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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빨갱이 사냥’…제헌국회의원 서용길은 어떻게 날개가 꺾였나

고경태기자

  • 수정 2026-06-05 06:40

국회프락치 사건의 주요 순간 담은 부인 이영란의 비망록

13명 중 홀로 남쪽 잔류…말년에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지난 4월27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난 서용길 전 국회의원과 이영란 여사의 아들인 서영철씨가 반민특위 및 국회프락치 사건을 기록한 비망록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국회프락치 사건이란 1949년 이승만 정권이 소장파 국회의원 13명을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제거한 일이다. ‘용공 조작’으로 국회를 제압하고 친일 청산을 가로막은 대한민국 국가폭력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지만, 아직 한 번도 국가 차원의 진실규명이 된 적은 없다. 서용길(1912~1992)은 이 사건에 휘말린 13명 중 한국전쟁 와중에 북한에 가지 않고 남쪽에 남은 유일한 인물이다.

한겨레는 서용길 전 의원을 주인공으로 해 부인이 쓴 비망록을 아들 서영철(74, 일창육영재단 이사장)씨로부터 입수해 공개한다. 부인 이영란 여사(1920~2013)는 남편이 고난을 겪던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대학노트 25쪽 분량에 기록해 놨다. 지난 4월부터 한겨레와 인터뷰를 나눈 서영철씨는 “어머니가 평생 국회프락치 사건을 한스러워하며 기억과 자료를 정리하셨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이듬해인 1993년부터 기어코 기록을 남기셨다”고 말했다. 비망록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이 사건이 조작임을 드러낸다. 마침 6일은 국회프락치 사건을 빌미로 서울 명동에 있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이 경찰의 습격을 받고 해체의 길로 들어선 지 77주년 되는 날이다. 서 전 의원은 반민특위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다.

“성대 교수 자리를 사표 내고 입후보했다”

비망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서용길은 연희전문대 문과를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이후 성균관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1948년 5·10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윤보선을 꺾고 당선하며 젊은 정치인으로서 날개를 활짝 편다. 이는 동시에 가혹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비망록은 그 운명을 따라간다. 1949년 남로당 지령을 받고 외군 철수 운동을 벌였다는 ‘국회 프락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서용길을 비롯한 제헌국회의원 13명. 그런데 예기치 않은 반전이 일어난다.

서영철씨가 소장하고 있는 가족 사진첩 속의 아버지 서용길. 서영철 제공

1950년 6월25일

밖에서 쿵쿵하는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이 감방 안에까지 들려온다.

“으와아 감옥 문이 열렸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북에서 인민군이 쳐들어온 것이다. 너나없이 감옥을 빠져나가려고 아우성들이다.

S는 혼자 감방 안에 앉아있다. 누가 와서 나가시지요 한다.

“아니 나는 무죄 석방돼야 나갈 거다.”

아무도 없는 감방에 혼자 남아서 앉아있는 S를 젊은이가 와서 부축해준다. 선생님 여기 계시면 위험합니다. 나가시지요. 비로서 S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옥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본다.

(‘S’는 서용길 전 의원을 일컫는다. 부인 이영란 여사는 비망록 속에서 내내 남편을 S로 표기했다. 또한 인민군의 서울 점령으로 서대문형무소가 개방된 것은 실제로는 6월28일이다-필자 주)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기소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13명의 제헌국회의원들은 1950년 3월14일, 1심 판결을 받았다. 서용길은 신성균·이구수 등과 함께 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받았고, 이문원·노일환은 같은 혐의로 가장 높은 10년형을 받았다. 6년형을 받은 이도 있었다. 이들은 곧장 항소했다. 두 달이 조금 지난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헀다. 2심 판결이 내려지기 전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서대문형무소가 개방됐다. 의원들은 각자 엄중한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서용길은 감옥 문이 열렸는데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비망록에 적힌 대로 “무죄 석방돼야 나가겠다”는 말은 잡아 넣은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내보내 줘야 나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반공주의자였고, 일찍이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북한 공산당에 의해 자신이 풀려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들 서영철씨는 “아버지는 강직했으나 융통성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고 계속 감방에 남을 수는 없었다. 주변에서 강권하자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이영란은 소설의 한 대목을 쓰듯 남편이 “하늘을 바라본다”고 적었다. 서용길이 정말 그날 하늘을 바라보았다면, 어떤 상념에 젖었을까.

