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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은 20세기 말 지구촌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무역자유화를 통한 전 세계의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1995년 만든 WTO는 취지와 달리 많은 지역경제를 몰락시켰다.
그 중 한 예로 미국 미시간 주의 최대도시 디트로이트시를 꼽을 수 있다. 세계적인 자동차산업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는 WTO의 무역자유화로 자동차 회사들이 빠르게 중국, 인도 등으로 이전하면서 인구가 300만 명에서 60만 명으로 줄었다. 2013년에는 20조 원의 빚을 갚지 못해 파산신청을 해야 했다. 마침내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위험한 도시로 쇠락했다. 제조업의 중심지였던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시와 영국 랭커셔주 프레스턴시도 이렇게 몰락했다.
그러면 21세기는 어떨까?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 1월 〈지구위기 보고서 2022>(Global Risks Report 2022)를 통해 앞으로 10년 간 인류가 겪을 10대 위기를 발표했다. 그 중 1위가 기후행동 실패다. 기후위기 대응에 실패했을 때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지구촌이 탈탄소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면서 뒤처진 나라들은 몰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디트로이트와 흡사하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예상되는 위기를 잘 준비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새 정부는 기존 정부의 상징부터 지우면서 시작한다. 윤석열 정부도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부터 지우고 있다. 그래서 윤 정부는 탈원전 폐기와 원전확대를 표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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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정부는 탈원전 폐기와 원전확대를 표방하고 있다. ⓒ 게티이미지뱅크
원전확대를 어떻게 할까? 원전 가동률을 늘리고, 노후 발전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평균 원전 가동률은 이명박 정부 5년 간 89.2%, 박근혜 정부 4년 간 81.7%였고, 문재인 정부는 2021년까지 71.9%였다. 다수의 보도를 종합하면 윤 정부는 원전 가동률을 90%대로 회복하려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난해 12월에는 원전 가동률이 91.8%나 됐고 올 1월에는 89.4%를 달성했다. 이처럼 문 정부의 막바지에 원전 가동률이 90%를 오르내리며 지난 10년 동안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윤 정부는 원전확대라는 소원을 벌써 이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윤 정부는 계속 원전에 공을 들인다. 왜 그럴까? 지난해 12월 문 정부가 발표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그린택소노미)에 빠진 원전을 집어넣기 위해서다. 왜 녹색분류체계에 원전을 포함시켜야 할까? 돈과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
녹색분류체계란 기업의 기후위기 대응 활동과 범위를 정하는 지침이면서 동시에 민간 부문의 투자 결정을 지원하는 데 목표가 있다. 우리나라 금융기관들도 유럽연합(EU)과 정부가 만든 녹색분류체계에 따라 투자를 한다. 따라서 녹색분류체계 포함 여부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문제다.
4월 28일 대통령직인수위는 녹색분류체계에 원전을 포함한다고 공식화했다. 원전이 돈이 되니 투자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연합이 2월 승인한 택소노미는 원전을 포함하되 엄격한 원전폐기물 처리와 부지 기준, 사고에 견딜 핵연료 기준 등을 요구한다.
윤 정부는 유럽연합 기준을 충족할 수 있을까?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러면 원전으로 만든 우리나라 수출품들은 녹색제품으로 인정받지 못 한다. 윤 정부의 녹색분류체계가 우려스러운 이유다.
윤 정부가 원전에 집중하는 동안 정작 위기는 다른 곳에서 오고 있다. 지구촌이 빠르게 탈탄소로 진입 중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예고한 탈탄소 시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앞당겨진 것이다. 그러면 윤 정부가 원전 구출에 집중하면서 탈탄소 시대도 대비했을까?
탈탄소 시대를 여는 세 가지 현안
탈탄소 시대와 관련해서 검토해야 할 세 가지 현안이 있다.
첫째, 탄소국경세다. 유럽연합은 지난 3월 15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로 불리는 탄소국경세를 결정했다. 유럽연합으로 수입되는 상품에 포함된 온실가스에 세금을 매기는 제도다.
