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늦게 무공훈장을 신청한 이유가 있나.
"내가 살고 있는 창원마산 지역은 보수적인 지역이다. 시민운동을 하면서 나를 '빨갱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훈장 수여 기록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기록이 나와서 보훈지청에 가서 훈장을 달라고 신청을 했는데, 이미 '훈장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고, '필요하면 훈장 만드는데 가서 몇만 원 주면 다시 제작해서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하더라. 하여튼 이때부터 나를 빨갱이라고 욕하던 사람들은 거의 없어졌다."
- 지난 주말 '6월항쟁 37주년 걷기대회'에 참가해서 채 상병 특검법 통과를 주장했다.
"나는 한동안 해병대전우회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베트남전에서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해병대를 사랑한다. 내가 해병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돌이켜보면 베트남전에서 내 지휘관은 약속을 지켰다. 나를 헬리콥터에 실어 미 해군병원에 보내줘서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해병대는 절대로 전우의 시신을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 동료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베트콩의 매복에 걸려 더 많은 해병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해병대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채 해병 사건에서는 어떠했나. 최고 지휘관인 사단장은 수색작업이 불가능하다는 보고가 있었는데도, 장병들의 안전과 생명을 고려치 않고 최소한의 안전 장비도 없이 무리한 수색을 지시했다. 그 결과 채 해병이 급류에 휩쓸려 숨진 것이다. 사고가 나니 모든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겨 버리고, 거짓말을 하고 이런 건 정말 군대, 특히 해병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것은 '내가 쓰러져도 지휘관은 끝까지 나를 살리려는 노력을 다 할 것이다' '혹여 목숨을 잃더라도 내 시신은 고향땅으로 가서 묻힐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이런 믿음이 모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기 위해선 명명백백하게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 그게 바로 특검이 필요한 이유다."
- 사건 자체도 문제지만, 대통령이 수사과정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물증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대통령이 격노해서 이렇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솔직한 말로 군대도 안 갔다 온 대통령이 어떻게 함부로 사건에 개입할 수 있는가 생각한다. 국가안보를 제일 먼저 지켜야 할 사람이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아닌가.
그런데 중간에 개입을 해서 '사단장은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빼라고 한다면 국군통수권자로서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주말 <오마이뉴스>에 '대한민국 안보를 제대로 지키려고 하면 먼저 윤 대통령이 안 보여야 한다. 이게 안보다'라고 인터뷰했다(관련 기사 보기)."
- 21대 국회에서는 끝내 채 상병 특검법안이 폐기됐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 보시는가.
"내가 해병대에서 배운 정신 중에 하나는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라'는 것이다. 계속 추진해야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요즘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해병대 예비역연대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쪽 눈은 이미 실명 상태고, 나머지 눈도 사물이 어렴풋하게만 보인다. 혼자서 서울까지 올라가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보수적이어서 이런 목소리를 내기도 쉽지 않은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무엇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다 할 것이다."
[짜빈동 전투는]
짜빈동 전투는 베트남전에 파병된 해병대 2여단(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1967년 2월 14일~15일 베트남 쾅나이성 손틴군 짜빈동 인근의 고지에서 북베트남 정규군 및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인 끝에 승리한 전투다.
11중대 진지는 남북 300m, 동서 200m 남짓의 나지막한 야산에 타원형으로 구축된 사주방어 진지였다. 북베트남군이 이곳을 기습한 것은 추라이 지역에 있던 청룡부대 포병대와 미 해병대 비행장을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그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던 11중대 진지를 먼저 함락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북베트남 정규군 제2사단 제1연대와 21연대 및 지방 게릴라 1개대대가 14일 심야에 기습공격을 가해왔지만, 해병대원들은 전술기지에 구축한 교통호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쳤다.
한때 진지 일부가 돌파되어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해병대는 진내사격까지 고려해야 할 위급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만, 결사의 각오로 싸웠고 기적처럼 승리했다. 날이 밝자 북베트남군은 전사자 243명, 2명의 포로를 남겨놓고 퇴각했다. 해병대는 전사 15명, 부상 33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제11중대는 이 전투로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했고‚ 장교를 제외한 중대원 전원이 일계급 특진했다.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이듬해인 1968년 11중대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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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영만, #짜빈동전투, #해병대예비역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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