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을 겪으며 맞이한 올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도 하릴없이 저물어간다.

대지진의 혼란속에 국가(일본 정부)가 개입해 자행한 전대미문의 조선인 집단학살(genocide, 제노사이드), 그 진상을 밝히려는 추도의 정은 더해가지만 진실을 덮으려는 탐욕과 위선의 힘은 100년이 지나도록 위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가리려 할수록 불가항력의 힘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오충공(呉充功, 68세) 감독의 발걸음은 분주하고 마음도 바쁘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인 올해가 끝나기 전에 새로 개봉할 영화를 마무리하고 유족회가 바로 서도록 하기 위해 그는 지금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다.

지난 9월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 재일 동포 출신 오충공 감독이 1923년 간토대지진 제노사이드, 재일동포가 겪어온 차별과 극복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지난 9월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 재일 동포 출신 오충공 감독이 1923년 간토대지진 제노사이드, 재일동포가 겪어온 차별과 극복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98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최초의 영상작품인 「숨겨진 손톱자국」을 감독한 28살의 청년은 환갑을 훌쩍 넘어 일흔을 앞둔 지금까지 40년 인생을 한결같이 그 진실을 밝히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그의 불가항력은 무엇일까?

지난 16일 저녁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오충공 감독은 깊은 존경심을 담아 '두번째 아버지'라고 부르는 재일 역사학자 고 강덕상 선생님을 이야기했다.

재작년 6월 12일 강덕상 선생이 별세할 때까지 끝까지 병상을 지킨 그는 "돌아가시기 2년 전인가, 선생님의 기대에 보답을 많이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처 알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 영화해설을 써주신 것도 그때 알았다"고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올해를 넘기지 않고 개봉하려고 하는 영화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부정」(가제)을 새로 시작했다. 이번 방한도 마산과 함양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다.

「숨겨진 손톱자국」을 감독하면서 한계에 부딪혔을 때 만난 강덕상 선생의 가르침과 '엄격한 진심'을 그렇게 평생 가슴에 새겼다. 그런 그에게 강 선생은 한번씩 "내가 너한테 반했다"며 잊지못할 깊은 정을 주었다.

또 하나의 잊지못할 인연은 1923년 9월 1일부터 조선인학살이 자행됐다는 결정적 증언을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해 준 조인승 할아버지(경남 거창 출신, 당시 82세)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인승씨가 가해자인 일본인과 대면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화를 내야 마땅한 피해자는 많이 울고 이를 지켜 보던 가해 일본인이 덤덤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고, 많은 생각을 하게됐다.

그의 마음속에 각인된 '강덕상'과 '조인승'은 일제의 만행과 억울하게 학살당한 재일 조선인을 잊지 않도록 하는 선명한 좌표이고 그 모든 것의 구체적인 표상인 듯 하다.

강 선생은 그에게 "나는 재일 조선인 역사학자로서 책을 많이 썼다. 하지만 책 5권, 10권을 쓴 것 보다 네가 만든 영화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이 있다. 너는 계속 간토대지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영광스러운 말씀인데 너무 어깨가 무겁다, 무슨 유명한 영화사도 아니고, 귀도 잘 안들리는데다가 능력도 부족하다"라고 대꾸라도 할라치면 "내가 네 결혼식 주례까지 했는데, 너는 그동안 영화를 안만들었다"고 질책하던 엄한 스승이었다.

그렇더라도 하나의 주제를 붙들고 40년을 살아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그를 이토록 '아주 드문 사람'으로 만든 건 사랑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또 그들의 아버지·어머니가 살아 온 세월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을까? 뼛속깊이 사무친 차별을 넘어 스스로 존엄을 지키기 위한, 온 힘을 다해 살아온, 말로는 다하지 못할 엄숙하고 준엄한, 자신도 일부가 되어버린 그런 세월.

그의 평온한 모습이 그걸 말해주는 듯 하다. 나이가 무색하게 순진무구한 표정이 있고, 자신이 겪은 차별의 파편이 제 몸에 박히지 않도록 경계해 온 듯 갖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경지가 있다. 40년을 지켜온 집념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대로 녹아있어 희노애락이 말속에 자연스레 묻어있다.

10월 16일 자리를 함께 한 서승 선생(맨 오른쪽)이 오충공 감독(가운데)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한 여러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조천현] 
10월 16일 자리를 함께 한 서승 선생(맨 오른쪽)이 오충공 감독(가운데)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한 여러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조천현] 

오 감독과 자리를 함께 한 서승 우석대 교수는 "다큐멘터리를 하면서 계속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해 온 사람이 많지 않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아주 드물다. 간토 사건을 이렇게 장기적으로 하는 사람은 재일동포 가운데서도 매우 귀중하다"고 말했다. "특히 역사관을 갖고 기본 주제를 붙들면서도 재일동포들의 밑바닥 투쟁과 연관시켜서 작업하는 시각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이제 사람들은 서서히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관동)지역을 강타한 대지진 당시 2주 남짓한 기간에 일본 당국의 직간접적인 개입아래 최소 6천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스스로의 잘못을 직시하지 않는 일본 당국의 용렬함, 진실 규명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국 정부의 무력한 태도가 오랜 세월을 짓눌러 왔다.  