서용길은 한때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짊어졌다고 자부하던 젊은 소장파 의원이었다. 1950년, 불과 서른여덟이었다. 2년 전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인 5·10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말 잘한다 서용길, 똑똑하다 서용길”이라고 열광하며 그를 뽑아주었다. 비망록 앞머리에도 “시골 사람들은 돈 많은 신사 윤보선보다 가난한 자기 고향 출신을 뽑았다. 정견이 좋다는 평이었다”고 썼다. 그러나 남로당과 내통한 프락치, 즉 간첩 혐의자로 추락해 모든 지위와 명예를 잃었다. 형무소에서 석방됐지만 오히려 더 혼란스러운 처지였다. 1년 전만 해도 그는 반민특위 특별검찰관으로 법정에서 친일파들에게 호통을 쳤다.

1948년 7월17일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던 중앙청 앞에서 촬영된 대한민국 헌법 공포 기념 제헌국회의원들의 단체 사진. 맨 아랫줄 가운데 이승만 국회의장이 보인다. 이승만은 7월20일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가기록원

반민특위 사람들은 보수도 없이 성실하게 일을 했다.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다는 긍지 하나로.

재판소에서 제일 큰 4호 법정에서 재판은 있었다.

친일파들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하나같이 발뺌을 했다.

김대우는 일제 때 도지사를 지내고 학병, 정신대 색출에 일체 협력한 자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창씨개명했는데, 나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애국자이다.”

이때 검찰관이 일어섰다.(S) (서용길이 일어섰다는 뜻-필자 주)

“일제 때 창씨개명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되었는가.” 박흥식, 한상용(녹기연맹이라는 총독부 아첨단체) 비행기 헌납한 공주 갑부 김갑순 등을 열거했다. 방청석에서 감탄의 소리가 들렸다.

4호 법정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서울지방법원(서울중앙지법) 4호 법정을 일컫는 말이다. 반민특위 재판이 열린 곳이다. 피고인석에 선 김대우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자 반민특위 특별검찰관 서용길이 ‘친일파들은 창씨개명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특혜를 누렸다’는 취지로 반박하는 대목이다. 김대우는 일제 강점기에 전라북도와 경상북도 지사 등 고위직을 지냈다. 반민특위 수사관들에게 1호로 체포된 이는 화신백화점을 기반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던 기업가 박흥식이었다. 악질 고문경찰 노덕술과 김대우 등이 뒤를 이어 붙잡혔다.

반민특위는 한마디로 우리나라 최초의 과거사위원회였다. 지금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데, 반민특위는 조사권과 기소권, 재판권을 모두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과거사위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가만히 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서용길 전 제헌국회의원을 주인공으로 반민특위 해체와 국회프락치 사건의 주요 순간을 기록한 부인 이영란의 비망록. 서용길이 반민특위 검찰관으로 있을 때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가 구금된 일과 국회프락치 사건 검사인 오제도와 판사 사광욱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다. 서영철 제공

서용길 전 제헌국회의원을 주인공으로 반민특위 해체와 국회프락치 사건의 주요 순간을 기록한 부인 이영란의 비망록. 수사기관이 국회프락치 사건의 증거라고 발표한 ‘간첩 정재한’의 암호문서와 연루된 의원들의 최후진술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서영철 제공

국회 내에서는 80명의 소장파 때문에 한민당이 제대로 일을 못 했다. 소장파 의원, 특히 반민특위 위원을 제거해야 편하게 되는 경찰과 한민당의 목적은 일치되었다.

일단 두 의원을 잡아들였다.

이구수, 이문원은 북쪽과 연락하여 국회 내에 동조자를 만들었다는 거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소장파이다.

다음은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한 8명의 소장파 의원을 구속했다.

김약수로 말하면 일제 때 모진 고문을 받아가며 독립운동을 펼친 역사에 남을 만한 사람이다.(중략)

이들은 필동 헌병사령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욕탕에 집어넣고 전기를 통하게 하고 구타하고 했다.

헌병사령관은 전봉덕(전혜린 아버지). 후에 목사가 됐다.

