장받게 됩니다(U.S. National Archives). 미국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은 독립 이후 오랫동안 자유와 민주주의를 말했지만, 흑인 다수는 투표권조차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1960년대 흑인 시민권 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폭력과 탄압에 노출됐고, 일부는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는 “어디에서든 정의가 훼손되면 모든 곳의 정의가 위협받는다(Injustice anywhere is a threat to justice everywhere)”고 말했습니다(“Letter from Birmingham Jail”, 1963).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가 미국 애틀랜타에서 연설하고 있다. 1960년 자료 사진 [AP=연합뉴스]

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통과되기 전까지 미국 남부의 많은 흑인들은 문해력 시험과 인두세, 각종 행정장벽 때문에 사실상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U.S. National Archives).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 역시 자유를 둘러싼 끊임없는 배제와 확장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이러한 문제는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법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계약이 존재했지만, 실제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 1845)』에서 당시 맨체스터 노동자 거주지역의 참혹한 현실을 기록했습니다. 하수도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빈민가에서는 전염병이 반복적으로 확산됐고, 아동노동과 하루 14~16시간 노동이 광범위하게 이뤄졌습니다.

노동자들은 법적으로는 자유로운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존을 위해 노동을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형식적 자유는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 자유는 여전히 불평등했습니다. 굶주림 속에서 맺는 계약은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 계약인가. 이 질문은 이후 노동권과 사회권 논의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의 개념은 새로운 층위로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자유는 더 이상 단지 왕권으로부터의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게 됩니다. 경제적 종속과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차별과 배제로부터의 자유, 정치적 참여의 자유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들어 자유의 문제는 개인의 권리를 넘어 국가의 독립과 주권의 문제로까지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식민지 지역에서 자유는 단순한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정치·경제 질서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인도의 독립운동, 알제리의 반식민지 투쟁, 베트남 독립운동, 중남미 민족주의 흐름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등장했습니다. 특히 중동 산유국들에게 자유의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역시 단순한 에너지 위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 통제권을 서구 강대국 중심 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국가적 자율성과 주권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Daniel Yergin,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1991).

반대로 냉전 시기 미국의 중남미 개입은 “자유세계 수호”라는 명분 아래 타국의 민주주의와 주권을 침해한 사례로 비판받아 왔습니다. 1953년 미국 CIA와 영국 MI6은 이란의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addegh, 1882~1967) 정부 전복에 개입했습니다. 모사데그는 영국계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있었습니다(CIA declassified documents / Stephen Kinzer, 『All the Shah’s Men』, 2003). 1973년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 정부가 군사쿠데타로 붕괴됐고, 이후 피노체트 군사독재가 등장했습니다. 미국의 직·간접 개입 문제는 이후 미국 상원 처치위원회(Church Committee) 보고서 등을 통해 국제적으로 논란이 됐습니다(U.S. Senate, Church Committee Reports, 1975). 즉 ‘자유’라는 이름은 때로는 타국의 자유와 주권을 제한하는 명분으로도 사용돼왔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자유는 결코 고정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자유는 시대마다 다른 층위로 확장돼왔습니다. 왕권으로부터의 자유, 귀족 특권으로부터의 자유, 자본권력으로부터의 자유, 식민지배로부터의 자유, 국가폭력으로부터의 자유, 혐오와 차별로부터의 자유까지. 자유의 역사는 결국 “누가 인간으로 인정받는가”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와 연결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을 기본으로 합니다. 헌법 1장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 민주주의는 결코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은 현재의 1987년 헌법체제를 만들기 위해 해방 이후 40여년 이상을 독재정부에 맞서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국가폭력과 검열, 독재와 혐오정치의 위험 속에서 자유를 지켜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사회는 또 다른 위기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조롱, 5·18민주화운동 왜곡, 제주4·3 음모론, 이태원 참사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 확산된 혐오와 냉소는 단순한 인터넷 문화 현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공동체의 슬픔은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타인의 고통은 밈(meme)과 놀이문화로 소비됩니다. 시민적 공감 능력은 냉소 속에서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극우정치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시민적 연민과 공감 능력을 약화시키고, 끊임없이 혐오와 조롱, 피해의식과 음모론을 확산시키며 공동체 내부의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또 다른 본질과 마주하게 됩니다. 자유는 언제나 권력과 함께 존재해왔다는 사실입니다.