한 세기가 되도록 미궁에 빠져있던 그 날의 진실이 이나마 세상에 알려진데는 오충공 감독의 공이 크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전남 담양 출신인 아버지 오상수와 보성 출신의 어머니 강정애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로 올해 68세이다.

어느 누구도 그 학살의 현장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학살의 현장이 모두에게서 잊혀져 가는 듯 보일 때, 27살의 영화학도 오충공은 카메라를 들고 그 현장에 뛰어들었다. 1982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이 자행된지 60년이 다 되가는 해였다.

처음 시작은 대학 중퇴 후 뒤늦게 들어간 영화학교의 졸업작품으로 출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러 차례 편집을 바꾸어 봐도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1년 반의 추가 촬영을 하면서 생존 피해자인 조인승 할아버지와 강덕상 히토츠바시대학교 교수(2021년 작고)를 만났고, 그들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가며 1983년 「숨겨진 손톱자국」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작품을 공개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이나 영상자료 한 점 없던 당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첫 다큐멘터리이고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현장을 들여다 본 것이 그에겐 숙명이었을까.  「숨겨진 손톱자국」(1983)을 시작으로 「불하된 조선인」(1986), 「93년의 침묵」(2016) 까지 그의 카메라는 40년을 한결같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찍고 있다.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조상의 묘가 일본에 있다는 것, 명부가 남아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유족들이 고국 땅에 많이 있다는 걸 알게됐다. 자연스레 한국을 오가며 유족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2017년에는 부산에서 처음으로 유족회도 만들었다.

100주기인 올해를 넘기기 전에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네번째 다큐멘터리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부정」(가제)를 개봉할 예정이다.

오 감독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에서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을 포함한 자경단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제노사이드이며, 최근에는 양심적인 일본인 역사학자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하면서 "아무리 식민지 종주국이라고 하더라도 미증유의 지진 상황에서 이민족인 조선인을 남녀노소 구별없이 무참하게 살해한 역사를 없었던 일로 은폐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또 지난 100년동안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추도비앞에 화환 한번 보내지 않은 한국 정부를 향해서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를 위한 조사 한마디 없고 유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일본정부와 공범이 되는 것"이라며,  "그래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신도 없이 만들어 놓은 헛묘앞에서 매년 음력 7월 20일, 21일(간토대지진 당시 9월 1, 2일의 음력 날짜)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숱한 조선인 희생자 유족의 백년 한을 하루 빨리 풀어주어야 한다는 호소는 간절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만든 영화 3편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한편,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행한 역사가 두번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굳은 다짐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어떤 의미인지, 다큐멘터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묻고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달 16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토크콘서트에 참가한 오 감독을 만나 나눈 대화를 시작으로 추석 명절 기간에 전자메일을 주고받으며 진행됐다. 서면으로는 부족하여 10월 16일 다시 한국을 방문한 그를 서울 인사동에서 직접 만나 보충했다.

인터뷰 내용 중 오충공 감독이 '관동대지진'이라고 한 표현은 '외래외표기법'에서 정한 '현지에서 쓰는 언어표기 원칙'에 따라 '간토대지진'으로 모두 바꾸었다. 

다음은 문답 전문. 

오충공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오충공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오 감독님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다룬 최초의 영상제작물 「감춰진 손톱자국」을 만들어 당대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건 발생 60년이 지난 시기였는데, 누구도 나서지 않았던 주제를 다루려면 남다른 결심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 오충공 감독 : 간토지진 조선인대학살은 조선근대사에 기록되어야 할 제노사이드, 민족최대의 비극이며, 일본이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일반 민중을 포함한 자경단을 동원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집단 살육한 국제법상 인권범죄입니다. 

저는 조선인 6,661명 이상이 학살당한 이 중대한 역사를 고등학생때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다뤄야 하겠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9살 무렵 생겼던 '조선인'이라는 자각이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네요. 


□ 재일 조선인이라는 자각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씀인데,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들려주시겠습니까?  

■ 저는 재일 조선인 2세로 도쿄의 '밑동네'(아랫동네)인 가츠시카구 다테이시에서 나서 자랐습니다. 전남 담양출신인 아버지 오상수는 중학교 중퇴 후 보성으로 내려가 삼촌이 운영하던 사진관에서 사진기술을 배운 뒤 일본의 벳푸 온천에 있던 사진관에 견습생으로 들어가서 일했습니다. 갖은 차별을 받으면서 일했다고 들었습니다. 다정하고 자애로운 어머니 강정애는 전남 보성출신인데, 그곳에서 아버지와 결혼해 생활하다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은 남편을 뒤따라 일본으로 들어왔죠. 1955년에 외아들인 저를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아홉 형제의 큰아들, 종손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이국땅에서도 어머니와 함께 '고품팔이'(고물장사)와 비닐 재생작업을 하면서 고향에 있는 늙은 부모의 생활을 지원하고 동생들의 학비를 보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지만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에 며칠간 원인불명의 고열을 앓고 난 후 귀가 잘 안들리는 난청이 생겼습니다. 부모님은 외아들인 저의 청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병원이란 병원은 다 돌아다니며 애를 썼지만 딱히 이렇다할 치료법도 없어서 그저 세월을 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난청 장애가 있는 제가 착하면서도 차별과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한 인간이 되길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항상 신념과 의지를 가져야한다고 엄하게  키워주신 분이 어머니였습니다.