이 사건의 검사는 오제도, 선우종원. 김준연은 오제도를 찾아가 왜 S를 그 멤버의 하나로 잡아들이지 않느냐고 재촉했다.

1949년 5월18일, 소장파 이문원·이구수·노일환 의원이 서울시경에 의해 체포됐다. 6월6일엔 서울 명동에 있는 반민특위 사무실이 경찰 습격을 받고 특경대원들과 권승렬 특별검찰부장이 무장해제됐다. 6월8일 이승만은 에이피(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반민특위 무장해제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6월16일 ‘남로당 프락치’ 암호문서를 국부에 숨겼다는 ‘40대 여간첩’ 정재한이 개성에서 체포됐다. 6월21일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8명이 대검찰청 요원들에게 체포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6월26일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암살됐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이승만의 6월 대공세’라고 일컫는다. 이승만이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이다.

비망록에 나오는 김준연은 이승만을 지지했던 한민당 소속 제헌국회의원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ML당 사건)으로 7년간 복역했던 좌익이었지만, 전향했다. 나중에는 법무부 장관이 된다. 비망록엔 “김준연이 수사검사 오제도를 찾아가 왜 서용길을 잡아들이지 않느냐고 재촉했다”고 나와 있으나, 그 출처는 없다. 다만 김준연이 당시 소장파 의원들을 공산당원으로 몰아세우며 이들에 대한 체포를 부추겼음은 사실이다. 그는 동아일보 1949년 5월9일자 지면에 “60여명의 소장파 의원들이 김일성을 따르고 있고 그 선전방침을 충실히 실행하고 있다”고 썼다.

국회프락치 사건 1·2차 검거가 있은 직후 서용길은 숨어있었다. 김구 암살 하루 전인 6월25일 헌병사령부는 신성균 의원과 함께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경찰·검찰에 이어 헌병까지 수사에 뛰어든 셈이다. 비망록은 서용길의 은신처가 서울 명동 성모병원(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의 전신)이라고 증언한다.

S는 위험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양심의 하나도 가책이 없다는 떳떳한 심경으로 태연했다.

장남 명철이가 홍역 후유증으로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집에는 할머니가 지키고 있었다.

성모병원에 S가 있는 것을 아는 것은 수행원 최영화, 나, 중호 뿐이다.

헌병들은 최를 끌고 가서 S의 거처를 알리라고 모진 고문을 했다.

최는 함경도에서 월남한 사람으로서 성대 시절 교수와 제자로 알게 돼 그 당시 취직이 어려운 시국에 S의 수행원이 된 것을 감사하고 충성을 다했다.

최는 끝까지 모른다고 해서 몸을 얻어맞은 탓으로 몸이 구렁이 감기듯 험한 꼴이 되어 처와 그의 어머니는 통곡하고 이렇게 고문을 당했으면 바른대로 알리지 그러느냐고까지 했다.

내수동 집은 형사대가 점령하고 대문만 두드리면 형사가 먼저 맞아 우선 종로서로 끌고 갔다.

마침 일본에 있는 중호 아버지가 찾아왔다. 이분은 할머니 동생이 된다. (중략)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중호를 매달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먼 데서 아들 보러 왔는데, 이 광경을 보고 중호야 알면 말해라고 애원했다. 중호 입에서 명동 성모병원이 튀어나왔다.

1958년 촬영된 서용길 전 제헌국회의원과 이영란 여사 부부의 가족사진. 맨 왼쪽이 둘째였던 서영철씨. 서영철 제공

서용길은 수행원 최영화와 성균관대 교수 시절에 인연을 맺었다. 최영화는 헌병대에 끌려가서도 서용길의 은신처를 대지 않았다. 하지만 이영란의 오촌 동생이었던 중호는 일본에서 잠시 다니러온 아버지가 있는 앞에서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한다. 아버지는 ‘중호야 알면 말해라’라고 애원한다. 고문을 못 이긴 중호는 결국 서용길이 어디 있는지 말하고 만다. 이는 당시 수사 과정이 불법체포와 감금·고문 및 가혹행위에 기반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용길은 결국 7월30일 체포된다. 종로경찰서에 ‘구류’되었다. 이영란은 남편을 살리기 위해 나선다. 비망록에는 “나는 미국 영사관으로, 오제도(수사 검사), 수도청 수사과 과장 ‘최운하’ 집으로 구명운동을 매일 다녔다”고 써 있는데, 변호사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이것은 죄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니만큼 그것이 해결돼야 한다고.”

