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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 필요 없이 지금 이곳이 가장 빛나는 성지

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

샘터교회 원로목사. 시인. 부산예수살기 대표.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전 상임의장. 탈핵부산시민연대 전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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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걷기를 실천한 사람들 24회]

멀리 떠나는 길, 결국 내면으로 향한다

일상의 길을 순례로 바꾸는 태도와 실천

지금 여기, 발밑에서 완성되는 거룩함

걷는 자의 깨달음, 비워짐에서 다시 시작

2025 겨울 가지산 정상에서 필자

1. 멀리 떠나는 길, 결국 내면으로 향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떠나기를 갈망하는 존재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이국적인 풍경, 끝없이 펼쳐진 산티아고의 황금빛 밀밭, 혹은 구름을 발밑에 둔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바라보며 우리는 매 순간 생각한다. 저곳에 가면 내 삶의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저 거룩한 길을 걸으면 내 안의 혼란이 가라앉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큰돈을 들이고, 바쁜 일상을 쪼개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들의 열정과 용기는 분명 가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은 스페인이나 네팔이라는 이국적인 공간 자체일까, 아니면 그 길을 걸으며 비로소 마주하게 될 내면의 나 자신일까. 성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이 성스러운 이유는 그 땅의 흙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수백 년 동안 그 길을 걸었던 수많은 순례자들의 간절한 염원, 스스로를 비워내고자 했던 침묵, 그리고 발바닥의 통증을 견디며 한 걸음씩 나아갔던 행위의 숭고함이 그 길을 성지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뀐다. 그 간절함과 침묵, 비워냄의 태도를 지금 내가 사는 이곳으로 가져올 수는 없을까. 비행기 표를 끊지 않고도, 거창한 등반 장비가 없어도,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일상 공간을 성지로 만들 수 있다. 들길도 좋고, 산길도 좋고, 도심 속 작은 공원길도 좋다. 산티아고를 걷는 심정으로 걷는다면, 지금 내가 딛고 있는 바로 그 아스팔트와 흙길이 곧 세계 최고의 순례길이 된다.

현대인들은 장소를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 유명 관광지나 트래킹 코스에 가야만 비로소 진정한 휴식이나 영적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일종의 환상이다.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히말라야의 멋진 배경 사진이 내면의 평화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압도당하는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는 있을지언정,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순간 다시 공허해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니라 잠시 동안의 도피에 불과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그들이 얻는 깨달음의 대부분은 풍경 그 자체보다는 걷는 행위와 태도에서 온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으며 소유의 부질함을 깨닫고, 발가락에 잡힌 물집을 보며 내 육체의 한계와 겸손함을 배우며, 몇 시간 동안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세 가지 본질은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오늘 퇴근길에 들르는 동네 뒷산 산책로나, 강변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 도로 옆 보행로에서도 정확히 똑같은 본질을 구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비게이션이나 구글 맵이 가리키는 지도 위의 좌표가 아니다. 그 길을 걷고 있는 당신의 마음의 주파수다.

2022년 가을 다대포 해수욕장 저녁노을 풍경. 가끔 낙동강변 둘레길을 걷는다.

우리는 매일 지나는 길을 다 안다고 착각한다. 익숙함이라는 눈꺼풀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자의 시선으로 동네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모든 공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도시 외곽의 들길이나 강둑길을 걸을 때, 우리는 자연의 가장 솔직한 얼굴을 마주한다. 봄에는 파릇하게 돋아나는 쑥과 냉이의 향을 맡고, 여름에는 잡초의 무성한 생명력과 매미 소리의 진동을 느끼며, 가을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곡식과 마른 풀잎의 서정성을 본다. 겨울의 들판은 어떤가. 모든 것을 비워낸 채 묵묵히 추위를 견디는 대지는 우리에게 기다림의 미학을 가르쳐준다.

들길을 걷는 것은 우주의 거대한 시계바늘과 나의 걸음걸이를 동기화하는 작업이다. 꼭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가야만 고독과 한계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동네 뒷산의 가파른 계단이나 경사로를 오를 때도 우리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허벅지는 터질 것처럼 팽팽해진다. 산길은 우리에게 중력이라는 정직한 법칙을 깨닫게 한다.

