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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대통령 덕에 한국이 잘산다? "결코 아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0> 해방과 분단, 열다섯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3.09 01:32:07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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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농지 개혁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많은 연구가 이뤄진 주제이자, 그럼에도 의견이 매우 엇갈린 사안이다. 일각에서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으로 대표되는 진보 학계가 북한의 토지 개혁은 긍정적으로, 남한의 농지 개혁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아니냐'고 공격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나. 토지 개혁과 농지 개혁, 이렇게 용어가 다른 것도 눈에 들어온다.

 

서중석 : 이 부분도 왜곡과 일방적인 주장이 많다. 기초적인 자료나 증언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말하는 경우가 뉴라이트뿐만 아니라 진보 세력 가운데에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먼저 농지 개혁과 토지 개혁, 왜 용어가 다른가? (1948년) 조봉암의 농림부에서 처음에 만든 건 토지 개혁안이었다. 국회에서 구체화하면서 농지 개혁 법안이 됐다. 무슨 차이가 있냐. 국회에서 만든 농지 개혁안을 보면 과수원이라든가 염전이 빠져 있다. 모든 토지가 들어간 게 아니다. 그래서 (일부) 대토지 소유자들이 (농지 개혁 대상 토지를) 염전으로 바꿔버려 나중에 문제가 생기고 그런다. 모든 토지가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농지 개혁안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다.

 

농지 개혁에 대해 차이가 나는 주장이 참 많았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이전에 진보 세력이라고 할까,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은 '사실상 농지 개혁이 참 잘못된 것이다.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지주 중심으로 된 것이다'라는 주장을 많이 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1권에서도 아무개 교수가 그런 주장을 했다. 그런데 장상환(경상대 교수) 씨가 학위 논문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하고 현지를 답사해 증언을 채록하면서, 그런 주장들은 진보 세력에서 많이 없어졌다. 지금은 진보 세력 가운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1권은 1979년에 나왔다. 장상환 교수가 농지 문제에 대해 쓴 박사 학위 논문이 나온 건 1995년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농지 개혁은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와 함께 국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서중석 : 외국 학자 중엔 '농지 개혁은 미국 공로'(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해외 학자들이 제일 궁금하게 여긴 건 도대체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그전에 일본, 그리고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 같은 데가 어떻게 엄청난 경제 발전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국내총생산(GDP)에서 한때는 일본이 2위, 지금은 중국이 2위 이렇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냐에 대한 여러 연구가 있었다.

 

이 지역들의 공통점은 토지 개혁이다. 일본은 패전 이후에야 토지 개혁을 했고 중국은 1950년대 초에 토지 개혁을 했다. 대만도 장개석(장제스) 정권이 토지 개혁을 했고 한국도 농지 개혁을 했다. 그러니 네 지역에서 이 점이 아주 공통적인 것이다.

 

(이와 달리) 중남미와 필리핀 등 동남아 일부 국가가 그렇게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도, 그리고 한때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것 같다가 왜 1960년대 이후에 저렇게 뒤처져 '네 마리' 용과 일본, 중국과는 비교가 안 되게 되었는가. 이 지역들이 전부 토지 개혁이 안 됐다. 예컨대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이 토지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는데, 그걸 할 수가 없었다. 마닐라 외곽에 가봐라. '성주'들이 있는데 (토지 개혁을) 어떻게 하겠나.

 

그런데 이(런 점에 주목한 외국) 사람들은 '대만이건 일본이건 (토지 개혁의 동력은) 미국의 압력이다. 한국(의 농지 개혁)도 미국의 압력 때문에 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미국의 압력 때문에 더 구체적으로 됐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으나 대만의 경우 어디까지를 미국의 압력으로 봐야 하는지 (의문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그런 주장이 과연 맞겠는가?

 

한국인들은 처음부터 토지 개혁을 친일파 처단과 함께 열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은 (전면적인 토지 개혁을) 끝내 못했다. 정부 수립 직전에 와서야 (미군정은) 귀속 농지, 그러니까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에 한해서만 소작농에게 토지를 줬다. 아주 부분적으로, 그것도 마지막에 와서야 한 것이다.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 압력을 넣은 건 사실이지만 (농지 개혁 문제에서) 미국의 적극적 역할을 인정하기는 참 어렵다. 이런 점을 생각해야 한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산업화 기반 마련한 농지 개혁, 이승만이 주도? "결코 아니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전 대통령을 부각하려는 이들은 '농지 개혁은 이승만의 공'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승만이 조봉암을 중용해 농지 개혁안을 만들게 하고 관철시킨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승만이 지주 대신 농민과 손잡는 진보적인 선택을 했다는 시각도 있다. 더 나아가, 이승만이 농지 개혁 등을 통해 산업화를 앞당겼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승만이 산업화의 터전을 마련하고, 박정희가 그걸 기반으로 급속한 산업화를 이뤘다는 논리다.

