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합(UN)이나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국제기구들은 비밀분류된 자료가 20년을 경과하면 정보공개청구 절차를 통해 이를 공개하는 ‘20년 룰’을 채택하고 있다. 시민단체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년 만인 2017년, 아이엠에프의 한국 구제금융과 관련된 기밀 기록분류표를 확인했다. 이후 여러 해에 걸쳐 아이엠에프를 상대로 비밀해제와 정보공개를 집요하게 요청한 끝에 한국 외환위기와 관련한 기밀문서 묶음 ‘아이엠에프 컬렉션’을 입수할 수 있었다.여기엔 1997년 8월에서 1998년 1월까지 아이엠에프가 한국 정부와 벌인 구제금융 협상 문건, 당시 한국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집한 파일 609건, 총 2260쪽 분량 자료가 포함됐다. 파일은 연대기별 기록철 10개, 주제별 기록철 20개로 정리됐다. 연대기별 기록철에는 1997년 12월3일 타결된 1차 구제금융 협상, 외화 유출과 자금 경색으로 인해 추가 지원(아이엠에프 플러스) 일정을 앞당긴 2차 협상(12월24일), 그리고 외국 은행들과의 채무만기 조정 과정 등이 시간순으로 담겼다. 주제별 기록철에는 당시 한국의 외환 상황, 단기부채, 재벌·노조와 구제금융 협의 이슈에 대해 논의하거나 수집한 문서 뭉치가 들어 있었다. <한겨레>는 정보공개센터, 한국 신자유주의를 연구해온 지주형 경남대 교수(사회학)와 함께 이 ‘아이엠에프 컬렉션’에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중심으로 외환위기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고, 한국 사회에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외환위기의 현재적 의미를 설명하는 연재를 네차례에 걸쳐 싣는다. 정보공개센터가 개설한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97imf.kr)에서 원문 형태의 ‘아이엠에프 컬렉션’과 함께 지주형 교수가 기증한 아이엠에프 관련 기록 5300여건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제 삶과 관련된 보잘것없는 얘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1997년 12월19일, 자신을 한국의 평범한 중산층 직장인이라고 밝힌 천아무개(당시 46살)씨의 편지가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 앞으로 도착한다. A4 4장 분량, 팩스로 송신한 영문 편지였다. 이를 보면, 천씨의 아버지는 1948년 북에서 내려와 한국전쟁 도중 어머니와 만나 결혼했다. 천씨는 전쟁 중이던 1952년 7월 태어났고, 남동생 넷과 여동생 한 명을 둔 6남매 맏아들로 자랐다. 전란 속에 태어나 1960년대 이후 군사독재, 개발독재 시대를 거쳐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시대를 겪으며 성장한 천씨는 1990년대 두 아이의 아빠로, 그 시대 보통의 40대 직장인이 됐다. “많지 않지만, 보통 수준의 월급으로 살아간다”며 담담하던 그의 어조는 외환위기를 말하는 대목에서 절박해진다.“지금 한국 경제체제는 국제통화기금 관리 아래 놓였습니다. 기업들의 파산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됐습니다. 구조조정으로 또 다른 노동자들이 직장을 그만뒀거나, 해고 위기에 놓였습니다. 저는 1년여 전부터 미국 기업 아이비엠(IBM)이 참여한 한국의 반도체기업 동부전자(현 DB하이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정된 시간 안에 반도체 공장을 짓지 못하면, 저도 해고 노동자가 될 겁니다.”천씨가 캉드쉬에게 편지를 보낸 날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12월19일(선거일은 12월18일)이었다. 천씨는 “어제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작은 차이로 이겼습니다. 이번 당선자의 임기 동안, 한국인들은 아이엠에프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등 국제금융시스템의 지침 아래 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환위기를 촉발한 무능한 정부는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칠흑같은 구제금융의 암운이 한국 사회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천씨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캉드쉬 총재의 이름이 가능성, 행동, 미래를 뜻하는 영어 발음 캔(CAN), 두(DO), 시(SEE)를 연상시킨다”며 “우리 공장이 건설돼 64메가디램, 256메가디램 반도체를 생산하면 내년부터 전량 수출해 아이엠에프 대출금 상환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간곡한 요청을 이어갔다. “나의 천주교 이름은 베네딕토인데, 그것은 좋은 대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당신과 아이엠에프의 훌륭한 시스템에 대한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당신이 우리 회사에 기회를 줄 수 있다”며 그의 편지는 끝을 맺는다. 천씨의 편지는 <한겨레>가 정보공개센터를 통해 입수한 아이엠에프 기밀자료 ‘아이엠에프 컬렉션: 한국의 위기(Korean Crisis)’ 파일 속에서 처음 확인됐다.
