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7)

필자의 변 - 

90년대 문민정부 출범 이후, 학생운동은 변화된 환경에 맞춰 새로운 방향을 잡아야 했다. 또한, 소련 붕괴 이후 미국 단일패권과 탈냉전이라는 국제 정세 변화도 새로운 고민과 실천을 요구했다. 

90년대 국내외 정세 변화 속에, 한총련의 기본 사상과 조직을 살펴본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1부,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제2부, 90년대 한총련 운동의 특징

  선도투쟁에서 대중운동으로, 이론에서 실천중심으로

  특징1. 기본 사상- 분단체제 및 미국 패권에 저항

  특징2. 조직-치밀하게 짜여진 대중조직과 전투력

  특징3. 강력한 학생권력-학원자주와 민족대학

  특징 4. 저항의 공동체, 민족문화와 민중문화

  특징 5. 민중운동과 강력하게 연대

 

특징1. 기본 사상- 분단체제 및 미국 패권에 저항

 

80년대는 군부독재와의 싸움, 90년대는 분단체제와 싸움  

90년대 한총련의 기본사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두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하나는 한총련을 비난하는 쪽에서 주로 나올 것인데, ‘주체사상’ 이라고 답할 것이다.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정답은 아니다. 한총련이 주체사상 이론의 영향을 받았지만,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시기 만들어진 사상을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90년대라는 시대 배경 분석이 빠졌기에 영혼없는 답변이라 감점.   

다음으로 예상되는 대답은 ‘자주민주통일’인데, 이 또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시대 배경 분석이 빠져 정답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자주민주통일은 한총련이 추구했던 한국사회 변혁의 방향이다. 이중 80년대에는 군부독재와 싸우는 민주화투쟁의 비중이 더 컸고, 90년대에는 분단체제 및 미국 패권과 싸우는 자주와 통일의 비중이 커졌다고 말할 수 있다.  

 

문민정부 출범 후 변화된 환경 

80년대는 광주항쟁으로 시작하여, 군부독재에 대한 분노와 투쟁이 학생운동의 기본 흐름이었다. 90년대는 문민정부 출범이라는 변화된 환경에 맞춰 학생운동의 방향을 잡아야 했다.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에 대한 투쟁으로 다져진 학생운동의 동력을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김영삼 정권은 군부독재와 야합하여 만들어진 정권이기에, 군부독재 잔재를 청산하는 투쟁도 지속되었다. 남총련을 중심으로 93년부터 전-노체포결사대가 선두에서 싸웠으며, 95년 학살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 투쟁으로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다.  

군부 독재가 끝나고 억압적인 사회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지면서 학생들의 요구도 다양해 졌다. 문민정부라고 해도 자주와 통일 영역에서는 진전이 거의 없었지만, 정권에 대한 비판 정도는 수용했다. 학생운동은 80년대까지의 분노와 저항의 정서를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간다는 자신감으로 다양한 영역으로 진출했다. 대학운영에 직접 참여하고, 대학 교과 과정도 개편하였으며, 학생들이 직접 문화예술의 주체가 되어 자주적인 대학문화를 만들어갔다.

전두환-노태우 체포 결사대 출정식. 1993년5월18일 연세대학교. 남총련 소속 결사대 200여명이 선봉..

미국 단일 패권 및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 

소련의 붕괴는 미국의 단일패권을 강화시켰고, 이속에서 미국은 한국 경제 시스템을 우르과이라운드와 WTO체제,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으로 변화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와중에 IMF 체제라는 고난의 시기를 거치며 수많은 민중이 피눈물을 흘렸고, 우리 사회에는 양극화된 경제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한총련 청춘들은 94년 쌀수입 개방 반대와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저지를 위하여 힘차게 싸웠고, 신자유주의 체제를 강요하는 미국에 맞서 노동자, 농민과  함께 모든 분야에서 싸웠다.       

