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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김민기’, 한국 포크의 역사가 되다

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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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청년 김민기 이야기] ⑫

앨범 ‘김민기 ’ 번안포크 시대를 뒤집어

한대수의 실험, 앨범 ‘김민기’ 기폭제로

자작 8곡이 한국형 포크의 원형으로

청개구리홀, 창작 포크운동의 실험실

방의경, 여성 싱어송라이터 첫 앨범 내

흔히 말하는 영어의 ‘포크송(folk song)’이란 우리말의 ‘민요’에 해당한다. 다만 포크송에는 작가를 알 수 없는 전승민요는 물론이고 민요풍의 새로운 창작곡까지 모두 포함한다. 후자를 별도의 장르로 구분해 붙인 명칭이 ‘컨템포러리 포크 뮤직’이다. 모던 포크송(혹은 ‘모던 포크’)이라고도 한다.

창작 포크라 해도, 자신이 속한 국가와 민족의 음악적 전통 속에서 나의 삶과 세상에 관한 나의 이야기, 감정, 생각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포크의 전통을 잇는다. 따라서 지역과 민족의 역사적 특징이 배어있기 마련이다. 특정한 포크송을 지칭할 때 미국 포크, 아일랜드 포크 등 국적이 따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포크는 이와 함께 작가의 세상을 보는 관점과 태도 그리고 가사의 문학성을 중시한다. 문학과 음악의 융합을 지향하는 셈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포크 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건 이런 맥락에서다. 특정한 시대적 상황과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젊은이, 무언가 말하고 외치고 털어놓고 싶은 젊은이들이 포크에 빠져들기 쉬운 건 이 때문이다. 몸은 물론 생각과 정신까지도 모두 국가가 통제하는 상황에 던져진 이들이라면 더 그랬을 것이다.

196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에서 흔히 불리던 포크송은 대부분 ‘미국 포크’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시대 상황을 이야기하는 노래라면 ‘한국 포크’라고 해야 할 텐데 그럴 만한 노래가 없었다.

1971년 11월 발매된 앨범 김민기는 한국 창작 포크의 출발점이자 ‘한국 포크의 원조’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은 2025년 11월 발매한 앨범 김민기 복각 LP 판 이미지. 출처 :학전 제공

당시 대중가요계를 양분하고 있던 것은 트로트와 서구의 팝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지배적 장르가 되었고, 해방 후에도 그 기반이 공고했던 트로트는 일본의 전통 음계인 ‘요나누키(よなぬき) 단음계’를 토대로 하고 있다. 열이면 아홉 사랑 타령이나 애상에 매몰돼 있어 포크의 본령에서 벗어나 있다.

모던 포크는 196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밀려왔다. 처음엔 외국어 그대로 불렸다. 1960년대 후반부터 우리말로 된 포크송이 등장했지만, 열이면 아홉 우리말로 번안한 미국 포크송이었다. ‘한국 포크’라고 할 수 없었다. 우리 대중음악계가 ‘한국 포크’의 시작 혹은 원조를 누구의 어떤 노래 혹은 음반으로 잡을 것인지 적잖이 고민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논쟁적인 주제는 김민기의 등장과 함께 깔끔하게 해결됐다. 김민기의 첫 앨범 <김민기>를 ‘원조’로 꼽는데 이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민기가 ‘한국 포크’의 원조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우연이 팔 할이었다. 청개구리 홀에서 이백천이 공연을 진행할 때였다. 미국 팝송과 번안 포크를 소개하는 게 일이었던 그였으니 진행 중에 영어가 튀어나오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마침 홀 한구석에 김민기가 있었다. 좀체 말을 섞지 않던 그가 이백천이 진행하는 중에 툭 튀어나왔다. 그것도 하늘 같은 선배에게 당돌하게도 ‘딴지를 거칠게 걸’더란다.

“영어가 아니면 진행이 안 되나요?”

“우리말 놔두고 왜 영어를 쓰는 거죠?”

한국의 대중음악을 이끈다고 자부하던 터에 새파란 후배에게 면박을 당했으니, 이백천으로서는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여전히 수양이 모자라나 보다. 한국어를 제대로 몰라 영어를 썼으니 양해해달라”고 얼버무리고 진행을 끝냈다.

며칠 뒤였다. 이백천이 청개구리 홀에서 공연을 진행하는데 그날도 김민기가 앉아 있더란다. 이백천도 빚지고는 못 참는 성격이었다. 김민기에게 노래 한 곡 부르라고 청했다. 김민기가 부른 노래는 아니나 다를까, 밥 딜런(Bob Dylan)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이었다. 이백천이 점잖은 한 방으로 복수를 했다. “우리말로 부를 만한 노래는 없을까?”