땀이 눈으로 흘러내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우고 있던 세상의 걱정거리들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오직 다음 한 걸음을 어디에 디딜 것인가라는 생존과 직결된 본질만 남는다. 그 순간, 동네 뒷산은 당신만의 히말라야가 된다. 도심의 공원 역시 현대인들을 위해 준비된 훌륭한 순례지다. 정형화된 보도블록이나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우리는 바쁜 도시의 소음 속에서 어떻게 나만의 고요를 유지할 수 있는지 연습할 수 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어머니, 벤치에 앉아 쉬는 노인,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인류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회복하기도 한다.

공원길은 고립된 명상이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면서도 내면의 중심을 지키는 시장 바닥에서의 명상을 실천하기 가장 좋은 장소다.

산티아고를 걷는 심정으로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리를 움직이는 물리적 행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아라는 세 가지 요소가 완벽하게 결합하는 철학적 사건이다. 우리의 마음은 대개 현재에 있지 않고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에 묶여 있다. 길을 걸을 때 비로소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오른발이 땅에 닿는 순간, 왼발이 지면을 차고 나가는 순간, 그 찰나의 시간들이 모여 걸음이 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 내가 내딛는 한 걸음뿐이다. 일상 속의 걷기는 우리를 시간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오롯이 지금에 집중하게 만드는 강력한 도구다.

또한 우리는 종종 내가 서 있는 이곳을 비하한다. 이 지긋지긋한 도시, 맨날 똑같은 동네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이 서 있는 그 위도와 경도는 온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고유한 공간이다. 히말라야의 꼭대기나 스페인의 벌판만 우주가 아니다. 당신의 발밑에 있는 흙 한 줌, 아스팔트 한 조각도 모두 지구의 일부이며, 우주의 먼지가 모여 만들어진 기적의 물질들이다. 공간의 등급을 매기는 인간의 편견을 버릴 때, 내가 서 있는 방 한 칸, 집 앞 골목길은 곧 우주의 중심이자 신성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앉아 있을 때 머리는 복잡해지지만, 걸을 때 머리는 맑아진다.

 

2025년 여름 신불산 산행. 내가 자주 찾는 산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걸을 때만 명상할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말했다. 니체 역시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고 했다. 걸을 때 우리의 몸은 일정한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이 리듬은 뇌세포를 자극하며 영혼의 먼지를 털어낸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도저히 풀리지 않던 인간관계의 실타래나 업무상의 난제들이, 신기하게도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경험을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걷기는 내 안의 진짜 나와 대화하는 가장 정직한 통신 수단이다. 아무리 좋은 철학도 실천하지 않으면 관념에 불과하다.

2. 일상의 길을 순례로 바꾸는 태도와 실천

내일부터 당장 집 앞을 나설 때, 가슴속에 몇 가지 순례자의 태도를 품어보자. 첫째는 스마트폰과의 결별이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다. 풍경을 담느라 정작 자신의 내면을 담지 못한다. 일상 순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어폰으로 음악이나 유튜브, 팟캐스트를 들으며 걷는 것은 걷는 행위를 소모하는 것에 불과하다.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내 발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를 들어라. 그 적막함과 심심함 속에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난다.

둘째는 오감을 열어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다. 매일 걷는 길이라도 매일 다르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보도블록 틈새의 민들레가 보일 수 있고, 늘 지나치던 담벼락의 능소화가 눈에 들어올 수 있다. 공기의 습도, 햇살이 내리쬐는 각도, 흙내음의 짙고 옅음은 매시간 변한다. 마치 태어나서 이 길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관찰하라. 경이로움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에 있지 않고, 새로운 눈을 갖는 것에 있다.