처음엔 장애인학교가 아니라 집 근처 일본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칠판에서 제일 가까운 앞자리에서 앉아서 선생님의 입 모양을 살피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때는 제가 조선인이라는 자각도 없이 다녔죠.

소학교 3학년때인데, 동급생들이 하교하는 저를 집앞까지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조센진! 조센진, 김치냄새 난다!"라고 계속 소리를 지르는 거에요. 9살이던 그때 일본인 동급생들로부터 들었던 '조센진'이라는 소리 덕분에 처음으로 내가 조선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번은 학교 작문시간에 '왜 조선사람은 부끄러운 인간인가'라고 쓴 적이 있어요. 제가 쓴 작문을 본 소학교 선생님이 어머니와 상의한 뒤 조선학교에서 열리는 문화제에 데리고 가보자고 해서 간 적이 있는데, 처음 듣는 장단소리에 아름다운 치마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는 조선 여학생들의 민족무용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몸안의 피가 뜨겁게 역류하는 걸 느꼈습니다. ''나에게도 자랑스러운 민족과 나라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첫 체험이었던 같애요. 별 망설임없이 소학교 4학년때 조선학교로 전학하게 됐죠.

소학교, 중고등학교를 조선학교에서 보내는 동안 축구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난청때문에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를 잘 알아들지 못하잖아요. 결국 문지기 전문으로 기량을 닦았어요. 그때 민족교육을 받으면서 배운 조선말과 글로 조국의 역사를 배웠고 식민지시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활동한 김달수, 김석범, 이은직, 허남기, 김시종을 비롯한 카프(KAPF) 작가들의 작품도 읽었습니다. 조선인의 문화정서와 민족 정체성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고, 독학으로 시 습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는 도쿄 조선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학교측과 교섭하면서 신문부를 창설해 학생신문을 발간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조선대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학교에는 난청 장애가 있는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설비도 없고 강의를 메모해 주는 보조자도 찾을 수가 없어서 갈등 끝에 중퇴하게 되었죠.


□ 「감춰진 손톱자국」은 조선대학교 중퇴후 출판사에서 일하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요코하마 방송영화전문학원'(현 일본영화대학) 다큐멘터리학과에 입학한 뒤 찍은 졸업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영화전문학원 입학전에 간토 조선인학살 문제를 다루야 한다는 결심을 하신 건가요.

■ 조선대학교를 중퇴한 뒤 25살에 영화전문학교에 입학하긴 했는데, 그때만해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8살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도 있어서 고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가 되려고 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을 2년 앞두고 새로 만들어진 다큐세미나에 흥미가 생겨서 들어갔어요. 그렇지만 다큐멘터리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들어서게 된 것은 영화학교 입학전에 일본인 모리겐치티 감독이 1981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세계의 사람들에게: 조선인 피폭자의 기록(世界の人へ: 朝鮮人被爆者の記録)」에 조감독으로 참여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영화학교 졸업작품의 테마와 소재를 토론하는 세미나에서 한 일본인 학생이 요시무라 아키라 작가가 쓴 「간토지진」을 읽었다고 하면서 '조선인학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없을까'라고 가볍게 말을 꺼냈는데, 누구도 선뜻 답을 하지 않았어요. 졸업작품 제작기간이 짧았고, 무엇보다 당시 기준으로 59년전에 발생한 조선인학살을 문학작품도 아닌 다큐멘터리로 과연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던 거죠.

아라카와 방수로 일대 발굴 현장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아라카와 방수로 일대 발굴 현장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이런 저런 궁리를 하던 중 그해 8월 TV뉴스를 통해 59년전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유해 발굴을 위한  시민단체가 결성되어 도쿄 아라카와 방수로의 하천부지 일대에서 첫 시험 발굴을 한다는 보도를 보게 되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죠. 그곳은 다름 아니라 제가 6년간이나 다닌 조선학교로 가는 등교길이었거든요. 그때까지만해도 졸업작품팀이 만들어지지는 않아서 친한 학생 5명이 비디오카메라를 빌려서 발굴장소로 뛰어갔어요. 