아직도 아이엠에프 체제의 여파는 가라앉지 않았다. 2021년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사회 양극화 현상 등 한국 경제의 여러 구조적 문제가 24년 전 외환위기에서 시작됐다. 실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구제금융 20년을 맞아 2017년 실시한 ‘대국민 인식조사’에서 외환위기 영향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 88.8%(복수 응답)가 비정규직 증가를 꼽았다. 소득과 빈부격차 등 양극화 확대, 대량실직·청년실업 등 실업문제 심화 등이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했다는 인식도 여전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천씨의 바람과 달리 1997년 한국 경제는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다. 그해 12월1일,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후베르트 나이스 아이엠에프 아시아태평양 국장 사이에 이뤄진 사전협상 때만 해도 작은 희망을 가질 만했다. 지주형 교수의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책세상·2011)을 보면, 이들은 부실 종합금융회사 11곳 가운데 10곳에 회생 기회 부여, 경제 성장 목표 3%대 유지, 기존 한국 정부의 주식·채권 시장 운영 계획을 기반으로 구조개혁에 속도를 낸다는 정도의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빌려준다는 얼개를 짰다.
“나는 협상하기 위해서 왔다.” 12월3일 오전, 한국에 도착한 미셸 캉드쉬 아이엠에프 총재의 일성이었다. 임창열-나이스의 사전협상에 불만을 품은 그가 직접 서울로 날아오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태도는 강경했다. 캉드쉬 총재는 우선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로부터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김영삼 정부가 맺은 아이엠에프 프로그램을 이행하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누군지도 모를 차기 정부 수장의 사전 백기투항을 접수한 것이다. 이어 저녁 7시25분 임창열 부총리,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캉드쉬 총재가 아이엠에프 자금 지원 의향서에 사인했다. 구제금융으로 아이엠에프가 210억달러, 국제부흥개발은행 100억달러, 아시아개발은행(ADB) 40억달러, 미국·일본·프랑스 등 다른 국가 13곳의 대출금(233억5천만달러)을 더해 총액 583억5천만달러 규모의 돈을 빌려준다는 내용이다.
막대한 자금을 꾼 대가는 혹독했다. 정부는 외국인의 종목당 주식 취득한도를 기존 26%에서 연내 50%(이듬해 55%)로 늘려 외국인의 국내 기업 인수합병을 쉽게 하는 것을 뼈대로 ‘경제구조조정 및 금융시장 개방에 관한 정책 이행계획’을 약속했다. 9개 부실 종금사 영업정지와 2개 상업은행 자구책 마련, 국내 콜금리를 기존 12.5%에서 25% 이상으로 인상, 외국 금융기관의 국내 금융기관 인수합병과 외국인 증권사 설립 허용, 일부 분야를 제외한 외국인 직접투자 제한분야 추가 허용, 노동시장 유연화 추가 조처 등이 요구사항에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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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엠에프 컬렉션’을 보면, 이 과정에서 캉드쉬의 역할은 천씨가 기대했던 ‘슈퍼히어로’가 아니었다. 1997년 12월4일 작성된 ‘아이엠에프 한국 이사진 미팅’ 머리발언에서, 나이스 국장은 “여러 해에 걸쳐 채택됐어야 할 정책들이 당장 ‘비약적 전환’(quantum jump)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 대단히 어려운 협상이었다”며 “매니징 디렉터(캉드쉬)가 협상 과정과 최종 단계에 철저히 개입하지 않았다면, 최종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캉드쉬가 최종협상 당일, 기존 사전협상보다 훨씬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며 판을 뒤엎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종전에도 캉드쉬가 구제금융 최종안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는 분석이 있었지만, 아이엠에프 내부문서로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캉드쉬는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집행자였다. 실제 아이엠에프를 장악한 미국은 막판까지 강하게 몰아붙였다. 협상 당일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이 캉드쉬에게 전화를 걸어 ‘미흡한 협상안으론 아이엠에프 이사회를 통과할 수 없다’는 경고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끝이 아니었다. 다국적 금융자본들은 12월5일부터 아이엠에프 차관이 들어오는 족족 한국에 빌려줬던 돈을 빼갔다. 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사라졌다. 달러가 다시 말라붙었다. 국가신용등급이 정크본드(쓰레기 채권) 수준까지 하락했고, 코스피도 300대 중반까지 폭락했다. 원-달러 환율은 1700원대까지 치솟으며 외환시장에 연일 거래정지가 이어졌다. 한국 정부는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채무 만기 연장과 추가 자금 지원 등을 요청하는 ‘아이엠에프 플러스’를 제시했다. 대신 한국 정부는 외국인 주식 소유한도의 100% 확대(1998년 말부터), 채권시장 완전 개방, 그리고 치명적인 정리해고제를 수용했다. 아이엠에프 컬렉션을 보면, 무기력했던 한국 정부와 다른 방향에서 그나마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국내외 노동단체들이 ‘경제위기 관리 범국가 태스크포스’ 설치 등을 제안하며 노동자 피해를 최소화해보려 했던 사실도 확인된다. 노동단체들은 캉드쉬 총재까지 어렵게 만나 뜻을 전달했지만, 거대한 물길을 돌리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
1997년 12월3일 밤,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임창열 경제부총리,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오른쪽부터)가 ‘대기성 차관 협약을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2월9일 고려증권 영업부로 몰려든 투자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던 고려증권 직원이 울음을 터뜨리자 동료 직원들이 달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한국 경제는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됐을까? 축축한 여름비가 내리던 1997년 7월15일. 여당 대선후보 이회창이 경쟁자 이인제를 15%포인트 차이로 앞선다는 여론조사 결과로 떠들썩하던 즈음이었다. 이날 재계 서열 8위 기아그룹이 사실상 부도를 맞았다. 대선이 코앞인 정부로선 협력업체가 무려 5천여곳인 기업에 사망선고를 내릴 처지가 아니었다. 부채가 무려 9조5천억원에 이르던 기아 사태가 장기화하자 여파는 시중은행으로 번졌다. 국가부도 위기가 본격화하고 있었다.
