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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5.16 쿠데타를 기획했나

5.16 쿠데타와 미국 ①

5.16 쿠데타는 한국 민주주의뿐 아니라 냉전 시대의 국제 정치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1953년부터 1961년까지 CIA 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가 1964년 5월 BBC와 인터뷰하면서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의 사례로 5.16을 꼽았을 정도로 미국은 5.16 쿠데타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 구체적 공작 과정은 지금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미국 정부의 외교문서집 등은 5.16 군사쿠데타를 앞두고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을 여전히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961년 4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의 외교문서에 대한 비밀은 지금도 해제되지 않은 상태다.

본 글에서는 미국이 5.16 구테타를 기획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정치적 이유와 미국의 개입 공작 과정 그리고 5.16 쿠데타가 현시점에 주는 교훈을 정리한다.

4.19 혁명 이후 분출하는 통일 열기와 반미자주 운동

장면 정부는 4.19 혁명 이후 등장했으나 집권 기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면 정부가 보이는 불안정한 모습은 안정적인 정부를 통해 소련과 공산주의를 봉쇄하기를 원하는 미국의 정책에 부합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은 장면 정부가 4.19 혁명 이후 분출하는 통일 열기와 반미감정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4.19 혁명 이후 통일운동은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만들어지고, 전국의 많은 대학교와 고등학교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어 중립화통일을 주장하거나 남북교류를 촉구하는 등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조직적 반미운동이었다.

이와 더불어 반미 감정도 확산하고 있었다. 19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은 한미 관계의 경제적 종속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진보적 정당과 사회단체 그리고 대학생들은 이 협정이 한국의 경제적 예속을 제도화하며 미국이 한국 내정에 간섭하는 통로를 열어주는 불평등조약이라면서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이 협정의 철회와 비준 거부를 요구했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 최초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이었다.

장면 정부에게서 불안감을 느낀 미국

미국은 한국 상황을 대단히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CIA는 장면 정부의 정치 갈등과 경제적 문제가 미국의 안보 이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안정화를 위한 조치”를 권고한다. 미 국무부 역시 한국에서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정치적 안정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특히 미 국무부는 “한국의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가 한국 사회를 장악할 수 있다”고까지 우려했으며, “한국의 불안정성 해소는 소련 봉쇄를 목표로 하는 미국 전략의 일부”라고까지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이 느낀 불안감의 실체는 4.19 혁명 이후 고양되는 통일과 반미자주의 기운이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는 장면정부의 ‘무능력’을 목도한 미국은 군부라는 새로운 세력을 한국 정치에 등장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30년 넘게 진행된 군부독재 시대는 4.19 혁명 이후 분출하는 자주통일 열망에 대한 미국의 위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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