유해 발굴을 제안한 분은 아라카와 방수로가 지나는 아다치구의 소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기누타유키 선생님이었어요. 작은 체구의 그 여선생님은 평소 알고 지내는 노동조합 간부와 상의하고 발굴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한사람 한사람 설득하면서 시민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기누타야키 선생님은 큰 비가 올때마다 발생하는 아라카와강 범람을 막기 위해 1911년 첫삽을 뜬 아라카와 간척공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 대규모 공사에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는데 간토대지진 이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 혹시 학살당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아라카와강 인근에서 군대와 자경단이 저지른 학살 현장을 목격한 노인들은 기누타야키 선생님에게 지금도 학살 희생자들의 '유체'(遺体, 시신)가 매몰된 채 그대로 있지 않겠느냐며, 동네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서 어떡하든 유골을 찾아 위령을 해드려야 한다고 당부했어요    


□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한 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어떤 것이었을까요. 

■ 제가 중학생때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도 잘 알고 있는 어머니의 사촌오빠, 즉 외당숙이 간토대지진 당시 아라카와 근처 무코지마섬에 있는 한 술집의 '오시이레'(押入おしいれ, 일본주택의 붙박이장)에 숨어 있다 살아남은 일화인데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때만해도 학살의 두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아라카와 강 옆에 있는 옛 요츠기다리 제방 아래에서 당시 학살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유체를 석유로 화장한 뒤 매장했다고 증언한 일본 노인의 기억을 중심으로 발굴 장소를 검토했지만 59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하천 부지의 모습은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어요. 결국 정확한 장소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굴을 시작했죠.

아라카와 하천부지에서 한 조선인 희생자 발굴작업은 처음에는 대형 포크레인으로 구멍을 뚫은 다음 청년들이 그 안에 내려가서 손과 삽으로 퍼 내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하루에 구덩이를 하나 파서 살펴보고는 다시 원상회복시킨 뒤 또 다른 구덩이를 파는 식으로 3일간 3개의 구덩이를 번갈아 팠다 덮었다하는데, TV보도를 보고 여기 저기서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어요. 구덩이 주위에 선 노인들은 흥분한 어조로 '군대가 조선인을 묶어서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는 등의 증언을 쏟아내는 등 난리도 아니었죠. 그렇지만 발굴은 3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조사도 하지 못한 채 일단 끝났습니다.

졸업작품으로 내기 위해 시작한 촬영도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제출 마감에 쫓겨 편집에 들어갔습니다. 제작에 참가한 학생들과 작품구성에 대해 의논하면서 여러 번  편집을 바꾸었지만 만족한 작품으로 마무리할 수가 없었죠. 3년의 학업을 끝낸 우리가 졸업을 앞두고 뭔가 결정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에 졸업작품으로 내도 좋은지 고민했습니다. 처음엔 결정적 증거, 조선인 희생자 유골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 간토 조선인학살 이후 60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일본 정부의 조선인학살 부정, 학술 연구 부족은 물론이고 학살 가해자의 증언거부, 가해자와 피해자의 서로 다른 기억 등 시대적 제약과 접근의 한계, 아쉬움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특별히 도움받은 사람,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 「감춰진 손톱자국」을 완성하는데 제일 큰 애로는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발굴 이후 아라카와 지역과 일본 사회에서는 과연 1923년에 조선인학살이 있었던가? 아라카와에서 조선인이 300명 이상 학살당하고 유골이 매장된 것이 사실인가? 등 목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우리가 다시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도 앞서 발굴 현장에서 흥분하며 증언한 일부 노인들은 촬영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일본인 7명과 조선인 3명으로 구성된 제작팀내에 조선인학살에 대한 역사인식의 차이가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감독을 하는 제 자신도 간토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했고 영화제작에 필요한 경험과 기술도 미숙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학살의 가해자도 중요하지만 피해자를 영화에 등장시켜야 하는데, 59년이라는 기나 긴 세월속에 묻힌 증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였어요.

감춰진 발톱 촬영 당시의 오충공 감독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감춰진 발톱 촬영 당시의 오충공 감독 [사진-오충공  감독 제공]

그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 재일 조선인으로부터 1923년 당시 요츠기다리 제방위에서 폭행당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피해자가 생존한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알려준대로 조인승 할아버지(경남 거창 출신, 당시 82세)의 주소를 들고 집으로 달려갔죠.

82세의 고령이었지만 기억이 분명하고 아라카와 발굴 소식을 TV방송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발굴 마지막 날 조인승 할아버지에게 부탁했습니다. '어르신, 발굴 장소에 저와 함께 한번 나갈 수 없을까요?'

할아버지는 발굴현장을 찍는 TV화면을 보면서 '안가겠다. 거기서 뭘하는지...유골이 안나오지 않나'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할아버지는 '그 날을 회상하기 싫다'는 생각이었어요. 본인이 요츠기다리 제방에서 일본 소방대로부터 '도비'(화재현장에서 장애물을 해체할 때 쓰는 막대기에 달린 낫)로 다리를 찔리며 폭행당한 일, 함께 아라카와로 피난 온 조선인 3명이 눈앞에서 잔인하게 학살당한 걸 목격한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기 싫었던 거죠. 그날 할아버지의 사촌형도 어디서 희생되었는지,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희가 영화를 완성하는데 증언이 꼭 필요하다고 간곡히 요청하니까, 마지막 구덩이를 다시 메꾸기 2시간 전에 우리 차로 발굴장소로 이동해 부상당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한걸음 한걸음 구덩이 옆으로 다가서서는 한참동안 말없이 그 안을 쳐다 보셨습니다.

