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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좀비가 아니었구나, 너도 외롭구나

 

등록 : 2014.01.3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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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 객차에서 승객들이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od@hani.co.kr

[표지이야기] 멀리 있는 당신을 찾아 안부를 묻는 ‘안녕들 하십니까’와 ‘응답하라’의 열풍
진정한 개인을 찾기 힘든 한국, 공동체를 향한 열망과 옛날 그리운 향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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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너를 찾고 있었구나.

 

상념은 뒤늦게 찾아온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지나가고 <응답하라 1994> 드라마도 끝나고. 그러나 여전히 끝없이 패러디되며 울림이 끝나지 않은 두 문장은 모두 ‘너’를 찾고 있다. 옆에 있는 당신이라기보다는 멀리 있는 너. 나와 비슷하게 ‘안녕하지 못한 당신’, 나와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당신. 그것은 당신도 나처럼 고립돼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나만 좀비가 아니었구나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고, 몸은 어쨌든 하루를 견디고, 일은 그럭저럭 굴러가고, 다행히 집안에 큰 우환은 없다. 해고되지 않았으니 잡혀가지 않았으니 아프지 않으니까 감히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헛헛하다.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처럼. 가까이 있는 이에게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고, 멀리 있는 당신에게 응답하라고 호소하는 아우성, 그것은 남의 목소리가 아니다.

 

 

 

“의미는 나로부터가 아니라 너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은 나를 너로 만드는 과정이다. 성장이 나로 사는 것을 받쳐줬다. 경제도 성장하고 집 평수도 느니까 그나마 헛헛함이 채워졌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우리는 끔찍할 정도로 너가 되는 연습이 안 돼 있다.”-사회학자 엄기호

 

 

 

태초부터 외로움은 있었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외로움은 세상에 세들어 사는 월세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시인은 쓰지 않았던가. 어쩌면 우리는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가수는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일찍이. 묵묵히 견뎌야 마땅할 터인데, 자꾸만 아우성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잉여들.” 엄기호 사회학자가 말했다. 어머, 나만 좀비가 아니었구나, 위안이 든다. 헛헛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의미는 나로부터가 아니라 너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 “우리가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은 나를 너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힐링을 설파하는 이들은 “나로부터 의미를 찾으라”고 속삭인다. “나한테도 너가 있고, 나도 누군가한테 너가 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나 아니면 남이다.” 하루이틀 이렇게 살아온 것도 아닌데, 지금 더 헛헛한 이유는? “성장이 나로 사는 것을 받쳐줬다. 경제도 성장하고 집 평수도 느니까 그나마 헛헛함이 채워졌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우리는 끔찍할 정도로 너가 되는 연습이 안 돼 있다.”

 

너가 되어야 하는구나. 그런데 너가 되기엔 힘이 달린다. 에너지가 부족하다. 다시 엄기호씨는 “‘굳이’에 비밀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처지는 영육을 붙잡고 ‘굳이’ 무언가를 해야 비로소 의미 있는 너가 된다는 말씀. 그는 대학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요즘 청년들은 굳이 연애를 하려 하지 않고 연애가 끝나도 굳이 이어붙이려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러면 요즘 젊은이를 만나보자. 40대의 외로움은 나를 통해, 노년의 쓸쓸함은 어머니를 통해, 느낌 아니까.

 

회사에 인턴으로 온 20대 남녀에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대학교 졸업반, 그녀의 일과.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9시에 등교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강의와 학교 내 알바를 정신없이 오간다. 그리고 저녁 6시부터 밤 9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한다. 외로울 시간도 없겠다. 그러나 혼자 있는 밤이면 “모든 사람이 중력을 잃어버리는 상태”가 찾아온다. 의미 있는 사람이 없다고 느낀다.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뜨는 것이 아니라 어제와 같은 오늘의 태양이라고 느끼는 아침도 있다.” 옆에 앉은 그도 하루 종일 공부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 공부한 게 쓸모가 있나?” 회의에 시달린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에 대한 희망을 주지 못하는 사회, “연애는 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굳이 누구를 배려해가면서 만날 마음이 지금은 없다”고 답했다.

 

 

SNS, 로맨틱 코미디 혹은 자기복제

 

 

누구나 하나쯤 중독을 달고 산다. 외로운 당신의 마지막 동아줄, 네트워크에 매달린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20대 중반에 고향을 떠나온 그는 “이상향은 부산, 현실은 대구에 있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에 들어가 웃기는 동영상을 보면서 향수를 달랜다. 친구가 누른 페이스북 ‘좋아요’는 여기로 오지 못하는 친구가 가져온 동영상 같다. 그만이 아니다. 나의 말을 아는 너, 나의 추억을 공유하는 당신과 연결되기 위해 우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매달린다.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는 쉽지 않다. 그러니 자꾸만 멀리 있는 너를 부른다. 그러나 SNS의 신기루를 경험한 뒤다. 이제는 안다.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 난망한 일이란 것을. 엄기호씨는 이런 SNS를 통한 관계를 “쌉쌀한 것은 빼고 달짝지근한 것만 취하는 로맨틱 코미디 같다”고 비유했다.