당시 포크 가수들은 열이면 열, 원곡이나 기껏해야 번안곡을 불렀으니, 자작곡이랄 게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김민기는 무안했다. 두 사람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이 풋내기의 발칙한 도발과 유명인의 뒤끝 작렬로 말미암은 이 해프닝은 한국 가요사의 중대한 전기가 된다. 다음은 김민기의 기억이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그때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지지 않고 맞서더란 거예요. ‘너도 영어 노래 부르네’라고 하길래 지지 않고 ‘그건 내가 보컬을 따라 반주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나도 내 노래가 있다’라고 하더래요.” “이백천 선배도 지지 않고, ‘그래? 그럼 해 봐’라고 부추겼구요.”

1주일 뒤 김민기는 1968년 작곡하고는 책상 서랍에 꼭꼭 숨겨두었던 ‘친구’를 들고나왔다. 이 노래를 듣고 이백천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꼭 샹송을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사랑이니 이별과는 전혀 상관없는 노래였고.”

마침 그 자리에 김진성 CBS 피디가 있었고, 그는 다짜고짜 김민기를 스튜디오로 불러 ‘친구’를 방송용으로 녹음했으며, 이후 ‘친구’는 CBS 음악 프로그램에서 마치 오프닝이나 엔딩 노래라도 되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친구’는 ‘한국 포크’ 가운데 처음으로 전파를 타고 또 ‘인기 가요’가 되었다.

김민기가 그림만큼이나 작곡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다. 그 결실은 이듬해 발매된 앨범 <김민기>로 맺었다. 이 앨범은 전체 10곡 가운데 8곡이 김민기의 자작곡이었다. 자작 포크 앨범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었다. 이후 방의경, 송창식, 한대수, 김의철 등의 자작 포크 앨범이 잇따르기 시작했다. 김민기가 ‘한국 포크의 효시’로, 1971년이 ‘한국 포크의 원년’으로 기록되게 된 건 그 때문이었다.

한대수는 1969년 ‘행복의 나라로’ 등을 통해 번안 포크 일색인 한국 포크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사진은 한국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할 무렵의 청년 한대수. 출처:미주뉴스엔조이

포크의 싱어송라이터 계보만 따진다면 김민기보다 앞선 이가 있었다. ‘친구’가 전혀 뜻하지 않은 해프닝으로 세상에 나와 방송을 타기 1년 전인 1969년 9월 19일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한대수는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노래 ‘행복의 나라로’, ‘옥의 슬픔’ 등을 발표했다. 미국 체류 중 지은 것이긴 하지만, 노래가 전하는 이야기는 공교롭게도 한국의 시대 상황과 젊은이들의 정서를 기가 막히게 대변하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은 장막에 겹겹이 둘러쳐진 것처럼 암울했고, 청년들은 그 장막을 찢어버리고 대명천지의 자유로운 광장으로, 미래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한대수가 이런 정서를 표현한 건 아니지만, 한국 젊은이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이 노래에 감정이입을 했다.

그러나 그는 ‘쎄시봉’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1971년 입대하면서 노래 판에선 잊혔다. 1974년 말 그이 첫 음반 <멀고 먼 길>이 나올 때까지 무대에서건 방송에서건 그의 노래는 들을 수 없었다. 평소 성정으로 보아 ‘원조’ 타이틀은 김민기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지만, 한대수로서는 어쩌면 아쉬운 일이겠다.

앨범 <김민기> 발매의 영향은 컸다. 이후 우리 음악계에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어법으로 노래를 짓고 노래하는 포크송 싱어송라이터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김민기보다 앞서 가요계에 진출한 송창식이나 서유석, 윤형주를 비롯해 김민기와 비슷한 시기에 노래하기 시작한 김광희, 방의경 등이 잇따라 자작곡 앨범을 내기 시작했다.

이런 창작의 열풍 배경에는, 방아쇠 노릇을 한 김민기의 노래들과 자작곡의 실험실이 되어준 청개구리 홀 그리고 통기타라는 전천후 도구가 있었다. 통기타는 자작 ‘한국 포크’ 생산의 설비이자, 공연의 도구이고, 유통의 동력이었다. 김민기는 물론이고 방의경, 김광희 등 신예들은 바로 이 통기타 덕분에 노래를 짓고, 혼자서 반주하며 노래할 수 있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중가요 시장은 전통적인 트로트와 미국에서 밀려온 록, 소울, 발라드, 재즈 등 팝이 양분하고 있었다. 트로트는 이미자, 남진, 문주란 하춘화 등이, 팝은 패티킴, 신중현, 윤항기 윤복희 형제 등이 시장을 이끌었다. 모두 밴드가 필요한 노래였다.