셋째는 속도를 줄이는 일이다. 우리는 늘 어딘가를 향해 서둘러 왔다. 더 빨리, 더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러나 걸음의 의미는 도착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평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걸으며 발바닥 전체를 땅에 맡겨보자. 발뒤꿈치에서 시작해 발가락 끝까지 이어지는 감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가 단순한 바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리임을 느끼게 된다. 속도를 낮출수록 주변의 소리와 빛, 바람의 결이 또렷해지고, 그 안에서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넷째는 무조건적인 수용이다. 하늘이 흐려도, 갑자기 비가 내려도, 길 위에 어지럽게 놓인 것들이 눈에 들어와도 그것을 판단하거나 밀어내려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펼쳐진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다. 좋고 나쁨의 기준을 잠시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현실과 다투지 않게 된다. 수용은 체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와 화해하는 태도다. 그 화해 속에서 걸음은 한층 가벼워지고, 마음은 예상치 못한 평온에 닿는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는 반드시 탁족을 하며 피로를 푼다.

마지막은 감사의 환대다. 오늘 하루 나에게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고, 숨 쉴 수 있는 맑은 공기가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 다녔지만, 결국 파랑새는 내 집 마당 새장 안에 있었다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어쩌면 내면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외국의 유명한 길, 거대한 자연, 값비싼 여행 상품을 기웃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진리나 평온함은 물리적 거리와 비례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지금 서 있는 방 안에서, 혹은 집 앞 골목길에서 평화를 찾지 못한다면, 스페인의 팔백 킬로미터 순례길을 걸어도,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라도 결국 똑같은 공허함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의 마음이며, 시간과 공간과 내가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다. 멀리 가기 위해 짐을 싸는 수고를 멈추어라. 거창한 계획을 세우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라. 그저 편한 신발 한 켤레를 신고 문밖을 나서라. 그리고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 스스로에게 속삭여라. 여기서부터 나의 산티아고가 시작된다고 말이다. 당신의 발밑이 바로 성지다. 그 길 위에서, 오롯이 당신만의 우주를 만나기를 소망한다.

3. 지금 여기, 발밑에서 완성되는 성지

우리가 발을 내딛는 모든 곳이 사실은 거룩한 땅이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위대한 탐험가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곳은 외부의 지리적 정점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이었다. 극단의 고독과 추위, 혹은 끝없는 지평선 앞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인간의 미약함과 동시에 생명의 경이로움이었다. 일상의 걷기는 이러한 거대 여정의 에센스를 매일 조금씩 나누어 마시는 일과 같다.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는 가로수의 잎사귀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우주의 역동성을 읽을 수 있고, 저녁 노을이 아파트 숲 사이로 붉게 물드는 풍경에서 히말라야의 일몰 못지않은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영혼의 깊이다. 깊은 영혼은 작은 조약돌 하나에서도 신의 지문을 발견하지만, 얕은 영혼은 그 어떤 웅장한 신전 앞에서도 지루함만을 느낄 뿐이다. 그러므로 먼 곳으로의 여행은 때로 우리의 영혼을 게으르게 만든다. 거대한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만 겨우 깨어나는 영혼은 자생력이 없다. 반면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스스로 경탄할 줄 아는 영혼은 강인하다. 그들은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환경을 창조한다. 매일 걷는 골목길을 자신만의 수행 공간으로 삼는 사람은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중심을 갖게 된다.

걷기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신체 활동이지만 가장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우리는 대지와 소통하고, 한 호흡을 마실 때마다 공기 중의 수많은 생명들과 연결된다. 이 연결감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순례의 진짜 목적이다. 머나먼 이국땅의 길들은 단지 우리에게 이 연결감을 강제적으로 깨우쳐주는 장치에 불과하다. 일상에서 이 장치를 스스로 가동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 순간 여행자이자 순례자로 살 수 있다. 돈을 들여 먼 곳으로 떠나는 행위에는 일종의 보상 심리가 작용하기 쉽다. 내가 이만큼의 비용과 시간을 투자했으니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거대한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어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이러한 조급함은 오히려 순수한 몰입을 방해하고, 길 위에 서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미래의 결과만을 계산하게 만든다.

 

작은 나무 십자가를 손에 쥐고 "한반도의 평화를!" 암송하며 걷는다.