소련 붕괴는 다른 한편, 한반도에 탈냉전이라는 기회도 주었다. 이전까지는 한반도 분단체제를 미-소의 냉전 때문이라고 핑계를 삼았지만, 90년대에는 분단체제의 본질이 바로 ‘우리 민족과 미국의 문제’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80년대까지는 ‘군부독재 배후조종’, ‘광주학살 배후조종’ 등 미국이 군부독재의 배후라는 구호가 일반적이었지만, 90년대에는 필연적으로 미국과 직접 맞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UR(우르과이라운드) 비준 반대 집회. 1994년. 한총련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싸웠다.
UR(우르과이라운드) 비준 반대 집회. 1994년. 한총련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싸웠다.

북-미간 핵공방 속 어디에 서야하나?

다음으로, 93년 북한의 NPT탈퇴 선언으로 본격화된 북한과 미국간의 핵공방은 한반도 정세를 뒤흔들며 새로운 시대에 맞는 청년학생들의 고민과 실천을 요구하였다. 분단체제의 본질이 미국과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난 후, 북-미 핵공방은 한국 국민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다. 북-미간의 대결 와중에, 한국은 어디에 서야 하나? 당연히, 우리 땅에서 절대로 전쟁은 없어야 하며, 결론은 평화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일부 수구냉전세력처럼 미국의 전략자산에 기대 전쟁을 벌여야 하나? (일부 수꼴 논객들은 3일만 참으면 된다고 하더라) 아니면, 철통같은(?) 한미일 공조로 북한을 고립시키고 말려죽여야하나? (김영삼-이명박-박근혜 열심히 말려죽이기 들어갔다가, 결국은 지들이 먼저 말라 죽었다) 

한총련은 일관되게 민족공조와 반미자주의 깃발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했다. 한총련의 민족공조 노선이 북한의 ‘우리민족끼리’를 따르는 거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우리민족끼리’가 북한에만 이익인가, 토착왜구를 제외한 우리 민족 전체에게 이익이다.

북한의 미사일은 도발이고, 미국의 미사일은 평화수호인가? 94년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반대 선전전 
북한의 미사일은 도발이고, 미국의 미사일은 평화수호인가? 94년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반대 선전전 

한총련 강령 - 나는 자랑스럽다

긴 말 할 필요없이 조직의 나아갈 방향과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강령이다. ‘한총련 강령’, 정말로 오랜만에 읽어보았다. 벗들도 다시 한번 읽어보시라. 청춘 시절, 이런 조직을 만들고, 수 많은 동지들과 함께 싸웠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성조기를 찢는 통일기. 93년 한총련 출범식 중 예술공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약칭 한총련) 강령

[전문]

한총련은 민중중심, 학우중심, 단결의 사상을 무기로 애국의 길을 가는 백만청년들의 자주적 대중조직이다.

한총련은 일제 식민지 치하의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을 계승하여 미제를 반대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화를 이룩하여 민중이 주인되는 민주주의,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고 학원의 완전한 자주화를 실현한다.

[강령]

1. 미국을 반대하고 모든 외세의 부당한 정치, 군사, 경제, 문화적 간섭과 침략을 막아내고 목숨보다 소중한 민족자주권을 회복하여 조국의 자주화를 이룩한다.

1. 사회전반의 민주주의 실현의 걸림돌과 비민주적인 요소를 척결하고 국민들의 자주적, 창조적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완전한 사회 민주화를 실현한다.

1. 조국의 영구분단을 막아내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 아래 연방제로 조국을 통일한다

2001 개정 - 조국의 영구분단을 막아내고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 아래 6.15 남북공동선언을 통일강령으로 틀어쥐고 2000년 가까운 앞날에 조국을 통일한다    

2003 개정 -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밝힌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 아래 6.15 남북공동선언의 이행으로 범민족적 통일국가를 수립한다

1. 학원을 지배 장악하려는 제도와 음모를 타파하고 교수 학생 교직원이 학원의 주인주체로 서는 학원의 민주화, 자주화를 실현한다.

1.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기층 민중뿐 아니라 모든 애국적 의식을 가진 각계각층과 굳게 연대하고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전세계 청년학생과 공동으로 싸워 나간다.

1. 제국주의 문화와 소비향락적인 문화를 척결하고 학원과 생활속에서 건강한 민족 민중적 문화를 일구어 나간다.

1. 외세와 지배집단이 조장하는 학원 내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단호히 배척하고 집단주의를 함양하여 개개인이 주인주체로 서는 학원공동체를 건설한다.