 

 

 

“개인화가 진행돼 공동체에 대한 역진적 그리움이 발생한 결과는 아닌 듯싶다. 오히려 개인화가 덜 진행된 결과로 보인다. ‘응답하라’에서 보이는 회고는 집단적 회고다. 원래 노스탤지어는 복원 불가능한 것에 대한 회한의 정서다. 지금 한국은 1990년대를 즐겁게 회고한다.” -노명우 교수

 

 

 

네트워크에 매달려도 헛헛함은 지워지지 않는다. 예전엔 당신과 연결될 방법이 없어서 외롭다는 변명이 있었지만, 이제는 연결될 망이 있는데도 외롭다. 자책감이 더해진다. 그러니 더욱 외롭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문화비평)는 “끝없는 자기복제”라고 지적했다. SNS는 나와 다른 타자와의 소통이 아니라 나와 의견이 같은 이들을 모으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기복제를 통한 자기확인은 허망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기 시작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문화연구)는 ‘안녕들’에 대해 “고독의 원인을 개인의 취향으로 보지 않고 경제·노동·도시·주거의 사회문제로 규정해 함께 풀어보자는 제안”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질문에는 “공동체 문화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다. 그러나 열망은 2008년 촛불처럼 번지지는 않았다. ‘안녕들’에 담긴 ‘껄끄러운 진실’을 말하는 이도 있다. 이택광 교수는 ‘자기계발의 흔적’을 지적했다. “안녕들의 타자는 윤리적 타자다. 자기계발의 벽에 부딪히자 ‘왜’를 고민하다 너에 대한 호출이 없어서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비판을 통해서 완성되는 나. 여기서 너는 또 다른 나로서 너다.”

 

지금 여기서 가장 잘 팔리는 향수는 ‘응답하라’다. 마케팅 수단으로 숱하게 패러디되는 ‘응답하라’는 대형마트에서 1990년대 유행했던 브랜드 옷을 다시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나와 추억을 공유하는 당신, 응답하라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한쪽은 민주화, 한쪽은 종북 논리, 정치도 자꾸만 과거로 회귀한다. 한국적 향수의 향기에 대해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화가 진행돼 공동체에 대한 역진적 그리움이 발생한 결과는 아닌 듯싶다. 오히려 개인화가 상대적으로 덜 진행된 결과로 보인다. ‘응답하라’에서 보이는 회고는 집단적 회고다. 과거를 같이 회고할 누군가를 열심히 찾는다. 원래 노스탤지어(향수)는 복원 불가능한 것에 대한 회한의 정서다. 지금 한국은 1990년대를 즐겁게 회고한다. 더구나 현재적 복원에 가깝다.” 마침 ‘아이러브스쿨’의 동창회 열풍은 ‘네이버 밴드’로 다시 살아났다. 수도권에 2천만여 인구가 몰려 살고, 인터넷 인프라는 지구촌 최고 수준이다. 누군가 찾으면 찾아질 것 같은데 찾아지지 않는다. 찾아도 외로움은 풀리지 않는다. 손에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신기루다.

 

 

종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매체는 외로움을 보여주고 외로움을 판매한다. 이택광 교수는 ‘문화적 거울’에 대해 말했다. “외로움은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면서 성찰할 때 발생한다. 자신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은 매체가 발달할수록 커지고 강화된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것처럼, ‘응답하라’고 호명하자 사람들은 외로움을 발견하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 교수의 지적처럼 “문화적 거울은 훨씬 상징적이고 정서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외로움을 파고드는 적들도 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이름도 희미한 옛날옛날 유명인들을 끊임없이 등장시키는 종합편성채널(종편) 방송. 종편의 핵심은 정치가 아닐지 모른다. 종편의 극우적 정치에 공감하지 않는 중·장년도 자신의 시대와 함께했던 이들이 등장하는 방송을 보면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확인한다. ‘샤우팅’하는 정치쇼가 아니라 당신의 어제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하는 토크쇼가 종편의 핵심이다. 혼자만의 방에 우두커니 앉은 노년은 이들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그것이 거짓 위로라 해도 달콤하다. 달콤한 옛 얘기는 당신의 쓸쓸한 오늘을 위로한다. 노년을 현재형 인간으로 만든다. 그래서 종편은 일종의 향수 산업이다. 엄기호씨는 “말의 세계에서 추방된 노인들을 종편과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말의 세계로 끌어들였다”고 표현했다. 그들을 외면한 민주화 세대가 어쩌면 자초한 일이다. 물론 이유는 있다. “그들을 역사적 주체로 호명하는 순간 박정희라는 상징이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엄기호씨는 딜레마를 지적했다.