당시 트로트건 팝이건 가요계를 이끄는 ‘큰손’은 (밴드를 이끄는) 작곡가였다. 트로트의 박춘석, 백영호 그리고 팝의 손석우, 이봉조, 길옥윤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20명 안팎의 ‘빅밴드’의 악단장을 겸하며, 가수를 선택하고 육성하는 프로듀서 역할까지 했다. ‘박춘석 사단’ 혹은 ‘이봉조 사단’ 등이 가요계를 쥐락펴락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1964년 신중현이 6~7명 규모(‘캄보 밴드’)의 록 밴드 ‘애드훠’를 이끌고 나타난 이후 록 그룹이 우후죽순 등장하면서 빅밴드는 캄보 밴드에 자리를 넘겨주기 시작했지만, 작곡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작곡자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가창력이 훌륭해도 곡을 받을 수 없었고, 무대에 설 수도 없었고, 방송 출연도 불가능했다.

대중음악의 이런 생산 및 공연 그리고 유통 구조에 제3의 길을 열어준 것이 통기타였다. 포크는 민요가 그렇듯이 간단한 어쿠스틱 악기만 있으면 공연이 가능했기에 포크 가수들은 통기타만 잘 다루면 다른 연주자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능력만 된다면 언제든 자신의 노래를 만들 수도 있었다.

작곡이 힘들다면 무진장 널려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포크를 부를 수도 있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저작권 계약을 맺을 필요도 없었고, 로얄티를 지급할 일도 없었다. 60년대 중후반 통기타가 대중화하면서, 번안곡 위주의 포크 음악이 유행을 타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시장의 반응도 좋았다. 당시 청년들은 트로트에 진력이 나 있었다. 허구한 날 울며 짜고 매달리는 노래를 듣느니, 차라리 무슨 뜻인지 모르고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도 팝송을 선택했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선 영어 가사 몇 줄 읊조리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중고생조차 악보의 마디마다 기타 코드가 적힌 조잡한 포켓 판 팝송 책을 한 권이라도 갖고 있지 않은 이가 없었다. 포크의 유행과 함께 통기타 바람도 거셌다. 1969년 서울에만 기타 학원이 무려 40여 개에 이르렀다. 수강생들이 부르는 노래는 포크였다.

1969년은 미국에서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린 해였다. 베트남 전쟁에 염증이 난 젊은이들은 반전 평화의 기치 아래 기성의 권위를 거부하는 히피 문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 유행을 앞장서 이끈 것이 포크와 록이었다. 그해 8월 베델 평원에서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는 50여 만 명이 몰려들어 텐트에서 먹고 자며 록과 포크로 반전과 평화를 외쳤다.

그해 우리의 문화방송, CBS, 동아방송, 동양방송 등 방송사들도 경쟁적으로 음악 프로그램을 확대하거나 신설했다. 주로 포크와 록, 소울 등을 소개한 이 프로그램들은 얼마지 않아 청취율 상위권을 휩쓸며 심야 음악방송 전성시대를 열었다. 얼마나 인기였으면,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는 톱 탤런트 못지않은 당대의 ‘아이돌’이었다.

그러나 외국 노래다 보니 확장에 한계가 있었다. 알아듣거나 따라 부르기 힘들었고, 감정을 살리기는 더 힘들었다. 특히 메시지가 중요한 포크의 경우 더 그랬다. 1960년대 후반 서유석, 송창식, 윤형주 등 포크계의 ‘아이돌’들이 주로 미국 포크를 우리 정서에 맞게 개사해 부르기 시작한 건 그 때문이었다. 이른바 ‘번안 포크’였다.

한때 ‘음유 시인’으로까지 불렸던 서유석의 ‘아름다운 사람’ ‘사모하는 마음’이 그렇고, 최고의 청춘스타로 떠올랐던 2인조 남성 포크 그룹 트윈폴리오의 ‘두 개의 작은 별’과 ‘케세라’,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의 ‘어린 시절’, 송창식의 ‘사랑’,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 등 당대의 히트곡은 대부분 번안 포크였다. 조영남 하면 떠오르는 ‘내 고향 충청도’ 역시 올리비아 뉴튼 존의 ‘더 뱅크스 오브 오하이오’를 번안한 것이었다.

