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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요?"…'징역 5년 구형' 비정규직 김수억에 쓴 편지

[기고] 비정규직 위해 살아온 당신이 아무일 없던 것처럼 돌아오길 기도하며


 

"모처럼 푹 쉬겠네. '빵' 가기 전에 놀러 갈까요?"

 

며칠 전 당신에게 건넨 한마디가 가시처럼 목에 걸립니다. 불법집회로 재판을 두 개나 더 받고 있고, 적지 않은 전과도 있으니 석방은 꿈일랑 꾸지 말라며 한 농이었는데, 후회가 밀려옵니다. 2월 9일 오전 11시30분 서울중앙지법(형사27부 부장판사 김선일) 509호 법정에서 당신은 감옥에 갇히거나, 풀려나겠죠.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이 점점 초초해집니다.

 

징역 5년이라니요. 대우차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과 화염병 시위를 주도했던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에게 김대중 정부 검찰 구형이 징역 5년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 반대' 총파업을 벌인 이석행 위원장에게 징역 4년을, 박근혜 정부는 '민중총궐기'를 한 한상균 위원장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한낱' 비정규직인 당신에게, 총파업도 아닌 집회와 농성을 이유로 징역 5년을 때렸습니다. 지난 해 2월 고 백기완 선생 장례식장에 조문을 온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김수억 당신이 '감히' "문재인 대통령, 노동존중은 어디로 갔습니까? 비정규직의 피눈물이 보이십니까?"라고 외쳤기 때문일까요?


 

법원이 단병호 위원장에게 징역 2년, 한상균 위원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으니, 당신도 징역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 걱정입니다. 박근혜 정권이 세월호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지만 법원이 집행유예로 풀어준 것처럼, 2월 9일 당신도 아무 일 없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2005년 기아차 화성공장


 

당신을 처음 만난 게 2005년이었으니, 우리 인연도 벌써 17년이 되었습니다. 금속노조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비정규직이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벌여 공장이 멈췄다는 소식을 듣고 기아차 화성공장으로 향했습니다. 파업을 하고 모인 야간조 노동자들 앞에서 쩌렁쩌렁 구호를 외치는, 서른 살 당신을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집회가 끝나자 영화 <파업전야>가 상영됐습니다. 1990년 노태우 정권 때 만들어진 영화를 틀다니, '너무 오버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상영 내내 사내들의 어깨가 들썩이더니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김수억이 말했습니다.


 

"영화가 나온 지 15년이 지났는데 하청노동자들은 여전히 쇳가루가 가득한 공장에서 정규직이 버린 안전화와 목장갑을 끼고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장을 멈추자 구사대와 용역깡패가 쇠파이프와 소화기를 뿌리며 폭력을 가했습니다. 세상이 뭐가 달라졌습니까?"


 

▲ 2019년 9월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노동부에 법원 판결대로 기아차 불법파견 시정 명령을 내려달라며 단식을 하던 중 인터뷰에 응한 김수억 씨. 당일 김 씨는 현대기아차가 불법파견 판결을 받고도 이를 시정하지 않는 사이 3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고 36명이 구속됐고 196명이 해고됐다며 자신이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투쟁하던 시대는 '민주당'만 끝났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라며 민주노총 간부들이 '비판적' 지지를 보냈던 김대중 정부는 정리해고를 제도화하고, 파견법을 만들어 중간착취를 합법화했습니다. 5년 뒤 민주노총에서 한자리씩 했던 사람들이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라며 노무현 후보에게 몰려갔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당사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비정규직법을 만들어 1000만 비정규직 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자 세상이 바뀐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2003년. 당신은 학교를 그만두고 비정규직의 삶을 살기 위해 기아자동차 사내하청업체로 들어갔습니다. 대통령은 "분신으로 투쟁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지만, 한진중공업, 세원테크, 근로복지공단,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 노무현 정권 내내 분신과 고공농성이 계속됐습니다.

 

민주당 사람들은 '투쟁하던 시대'가 끝났겠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니었지요. 분진 날리는 도장공장에서, 쇳가루 가득한 주조공장에서, 펄펄 끓는 물에 살갗이 벗겨지는 조리실에서, 김수억 당신이 매일 마주한 동료들은 노무현 '인권변호사'가 만난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2008년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한 동안 당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2005년 노조를 만들어 2008년까지 파업을 벌인 대가로 당신은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2008년 늦여름이었나요? 90일 넘게 단식이 이어지던 기륭전자 농성장에 당신이 '몰래' 나타났습니다.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의 싸움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당신이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륭전자의 싸움에 먼저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공장 안에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 투쟁으로 만드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기륭 조합원들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얼마 뒤 당신은 감옥에 갔고, 2년 6개월을 꼬박 살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빵'에 있던 2010년 7월22일 대법원에서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기 때문에 정규직"이라는 판결이 났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노무현 정부 내내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신'과 '고공농성'과 '투쟁'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당신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2011년 겨울 감옥에서 나온 당신은 기아차 비정규직 해고자들과 복직투쟁을 하면서 사회적 연대운동을 활발하게 벌였습니다. 2012년 쌍용차 대한문 농성, 2013년 현대차 비정규직 희망버스, 2014년 유성기업 희망버스와 삼성전자서비스 최종범 열사 투쟁, 2015년 케이블 비정규직 고공농성, 2016년 파견업종 확대 반대투쟁….