저희는 이미 영화학교를 졸업했지만 조인승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전문 촬영감독을 영입해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재개했습니다. 학생 몇명은 1년 반동안 구직 활동도 포기하고 영화 완성을 위해 한몸처럼 나섰습니다.

할아버지가 살아 온 82년간의 인생을 통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쓰라림과 억울함을 같이 호흡하는 기분으로 배우는 나날이었죠. 제작팀도 하루 하루 작업이 거듭되면서 갈등이 풀리고 민족의 차이를 넘는 우정을 쌓아나가는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아쉬운 점도 있었겠습니다.

■ 사실 40년동안 영화를 못찍었던 시절이 있었죠. 돈 벌어가면서 영화를 만들어야 되잖아요. 제가 2017년 부산에서 유족회를 만들었는데, 왜 그랬냐하면 영화를 찍으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경상도 출신들이 많았어요. 여기 민족문제연구소 같은 곳을 찾아가서 도움도 청하곤 했어요. 여러 말 하기는 어려운데 평화주의자인 나로서는 조선(한국)은 너무 날카로웠어요.

경제적인 문제, 선입견과 이념의 장벽 그런 것도 없지는 않았죠. 영화로만 보면 초기 작품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죠.

198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필름을 썼는데, 이건 한번 걸면 3분밖에 못찍었어요. 두번째 작품(불하된 조선인)에는 조선인 살해에 가담한 일본인 노인이 '죽기전에 마시고 싶은 만큼 술을 사주었다. (조선인이) 원하는대로 총으로 죽이기 위해 들고 있던 칼 대신 돈을 들여서 총을 빌려서는...좋은 일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어...'라는 증언이 나옵니다.

자신의 죄행을 감추고 나는 양심적으로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슬쩍 덮어서 했던 말인데, 죽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기억을 해야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마음은 알지만 그대로 그냥 기록을 하겠다는 마음이 컸죠.

첫번째 영화(감춰진 발톱)에서 조인승 할아버지가 9월 초하루부터 일본의 조선인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확인해주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학살을 보았다'고만 했던 가해자가 '학살에 가담했다'고 고백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1923년 9월 5일 이후에는 조선인을 보호한다고 선전하면서 치바현(千葉縣) 나라시노(習志野)의 수용소에 가두었는데, 전쟁포로로 다룬 조선인들(2만 3,715명-강덕상 『현대사자료 6권』)을 민간 자경단에 '불하'해서 그들이 죽이도록 했어요.

"(조선인들에게) 어떻게 죽고 싶냐고 물었더니, '칼 대신 총으로 한 번에 죽고 싶다'고 했다...총을 구해서 조선인을 줄지어 세워 두고 3명을 한 명씩 총으로 쐈다"는 증언으로 그같은 사실이 확인된거죠.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으니까 중간에 다른 질문을 해서 이걸 놓치면 안되었으니까. 자신이 조선인을 죽였다는 일본인의 증언이 책으로는 있었지만 영상으로는 카메라에 처음 담게 된 것이거든요. 그때 32살이었는데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찍으려고 노력했어요. 

다만, 그렇다면 죽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지, 무슨일을 하다 왔는지, 가정은 있었는지. 보통 사람의 대화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때는 왜 그런 걸 묻지 못했는지 반성하고 있어요. 그때는 아마튜어였어요.

강덕상, "내가 너한테 반했다"

강덕상 선생님과 함께 한 오충공 감독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강덕상 선생님과 함께 한 오충공 감독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강덕상 선생님도 그때 처음 만나신거죠.

■ 네. 또 한 분, 「감춰진 손톱자국」과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기록영화를 제작하면서 잊을 수 없는 저의 은인이자 인생의 스승인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선생님입니다. 강 선생님은 제가 제작과 편집의 방향을 못잡고 헤맬때 저의 어두운 역사탐구에 바른 눈을 열어준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연구의 최고 전문가로, 책으로만 알고 있던 강 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해서 자택으로 찾아간 것이 27살때입니다. 영화에 필요한 학살사진과 자경단의 실체를 보고 싶어하는 저의 조급한 마음을 감지하셨는지 강 선생님은 저에게 '어떤 영화를 만들고싶은가?  지금까지 간토지진에 대해 어떤 책과 자료를 읽고왔는가? 도쿄의 도서관과 공문서관에 가본 적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대학을 중퇴했다는 콤플렉스가 있었고 긴장감과 교양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이 들어서 똑똑한 답을 하지 못하고 선생님 댁에서 나왔습니다. 학살 현장 사진을 하루 빨리 보고 싶었던 제작팀은 '감독이 강 선생님 댁까지 찾아갔다가 사진 한장 보질 못하고 돌아왔다'고 모두 한숨을 쉬었죠.