이런 번안 풍토에 충격을 준 게 앞서 소개한 한대수였다.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다가 돌아온 한대수는 스무 살 되던 1968년 송창식·윤형주·조영남이 등판하던 ‘쎄시봉’ 무대에 섰고, 1969년 9월 송창식 등의 도움을 받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첫 데뷔 무대를 가졌다.

팝송 혹은 포크의 본바닥 물을 먹고 들어온 그의 무대는, 등장하는 장면부터 한국의 대중음악계에는 충격이었다. 조명이 완전히 꺼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계 초침 소리만 들리다가 어디선가 향이 피어오르면서, 한대수는 커다란 톱을 연주하며 나타났다. 그가 이날 부른 노래 ‘행복의 나라로’ 역시 충격적이었다. 다른 출연자들이 부른 ‘말랑말랑하고 달착지근한’ 노래와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장막을 찢는’ 것들이었다. 이로써 한대수는 번안 포크에서 창작 포크로 넘어가는 발판이 되었다.

한대수의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번안 포크 시장을 뿌리부터 흔들기 시작한 이가 김민기였다. 청개구리 홀에서 잇따라 소개한 그의 노래들은 ‘한국 포크’의 원조로 평가되는 앨범 <김민기>(1971년 11월 발매)에 실렸다. 앨범 <김민기>의 10곡은 김민기의 자작곡 8곡과 한대수의 ‘바람과 나’, 최경식이 번안한 ‘저 부는 바람’으로 이루어졌다. ‘바람과 나’는 한대수가 김민기의 앨범 제작을 위해 지은 노래였다.

이 앨범에는 드럼, 베이스 기타, 피아노, 바이올린, 색소폰, 오르간, 플루트 등의 다양한 악기가 사용되었고, 클래식에서 재즈, 포크록까지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는 재즈 뮤지션 정성조에 힘입은 바 컸다. 정성조는 앨범의 전체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편곡과 연주는 물론 반주를 맡은 ‘정성조 콰르텟’을 이끌고 있었다. 정성조는 앨범 <김민기> 앞서 양희은 1집, <김민기> 이후엔 한대수, 쉐그린 등의 당대의 명반 제작에서 편곡과 연주 등 세션을 맡았다.

서유석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 포크 1세대로서는 자존심이 잔뜩 상했다.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정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 할 때 다시 한번 이 선배들을 자극한 후배 가수가 있었으니, 방의경이었다. 김민기와 함께 청개구리 홀을 창작 포크 공작소로 이끌었고,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시대와 이웃의 아픔을 노래에 담으려 했던 이였다. 그는 앨범 <김민기>가 나온 이듬해인 1972년 자작곡 10곡을 모아 앨범 <내 노래 모음>을 발매했다.

여성 싱어송라이터로는 방의경과 비슷한 시기 ‘그리운 사람끼리’ ‘모닥불’ 등을 노래한 박인희가 있었지만, 자작곡 앨범을 낸 것은 방의경이 처음이었다. 방의경의 첫 앨범 역시 ‘불나무’ 등 ‘불온한’ 노래로 말미암아 앨범 <김민기>처럼 출시하자마자 수거되고, 방송 금지를 당했다.

방의경은 김민기와 함께 청개구리 홀에서 창작 포크의 지평을 넓혔고, 1972년 자작곡집을 내며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새 길을 열었다. 사진은 40년만인 2011년 발매한 방의경 복각 음반. 출처:알라딘

김민기와 방의경은 청개구리 홀을 단순히 발표하는 무대가 아니라, 함께 노래를 짓고 다듬고 발표하는 무대로 바꿔나갔다. 그런 노력은 1971년 초 열린 창작 포크송 페스티벌로 결실을 보았다. 이 페스티벌에는 ‘새로운 노래’에 관심을 가진 가수들이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한국 포크’ 운동의 기폭제였다.

앨범 <김민기>는 지금까지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을 선정할 때면 꼭 상위권에 올랐다. 1998년 음악 잡지 <서브>가 선정한 100대 명반 리스트에선 13번째에 올랐고, 2007년 가슴네트워크가 기획하고 선정한 100대 명반 리스트에는 세 번째로 올랐으며, 2018년 음원 서비스 <멜론>, 일간지 <한겨레>와 음악 전문 출판사 <태림스코어>가 공동 기획한 100대 명반 리스트에선 네 번째로 올랐다. 이들 리스트에 오른 음반 가운데 가장 먼저 세상에 나온 것은 <김민기>였다. <김민기>는 한국 현대 대중음악의 향도가 되고 길이 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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