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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김형남의 갑을,병정] 계엄 의혹 마주한 판박이들, 2016년 새누리당과 2024년 국민의힘

24.09.23 07:05최종 업데이트 24.09.23 07:05

▲ 2018년 7월 26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 서울동부지검에서 열린 '계엄령 문건 의혹 합동수사단' 현판식에서 참석자들이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2018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계엄령 문건 관련 의혹 군·검 합동수사단'이 꾸려졌다. 합수단은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던 노만석 검사를 위시한 특수부 검사들과 군검사들로 꾸려졌다. 이들은 8월경, 국방부 청사 컴퓨터 압수수색 과정에서 괴상한 문건 하나를 손에 넣게 된다.

컴퓨터의 주인은 박근혜 정부 말 청와대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실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했던 군법무관 A 중령이었다. 정권이 바뀐 뒤 다시 국방부에 복귀해 복무 중이었다. 그의 컴퓨터에서 발견된 문건은 2016년 10월에 작성된 보고서였다. 그때는 아직 박근혜 탄핵 촛불이 본격화되기 전이었고, '최순실 태블릿PC'도 발견되지 않았을 때지만 대통령 지지율은 20%대로 급락한 상태였다.

A 중령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북한 급변 사태' 발생을 명분으로 남한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는 법리 검토가 담겨있었다. A 중령은 북한 급변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곧바로 남한의 행정, 사법 기능이 마비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요건 상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일은 어렵다고 보면서도,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되기 때문에 북한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을 빌미로 대통령이 한반도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방식으로 계엄 선포 요건을 우회할 수 있다는 황당한 논리를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보고서에는 '국회가 계엄 해제를 시도할 때에 저지할 방안'과 '계엄사령관을 법규가 정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육군참모총장으로 지정하는 방안', '국무회의를 평소와 달리 수시로 개최하여 수시 보고를 받는 방안' 등 구체적 상황별 대응 계획도 기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4개월 뒤 국군기무사령부에서 작성한 '계엄 문건'에도 동일하게 담기게 된다.

합수단 수사 결과 A 중령에게 보고서 작성을 지시하고 보고 받은 사람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국가안보실이 북한 급변 사태에 대비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이를 빌미로 법을 우회해 대한민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해 계엄 해제를 차단하고, 계엄사령관을 합참의장이 아닌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해괴한 법리 검토를 시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계엄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할 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대로 계엄을 선포하고, 평소 합참이 준비해 둔 대로 후속 절차를 밟는 것뿐이지, 국회의원들을 잡아 가둘 모략을 꾸미는 것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박근혜 청와대는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지휘하에 이미 탄핵 정국이 시작되기도 전인 2016년 10월, 국정농단 의혹으로 대통령 지지율이 급락 중인 상황에서 계엄 선포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구체적인 검토에 착수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김 전 실장은 윤석열 정부에서 특별 사면으로 복권된 뒤 국방 정책 컨트롤 타워인 국방혁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대통령이다.

기시감이 드는 장면

2024년 다시 계엄령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야당을 중심으로 대통령실이 여소야대와 저조한 정권 지지율을 타개하기 위해 계엄령을 검토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대통령실과 여당인 국민의힘은 즉각 반발했다.

지난 1일,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야당의 계엄령 주장은 비상식적인 거짓 정치공세"라고 비난했다. 10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국민의힘 임종득 의원은 "황당무계한 정치 선동이자 극단적 망상"이라 했고, 이에 대해 김선호 국방부 차관은 "지금 계엄을 논하는 것은 망상이며 고도의 정치적 선동"이라고 맞장구쳤다.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2016년 11월 18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추미애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이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돌고 있다"고 발언했다. 청와대는 즉시 "무책임한 정치적 선동"이라 비난하며 혼란을 부추기는 발언을 자제해달라고 브리핑했다.