유럽연합은 탄소국경세를 전격적으로 합의한 계기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고 밝혔다. 유럽연합은 천연가스 40%를 러시아에 의존하다 보니 러시아가 가스를 끊으면 위기에 빠진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그래서 에너지 자립을 안보의 핵심으로 보고, 재생에너지로 그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한다. 탄소국경세로 목표 달성을 촉진하면서 2050년으로 예정된 유럽의 탄소중립도 조기에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탄소국경세를 2026년 1월 1일부터 적용한다.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비료, 전기가 우선 대상이다. 그동안 당연시해온 공짜 탄소는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생각해보니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간산업인 철강이 탄소국경세의 영향을 받는다. 유럽연합에서 탄소거래 가격이 1톤 당 100달러면 철강회사는 수출가격의 13%를 지불해야 한다. 철강의 영업이익률이 수출가격의 8% 안팎이니 유럽연합 수출은 불가능해진다.
유럽연합이 하면 미국도, 중국도 한다. 이렇게 탄소국경세를 필두로 무역에 온실가스 기준이 적용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그 결과는 미, 중, 유럽연합이 주도하는 새로운 무역질서이고 세계화 질서다. 여기에 제대로 대응을 못 하면 한 순간에 2류, 3류 국가로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기후위기는 경제와 안보문제다.
그러면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들은 탄소국경세를 잘 준비하고 있을까? 모니터를 해보면 유감스럽게도 거의 준비가 안 돼 있다.
▲ 유럽연합이 탄소국경세를 적용하면 철강수출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지난 4월 21일 당선인 신분으로 포스코 광양제철소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 ⓒ 유성호
둘째, 기업들의 기후위기 대응에 대한 공개가 의무화된다. 지난 3월 21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미국 증권시장에 상장된 기업들이 처한 기후위험을 보고하고 공시하도록 결정했다. 미국 증시에 상장한 기업들은 이제 투자를 받기 위해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기업과 주요 은행들은 미국에서 증권을 이미 거래하고 있으니 기후위기 평가를 공시해야 한다. 그런데 기업들을 모니터링해 보면 우리나라 기업들은 탄소국경세만이 아니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결정한 기후 공시에 대응할 전략이 없어 보인다.
셋째, 재생에너지 100%(RE100)다. 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전기에너지 100%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자는 국제 기업들의 자발적 캠페인이다. 그러나 현실은 자발적이지 않다. 구글, 애플, BMW 등 글로벌 기업들은 거래하는 기업들에게 RE100 충족을 요구하고 있다.
영국의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가 발표한 <국제전력 리뷰 2022>는 우리나라 재생에너지가 전체 전력의 4.7%라고 했다. 지난 2월 '에너지 신산업 활성화를 위한 컨퍼런스'에서 LS일렉트릭 이학성 고문은 우리나라 RE100이 적용되는 기업들의 사용 전력량이 전체 전력의 37%라고 발표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 전부를 이들 기업이 사용한다고 해도 재생에너지 비율을 4.7%에서 37%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셈이다.
과연 달성할 수 있을까? 달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이 고문은 우리 기업들의 해외 이전 가능성을 제기했다. RE100 해당 기업들이 해외로 이전하면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이 기업들과 노동자, 가족으로 지탱해온 지역경제는 어떻게 될까? 이런 것을 보면 기후행동의 성패는 사람들이 살고 죽는 문제다.
새 정부에 돌파구 안 보여
국민의힘 기후공약은 유럽발 탄소국경세에 대해 선제적이고 현실적인 탄소저감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떨까? 지난 4월 6일 <서울경제>는 대통령직인수위가 문 정부의 풍력, 태양광 정책을 대대적으로 재검토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유는 농민과 어민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라 했다.
실제로 농촌 태양광사업은 농민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있다. 2030년까지 12기가와트 규모의 해상풍력발전단지를 만들겠다는 문 정부의 계획도 지난해 11월 해양수산부의 반대로 제동이 걸렸다. 이를 이번 인수위가 확인해준 꼴이다.
▲ 우리나라는 재생에너지가 전체 전력의 4.7%에 불과하다. RE100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7%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 게티이미지뱅크
윤 정부는 대안으로 원전을 생각했을 것이다. 원전은 재생에너지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RE100과 하등 상관이 없다. 탄소국경세와 RE100을 생각해보면 윤 정부는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다. 탈탄소 전쟁에 임하는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명백해진다.
지난해 12월에 출범한 독일의 새 정부는 4월 7일 부활절계획(Easter Package)을 통해 2030년에 전기에너지의 80%를 재생에너지로 조달하고, 2035년에는 100% 달성하겠다는 대담한 정책을 발표한다.