■ 민주공화정은 왜 자유를 ‘공동체’와 연결했는가

재산과 경제력의 확대는 곧 자유의 확대와 연결됐고, 반대로 경제적 종속은 자유의 제한으로 이어졌습니다. 절대왕정이 추구했던 왕의 절대적 자유 역시 결국 권력과 재산, 군사력을 독점할 자유에 가까웠습니다. 그것은 시민과 상공업자, 신흥 자본가 계층이 요구했던 경제적 자유와 권한 확대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결국 절대왕정은 시민혁명의 도전에 무너졌습니다.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전체의 자유가 아니라 특정 권력집단과 엘리트, 거대자본, 국가기구가 자신들의 권력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할 자유를 추구한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결국 시민 공동체 전체의 자유를 짓밟고 파괴했습니다.

 

민주공화정에서 자유는 단순한 방임이 아니라 서로를 시민으로 인정하며 공론장을 유지하는 책임과 함께 발전해왔다.

오늘날 극우가 말하는 ‘표현의 절대적 자유’ 역시 이러한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전체의 자유라기보다 자신들의 혐오와 조롱, 허위정보와 폭력적 선동까지 제한 없이 행사하려는 자유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공론장을 희화화하고,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며, 자신들의 주장만을 절대화하는 정치.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러한 정치체제를 전체주의 혹은 파시즘이라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공화주의(democratic republicanism)의 자유 개념은 근대 자유주의가 강조했던 “간섭받지 않을 자유”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자유를 국가권력의 간섭이 없는 상태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특정 권력과 지배로부터 시민이 예속되지 않고,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며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상태를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자유는 공동체 바깥에서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시민 공동체 속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공화주의(republicanism) 전통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시민 개념과 공공선(res publica) 사상에서 출발해 르네상스 시기의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근대 시민혁명기의 루소(Jean-Jacques Rousseau)를 거치며 발전했습니다. 이후 미국혁명(1776)과 프랑스혁명(1789)을 통해 민주공화정은 역사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시민 전체가 공동체의 주권자라는 원리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현대 민주공화정은 여기서 다시 한 단계 더 발전한 형태에 가깝습니다. 20세기에 들어 보통선거와 여성 참정권, 노동권과 사회권이 확대되고, 파시즘과 세계대전, 식민지 해방과 냉전의 경험까지 거치며 민주공화정은 선거제도의 문제를 넘어 시민 공동체 전체의 공존과 헌정질서를 유지하는 문제로까지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Discourses on Livy, 1531)』에서 공화정의 핵심을 시민적 참여와 공동체의 자율성 속에서 찾았습니다. 그에게 자유(libertà)는 개인 욕망의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외부 권력과 내부 전제정으로부터 공동체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공화주의의 핵심은 결국 “누가 공동체의 주권자인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왕이나 귀족, 특정 재산계급이 아니라 시민 전체가 정치공동체의 주권자라는 인식이 공화주의 전통의 핵심이었습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신분과 재산의 여부를 넘어 시민의 의사와 주권 자체를 공동체의 정당성 근거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과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근대 자유주의는 절대왕정과 신분제를 제한하고 인간을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언론·출판·종교의 자유와 시민권 확대 역시 자유주의의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그것은 인류사적으로 거대한 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역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유는 재산을 가진 일부 시민만의 권리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여성과 노동자, 흑인과 식민지 민중, 사회적 약자들 역시 스스로를 인간이자 시민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유의 범위는 왕권으로부터의 자유를 넘어 차별과 빈곤, 식민지배와 국가폭력으로부터의 자유까지 점차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자유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주의를 더 민주주의적으로 확장하려는 흐름에 가까웠습니다. 문제는 자유주의 자체가 아니라 자유를 공동체와 분리된 개인 욕망의 문제로만 축소할 때 발생합니다. 특정 계급과 권력집단의 독점적 자유가 아니라 시민 공동체 전체의 자유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 바로 여기에 민주공화주의의 핵심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자유를 공동체의 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민 공동체가 붕괴하면 자유 역시 가장 먼저 무너진다고 보았습니다.

