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 뒤 달러 대비 26% 싸진 엔
우크라전쟁 직전인 2022년 1월엔 1달러=115엔 정도였던 엔 시세는 요즘 155엔대에 거래될 정도로 싸졌다. 그 기간에 엔 시세가 달러 대비 26%나 내려갔다.
다른 주요 통화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위스프랑에 대해서는 37% 싸졌고, 유로에는 29%, 영국 파운드에는 26%, 호주 달러에는 21%, 중국 위안에 대해서도 18%나 가치가 떨어졌다. 엔이 그만큼 싸졌다는 얘기다. 그 때문에 일본인들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더 가난해졌다는 것이 하라 위원의 주장이다.
외국인 여행객들이 일본으로 밀려드는 현상이 그런 사정을 상징한다. 같은 돈으로 일본에선 그만큼 더 싸게 호텔을 이용할 수 있고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 올해 일본을 찾는 외국인 여행객 수는 4천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이지만, 일본인들은 그들 여행객처럼 즐겁지 않다.
금융정책 조사분석연구기관 도단(東短)리서치에 따르면, 일본의 정식(定食)체인점 ‘오토야’의 시마홋케 야끼(임연수 구이) 정식은 지난 11월 기준으로 뉴욕에서는 팁 포함 7145엔(약 6만 7000원)이었으나, 도쿄의 가게에서는 같은 메뉴가 1240엔(약 1만 1700원)으로, 일본인들은 같은 음식이 미국에서 일본보다 5.8배나 더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는 것으로 느낀다. 도쿄에서 1240엔에 먹을 수 있는 것을 뉴욕에선 7145엔을 내고 먹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엔 시세가 그만큼 낮기 때문이다. 하라 마코토는 그만큼 일본인은 상대적으로 빈곤해졌고, 엔 약세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질 것이라고 본다.
엔으로 외국 물품을 수입할 경우 엔 시세가 내려가면 그마나큼 더 많은 엔을 지불해야 하고, 수입된 그것은 일본 국내에서 물건값에 전가돼 그만큼 더 비싸진다. 엔 시세가 내려가면 물가가 올라가는 것이다. 일본에선 엔 약세로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터에 수입품의 가격이 올라가면서 다른 물건 값도 올라가는 물가고(인플레)가 심각한 상태다.
물가 잡으려는 물가대책 추가예산이 물가 부추길 수도
다카이치 정권은 지난 16일 국회에서 통과된 18조 3034억 엔(약 172조 원) 규모의 보정예산(추가경정예산)에서 8.9조 엔(약 83조 원)을 물가대책비로 할당했다. 2.7조 엔(약 25조 원)의 가솔린 감세를 비롯해서 소득세 감세, 겨울철 전기 가스 요금 지원, 아동 1인당 2만엔 지급 등에 쓰인다. 전체 보정예산의 60%가 넘는 11조 6960억 엔(약 110조 원)을 국채 추가발행으로 충당한다. 국채발행은 곧 그만큼 정부부채가 더 늘어난다는 얘기다.
보정예산 투입으로 경기가 활성화될 경우 물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해, 물가를 잡기 위한 보정예산 60% 이상의 물가대책비가 오히려 물가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원래 물가대책으로 가장 효과가 있고 또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것은 중앙은행의 금리인상이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이후 급등한 물가를 잡기 위해 주요국들은 금리를 인상했다. 미국 FRB는 정책 금리를 최고 5.25~5.5%까지 올렸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유로 탄생 이후 최고치인 4.5%까지 금리를 올렸다. 영국 잉글랜드 은행도 최대 5.25%까지 금리를 올렸다. 그 결과 인플레율이 억제된 뒤 다시 이자를 내려, 대다수 중앙은행들은 경기를 데우지도 식히지도 않는 ‘중립금리’에 가까운 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예외적이다. 정책금리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뺀 ‘실질정책금리’의 경우 일본만 유독 큰 폭의 마이너스 금리상태다. 미국의 실질정책금리는 1.15%, 영국은 0.55%, 한국은 0.1%, 캐나다 0.05%, 유로권은 마이너스 0.2% 등인데 비해, 일본은행은 이번에 정책금리를 0.75% 올렸지만 실질정책금리는 마이너스 2.15%나 된다.