드디어 재판날이 왔다.

재판장은 사광욱 판사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오제도와 동향이다.

전날 같은 의주 출신의 안면 있는 분을 판사 집으로 들여 보냈다. 그 당시 법원 관사는 의주로 전매청 맞은편에 있었다.

물론 면회 사절이다. 그러나 다녀온 사람의 말로는 사광욱 판사는 붓글씨로 판결문을 쓰고 있다고 했다. (중략)

도대체 프락치사건이라는 것은 이북에서 정모(정재한) 여인이 월경대에 비밀암호를 가지고 월남해서 국회의원들을 포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에는 정모 여인도, 그 암호문서도 볼 수 없었다.

모든 국회의원들이 최후진술을 했다. 노일환의 최후진술은 감동적이었다. 36세의 자기와 같은 나이에 모진 고문을 당한 박팽년을 생각했다고 했다. S는 죄없이 나라를 위해 백의종군한 이순신을 생각했다고 했다. S는 제일 낮은 3년이 선고되었다.

앞에서 밝혔듯, 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은 국회프락치 사건 관련자 13명은 1950년 3월14일 1심 재판에서 3~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했지만 2심 판결을 받기도 전에 인민군이 서울까지 밀고 내려와 형무소 문이 열리면서 얼떨결에 풀려났다. 그것도 잠시,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인민군은 패퇴했고 13명 중 12명이 가족을 남겨두고 북한으로 갔다. 북쪽 공안요원에 강제연행돼 된 이도 있고, 스스로 월북을 선택한 이도 있다. 자진월북을 했다 해도, 이승만 정권 아래서 생존할 수 없다는 판단이 큰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다. 서용길만 남았다.

8월 중순경 새벽 4시경 대문 소리 죽이고 우리 가족은 집을 빠져나왔다. 네살 된 아이와 갓난아이는 엄마가 업고 짐보따리 들고 걸었다. 50리길 고양군 벽제면에 어느 농가를 향해서. 이 집은 성대(성균관대)의 제자 조인선씨 친척 집이다.

9·28 수복이 되어 피난민들도 하나둘 철수하고 우리만 남았다.

학교 선생이고 김씨라고 해서 있었는데 10월, 11월이 되어도 서울에 갈 기미가 없자 의심받기 시작했다.

하루 S는 두꺼운 외투 입고 집을 떠났다. 그때 울고 있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 숙이고.

국회프락치 사건 유족들이 지난 3월24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송상교 위원장과 면담을 마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서용길 전 의원의 아들 서영철씨, 강욱중 전 의원의 아들 강호림씨와 딸 강금자씨, 김병회 전 의원의 딸 김영자씨, 강욱중 전 의원의 며느리 이선자씨, 노일환 전 의원의 손자 노주상씨.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서울이 수복되기 한 달 전의 이야기다. 본래 서용길 가족이 살던 종로구 내수동 옆집엔 김OO이라는 자가 기거했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인물이다. 비망록에는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공산당 중요멤버였고, 나중에 전향했다”고 썼다. 서용길 부부는 김OO에게 위협을 느꼈다. 공산당은 그들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심야에 은밀히 경기 벽제의 농가로 도피한 이유다. 하지만 9·28 서울 수복 뒤 이웃들의 눈초리 때문에 벽제에 마냥 숨어있을 수도 없었다. 비망록에 나온 대로 ‘두꺼운 외투 입고 집을 떠난’ 서용길의 선택은 검찰청 자진출두였다.

서용길은 자신이 북에도 가지 않고, 죽지도 않고 생존해있음을 세상에 알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증거 없이 자신을 프락치로 몰아 기소한 오제도 검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여겼다. 그는 1950년 11월19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됐다.

S는 서울에서 신문사를 방문했다.

그래야 오제도가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검찰청에 자진출두해서 그동안의 행동개요를 제출했다.

보안법(위반)으로 감옥에 들어갔지만 부역하지 않았다는 증명이다.

정말 사상이 있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고. 하여튼 (6·25)사변으로 흑백이 판명된 것이다.

그러나 오제도는 하나 남아있는 S가 방해가 된다. 자기가 꾸민 프락치 사건이 무효가 되기 때문에.

