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내에서는 80명의 소장파 때문에 한민당이 제대로 일을 못 했다. 소장파 의원, 특히 반민특위 위원을 제거해야 편하게 되는 경찰과 한민당의 목적은 일치되었다.
일단 두 의원을 잡아들였다.
이구수, 이문원은 북쪽과 연락하여 국회 내에 동조자를 만들었다는 거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소장파이다.
다음은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한 8명의 소장파 의원을 구속했다.
김약수로 말하면 일제 때 모진 고문을 받아가며 독립운동을 펼친 역사에 남을 만한 사람이다.(중략)
이들은 필동 헌병사령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욕탕에 집어넣고 전기를 통하게 하고 구타하고 했다.
헌병사령관은 전봉덕(전혜린 아버지). 후에 목사가 됐다.
이 사건의 검사는 오제도, 선우종원. 김준연은 오제도를 찾아가 왜 S를 그 멤버의 하나로 잡아들이지 않느냐고 재촉했다.
1949년 5월18일, 소장파 이문원·이구수·노일환 의원이 서울시경에 의해 체포됐다. 6월6일엔 서울 명동에 있는 반민특위 사무실이 경찰 습격을 받고 특경대원들과 권승렬 특별검찰부장이 무장해제됐다. 6월8일 이승만은 에이피(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반민특위 무장해제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6월16일 ‘남로당 프락치’ 암호문서를 국부에 숨겼다는 ‘40대 여간첩’ 정재한이 개성에서 체포됐다. 6월21일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8명이 대검찰청 요원들에게 체포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6월26일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암살됐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이승만의 6월 대공세’라고 일컫는다. 이승만이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이다.
비망록에 나오는 김준연은 이승만을 지지했던 한민당 소속 제헌국회의원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ML당 사건)으로 7년간 복역했던 좌익이었지만, 전향했다. 나중에는 법무부 장관이 된다. 비망록엔 “김준연이 수사검사 오제도를 찾아가 왜 서용길을 잡아들이지 않느냐고 재촉했다”고 나와 있으나, 그 출처는 없다. 다만 김준연이 당시 소장파 의원들을 공산당원으로 몰아세우며 이들에 대한 체포를 부추겼음은 사실이다. 그는 동아일보 1949년 5월9일자 지면에 “60여명의 소장파 의원들이 김일성을 따르고 있고 그 선전방침을 충실히 실행하고 있다”고 썼다.
국회프락치 사건 1·2차 검거가 있은 직후 서용길은 숨어있었다. 김구 암살 하루 전인 6월25일 헌병사령부는 신성균 의원과 함께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경찰·검찰에 이어 헌병까지 수사에 뛰어든 셈이다. 비망록은 서용길의 은신처가 서울 명동 성모병원(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의 전신)이라고 증언한다.
S는 위험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양심의 하나도 가책이 없다는 떳떳한 심경으로 태연했다.
장남 명철이가 홍역 후유증으로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집에는 할머니가 지키고 있었다.
성모병원에 S가 있는 것을 아는 것은 수행원 최영화, 나, 중호 뿐이다.
헌병들은 최를 끌고 가서 S의 거처를 알리라고 모진 고문을 했다.
최는 함경도에서 월남한 사람으로서 성대 시절 교수와 제자로 알게 돼 그 당시 취직이 어려운 시국에 S의 수행원이 된 것을 감사하고 충성을 다했다.
최는 끝까지 모른다고 해서 몸을 얻어맞은 탓으로 몸이 구렁이 감기듯 험한 꼴이 되어 처와 그의 어머니는 통곡하고 이렇게 고문을 당했으면 바른대로 알리지 그러느냐고까지 했다.
내수동 집은 형사대가 점령하고 대문만 두드리면 형사가 먼저 맞아 우선 종로서로 끌고 갔다.
마침 일본에 있는 중호 아버지가 찾아왔다. 이분은 할머니 동생이 된다. (중략)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중호를 매달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먼 데서 아들 보러 왔는데, 이 광경을 보고 중호야 알면 말해라고 애원했다. 중호 입에서 명동 성모병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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