여전히 살아 있는 ‘아베노믹스의 저주’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19일 기자회견에서 “정책금리 변경 뒤에도 실질금리는 큰 폭의 마이너스가 계속돼 완화적인 금융환경은 유지된다”고 말했다. 하라 마코토는 이를 “아베노믹스의 저주”라고 했다. “일본은행이 왜 이런 물가고에도 물가를 올리기 위한 금융정책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가? 이것은 제2기 아베 신조 정권에서 구로다 하루히코 당시 일본은행 총재 아래 추진된 아베노믹스의 저주 탓이 크다.”
아베노믹스의 핵심 개념은 돈(엔)을 대량으로 뿌리면 물가와 임금, 소비가 서로 다투듯 올라가는 ‘선순환’이 시작돼 일본경제의 고질문제인 디플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행이 장기적인 엔 약세 기조를 유지해 온 근본 이유다. 그것을 위해 아베와 구로다는 일본은행을 통해 초저금리의 금융완화정책을 쓰면서 막대한 돈을 뿌렸고, 그로 인한 재정적자를 대규모 국채발행, 즉 차입금(부채)을 통해 메웠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임금과 물가, 그리고 엔 시세를 서로 끌어내리는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디플레 상태를 심화시켰다. 아베노믹스는 아베가 2020년 8월 총리직에서 사퇴하고 2022년 7월 피살당한 뒤 흔들리기 시작했고, 10년간 총재자리를 지킨 구로다가 2023년 4월 퇴임한 뒤 일본은행 총재가 된 우에다 가즈오가 2024년 3월 초저금리 금융완화정책 탈피, 즉 탈아베노믹스를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청산이 시작됐다. 그렇게 해서 임금을 올리고 물가도 올려 디플레에서 벗어나고 엔 시세를 끌어올리는 작업이 느리지만 꾸준히 진행돼 왔다.
‘아베노믹스’ 브레인들이 포진한 다카이치 정권
그러나 ‘제2의 아베’라는 다카이치 사나에가 아소 다로 부총재 등 자민당 내 우익세력을 등에 업고 총재에 당선되고 또다른 우익정당 일본유신회와 연립정권을 구성하면서 또 다시 고비를 맞고 있다.
하라 마코토가 지적하듯이 “고물가 상태에서도 여전히 ‘물가를 올리는 금융정책’을 계속하는 것은 ‘디플레 탈각’(탈디플레)이라는 문제의식에 집착한 아베노믹스의 브레인들이 지금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 브레인으로 다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아베노믹스의 브레인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재정투입 확대를 통한 성장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에 금리인상을 바라지 않는다. 올해 10월 기준, 신선식품을 제외한 일본 소비자물가지수(CPI)는지난해 같은 달 대비 3% 상승하는 등 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우에다 총재는 금리인상을 통해 이같은 고물가도 잡고 엔 시세도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야 임금도 오르고 소비와 투자도 늘어 일본경제가 ‘아베노믹스의 저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0월의 일본은행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우에다 총재는 시장의 기대를 저버리고 금리인상을 미뤘다. 다카이치와 그 브레인들, 자민당과 연립 여당 일본유신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에 정책금리를 0.25%p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물가고에 고통당하는 사회와 시장의 압박, 그리고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미국은 달러 대비 엔 시세가 올라가야 달러 약세가 돼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다고 계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은 금리를 내리고 일본은 금리를 올려야 한다.
다카이치 정권은 이번 한 차례 정책금리 인상을 허용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런 자세를 견지할 것으로 보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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