하지만 선생님이 저에게 가르쳐주신 건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1982년 당시만 해도 일본인 학자와 출판사가 낸 조선인학살 관련 연구서가 많지 않았어요. 더러 있더라도 간토지진의  자연재해 피해나 도쿄 일대에서 자경단이 자행한 일본 사회주의자 학살사건(가메이도사건),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 일가가 육군 헌병대에 살해된 이른바 '아마카스 사건' 등을 조선인 학살과 나란히 다룬 책이 주류였습니다.

선생님은 영화 제작 전에 제가 조선인학살에 대한 정확한 역사인식을 갖고, 자기 발로 도서관과 도쿄도 공문서관, 국립공문서관에 가서 조선인학살에 관한 일본군과 경찰의 문서와 동향, 자경단의 기록을 찾아보도록 하셨던 거죠. 훗날 생각해보아도 선생님의 그 '엄격한 진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생님은 간토대지진 당시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 있었던 목격자와 증인, 즉 가해자와 피해자를 영화에 출연시키고 남아있는 지도와 자료를 함께 사용하면 좋지 않겠는가, 구체적인 내용을 증언 영상과 기록문서를 담아 찍으면 어떤가 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고생끝에 목격자를 찾아도 카메라 앞에서는 '조선인을 죽였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학살 장면을 보았다거나 들었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아라카와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입이 무거웠어요. 반면 세월이 지나 다른 지방으로 이주해 간 노인들중에는 당시 학살 장면을 그림 그리듯이 증언하는 사람도 있어 촬영이 잘됐던 일도 있습니다.

그 노인들이 보시기에 손주뻘인 저희가 노인들이 다니는 목욕탕에 열심히 쫓아다니고 어떤 날엔 노인들이 하는 게이트볼 경기장에 들어와서 함께 운동도 하니까 당신이 목격한 학살장면만은 이야기해주자는 심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저도 20대 젊은이였으니까요. 

영화제작이 어려움에 닥칠때마다 일본인 노인들의 증언과 강덕상 선생님의 연구, 무수히 수집한 자료 덕분에 일본 정부가 학살의 흔적을 숨기고  희생자 조사를 방해하고 심지어는 조선인의 유체와 유해을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던 은폐의 단편을 하나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은 굉장히 컸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도 1923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배는 더 큰 충격을 받았어요.

9월 15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에 출연해 첫 영화 촬영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오충공 감독 [통일뉴스 자료사진]
9월 15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에 출연해 첫 영화 촬영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오충공 감독 [통일뉴스 자료사진]

오충공 감독은 9월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에 출연해 첫 영화 촬영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가해자인 일본인과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인승씨가 대면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화를 내야 마땅한 피해자는 많이 울고 이를 지켜 보던 가해 일본인이 덤덤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고 했다.

유언비어만 믿고 왜 조선사람을 그렇게 죽였느냐고 물으면, 가해자들은 "머릿속에 '삐쩍'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때는 '조선 정벌, 조선인 토벌'이라는 말이 횡행했었다"고 당시의 광기어린 풍경을 기억했다. 결국 국가가 개인을 집단학살의 가해자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 2년전 별세한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선생님은 오 감독님의 영상작업에 평생의 길잡이이자 동지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오랜 세월 교유한 강덕상 선생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제가 처음부터 강덕상 선생님을 만나서 영화를 만든게 아니고 영화를 만들다가 고민이 생겨서 만난 사람이 그 분이었어요. 강선생님은 영화감독도 아니고 역사학자이잖아요.

강 선생이 저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입니다. "나는 재일 조선인 역사학자로서 책을 많이 썼다. 하지만 책 5권, 10권을 쓰는 것 보다 네가 만든 영화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이 있었다. 너는 계속 간토대지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저는 "영광스러운 말씀인데 너무 어깨가 무겁습니다, 무슨 유명한 영화사도 아니고, 귀도 잘 안들리는데다가 능력도 부족합니다"라고 짐짓 딴청을 부리기도 했지요.

2011년 동일본지진때는 집이 무너지는 큰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내가 네 결혼식 주례까지 했는데, 너는 그동안 영화를 안만들었다"는 질책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엄격한 분이었지만 그만큼 저와 제가 하는 영화작업에 기대를 많이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 한마디로 감독님에게 강덕상은 어떤 존재입니까. 영화 만드는데 자문도 하시고 주례까지 해주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만났잖아요.

■ (얼굴을 감싸쥐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갈린 목소리로) 두번째 아버지같은 분이지요.
 