일본은 2030년 재생에너지 36~38%를 목표로 한다. 일본의 재생에너지 설치비는 국제시세보다 2배 이상 비싸다. 그럼에도 강행하는 이유는 자국의 제조업에 RE100을 충족시켜서 해외이전을 막겠다는 것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발행하는 <세계 에너지시장 인사이트>는 중국의 2021년 재생에너지 설비 규모가 석탄화력 규모를 넘어섰다고 밝히고 있다. <국제전력 리뷰 2022>는 몽골, 베트남 등 개도국들도 재생에너지 10%를 넘겼다고 밝힌다. 그러고 보니 지구촌에서 우리나라만 탄소시대를 사는 갈라파고스 섬이 되어 있다.
4월 25일 <더벨>은 삼성전자가 RE100 참여 의사를 인수위에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현대자동차, 카카오도 RE100 가입을 선언했다. 우리나라 RE100 대상 기업들은 이제 RE100에 줄을 서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실정은 RE100은커녕 RE5도 안 된다.
윤 정부가 공약한 선제적이고 현실적인 탄소저감 정책은 어디에 있을까? 원전확대로 부각되는 우리나라 새 정부에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시민이 주도해서 길을 열자
이대로 가면 우리나라는 세계경제포럼이 경계한 기후행동 실패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동안 공짜 탄소로 산업을 부흥시킨 대한민국호, 머뭇대다 제조업들이 떠날 수도 있다.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할까?
시민이 주도하는 거버넌스를 제안하고 싶다. 기존 문 정부가 추진해온 그린뉴딜은 농민, 어민, 시민, 학부모들이 반대해서 진척이 없었다. 그린뉴딜의 중심에 대기업이 있고, 시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법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농민, 어민, 시민이 주도하는 그린뉴딜을 열면 되지 않겠는가?
독일과 덴마크, 영국, 미국 뉴욕주 등이 재생에너지 선진국이 된 것은 시민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클린에너지와이어(CLEW)가 2018년 발간한 보고서 〈에너지전환과 시민참여〉는 독일의 재생에너지 시설용량 100기가와트 중 42%를 시민들과 농민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800만 명의 시민들이 재생에너지 투자자가 되어 심층적으로 공부하고 토론한다고 한다. 독일 그린뉴딜을 시민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덴마크 재생에너지의 60%는 시민이 투자한 발전소다. 네덜란드나 영국도 비슷하다.
2019년 뉴욕주는 그린뉴딜 예산의 40%를 시민공동체에 할당하는 '기후리더십과 공동체보호법'을 만들었다. 2022년 현재 뉴욕주 인구의 절반이 넘는 950만 명이 그린뉴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시민들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만든 전기를 사용하거나 기업에게 팔 수도 있다.
시민의 지지가 없는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시민이 주도하는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 탈탄소 대응에 실패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당사자는 시민이다. 시민이 문제해결의 당사자가 될 때 기후 리더십은 작동한다. 주민들에게 묻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라. 시민 누구나 재생에너지를 스스로 만들고 처분할 수 있는 정책으로 길을 열어야 한다. 그러면 RE100은 못해도 RE30은 만들 수 있다. 정부와 정치는 시민들을 잘 지원하면 된다. 누구나 에너지,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의 출발이다.
윤석열 정부는 선제적·현실적인 탄소저감을 정말 원하는가? 그러려면 시민과 공동체가 주도하는 거버넌스를 설계하고 실행하자. 탈탄소의 쓰나미가 몰려오는데 우리나라가 살기 위해 그 이외에 무슨 길이 있겠는가?
▲ 오기출 / 푸른아시아 상임이사 ·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오기출
*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오기출 푸른아시아 상임이사 겸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은 경제학을 전공하고 1997년부터 기후위기 현장에서 기후난민들의 자립을 지원해온 기후운동가입니다. 국제기후종교시민네트워크(ICE)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고 유엔사막화방지협약 CSO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관심영역은 △무역에 온실가스가 포함되면서 구성되는 세계질서 변화 △기후위기와 인권, 식량, 전쟁, 테러의 상호 관계 △기후위기로 땅, 공동체가 붕괴된 마을 공동체의 자립과 생태복원입니다. 주요 저서로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면 천 개의 복이 온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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