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5.18과 미국, 꼭 기억해야 할 세 가지 문제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4/05/19 08:48
  • 수정일
    2024/05/19 08:4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5.18 당시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와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을 증인으로 채택했으나 이들은 출석을 거부했다. 대신 미국은 “1980년 5월 광주 사건에 대한 미합중국 정부 성명”이라는 서면 답변을 보내왔다.

 

서면 답변에 따르면 미국은 “10.26 박정희 암살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12.12 사건에 대해 사전 통보받지 않았고, 5.18 당시 광주에서 어떤 폭력 상황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12.12도 미국이 지원했고, 5.18 진압도 미국이 승인했다는 <소문>은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언론에 조작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많은 진실이 밝혀졌다. 5.18 당시 미국이 모든 전개 과정을 알고 있었으며, 미 백악관에서까지 대책 회의를 진행했으며, 전두환 세력으로 하여금 군부를 앞세워 광주 민주화운동을 진압하라는 ‘승인’이 내려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미국 관련 세 가지 문제가 있다.

 

미국은 한국군의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울 시각으로 12월 12일 초저녁, 전두환 보안사령부 및 일단의 한국군 장교들이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서울 남부 중심지(용산)에서 몇 발의 총성이 들렸으나 사망자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음.”

 

1979년 12월 12일 당일 미 국무부가 백악관, 주한미대사관, 주한미군, 미 국방부 등을 수신처로 보낸 ‘한국에서 군부의 실력행사 발생’이라는 문서의 일부이다. 또한 미국은 한국군 일각에서 전두환 파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한국공군 및 해군의 일부 고위 멤버들이 1979년 12월 13일 육군의 권력장악 사건을 주도한 전두환 소장이 사임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권력이 억제되지 않으면 그와 그의 파벌에 대한 대응을 고려하고 있다 함. 이들은 전두환이 계속해서 최규하 정부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다면 해병대를 동원하여 그 파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수립 중이라고 말했다 함.”

 

1980년 1월 9일 미 국방정보국 정보요원이 작성한 ‘첩보’ 문건에 담긴 내용이다. 그런 미국이 전두환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음은 상식에 해당한다. 다음은 1980년 3월 12일 주한미대사관에서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일부이다.

 

“지배 구조 내에서 특히 우려되는 현상은 전두환이 가지고 있는 권력임. 그는 정부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고 있음.”

 

12.12로 군부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이 기다리는 ‘때’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2차 쿠데타를 의미한다. 이미 미국은 3월부터 전두환이 2차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문제의 5월, 전두환이 군사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5월 7일 주한미대사관에서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이다.

 

“위 2개 여단(제13공수여단, 제11공수여단)의 총병력은 약 2,500명이며, 학생 시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하고 있음. 또한 미군은 포항 주둔 해병대 제1사단이 대전과 부산 지역에 필요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음. 해병대 제1사단은 연합사 작전통제 병력이며 이동을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이 필요함. 아직 이러한 요청은 없으나 유엔군사령관은 요청이 있을 경우 승인할 계획임.”

 

그리고 잘 알려진 5월 22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미국 정부의 주요 결정자들이 모여 “최소한의 무력으로 광주 질서 회복”을 결정한다.

▲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상황실, ‘한국관련 정책검토위원회’ 회의록

미국은 광주 시민을 폭도로 보았다

 

미 국방정보국은 5월 22일 광주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20여명의 젊은이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자신들을 돕지 않으면 폭력을 가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함. 폭도들은 모두 칼이나 쇠파이프로 무장하였고, 아주 흥분한 상태였음. 화순탄광에서 탈취한 TNT와 수류탄이 송정 고속도로 다리를 파괴하기 위해 광주로 옮겨지고 있음.”

 

5월 23일 보고에서도 “현재 상황은 여수 순천 반란사건과 유사함.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강경하게 현재 상황을 진압해야 함”이라고 적었다.

 

미국이 광주 시민을 폭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미국은 광주 시민을 폭도로 만들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자주 보여왔던 패턴이다. 제주 도민의 3.10 총파업을 빨갱이의 소행으로 몰았던 것처럼,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야 군부에 의한 강경 진압에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미국무부에서 작성한 5월 25일자 한국 상황보고는 “광주에서 인민재판부가 설치되어 몇몇 처형이 있었으며, 학생 시위는 혁명 정부 설치를 주장하는 미상 무장 과격세력에 의해 전반적으로 대체되었음”이라고 적었다.

 

다음은 6월 6일 보고.

 

“1개 대대 규모의 무장 반란군이 광주 인근 산악지대로 도주했고, 전라남도 지역에서 약 2,000명이 무기를 확보하고 무인지대로 들어갔고, 2,000명이 전두환 군부세력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일 것이고,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학생 시위대는 어느 순간부터 폭도로 묘사되기 시작했고, 폭도는 어느 순간 게릴라 무장 세력으로 묘사되었고, 또 어느 순간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항상 미국과 독재 세력에 의해 폭도, 무장 세력,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매도되었다.

 

5.18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인권 대통령’ 지미 카터였다

 

1979년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박정희 면전에서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재소자들을 가능한 많이 석방”할 것을 요구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지미 카터는 ‘인권 대통령’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 1979년 6월 지미 카터가 박정희에게 긴급조치 9호 철회와 양심수 석방을 요구한 대화록.

퇴임 후에도 빈곤층 지원 활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 국제 분쟁 중재 등의 활동을 해왔으며, 1994년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문제 해결을 위한 극적 타결을 이뤄낸 인물이기도 하다.

 

백악관 상황실에서 광주 시민에 대해 무력 진압을 ‘승인’하는 정책 결정이 내려졌던 1980년 5월 22일, 당시 미국 대통령 역시 지미 카터였다.

 

당시 재선을 노리고 있던 카터는 이란에서 발생한 미 대사관 인질 사건, 뒤이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건이 발생하면서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한국의 정치적 혼란은 카터가 직면한 정치적 위기를 더욱 부채질할 가능성이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서의 ‘정치 안정화’를 추구했다. ‘정치 안정화’는 곧 광주에서의 조속한 ‘질서 회복’이었다.

 

지미 카터 미국 정부는 ‘광주 질서 회복’을 통한 ‘정치 안정화’를 위해 전두환에게 군부대 동원을 ‘승인’했다. 그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리는 회의 시간은 75분. 1980년 5월 광주 시민의 운명은 백악관에서 단 75분 만에 결정된 것이다.

 

당시 한국 상황을 관리하던 비상대책팀의 이름은 “체로키”였다. 건국 시절 자신들이 학살했던 인디언 부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한국의 인권을 위해 박정희와 설전을 벌였던 ‘인권 대통령’ 지미 카터는 11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광주 학살의 칼자루를 전두환 군부에게 쥐어주었다.

 

지미 카터가 추구한 ‘인권 외교’가 얼마나 진정성 있는 것이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의 어느 대통령도 우리 국민의 인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희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16 쿠데타가 ‘정치적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이 기획한 것이라면, 그와 정확하게 똑같이 전두환의 5.18 광주 학살은 ‘정치적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에 의해 ‘승인’된 것이었다.

 

장창준 객원기자92jcj@hanmail.ne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