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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라마같은 현실판 김부장 "북한 장교 납치 작전하다가..."

▲실제 북파공작원 등장!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판 김부장’ 이야기 오마이뉴스

말도(唜島, 현 강화군 말도리)에는 '간첩'이 살았다.

북한 황해도 연백과 6km 떨어진 서해 최전방 섬 말도. 북방한계선을 코앞에 둔 그 섬에서 '김태윤'에게 최종 명령이 떨어졌다. 1970년 9월, 북에 침투해 "군관 동무(북한 장교)"를 납치해 올 것. 그 임무가 있기까지 갯벌에 파묻혀 보트를 짊어지는 고강도 해상 훈련, 이른바 "UDU(첩보부대) 훈련"이 계속됐다.

본명도 없이 북파돼 특수 임무를 수행한 북파공작원. 드라마 '김부장'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목숨 건 임무를 마치고 살아남은 김부장처럼, 실제 북파 공작에 투입된 김태윤도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김부장' 종영 사흘 뒤인 지난 7월 28일 <오마이뉴스>는 김태윤씨를 만났다. 민간 북파공작원 시절 '김태윤'이 아닌 진짜 이름 '김윤태(78)', 그는 50여 년 전 말도에서 찍은 사진을 세상에 처음 공개했다.

북파공작원 출신 김윤태씨(특수임무수행자 유족회 부회장). ⓒ 권우성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UDU 훈련받다 쉬는 사진, 뻘(갯벌) 훈련받다 쉬는 사진, 산악 훈련받다 쉬는 사진, '큰 선생(교관)'이랑 찍은 사진. 훈련받다 배고프면 뱀을 산 채로 벗겨 내장까지 잡아먹고 그랬어. 어휴 진짜, 생각도 하기 싫지. 스물한 살 때 일인데 일흔여덟인 지금도 생생하다니까."

드라마는 끝났지만 '현실판 김부장' 김윤태씨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2004년 북파공작원을 위한 보상법이 발효된 뒤로도 여전히 남은 과제가 많다고 했다. 특수임무수행자·유족동지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씨의 사연을 들은 건 이날 서울 용산구 동지회 사무실에서였다. 하태준 동지회 회장도 김씨 옆에서 설명을 보탰다.

'북으로 침투하라', 두 번의 작전

SBS 드라마 <김부장>의 한 장면 ⓒ SBS

"김부장 드라마 보니까 실감이 좀 나더만. 북파공작원 출신은 싸움을 다 잘해. (공작원이 되면) 처음부터 권총을 주면서 쏴 죽이라고 그래. 훈련받을 때도 역기를 못 들면 (교관이) 곡괭이자루로 몸을 막 찍는데, 그럼 벌떡 일어나게 되지. 진짜 '인간 병기'를 만드는 거야."

1969년의 일이었다. "물색조" 군 요원이 김씨에게 "쌍권총 차고 서울 시내 누비는 부대"라며 특수부대 입대를 권했다. 임무 한 번 수행하고 전역하면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 없다"는 제안과 함께였다. 원래도 해병대 입대를 생각했던 김씨는 1970년 4월 종로3가 한 다방에서 '부장'이란 사람을 만났다. "넘버(차량번호)도 없는 까만 지프차"가 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차 딱 탔는데 나보고 '가운데 앉아라' 그러더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 안경을 씌우더라. 어디로 가는지 루트를 모르게 하려고. 종로3가에서 의정부를 거쳐 운천(경기도 포천)까지 가는데 헌병검문소를 프리 패스로 다 통과했어. '여기 잘못 들어온 것 같다' 생각했을 땐 이미 늦었던 거야."

북파공작원 출신 김윤태씨(특수임무수행자 유족회 부회장). ⓒ 권우성

강원도 철원 외딴 민간인 집으로 보내진 김씨는 북파 공작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모래주머니 산악 구보 훈련, 급소 겨냥 살상 훈련, 휴전선을 넘기 위한 장애물 훈련 등이 이어졌다. 김씨는 북한 평강에 홀로 침투하는 임무를 하달받았다. "나침반과 대검과 미숫가루와 말린 소고기"를 들고 "괴뢰군(북한군) 복장"으로 레이더 첩보를 수집해 복귀했다.