이 문제를 수백 년 전 가장 강하게 제기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장 자크 루소였습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1762)』 첫머리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L'homme est né libre, et partout il est dans les fers)”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권력의 간섭만 줄인다고 자유가 완성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이 공동체의 법과 정치 형성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스스로 입법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루소가 말한 자유는 개인 욕망의 무제한적 해방이 아니라 시민이 공동체의 주권자로 살아가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이를 “일반의지(general will)”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공공선(common good)을 함께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시민적 의지가 민주공화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 연합뉴스

이것은 중요한 차이입니다. 근대 자유주의가 “국가가 개인을 간섭하지 말라”는 방향에 가까웠다면, 민주공화주의는 “시민이 공동체의 주권자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방향에 더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와 책임은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시민 공동체 자체가 무너지면 자유 역시 유지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 역사 속 민주주의 역시 이러한 문제와 반복적으로 충돌해왔습니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Weimar Republic, 1918~1933)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 헌법 가운데 하나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표현의 자유와 보통선거, 사회권 보장도 상당 부분 제도화돼 있었습니다.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은 여성 참정권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선거권을 보장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이마르공화국 내부에서는 극단적 혐오 선동과 음모론 정치, 반민주주의 운동이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특히 나치당(NSDAP)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용해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했습니다. 1928년 총선에서 2.6% 득표에 불과했던 나치당은 대공황 이후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1932년 7월 총선에서는 약 37.3%를 득표하며 제1당으로 성장했습니다(Richard J. Evans, 『The Coming of the Third Reich』, 2003).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선거와 대중선동, 언론과 선전, 거리폭력과 혐오정치를 결합해 민주주의 내부에서 권력을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잡은 뒤에는 오히려 표현의 자유와 정당정치, 언론과 시민사회를 파괴했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실패는 민주주의가 자유를 부정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에게까지 민주주의적 관용을 무제한 허용했을 때 어떻게 붕괴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역사적 사례였습니다. 독일 법철학자 카를 뢰벤슈타인(Karl Loewenstein, 1891~1973)은 이러한 경험을 분석하며 「전투적 민주주의와 기본권(Militant Democracy and Fundamental Rights)」(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1937)에서 “전투적 민주주의(militant democracy)”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반민주주의 세력에 대해 일정 수준의 자기방어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독일 기본법(German Basic Law) 제21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정당에 대해 위헌정당 해산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독일은 전후 바이마르 붕괴의 경험을 반성하며 혐오선동 제한과 나치 상징 금지, 그리고 연방헌법수호청(Bundesamt für Verfassungsschutz, BfV) 체제를 발전시켜왔습니다. 이것은 검열국가의 논리가 아니라 시민 공동체 자체가 무너지면 자유 역시 유지될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에 가까웠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민주주의는 선거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시민들이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공론장과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 시대의 정치환경은 오히려 이러한 공론장을 빠르게 해체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와 SNS 알고리즘은 사실보다 감정을 더 빠르게 확산시킵니다.

긴 설명보다 짧은 분노와 혐오가 더 강한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2021년 공개된 ‘페이스북 파일(Facebook Papers)’은 플랫폼 알고리즘이 분노와 극단적 콘텐츠에 더 높은 반응을 보이며 사용자 체류시간과 광고수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The Wall Street Journal, 2021.9.14).

오늘날 권력은 금지와 검열만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와 혐오, 공포와 조롱을 끊임없이 증폭시키며 정치적 행동 자체를 조직합니다. 극우의 문화전쟁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공동체의 슬픔은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타인의 고통은 밈(meme)과 놀이문화로 소비됩니다. 시민적 공감 능력은 냉소 속에서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민주공화정의 공론장은 조금씩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어떻게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가. 공동체 자체가 붕괴되고 시민적 신뢰가 사라진 공간에서 자유는 과연 지속될 수 있는가. 표현의 자유는 공동체를 파괴할 자유인가, 아니면 시민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유인가.

민주공화정은 3권분립이라는 국가 구조의 문제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민이 서로를 동등한 주권자로 인정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한 이유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와 권력이 특정 지배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 전체의 정당성과 공공선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원리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극우세력이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혐오와 조롱, 허위정보와 폭력적 선동까지 무제한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은 의견 차원의 갈등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민을 동등한 주권자로 인정하는 민주공화정의 기본질서 자체를 흔드는 행위입니다. 자유는 공동체 바깥에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시민적 신뢰와 공론장이 무너진 공간에서 자유는 결국 가장 큰 목소리와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집단의 특권으로 변질됩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자유를 보장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유가 유지될 수 있는 시민 공동체 자체를 지키려는 정치철학입니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조금 더 본격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왜 표현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로 보았는가. 동시에 그는 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자유”까지 허용하지 않았는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왜 공론장과 시민적 세계(common world)를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으로 보았는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는 왜 민주주의를 시민적 의사소통과 공론장의 문제로 이해했는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왜 권력이 단순한 검열이 아니라 담론과 문화, 일상 속에서 작동한다고 분석했는가. 다음 편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이러한 현대 정치철학의 논쟁을 보다 구체적으로 따라가보려 합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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