돌아가시기 2년전인가, 선생님의 기대에 보답을 많이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영화를 많이 못만들었다는 자책도 있었고...미처 알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 영화해설을 써주신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이 교수(강덕상 선생의 히토츠바시 대학 제자, 강덕상자료센터 운영위원) 앞에서 말하기 거북한대 강 선생님이 간혹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너한테 반했다"구요.

주제를 가지고 이런 어려운 영화를 만든 젊은이가 있었다고 격려하느라고 하신 말씀이었겠지요. 마음에 안드신 것도 있었겠지만 그저 반했다고 말씀하신 거겠죠. 너무 고마운 말씀이고 영광스러운 마음이에요. 내가 영화를 많이 만들지 못할수록 강 선생님이 마지막 돌아가실 때...

마지막 영화는 강 선생님의 그 말씀때문에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네 편의 간토 영화를 만들면서 왜 다른 영화는 만들지 않는지, 밝은 영화는 왜 만들지 않았느냐고요.

그런데 나한테는 테마가 너무 무거웠어요. 아니 테마가 무거운 것보다도 영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거에요. 알지 않아요. 그런 영상이 남아 있지 않아요. 드라마로 못만들잖아요.

강 선생님은 '논다'고 혼을 내지 '쉰다'고 다정하게 말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렇게 일에 엄격하신 분이 내 앞에서 일본말로 '너한테 반했다'고 그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한동안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꼈다.

□ 분위기를 좀 바꿔서 강선생님이 주례 봐주신 이야기 좀 해 주시죠.

■ 재미난 이야기인데, 제가 건방지게 강덕상 선생님에게 주례를 부탁했습니다. 첫번째 작품과 두번째 작품 사이에 찾아가서 부탁을 드렸죠. 그때 나이가 33살이었습니다. 

마누라는 역사도 모르고 내가 영화감독인지도 몰랐어요. 일본에 온지 5~6년밖에 안되는 아가씨였거든. 나를 그저 밥 먹으로 오는 손님인줄만 알았지. 어머니(장모)는 제주도분이었는데 거기서 무슨 사정이 있어서 곱창집을 하고 있었어요. 첫번째 영화를 만들고 두번째 영화를 준비할 때 제 사무실이 그 곱창전골집  바로 옆 아파트에 있었습니다. 그 집에 당시 여자친구하고 밥먹으로 갔다가 거기서 알게된 거에요. 

강 선생님은 대학 교수님이니까 제자가 많이 있는데, 나는 그 제자도 아니잖아요. 우리 마누라는 제주도에서 건너 와서 엄마 일을 돕고 있던 그저 이쁜 아가씨일 뿐이었고. 23살때였거든. 뽀뽀도 안한 여자를 강 선생님한테 데리고 가는데, 어디 가냐고 자꾸 묻는거에요. 강 선생님은 아가씨가 이쁘다고 생각은 했겠지만 그 많은 제자들 주례도 한번 해보지 않았다고 난처해 하시다가 결국 해주시긴 했어요. 나와의 인연이란 것도 어릴때부터 잘 아는 사이도 아니라 그저 영화를 좀 도와주신 거잖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해주셨어요. 

그런데 주례로서 신랑 신부 소개부터 해야 할 분이 계속 영화해설만 했어요. 하객들을 배려해서 처음으로 한국말로 주례사를 하는데 너무 오래하니까 제주도에서 온 마누라 집안 사람들은 다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그 결혼식에 야마다 쇼지라는 간토대지진 연구자가 내빈으로 참석하셨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도 30분 이상 영화 애기를 하는거야.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집 친척들이 또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그렇게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왼쪽부터 「숨겨진 손톱자국」(1983), 「불하된 조선인」(1986) 포스터, 「93년의 침묵」(2016) 스틸컷 [통일뉴스 자료사진]
왼쪽부터 「숨겨진 손톱자국」(1983), 「불하된 조선인」(1986) 포스터, 「93년의 침묵」(2016) 스틸컷 [통일뉴스 자료사진]

□ 2023년 9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맞이하면서 남다른 감회가 있을텐데, 먼저 일본 정부의 태도,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움직임,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감독님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 고 아베수상이 2016년 무렵에 '아름다운 일본국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일본의 전쟁범죄와 식민지침략에 사죄를 해야한다는 진보세력과  역사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한 적이 있습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부터 올해 100주기 조선인추도제까지 7년간 연속해서 추도사를 보내는 일을 거절했습니다. 고이케 도지사는 도쿄올림픽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미래를 지향하며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선언했지만 막상 자신이 딛고 서있는 땅 위에 서 있는 조선인학살 추도비 앞에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급기야 100년이 지난 지금에와서는 또 다시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고 극구 부정하고 있는데,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식민지종주국인 일본에서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을 포함한 자경단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제노사이드이며, 최근에는 양심적인 일본인 역사학자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식민지 종주국이라고 하더라도 미증유의 지진 상황에서 이민족인 조선인을 남녀노소 구별없이 무참하게 살해한 역사를 없었던 일로 은폐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간토 조선인학살 100주기인 지난 9월 1일 차별주의 단체인 '소요카제'는 도쿄 도립 요코아미초 공원에 세워진 조선인 추도비 앞에서 '진실의 위령제'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인 피해자들은 실제 비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변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등 더욱 교묘하고 악의적인 방식으로 또 다른 학살을 시도했습니다.