▲ 2016년 11월 4일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서울 여의도 당사 대표실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 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이정현 대표도 "국민들을 우롱하고 한번 떠보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계엄령 검토하고 있다는 것을 제1야당의 대표가 얘기한다면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제시를 해서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대통령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 부분 제대로 문제를 삼아야지, 제1야당 대표가 이렇게 전혀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를 공식적으로 이렇게 퍼뜨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비난했고, 당 대변인실은 "계엄령은 있지도 있을 수도 없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라 일축했다.

그러나 펄펄 뛰며 계엄 의혹을 부인하던 박근혜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무색하게도 2018년 기무사 계엄 문건이 폭로되며 박근혜 정부의 계엄령 검토는 사실로 드러났다. 2021년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도 언론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가 탄핵 정국에서 계엄을 검토했다고 실토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검찰과 법원에서도 인정되었다. 계엄문건 작성을 주도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의 명을 받아 문건 작성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던 소강원 전 참모장과 기우진 전 5처장은 각각 위헌, 위법한 계엄문건 작성 사실을 감추기 위해 문재인 정부 출범 다음 날 '현 시국 대비계획'이란 계엄문건을 '전시 합수 업무 수행방안'이란 괴문서로 바꿔치기해서 '키리졸브 훈련 2급 비밀'로 허위 등재한 사실이 인정되어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기무사 계엄문건은 명백한 위법 절차에 의해 작성된 반헌법적인 문서이며 군사비밀이 아니다'라고 판시한 바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들도 특별사면했다.

지난 2월 21일에는 검찰도 계엄 문건 작성은 기무사 권한 범위 밖의 일일뿐더러 위헌·위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을 직권남용죄로 기소했다. 재판은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최근 신원식 국가안보실장과 대통령실 고위관계자, 여당 인사 등이 국회, 언론 등에서 기무사 계엄 문건은 실체가 없으며, 문재인 정부가 날조한 정치 공작이며, 단 한 사람도 기소된 바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윤석열 정부의 계엄 검토 의혹을 반박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거짓말이다. 이들이야말로 사실관계를 날조하며 정치 공작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아무도 몰랐다

▲ 2023년 5월 11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국방혁신위원회 출범식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왼쪽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안보실장을 지낸 김관진 국방혁신위원회 부위원장이 보인다. ⓒ 연합뉴스

물론 과거에 있었던 일만으로 윤석열 정부의 계엄 검토 의혹이 기정사실화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불과 8년 전, 권력자의 불순한 의도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망상이나 황당무계한 선동쯤으로 치부되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바 있다.

박근혜 청와대는 본격적인 촛불 시위가 확산하기 전부터 북한 정세를 빌미 삼아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으면서도, 야당의 의혹 제기를 '무책임한 정치적 선동'이라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2017년 2월에는 앞선 검토를 진화시켜 기무사 내 빈 사무실에 태스크포스팀까지 꾸려놓고 남몰래 계엄문건을 만들었다. 실행이 안 되었다고 이러한 시도들이 없었던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권 보위를 목적으로 하는 계엄령은 검토나 계획 수립 자체가 내란음모나 다름없다.

요즘같이 스마트폰이 보급된 시대에 계엄이 어떻게 가능하겠냐며 의혹을 일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무사 계엄 문건에는 KT기지국 등을 장악해 주요 지역 통신을 마비시키고 언론사 보도를 검열할 구체적 계획이 적혀있었다.

정권이 국회의장과 부의장을 모처에 가둬 국회 등원을 막고, 야당 의원들을 계엄법 위반 혐의로 현행범 체포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현실적으로 계엄을 해제할 방도도 없다. 정권을 뒤엎는 쿠데타는 어렵지만, 정권이 벌이는 친위쿠데타는 권력기관을 조기에 장악하고 시민의 저항을 제어하면 그다지 불가능한 일이라고만 볼 것도 아니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의혹 제기가 아니라, 의혹 제기를 망상쯤으로 치부하는 안일한 인식이다. 세계 곳곳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견고한 민주주의가 무력 앞에 무너지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분명한 팩트는 김관진이 A 중령으로부터 계엄 검토를 보고 받았을 때도, 기무사가 계엄 문건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도,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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