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연세대학교 영·독·불 계열로 입학한  만 19살의 신입생 정성희는 그해 11월 25일 학내에서 벌어진 격렬한 시위 가담자로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그날 곧바로 군대로 끌려갔다. 

그렇게 강제징집당한 정성희는 이듬해인 1982년 7월 23일 초소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갓 스무살을 넘긴 그의 죽음은 '의문사'라는 이름으로,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숨겨졌다. 그의 주검은 가족들도 모르게 군 당국이 화장하여 납골조차 못한 채 어딘지 모를 곳에 뿌려졌다. 잔혹한 세월이었다.

지난 14일 고인이 활동했던 흥사단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연세대민주동문회 선후배들이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초혼안장식을 거행했다.

정성희는 스무살 청년으로 유명을 달리한 지 38년만에 제대로 된 안식의 터에서 영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흥사단아카데미에서 활동했던 친구이자 지금까지 그를 잊지않고 이날 초혼안장식을 준비한 이성우씨의 간략한 기록과 단상을 게재한다. 연세대 민주동문회 밴드에 게재된 글과 사진을 동의하에 싣는다. [편집자]

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강제징집, 녹화선도사업의 첫 희생자였던 고 정성희의 초혼안장식이 14일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렸다. 
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강제징집, 녹화선도사업의 첫 희생자였던 고 정성희의 초혼안장식이 14일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렸다. 

11월 14일(토). 강제징집, 녹화 선도사업의 첫 희생자였던 故 정성희의 초혼안장식이 이천에 있는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열사묘역에서 열렸다. 

예상보다 많은 인파가 몰린 초혼 안장식은 민중의례와 고인의 약력소개, 추도사와 조가 합창, 헌화, 취토 등 순서로 약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재학중 동아리에서 정성희를 직접 지도했던 선배 이재영(경영79)이 사회를 맡아 진행하고 안장예배는 김성복(연대 신학77, 부천 샘터교회)목사가 집례했다.

먼저 흥사단아카데미 동료들이 준비한 약력보고와 추모시 낭송, 추모사, 연세 강녹진(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 추진위원회)에서 준비한 추모사, 연세 어울림합창단에서 준비한 추모곡(부치지 못한 편지, 그날이 오면) 공연 등이 이어졌다.

이어 취토와 헌화를 시작으로  참여 단체 소개와 인사, 그리고 유족을 대표해 정성희 아버님의 인사 말씀으로 이날 초혼안장식은 끝났다.

추모식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이어졌으나 어릴 적 성희를 직접 업어서 키운 적이 있다는 고모는 끝내 오열을 토하기도 했다.

38년만에 안식의 터를 찾은 정성희를 위한 추모가 이어졌다.
38년만에 안식의 터를 찾은 정성희를 위한 추모가 이어졌다.

초혼안장식이란 혼을 불러서 안장한다는 뜻으로 유해가 없을 경우에 진행되는데, 정성희의 유해는 군 당국의 강압에 의해 화장된 후 화장터 인근에 뿌려졌기 때문에 초혼안장식으로 치러질 수 밖에 없었다.

1982년 정성희가 군에서 '의문사'했으니 38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흘렀다. 이후 민주주의의 역사는 부침을 거듭했고 2000년에 와서야 '의문사'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2002년 9월 16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정성희의 죽음에 대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인한 사망으로 인정된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화답하여 연세대학교는 2003년 2월 고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반면 군 당국은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은 채 시간만 보내다가 2018년 7월 13일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를 통해 정성희의 죽음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강제징집되어 철책(DMZ)근무 중 보안부대의 불법적인 조사와 감시, 진술강요 등의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한"것이라고 인정하였다. 

이어 2019년 12월 16일 국가보훈처는 고인을 "의무복무자로서 가혹행위 등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것으로 판단하여 국가보훈대상자 재해사망군경(순직2형 2-2-1)으로 인정"하였다.

이제 고인의 명예는 사회적 인식에 있어서나 법적 지위에 있어서나 어느 정도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문제는 있다. 

정성희를 담당한 당시 보안사나 그 구성원은 '보안부대의 불법적인 조사와 감시, 진술강요 등의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를 직접 한 당사자들인데, 정작 이들은 관련 자료를 제대로 내놓은 것도 없고 전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당시 광범위하게 벌어진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내세웠지만 뒤에선 가장 비열하고도 야만적인 인권탄압을 벌였던 자들에게 철퇴를 가할 수 있는 사회가, 그리고 그 피해자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야말로 진정 성숙한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날 초혼안장식에는 고인의 유가족, 동료, 사회단체 인사 등이 참석했다.
이날 초혼안장식에는 고인의 유가족, 동료, 사회단체 인사 등이 참석했다.

막바지 단풍구경 인파로 고속도로가 아침부터 혼잡했던 관계로 예정시간보다 20가량 늦게 시작된 이날 안장식에는 끝날 무렵까지도 문상객의 행렬이 이어졌다. 

유가족, 동료, 사회단체 인사 등 80명 정도가 참여했고 추모의 현수막, 조화와 다과, 음료 등을 여러 개인과 단체에서 협찬해 주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고인의 안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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