1. 학원에서 배우고 익히는 학문의 목적은 민중의 이해와 요구에 정확히 부응하고 민족의 중흥과 조국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이를 저해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척결하기 위해 싸워 나간다.

1. 백만학도의 부문별, 계열별 조직활동을 적극 포괄, 지원하여 학우들의 다종다기한 이해와 요구를 실현한다.

1. 백만학도가 앞으로 사회에서 민족중흥과 조국발전의 당당한 주체와 건강한 사회인으로 서기 위한 학문적 습득과 단련을 위해 적극 노력한다.

 

특징2. 조직 - 치밀하게 짜여진 대중조직과 전투력

대학교 단위가 아닌 지역 총련 중심 실천

한총련 시기 학생운동의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조직력이다. 학교 내 조직은 가로와 세로로 촘촘히 짜여졌고, 대외적인 투쟁이나 입장발표 등은 지역총련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80년대 학생운동은 학교별로 분산되어 대형 캠퍼스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90년대에는 학생수 2천~5천명 수준의 2~3년제 대학 또는 중소규모 대학에서도 학생운동이 활발해졌다. 지역 총련에서 이전까지 조직 기반이 없던 대학들을 지원했고, 소규모 학교에서는 교내 집회를 조직하기 힘들다 하더라도 지역총련 집중 집회 등에 참석하면서 활동가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조직력이 약한 학교에서 학내 문제로 투쟁이 벌어질 경우(우리는 통상 ‘학원자주화투쟁’이라 불렀다), 주변 대학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 한총련 시기에는 특정한 대학교 소속이라는 정체성 보다는 어느 지역 총련 소속이냐에 따른 정체성이 더 부각되었다. 지역 총련 중에서는 누가 뭐라해도 남총련이 가장 모범적이고, 잘 싸웠다고 자부한다. 이렇듯, 90년대 학생운동은 대학교 단위를 뛰어넘어 진행되었기에, 한총련 학생운동 대오 내에서는 적어도 학벌주의나  대학 서열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서울대 출신이던, 광주대 출신이던 학교에 상관없이 누가 더 조국을 사랑하고 헌신적인가에 따라 동료들의 평가를 받았다. 

1994년에 발표된 논문에 실렸던 내용 인용. 조직도 개념이 잘 잡혔다..
1994년에 발표된 논문에 실렸던 내용 인용. 조직도 개념이 잘 잡혔다..
미국의 역사학자가 우리 민중운동사를 썼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뭐하고 있나?
미국의 역사학자가 우리 민중운동사를 썼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뭐하고 있나?

김영삼 정권이 소개한 한총련의 실체

한총련 조직의 실체가 무엇인지, 인터넷에서 좋은 자료를 찾았다. 그것도 대한민국 정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제공하는 정책브리핑. 1996년 8월, 연세대 항쟁 직후 김영삼 정권 때 발표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내용은 오류 투성이라, 내가 정확히 지적해 주겠다.

[‘한총련’ 그들은 누구인가]북한의 전사(戰士)로 전락한 자칭 ‘통일꾼’조직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올라간 문서가 엉터리다. 김영삼 정권 시절 배포한 자료로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올라간 문서가 엉터리다. 김영삼 정권 시절 배포한 자료로 보인다.

범청학련, 실체를 알려주마

범청학련의 실체를 정확히 알려주겠다.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산하의 부문계열 단체로,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해외 청년학생들이 만든 자주적 조직이다. 1992년 8월 15일 범민족대회 중 공식 출범하였다. (참고로, 북한의 대남공작이 아니고, 남측에서 먼저 제안해서 만든 단체이니 대북공작이라 부르는게 더 타당하겠다) 

남과 북이 분단된 상황에서는 전체 조직 구성원이나 대의원이 모여 대표를 선출하기 힘드니, 범청학련 남측본부는 한총련이 맡고, 범청학련 북측본부는 조선학생위원회가, 범청학련 해외본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일본에 있는 민족대학인 조선대학교가 해외 대표를 맡았던 것 같은데, 정확하진 않다) 그래서, 한총련 의장은 범청학련 남측본부장이며, 범청학련 공동의장을 겸임한다. 그리고, 각 지역총련 의장들은 범청학련 의장단도 겸임하게 되는 것이다. 범청학련 북측본부는 조선학생위원회 위원장이 맡고, 마찬가지고 범청학련 공동의장을 겸임한다. 마찬가지로, 북측의 각 도별 학생대표도 범청학련 의장단을 겸임한다. 그리고, 조국통일위원회(조통위)는 통일운동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한총련 산하 특별기구다. 조통위에서 범청학련 관련 실무를 주로 담당한다. 