반면 일상 속의 걷기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아무런 압박도 없다. 실패할 확률이 없는 여정인 것이다. 오늘 조금 덜 집중했더라도 내일 다시 걸으면 그만이고, 오늘 풍경이 지루했더라도 그것 나름대로 내 마음의 상태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된다. 이 완전한 자유로움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인위적인 목적성이 사라진 자리에 순수한 존재 자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상태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여여한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훌륭한 순례자가 될 필요도 없고, 대단한 철학자가 될 필요도 없다. 그저 걷는 자로 존재하면 충분하다. 발바닥이 지면에 닿을 때 느껴지는 압력, 무릎이 굽혀졌다가 펴지는 리듬, 가슴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숨결의 흐름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과정에서 내 안의 불필요한 욕망들과 타인의 시선, 사회적 가면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집을 나설 때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이 돌아올 때쯤 텅 비어 있다면, 당신은 오늘 훌륭하게 순례를 마친 것이다. 그 비워진 자리에 비로소 새로운 생명력과 창조적인 영감이 채워질 수 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시간의 축적물이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지나갔던 길이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 고뇌와 희망이 이 땅의 분자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걸으면서 과거의 무수한 발자국들과 대화를 나누는 셈이다.

도심의 길이라면 수많은 노동자들과 이웃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을 것이고, 자연의 길이라면 자연을 지켜온 수많은 생명들의 서사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바라보면, 내가 가진 고민들이 얼마나 작고 일시적인 것인지 깨닫게 된다.

4. 걷는 자의 깨달음, 비워짐에서 다시 시작되는 삶

인류의 역사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서 나는 잠시 반짝였다 사라지는 물방울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물방울이 없다면 강물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우리에게 깊은 위안을 준다. 내가 외롭고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전체의 일부라는 감각을 주기 때문이다. 일상 속의 걷기는 이처럼 나를 확장시키고 세상과 화해하게 만드는 평화의 정치학이다. 멀리 있는 성지만을 고집하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아군과 적군, 성스러운 곳과 속된 곳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의 연장선일 수 있다. 진정한 영성은 속된 곳을 성스럽게 바꾸는 힘에 있다.

당신이 걷는 일상의 길이 바로 그 연금술의 현장이다. 당신의 의식적인 발걸음이 아스팔트를 황금빛 순례길로 변화시킨다. 공간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의 의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이 그 길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 길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금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의미가 있다. 시간과 공간과 내가 만나는 곳이 중요하다. 매일 똑같은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똑같은 풍경이란 없다. 변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의 마음이다.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문을 나선다면, 매일 새로운 세계가 당신 앞에 펼쳐질 것이다. 큰돈을 들여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내 방 문을 열고 나가는 그 순간부터 당신의 위대한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스럽게 땅을 딛어라. 그 발걸음마다 당신의 영혼이 깨어나고, 당신의 삶이 온전해질 것이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성지에서, 지금 바로 순례를 시작하라. 당신의 모든 걸음걸이에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지금 당신이 걷고 있는 곳이 가장 거룩한 성지이다. 우리는 늘 어딘가 특별한 장소를 찾아 떠나야만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먼 나라의 오래된 성전, 수많은 이들의 기도가 쌓인 순례지, 이름난 산과 강을 떠올리며 그곳에 도착해야 비로소 삶이 달라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자리,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공간을 소홀히 지나치곤 한다. 거룩함은 특정한 장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조용히 깨어난다.

발걸음을 잠시 늦추고 주변을 바라보라.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길가의 작은 풀잎,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자동차의 소리까지도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 우리가 의식을 기울일 때, 그 모든 것은 분리된 사물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생명의 결로 다가온다. 그 연결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성지에 서 있는 셈이다.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다. 마음이 깨어 있을 때 평범한 길은 제단이 되고, 우리의 걸음은 기도가 된다. 특별한 장소를 향해 떠나기 전에, 먼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와 화해하고 깊이 만나는 일.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된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지금 이곳이 가장 빛나는 성지임을.

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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