 

서중석 : 농지 개혁이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인가? 한때 뉴라이트 정치학자가 이 점과 관련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그러면서 소장파 정치학자들이 이 부분을 굉장히 주장하더라. 나하고도 토론을 많이 했다. 이승만이 농지 개혁을 주도한 게 결코 아니다. 그걸 1996년 내 책(<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에서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저들은) '1952년 8.5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많은 지지를 받았다. 농지 개혁을 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것이다'라는 걸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면 농지 개혁을 (시작)한 직후에 치러진 (1950년) 5.30선거에서도 이승만 지지 세력인 (대한)국민당이 약진했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5.30선거에서) 중도파 민족주의자와 무소속이 대약진했고 민국당(한민당의 후신)하고 국민당은 추풍낙엽처럼 쪼르륵 떨어졌다고 당시 사람들이 모두 쓰고 있지 않나. (저들의 이야기는) 이런 사실과도 너무나 어긋나는 주장이다.

 

(저들은) 1952년 선거만 가지고 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대다수 국민이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함태영이란 분이,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냈고 자유당 2인자이던 이범석을 상당히 큰 표 차로 누르고 부통령이 된 게 뭘 의미하는 것이겠나. 이 선거가 얼마나 심한 부정 선거였는지를 단적으로 얘기해주는 거다. 내가 이런 구체적인 걸 얘기하는데도 안 통하더라. (그런 주장을 하는) 정치학자들이 기본적인 자료를 많이 봐가면서 얘기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들더라. 방송 같은 데 나와서 그런 주장을 하는 걸 볼 때마다, 그런 걸 많이 느꼈다.

 

프레시안 : 해방 후 농지 개혁은 시대의 대세였다.

 

서중석 : (1948년) 5.10선거에 입후보한 거의 모든 후보가 토지 개혁을 하겠다고 했다. (그걸 공약하는 것이) 제일 쉬운 것 아니겠나. 당시 농민이 많았고 그 농민에게 표를 얻어야 했다. 그러니까 토지 개혁을 하는 건 확실했다. 사실 대한노총(한국노총의 전신)과 쌍생아라고 볼 수 있는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대한농총)에서도 '(농민은 1년 수확량의) 25퍼센트를 5년간 지불하면 된다'는 상당히 농민적인 토지 개혁안을 주장했다. 좌파 쪽에서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많이 주장하는데, 이것에 맞서려면 자신들도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안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대한노총 위원장을 지내는 전진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조봉암을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데는 이 대통령이 한민당을 견제하려는 뜻이 분명히 들어 있었다. 토지 문제로 견제하려는 면도 있지만, 조봉암이 무소속계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조봉암과 윤석구(체신부 장관)가 무소속계로 입각하는데, 억센 한민당을 누르려 무소속계를 상당히 대우해준 셈이다.

 

문제는 한민당도 토지 개혁을 반대한 게 아니(라는 거)다. 한민당이 만들어질 때부터 '토지 개혁을 언젠가는 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방안이 다른 거였다. 문제의 핵심은 농민적이냐 아니냐, 이거였다. 이 대통령(과 농지 개혁의 관계를 볼 때)도 농민적으로 하려고 했느냐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하려 했느냐, 이걸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농지 개혁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조봉암과 이승만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조봉암은 전국을 참 열심히 돌면서 농민들에게 얘기를 들었다. 이게 나중에 두 차례에 걸친 대선에서 조봉암이 지지를 받는 제일 큰 힘 중 하나였다. (1948년 11월 시안을 만들고) 1949년 1월 24일 국무회의에 농림부 안을 내놓는데, 농민들이 (1년 수확량의) 20퍼센트씩 6년 동안, 총 120퍼센트를 상환하고 지주한테는 150퍼센트를 보상한다는 아주 농민적인 것이었다. (150퍼센트와 120퍼센트의) 차액(30퍼센트) 계산은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돼 있었다. 대지주 토지는 체감 매상(을 고려하고), 그리고 3년 거치를 한 다음에 (지주에게) 지대증권으로 지불(해 귀속 기업체를 불하받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물하곤 큰 차이가 난다. 귀속 기업체 매각 문제 같은 것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이런 걸 종합적으로 제시했지만, 바로 이 대통령 지시에 의해 일축된다. 그러면서 한민당 쪽과 연결된 감찰위원회에서 농림부 장관 관사 수리비 같은 걸 들고나와서 '조봉암을 처단해야 한다'(고 했다). 이거 나중에 (1심, 2심, 3심) 모두 무죄 판결 받는다. 한민당 측은 토지 문제가 아니라도 조봉암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시쳇말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조봉암은 이 일 이전부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양곡 매입 문제 등에서 여러 가지로 따돌림을 당했다. 그래서 (1949년) 2월 21일에 대통령 권고로 사표를 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를 볼 때 (이승만이) 조봉암을 기용한 의미가 무엇이냐,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프레시안 : 조봉암이 사임한 후엔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농지 개혁안을 놓고 이승만 정부 및 한민당(민국당)에 맞섰다.