앞서 1월, 빚 5조원을 갚지 못하고 무너진 한보그룹은 외환위기 도미노의 첫 조각이었다. 뒤이어 주요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두달 뒤 삼미특수강을 시작으로 진로그룹, 대농, 한신공영, 기아, 쌍방울, 해태, 뉴코아…. 정부·여당은 대기업 연쇄 도산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부도유예’ 조처를 취하도록 은행을 압박했다. 한해 전 역대 최악의 경상수지 적자(237억달러)를 맞은 정부는 ‘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외치다 기업을 통제할 힘을 잃은 상태였다. 재벌그룹이 막대한 부실채권을 쏟아낸데다, 희망 없는 기업에 인공호흡을 하던 금융부문의 부실이 갈수록 악화했다.
나라 밖 위기가 기름을 부었다.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금리 인상을 결정하자, 동남아에 투자됐던 달러가 이율이 높은 미국 채권 쪽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해 전부터 금융위기 조짐을 보이던 타이(태국)의 밧화 폭락이 동아시아 달러 탈출의 불쏘시개가 됐다. 동아시아가 연쇄폭발을 일으켰고, 화약고 한복판에 한국이 있었다. 구제금융 한달 전, 만기 1년 이하 단기부채가 660억달러였는데 연내 가용외환이 92억달러에 불과했다. 단기외채 주요 거래처이던 일본이 11~12월 한국에서 무려 83억달러 규모 돈을 빼가며 치명타를 안겼다. 낮은 금리의 엔화를 빌려 동남아 쪽에 투자했던 국내 종금사들은 만기가 돌아온 대출을 돌려막을 길이 사라졌다. 11월7일, 한국은행은 ‘외환유동성 사정과 대응방안’이란 보고서를 통해 국가부도 위기를 인정하고,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검토했다. 사흘 만에 김영삼 대통령에게 구제금융 필요성이 보고됐다. 당시 홍콩페레그린증권의 보고서 제목은 이랬다. “지금 당장 한국을 떠나라.”(Get out of Korea, Right now)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이 본격화한 1997년 12월17일.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서울 광화문 빌딩 앞에서 ‘경제주권 수호 결의대회’를 열어 재벌 해체와 관치금융 철폐 및 아이엠에프 재협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1년 8월23일.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아이엠에프 대출금 최종상환’ 문서에 결재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평범한 가족의 삶을 지켜달라던 천씨의 바람은 어떻게 됐을까? <한겨레>는 천씨 편지에 적힌 정보를 추적해 칠순 나이가 됐을 그를 수소문했다. 편지에서 그가 1980년대 중반 다녔다는 선경증권의 모그룹에는 35년 전 근무 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엠에프 당시 근무했다고 밝힌 회사 인사팀에서도 천씨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대답이 왔다. 편지에 적힌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 한 아파트 주소지의 등기부등본을 뒤졌지만 그의 흔적은 없었다. 편지 속 전화번호 역시 존재하지 않는 지역번호로 시작해 연락이 불가능했다. 구제금융과 연결된 대기업 직원이 아이엠에프에 사적 편지를 보내면서, 만일의 불이익을 우려해 가짜 이름과 주소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편지에 찍힌 팩스 발신번호를 추적한 결과, 천씨가 아이엠에프 때 근무했다고 밝힌 서울 중구 초동 소재 한 대기업 건물임이 확인됐다. 편지 내용처럼 1997년 반도체 사업에 참여했던 곳이다. 이 회사는 아이엠에프 당시 구조조정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위기를 딛고 현재 탄탄한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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