 

고독은 이제 독신의 문제만이 아니다. 진정한 소통이 없는 관계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늘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마인드프리즘 대표)는 “존재에 대한 사랑과 인정은 산소와 같다”고 표현했다. 존재 자체로 사람을 주목하고, 존재 자체로 서로를 축복하는 관계는 점점 줄었다. 아이들 한명 한명에 집중하기에 교사는 버겁다. 정혜신 박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먹었냐’ 손 잡아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직장에서는 해고 위협에 시달리고 가정에서는 비교의 스트레스에 지친다. 홀로서라고 하지만, 홀로서기는 홀로 하지 못한다. 정혜신 박사는 “축복받고 사랑받고 위로받는 관계를 경험해야 비로소 홀로서기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홀로서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 소리가 넘친다. 엄기호씨는 “그런데 자기 고통만 넘쳐난다. 대통령부터 걸인까지 내 고통을 들어달라 호소하지만, 서로 얼굴을 보며 고통의 소리를 들어주는 너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의미 있는 너가 되지 못한 너는 불편한 너가 된다.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에서 ‘굳이’ 소모되느니 차라리 안전한 너를 택한다. 비판이 어려운 멀리 있는 너다. 그러나 멀리 있는 너의 응답은 얻기 어렵다. 이런 고통을 잊으려 누구나 하나씩 가벼운 중독에 기대어 산다. 무심코 반복적으로 ‘무슨 짓’을 하다가 외로워서 이러나 의심한다. 문제가 생기면 인터넷부터 찾는다. 엄기호씨는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슬기로우냐가 아니라, 어떤 레퍼런스(참조) 집단을 가지고 있느냐다. 다들 이런 집단이 별로 없다. 이것을 인터넷 정보로 대체하려 하지만 정작 인생의 문제가 닥치면 정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독하기도 친교를 나누기도 어려워

 

 

고독과 친교의 이분법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고전연구가 고미숙 박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도 있듯이, 고독 안에서 편안할 수 있어야 우주적 인드라망(우주 만물이 한 몸이자 한 생명이라는 깨달음)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근대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고독을 누리는 능력도, 친교를 나누는 소통도 점점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현상의 근원에 자연과 인간의 단절이 있다고 보았다. “문명이 발달하면 혼자서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외부에 대해 무관심해진다. 근대 이전에는 먹고사는 행위 자체가 공동체적 연대를 전제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적 전제는 천지만물에 대한 변화를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난해도 이런 연결 고리가 무의미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작금의 현상은 운명적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몸이다. 그는 “몸에서 출발하면 소통이란 결국 몸을 적극 활용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삶의 근본 문제가 소통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도 있듯이, 고독 안에서 편안할 수 있어야 우주적 인드라망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근대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고독을 누리는 능력도, 친교를 나누는 소통도 점점 어려워졌다.” -고전연구가 고미숙

 

 

 

그렇다고 외로움이 모두에게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로움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문제다. ‘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쓴 노명우 교수는 “외로움을 선택하는 것이 희생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외로움을 통해 얻게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책은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시대에 ‘다 함께 홀로서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동연 교수는 이런 집단의 출현에 대해 “소외감과는 다른 개인화 경향”이라고 분석했다. 공동체는 사라지고 있으나 개인은 나타나지 않은 자리에 혼란은 더해진다. 가족이나 직장에서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우리는 ‘나와 같은 너’ ‘확장된 나’다. 그 배경에는 가족주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노명우 교수는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가족주의의 유지냐 약화냐가 아니다”라며 “가족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족이기 때문에 같아야 한다는 논리가 모두를 괴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가족 역시 사회처럼 이질적인 정서와 사회관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의미 있는 너가 되기에 서투른 이유를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이렇게 분석했다. “우리 사회의 초고속 근대화, 불균형 발전, 토건 자본주의는 근대적 주체의 개별화와 분화를 가져왔다. 사람을 유기체적 연대의 존재로 향하게 하기보다는 자기 생각만 하는 일중독 상태로 만들었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이들은 지금 더 이상 일에서 보람을 찾기 어려워한다. 아니, 현 상태의 유지조차 버겁다. 사회가 구성원을 섭섭함과 배신감에 몸을 떠는 존재로,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존재로, 좀비로 만들어버렸다.”

 

 

공포와 직면하지 않으면 좀비가 된다

 

 

때로 타자는 공포다. 그러나 공포와 직면하지 않으면 좀비가 된다. 가끔 자신이 좀비가 아닐까 의심하는 당신, 혼자가 아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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