학살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조선인의 넋을 기리는 신성한 추도비 앞에서 사자(死者)를 모욕하고 추도제를 더럽히는 '소요카제'의 집회를 도쿄도는 처음부터 허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기동대 경찰과 도쿄도 공원과의 직원들이 소요카제의 가짜 위령제를 보호하듯이 바리게이트로 벽을 만든 그 앞에서 차별과 역사수정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일본인과 재일 조선인, 한국의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단결된 힘으로 조선인 추도비를 지켰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상황입니다.


□ 올해 간토대지진 학살 희생자 추도제에서는 조선인 희생자와 함께 중국인 희생자 문제를 공론화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배경이 궁금하구요. 이에 대한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 것 같습니다.

■ 중국인 유족은 간토대지진 당시 희생자가 약 700명인데, 명단도 다 있습니다. 지금 증손자까지 약 2,000명에서 2,500명이 있어요. 해마다 일본에서 추도제가 있을 때 약 20명 정도가 일본에 옵니다.

그 분들의 요구는 여러가지인데, 첫번째는 당시 중화민국 외교부가 일본 외무성에 희생자 명단을 내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도 인정을 했어요. 명부도 남아있구요. 일본정부는 그때 국제적인 관례에 따라 희생자 1명에 20만엔을 지급한다는 도장을 찍었습니다.지금도 그 계약서가 남아있는데 일본 정부는 지급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중단된 거에요.

그래서 중국 유족들은 일본 정부에 대해서 우선 20만엔을 갚으라, 사죄하라고 요구하는 거에요. 중국인 희생자도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유골이나 묘비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인 희생자는 강덕상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최소 6,600명 이상입니다. 더 많은지 모릅니다. 희생자 명단이 전혀 없는 건 아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재일본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6,661명의 명단도 있습니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자에도 발표가 나왔는데,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거죠.

중국인 희생자들과 비교하긴 어렵지만 한국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일본정부에 법적인 주장을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학살의 증거, 명단이 있어야지요. 유골과 유체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어디에 했는가? 일본 정부에 따져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일본에는 학살 희생자를 기리는 20여군데의 시민단체와 총련, 민단이 만든 모임이 있는데 어디나 할 것 없이 유골이 없습니다. 중국인 유가족과 한국인 유가족이 같이 기자회견하면 서로 형편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은 따로 따로 하고 있어요.

올해 8월 31일에 한국에서 두분만 왔지만 그래도 유족을 대표해서 기자회견을 한 겁니다. 그때 함께 왔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측 변호사가 한국인 유족을 위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한국정부는 올해 100주기까지 진상규명과 추도를 위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한국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 1923년 9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무대신 조소앙 명의로 일본 총리 앞으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해 항의공문을 발송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뒤 100년동안 역대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과 학살 피해자의 구제를 한번도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기나라 국민, 해외공민의 죽음에 애도의 말도 없었고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추도비 앞에 100년동안 화환 한번 보내지 않았습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를 위한 조사 한마디 없고 유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일본정부와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시신도 없이 만들어 놓은 헛묘앞에서 매년 음력 7월 20일, 21일(간토대지진 당시 9월 1, 2일의 음력 날짜)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조선인 희생자 유족의 백년 한을 하루 빨리 풀어주어야 합니다. 


□ 다큐멘터리 제작 외에도 2017년부터 한국내 희생자 유족회를 결성하는데에도 적극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현황과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세편의 간토학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조상의 묘가 일본에 있거나 명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유족들이 고국 땅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한국을 오가며 유족들을 만났습니다. 2017년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유족회를 만들었고 올해 100주기 추도제에는 일본으로 유족들을 모셔가기도 했습니다. 이번 방문(10.16)도 마산과 함양의 유족회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유족회가 나서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희생자 명부와 유골을 비롯한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조선인 학살 희생자들은 세상에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선사람'으로서 '살아있던'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아파하고 이같은 학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100주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만든 영화가 희생자의 넋을기리고 두번 다시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사이에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굳은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서승 선생은 "오 감독이 지금 하고 있는 유족 모임 구성을 혼자서 하는 것 보니까 참 벅찬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유족모임과 함께 그들을 지원하는 한국 시민사회운동이 제대로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간토 조선인학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른 사안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 이후 일본인의 잠재의식속에 가려져있던 조선인에 대한 열등감이 분출한 사건'이라는 제대로 된 조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일본에서 구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추도회 실행위원회에 참가하면서 오 감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서승 선생은 오 감독의 작품에 대해서도 "일본 술집에서 아버지의 아버지 같은 사람을 붙잡고 집요하게 딱 작품을 만들었잖아. 그거 대단한 거에요. 그런 작품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라고 그를 격려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