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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위선, 전쟁광 앞에 중립은 없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6/04/14 09:22
  • 수정일
    2026/04/14 09:2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임상훈의 글로벌 리포트] 휴전 뒤에도 레바논을 때리는 나라

26.04.14 06:43최종 업데이트 26.04.14 06:43

12일(현지시간) 레바논 티르의 알 카라브 모스크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숨진 사이드 가족의 장례식이 열린 가운데 친지들이 오열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휴전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말이다. 그런데 이번 중동에서는 그 말이 나온 첫날, 레바논 남부 스리파에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러 돌아온 가족이 이스라엘 공습을 맞았고, 한 살 반 아이 탈린 사이드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 날 이스라엘은 레바논 전역에 전쟁 발발 이후 최대 규모의 공습을 가해 250명 넘게 숨지게 했다.

이쯤 되면 이스라엘은 휴전이라는 말에 제동을 거는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말에 더 자극받아 레바논을 더 철저히 파괴하려 드는 전쟁광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이토록 만만한 파괴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베이루트와 남부를 뒤흔드는 광기의 폭격 배경에는, 외세가 그은 경계와 종파적 권력 배분 위에 세워진 채 오래도록 흔들려 온 레바논의 취약한 형성이 놓여 있다.

레바논은 처음부터 하나의 민족이 자연스럽게 결속해 세운 나라가 아니었다. 오스만제국 해체 뒤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을 나누는 과정에서, 프랑스가 1920년 베이루트와 해안, 베카를 묶어 만든 식민 설계의 산물이었다.

국가를 묶는 원리도 통합이 아니라 배분이었다.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가 맡는 방식이 국민 협약과 타이프 협정을 거치며 굳어졌다. 레바논은 처음부터 하나의 의지보다 종파 간 균형으로 버텨 온 나라였다.

그럼에도 베이루트는 한때 아랍 중동의 경제, 지성, 문화의 중심이었다. 1952년부터 1975년까지 베이루트는 권위주의와 군사주의가 지배하던 주변 지역과 달리 상대적 자유와 금융, 관광, 언론의 공간으로 기능했다. '중동의 파리'라는 별명이 붙은 까닭은 바로 이 화려한 개방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개방성은 곧 취약성이었다. 1975년 내전은 국가의 약화와 민병대의 성장 속에서 터졌고, 시리아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해방기구까지 개입했다. 전쟁은 1990년에 멈췄지만, 국가는 회복되지 않았다. 레바논은 다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을 만큼만 이어 붙여진 채 남았다.

헤즈볼라는 바로 그 틈에서 등장했다. 이 조직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무장 조직이지만, 동시에 정당이고 복지망이며, 레바논 안에서 오랫동안 '국가 안의 국가'처럼 기능해 온 병행 권력이다. 단순한 외부 대리 세력도 아니고, 레바논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국가 실패가 낳은, 또 하나의 권력이다.

지금 레바논에는 공식 국가도 있다. 조제프 아운 대통령과 나와프 살람 총리가 이끄는 새 권력은 헤즈볼라와 동맹 세력이 정부에서 결정적 거부권을 갖지 못하게 했고, 무너진 국가 제도와 재정을 다시 세우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금융 붕괴, 베이루트항 폭발, 전쟁 피해가 겹친 나라에서 국가는 아직 헤즈볼라를 압도할 만큼 강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심각한 인지 부조화와 논리적 파탄

12일(현지시간) 레바논 남부 나바티에시의 한 지역을 겨냥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레바논 보건부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간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사망자 수가 2020명에 달한다고 밝혔다.AFP 연합뉴스

이 배경 위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행동은 더 선명해진다. 이스라엘은 입으로는 레바논 국가와 헤즈볼라를 구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폭격은 그 구분을 처음부터 존중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4월 8일 공습은 베이루트, 베카 계곡, 남부 레바논을 한꺼번에 때렸다. 수도 베이루트 도심 한 복판까지 사전 경보 없이 폭격했다는 점에서 표적만 찍어 제거하는 정밀 응징이라는 말은 설 자리를 잃는다.

더 위선적인 것은 그다음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향한 공격은 곧바로 문명과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전 세계를 향해 피해자의 언어를 독점하려 든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행동할 때는 더 약하고, 더 분열돼 있고, 더 쉽게 짓밟을 수 있는 이웃을 먼저 골라 때린다. 힘이 센 적과는 미국을 끌어들여 계산하고, 당장 되갚기 어려운 약한 공간에는 폭탄을 쏟아붓는다.

그래서 지금 레바논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레바논 사회 전체를 지옥으로 내몰고 있다. 조직 하나를 겨눈다고 하면서 도시를 무너뜨리고, 주민을 쫓아내고, 병원과 도로와 일상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자위가 아니라 집단적 응징에 가깝다.

이쯤 되면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영원한 피해자로 내세우면서도, 정작 더 만만한 약자를 향해서는 가장 가혹한 가해자가 되는 국가처럼 보인다. 말로는 안보를 외치지만,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은 압도적 힘으로 약한 사회를 짓눌러 굴복시키려는 전쟁의 습성이다. 레바논은 지금 그 위선과 폭력의 가장 손쉬운 표적이 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세월호 유가족의 노란 리본을 달았다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중립일 수 없다고 답했다. 그 문장은 지금 레바논을 보며 다시 떠오른다. 장례식장으로 돌아온 가족 위에 폭탄이 떨어지고, 아이가 죽고, 병원과 주거지가 무너지는 장면 앞에서 중립을 말하는 것은 사실상 가해의 편에 서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행태를 비판하자, 이스라엘 외교부는 이를 강하게 규탄했고, 한국 외교부는 대통령 발언의 취지를 오해한 대응이라며 유감을 표했다.

문제는 이 반응이 단순한 외교적 과민함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신들은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피해의 언어를 호출하면서도, 정작 더 약한 이웃에게 가하는 집단적 응징은 방어라고 우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 이스라엘 정권의 심각한 인지 부조화와 논리적 파탄이 드러난다.

이스라엘 국민의 주권은 존중받아야 하고, 유대인의 역사적 고통과 존엄 역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역사와 존엄을 방패로 삼아 민간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국제법을 짓밟는 현 이스라엘 정권은 더 이상 문명과 인권의 언어 뒤에 숨을 수 없다. 그것은 인류 보편의 이름으로 고립되고, 제어되고, 끝내 심판 받아야 할 대상이다.

#휴전 #이스라엘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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