한편, 한총련이 범청학련의 산하 단체냐를 두고 논쟁이 좀 있었던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범청학련은 남북해외 3자연대 기구지만, 통일이 되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며, 한총련의 상급 단체는 아니다. 한총련의 상급단체라면, 조국이 통일된 후, 전체 학생들을 대표하는 새로운 단체가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던 것 같다. 

휘날리는 범청학련 깃발. 1992년 범청학련 결성식 중
휘날리는 범청학련 깃발. 1992년 범청학련 결성식 중

한총련부터 과학생회까지, 가로 세로로 촘촘한 조직

학생 시절 나의 소속을 이야기해 보겠다. 나는 조국통일의 선봉대 조국통일범민족쳥년학생연합(범청학련) 남측본부이자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산하, 새조국 건설의 선봉 자주의 횃불 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남총련) 산하, 반미구국의 철옹성 민족전남대학교(민족전대) 산하, 나라사랑 인문대 산하, 주체역사 해방사학과 학생이다. 이것이 세로로 짜여진 조직이다.

그리고, 세로로 짜여진 각 단계마다 가로로 엮어진 조직이 있다. 각 학년별로 과대표와 총무 등 간단한 집행부를 뽑는 학년 학생회, 과 학생회 대의원과 집행부, 단과대 학생회 대의원과 집행부, 총학생회 대의원과 집행부, 지역 총련 대의원과 집행부에 소속될 수 있다.

가로와 세로로 촘촘하게 얽히고 섥힌 기본 조직망에 각종 동아리, 학회, 대중조직, 부문계열조직이 더해진다. 나 같은 경우, 91년에는 1학년 과대표 선출에 참여했고, 사학과에 있는 한국사연구회에 가입했으며, 과 노래 소모임 엇부루기 회원, 전남대 총학생회 산하 오월대 진달래 중대원으로 활동했다. 아참, 부문계열조직인  광주전남지역사학과학생회연합(남사련) 회원이기도 했다. 

92년에는 91년 소속된 조직에 더하여 사학과 내 사회과학 학습모임 ‘꽃다지’에 가입했고, 2학기 부터는 ‘인문대 투쟁국 세로모임’에 참석했다. 과학생회 집행부 모임을 가로 모임이라고 한다면, 세로모임은 인문대 내 각 과학생회에서 같은 분야 집행 일꾼들끼리의 회의구조다. 그러니까, 인문대 투쟁국 세로모임에는 나를 포함하여 인문대 투쟁국장, 인문대 소대장, 철학과 투쟁주체, 국문과 투쟁주체 등 각 과별 투쟁주체가 참여했다.

한총련 조직망이 어떻게 짜여지는지 대충 감이 잡히시는가. 내가 가입하고 거쳐가며 활동했던 조직만 수십개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자기 돈 내고 엄청나게 고생하는 한총련 출범식. 그래도 모인다. 93년 한총련 1기 출범식 중
자기 돈 내고 엄청나게 고생하는 한총련 출범식. 그래도 모인다. 93년 한총련 1기 출범식 중

활동가 조직과 전투조직(선봉대)

활동가 조직과 전투조직은 조금 민감한 부분도 있고,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다음에 보충하겠다.  

 

이론 보다 실천.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

범청학련부터 과 학생회까지 한총련의 조직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처럼 거대한 조직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한총련에게 돈이 있나, 세속적인 권력이 있나, 한총련과 함께한 벗들에게 정권이 주는 것이라고는 최루탄과 몽둥이, 빨갱이라는 낙인과 구속영장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총련 청춘들은 조국을 노래하고 춤추며 싸웠다. 80년대가 이론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실천의 시대였다. 90년대 한총련을 끌고간 힘은 동지들과 치열한 실천 속에서 쌓아올린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