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일상 속의 걷기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아무런 압박도 없다. 실패할 확률이 없는 여정인 것이다. 오늘 조금 덜 집중했더라도 내일 다시 걸으면 그만이고, 오늘 풍경이 지루했더라도 그것 나름대로 내 마음의 상태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된다. 이 완전한 자유로움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인위적인 목적성이 사라진 자리에 순수한 존재 자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상태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여여한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훌륭한 순례자가 될 필요도 없고, 대단한 철학자가 될 필요도 없다. 그저 걷는 자로 존재하면 충분하다. 발바닥이 지면에 닿을 때 느껴지는 압력, 무릎이 굽혀졌다가 펴지는 리듬, 가슴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숨결의 흐름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과정에서 내 안의 불필요한 욕망들과 타인의 시선, 사회적 가면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집을 나설 때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이 돌아올 때쯤 텅 비어 있다면, 당신은 오늘 훌륭하게 순례를 마친 것이다. 그 비워진 자리에 비로소 새로운 생명력과 창조적인 영감이 채워질 수 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시간의 축적물이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지나갔던 길이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 고뇌와 희망이 이 땅의 분자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걸으면서 과거의 무수한 발자국들과 대화를 나누는 셈이다.
도심의 길이라면 수많은 노동자들과 이웃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을 것이고, 자연의 길이라면 자연을 지켜온 수많은 생명들의 서사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바라보면, 내가 가진 고민들이 얼마나 작고 일시적인 것인지 깨닫게 된다.
4. 걷는 자의 깨달음, 비워짐에서 다시 시작되는 삶
인류의 역사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서 나는 잠시 반짝였다 사라지는 물방울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물방울이 없다면 강물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우리에게 깊은 위안을 준다. 내가 외롭고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전체의 일부라는 감각을 주기 때문이다. 일상 속의 걷기는 이처럼 나를 확장시키고 세상과 화해하게 만드는 평화의 정치학이다. 멀리 있는 성지만을 고집하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아군과 적군, 성스러운 곳과 속된 곳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의 연장선일 수 있다. 진정한 영성은 속된 곳을 성스럽게 바꾸는 힘에 있다.
당신이 걷는 일상의 길이 바로 그 연금술의 현장이다. 당신의 의식적인 발걸음이 아스팔트를 황금빛 순례길로 변화시킨다. 공간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의 의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이 그 길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 길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금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의미가 있다. 시간과 공간과 내가 만나는 곳이 중요하다. 매일 똑같은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똑같은 풍경이란 없다. 변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의 마음이다.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문을 나선다면, 매일 새로운 세계가 당신 앞에 펼쳐질 것이다. 큰돈을 들여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내 방 문을 열고 나가는 그 순간부터 당신의 위대한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스럽게 땅을 딛어라. 그 발걸음마다 당신의 영혼이 깨어나고, 당신의 삶이 온전해질 것이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성지에서, 지금 바로 순례를 시작하라. 당신의 모든 걸음걸이에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지금 당신이 걷고 있는 곳이 가장 거룩한 성지이다. 우리는 늘 어딘가 특별한 장소를 찾아 떠나야만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먼 나라의 오래된 성전, 수많은 이들의 기도가 쌓인 순례지, 이름난 산과 강을 떠올리며 그곳에 도착해야 비로소 삶이 달라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자리,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공간을 소홀히 지나치곤 한다. 거룩함은 특정한 장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조용히 깨어난다.
발걸음을 잠시 늦추고 주변을 바라보라.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길가의 작은 풀잎,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자동차의 소리까지도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 우리가 의식을 기울일 때, 그 모든 것은 분리된 사물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생명의 결로 다가온다. 그 연결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성지에 서 있는 셈이다.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다. 마음이 깨어 있을 때 평범한 길은 제단이 되고, 우리의 걸음은 기도가 된다. 특별한 장소를 향해 떠나기 전에, 먼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와 화해하고 깊이 만나는 일.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된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지금 이곳이 가장 빛나는 성지임을.
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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