S는 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를 아이 업고 데리고 어머니하고 홍제동 고개를 넘어 서울에 들어왔다.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발을 옮겨놓았다. 전시에는 제각기 살길 찾아 살아야 한다.

S는 전의 감방생활과는 판이했다. 감방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 미쳐서 울부짖는 사람, 아무도 밥 한 끼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 가족이 뿔뿔이 헤어진 것이다. S도 같은 입장이다.

눈이 내리는 1·4후퇴에 죄수들은 묶여서 대전형무소로, 그리고 부산(부산형무소)으로 이동됐다. 피난민들이 기차를 타려고 아우성들이다. 중공군이 서울 가까이 와 있다. (중략)

부산에 도착하니 차 안에 인원은 반으로 줄어있었다. 모두 죽은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서용길 전 의원과 함께 한 서영철씨. 서영철 제공

비망록이 묘사하는 풍경은 뒤로 갈수록 비참하다. 서용길은 기차를 타고 부산형무소로 이송될 때 며칠간 물을 한 모금도 못 마셔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을 못할 정도였다. 영어를 잘 했던 그는 이때 간수가 미군 헌병의 오해를 사 일촉즉발의 위기에 몰리자 영어로 변명을 해주고, 목숨을 부지한 간수는 서용길의 청에 따라 체신청장으로 있던 친척(김봉열)에게 연락을 해줘 은혜를 갚는다.

부산에 도착하니 절반이 죽어있었다. 서용길은 살아남았다. 마침내 1951년 2월5일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된다. 부인 이영란이 백방으로 뛰며 구명운동을 펼친 결과였다. 이영란은 비망록을 서용길의 석방소식으로 마무리한 뒤 맨 마지막 장엔 이렇게 적어놓았다.

그 당시는 반대하고 다른 의견을 말하면 저 사람 사상이 이상하다. 빨갱이 아냐?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모든 면에서 매장되고 신체의 위험까지 받아야 했다.

서 의원이 만약 반민특위 검찰관을 하지 않았으면 프락치 사건의 일원으로 집어넣지 않고 옥고도 받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서용길 전 제헌국회의원을 주인공으로 반민특위 해체와 국회프락치 사건의 주요 순간을 기록한 부인 이영란의 비망록. 마지막 쪽에 “반대 의견을 말하면 빨갱이로 몰렸다”는 한탄이 적혀 있다. 서영철 제공

서용길 전 의원이 마지막으로 1967년 총선에 나갔을 때의 포스터. 한겨레 자료

이후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서용길은 정치적 재기에 끝내 실패했다. 고향 아산에서 1954년, 1960년, 1963년, 1967년 총선에 도전했으나 내리 낙선했다. 생계를 위해 서울과 청주에서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마지막으로 서울 도곡동 숙명여고에서 도덕 과목을 가르치다 교사 일도 그만두었다. 서영철씨에 따르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두고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가정경제는 빵점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부인 이영란도 도쿄 일본여자대학에서 유학한 인텔리였다. 이영란은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4남매를 키웠다. 두 사람은 1962년 이혼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아버지와 같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약수 부의장, 노일환 의원 등에 대해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들, 너무 아까운 인재들이었다’며 안타까워하셨어요. 나중에 아버지와는 거리를 두셨지만 존경심만은 버리지 않았고요.”

이영란 여사가 생전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 이영란 여사는 일본여자대학에서 유학했다. 서영철 제공

서용길은 말년에 제헌국회의원들이 모이던 서울 통의동(처음에는 청진동)의 제헌동지회관(현 제헌회관)에 가 하루종일 신문을 보거나 바둑을 두면서 소일했다. 북으로 간 다른 제헌국회의원 자녀들을 만나 “너희 아버지는 아무 죄가 없다”고 위로하기도 했다.

권력에 철저하게 패배했던 서용길은, 그러나 눈을 감기 전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서영철씨의 말이다. “아버지가 세상 떠나시기 1년 전 인생을 돌아보며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셨어요. 신약성서 요한복음 16장33절이죠.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하는 말씀. 어떤 부정이나 권력의 외압에 타협 안 하고 한평생 지조를 지켰다는 아버지의 자부심이 느껴졌어요.”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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