"작전하고 왔으니까 한 20일을 푹 쉬었어. 그러고 철수하는 줄 알았는데 서울을 거쳐 인천에 나를 떨어뜨리더라. 다른 두 요원이랑 배 타고 7시간 걸려 말도라는 섬에 갔어. 거기서 똥물을 토해가면서 계속 훈련받았지. 셋이서 작전을 하는데... 그게 뭐냐면 (북한군 군관을) 납치해 오는 거야."

1970년 9월께 김씨에게 하달된 납치 작전. 그런데 한 요원이 침투를 거부했다. 북한의 경계가 심해 "가 봐야 잡혀서 다 죽는다"며 임무를 포기한 것이었다. 작전 수행을 못 하게 된 김씨는 다시 배를 타고 인천에 떨궈졌다.

"본부에서 나를 철수시키라고 연락이 온 거야. 보상이고 뭐고 없고 인천에 떨어뜨리니 그걸로 끝이야. 그때는 반공법(1980년 국가보안법에 통합되며 폐지)이 진짜 셌어. 말도에서 있었던 일을 나가서 발설하지 않겠다고 선서하고 (지장도) 찍고, 그렇게 살아 나온 거야. 얘기하면 안 되니까... 우리 집사람도 몰랐지."

집으로 돌아간 1970년 10월까지, 그 모든 게 1년도 안 돼 벌어진 일이었다.

'김부장'들을 버린 대한민국

북파공작원 출신 김윤태씨(특수임무수행자 유족회 부회장). ⓒ 권우성

김윤태씨는 사회로 복귀했지만 국가의 사찰은 집요하게 계속됐다.

"두 사람이 나를 감시하느라 계속 쫓아다녔어. 이사 가면 제일 먼저 전화 오는 것도 걔네야. '너네 왜 자꾸 이러냐'고 하면 '이번엔 비행기 조종술 가르치는 거다' '정보사 기간병으로 해주겠다'며 다시 나를 데려가려는 거야. 근데 내가 (북파공작원으로) 한 번 갔다 왔는데 또 가겠어? 그래서 도망 다니고 막 그랬어."

당시 정부는 특수임무수행자 1만 3000여 명을 양성했으며 그중 7800여 명이 실종·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마저도 추정치다. 수많은 북파공작원이 생포되고, 죽고, 행방불명됐다. 김씨는 용케 살아남았지만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했다. 성질나면 자기도 모르게 "살기 도는 세모눈으로 난폭하게 변해 버린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대한민국은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감춰. 정보사에 가니까 나보고 '이런 부대가 어디 있냐' 그러더라니까? 그래서 내가 귀싸대기를 때려버렸지. '야 이 새끼야. 나는 생존자야 생존자, 임무 갔다 온 사람이야. 그런데도 (부대가) 없다고?' 나한테까지 그러는데 유족들한텐 얼마나 그러겠어."

2004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발효되고 김씨도 30여 년 만에 보상을 받았지만, 특수임무수행자·유족동지회에 따르면 지금도 '법 테두리 안'에서 제외된 이들이 많다. 여전히 집계되지 않거나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북파공작원 출신과 유족들. "국가가 은폐한 이 어마어마한 숫자"를 두고 김씨 옆에 있던 하태준 회장이 말을 보탰다.

북파공작원 출신 김윤태씨(특수임무수행자 유족회 부회장). ⓒ 권우성

"국가가 법으로 북파공작원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젠 감출 게 아니에요. 첫째는 국가의 공식 사과와 위로가 있어야 하고요. 둘째는 북파공작원이 왜 이런 피폐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진상 규명이 있어야 해요. 국가의 비공식적 부름을 받고 목숨을 걸었지만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해요."

김씨도 '자신들을 버린 국가'에 묻는다. 뒤늦게라도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겠느냐고, 드라마 '김부장'으로 모아진 관심이 일회성으로 끝나선 안 된다고. 그가 바람을 담아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에게 바라는 건) 우리들의 명예 회복. 북파공작원도 유족도 빨리 찾아서 보상해 주고 해야죠. 아직 억울한 사람이 많다니까. 연세가 많아서 다들 돌아가시기도 했고. 정부에서 빨리빨리 밝혀줘야 해. 유족들의 명예를 찾아줘야 해."

#김부장#북파공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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