 

▲ 청와대 앞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는 등 집시법 위반을 이유로 김수억 씨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2019년 1월,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탄원서를 내러 가고 있다. ⓒ연합뉴스
 

2016년 겨울 광화문


 

2016년 겨울이었습니다.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에 당신은 '기아차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작은 천막을 한 동 쳤습니다. 그리고는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모아 '박근혜 퇴진 비정규직 농성촌'을 만들었습니다. 농성촌을 찾아온 문재인, 이재명 후보에게 비정규직의 현실을 알리기도 했지요.


 

모두가 박근혜 가면 뒤 최순실에 분노하고 있을 때, 당신은 최순실 뒤에 숨어있는 이재용과 정몽구, 부정한 재벌을 사회에 알렸습니다. 특검 사무실을 출발해 법원과 국회를 거쳐 청와대로 행진하면서 재벌의 국정농단을 규탄했습니다. 수많은 방송 카메라들이 당신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응원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도 당신은 공무집행방해, 도로교통법, 집시법, 건조물 침입 등 온갖 실정법을 위반했습니다. 지금 검찰이 당신에게 건 죄목과 똑같습니다. 죽은 권력이어서 그랬겠지요? 그 시절 당신과 우리는 경찰의 소환장 한 장도 받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위선에 맞서


 

불의한 권력과 자본이 감옥에 갇혔지만, 당신의 싸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90%의 지지를 받으며 취임 첫 일정으로 인천공항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할 때, 노동운동 출신들이 흥분하며 '문빠'를 자임했을 때, 당신은 문재인 정부의 위선을 온 몸으로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존중' 공약을 손에 들고 노동청과 검찰청에서 불법파견 범죄자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태안화력 김용균 하청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을 때, 당신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문재인 정부와 싸웠습니다. 코로나19가 터진 후 '단 한 개의 일자리도 지키겠다'던 대통령의 거짓을 폭로하며, 코로나를 이유로 비정규직 해고를 멈추라고 외쳤습니다. 47일 동안 곡기를 끊으며 투쟁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당신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고, 오늘도 당신은 이재명 후보를 향해 불평등의 핵심인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재명 후보에게 '파리떼'처럼 몰려든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에게, 오늘도 전봇대에 매달려 죽고 일하다 깔려 숨진 하청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민주당이 권력을 잡아서 세상이 뭐가 바뀌었는지 묻고 있습니다.


 

▲ 2020년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의 풍경. 코로나 이후 비정규직이 겪는 어려움을 드러내는 이날 집회 때도 김수억 씨는 대열의 맨앞에 서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17년 만에 들려준 가족 이야기


 

얼마 전 당신이 3기 항암 투병을 하고 있는 누이의 병문안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팔순이 넘은 부모를 대신해 평생 돌봄이 필요한 여동생을 오랜 세월 홀로 보살펴왔던 누이의 병환 이야기를 꺼낼 때, 당신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17년 만에 꺼내놓은 가족 이야기였습니다.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기아자동차라는 대기업에 20년을 다녔는데, 월세 23만 원짜리 옥탑방에 넣어둔 보증금 200만 원이 가진 재산의 전부라는 사실을 안 것도 얼마 전이었습니다. 기아차 회사가 당신에게 청구한 손해배상 금액이 11억 5000만 원이라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훈장으로 달고 권력과 부를 누리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민주당 86세대들이 오늘도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고, 1990년대 노동운동을 명패처럼 들고 권력의 품에 안긴 노조 출신들이 노동운동이 변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는 시대. 가장 낮고 소외된 자리를 지키며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당신의 외침이 저들에게 들리기나 할까요?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요?"

 

 

기아차 비정규직 조합원들 중 가장 늦게 불법파견 소송을 한 당신도 조만간 정규직 판결이 나겠지요. 기아차 정규직이면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고, 가족의 병원비도 보탤 수 있잖아요. 앞장서지 않고 한 발만 물러서면 감옥이라는 고통도 피할 수 있고요. 그러면 안 될까요?


 

서른에 만나 이제 마흔 후반에 접어들었는데 여전히 당신은 열정 가득한 청춘입니다. 가난한 노동에 대한 연민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어리석은' 당신에게 "이제 그만 하면 안 될까요?"라고 하면, 당신은 해맑게 웃으면서 "막걸리나 한 잔 하세요"라고 하겠지요. 단식 40일이 넘어 뼈밖에 남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도 그랬던 것처럼.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이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밤에 띄우고 싶지 않은 편지를 띄웁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오길 기도하며.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11015122561840#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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