 

서중석 : 국회에서 소장파를 중심으로 활발히 논의해 1949년 봄에 '상환액 125퍼센트, 보상액 150퍼센트'로 하는 걸 볼 수 있다. 조봉암 안과 큰 차이가 안 난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 쪽에선 이걸 돌려보내려 하다가, 국회가 폐회 중이라는 이유를 달아서 이게 소멸됐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1949년 6월에 국회에선 즉각 재석 153, 가 97, 부 19라는 압도적 표 차이로 원래 법안을 가결해 버린다. 반민법(을 둘러싼 국회와 이승만의 줄다리기)과 비슷한 거다. 이승만 정권은 (이 법안을) 실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또 실시를 안 한다. 미국 국무부에서 이때 이승만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그때 국무부 관계자가 이런 얘기를 한다. '이걸 즉각 시행하지 않는 것은 지주 때문이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농민 숨통 조인 현물세와 저곡가 정책

 

프레시안 : 농지 개혁이 시행된 시점을 두고도 논란이 많았다.

 

서중석 : 한국전쟁 이전에 시행됐는가, 이걸 갖고도 학계에서 수십 년간 논쟁했다. 도대체가 농지 개혁 실시처럼 자명해 보이는 게 없는 것이 왜 이렇게 제대로 정리가 안 됐느냐, 이것도 예전부터 참 의문이었다. 우리 연구가 실증적인 게 약하다는 점도 작용했고, (그와 별개로 상황 자체가) 애매한 게 많았다. 특히 농지 개혁 관련 자료가 전쟁 때문에 거의 다 없어진 모양이다. 논산 등에 약간 남은 것 빼고는 없는 점도 (이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쟁이 벌어지는 데) 영향을 준 것 같다.

 

어쨌든 '만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농지 개혁이 불완전하게나마 시행되지 않았으면 북한에서 와서 북한식으로 토지 개혁을 하는 거니까 엄청나게 양상이 달랐을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이 꽤 많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승만 정부가 농지 개혁을 하게 되느냐.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이 나고 김구가 암살당하면서 아주 힘없는 국회가 되지 않나. 1950년 1월에 이승만 정부에서 개정 법률안을 내세운다. (상환액과 보상액을) 150퍼센트로 통일해 제시한다. 이게 언제부터 시행됐느냐? 그에 대해선 자료가 불확실하다. 그러나 (1950년) 4월부터 일정하게 시행되는 것으로 학계에선 보고 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시행된 것이다. (전쟁 전에 농지 개혁 작업을 시작하지 못했다면) 전쟁 때 어떻게 됐겠나.

 

(1980년대까지 농지 개혁에 관한 통설은 '한국전쟁 전 법적 준비 완료, 전쟁 중 본격 실시'였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일부 경제학자와 정치학자 등을 중심으로 '한국전쟁 이전 시행 완료'를 주장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이승만의 강력한 의지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1950년 10월 23일 이승만 전 대통령 본인이 "농지 개혁 법안을 우선 실시해야 될 것"이라고 했다. 첫 단계(분배예정통지서 발급)를 밟던 중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중단된 농지 개혁을 다시 실시하라는 뜻이었다. 이와 더불어 살펴볼 건, 재실시 지시 직전인 1950년 10월 초 이 전 대통령이 농지 개혁을 1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가 한 달도 안 돼 뒤집었다는 연구 결과다. 1년 연기했다면 농지 개혁 자체가 폐기될 위험성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 전 대통령이 농지 개혁 자체를 반대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와 반대로 농민에게 유리한 형태의 농지 개혁을 적극 추진했다고 주장하는 건 무리임을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다. <편집자>)

 

그런데 문제는 또 거기에 있지 않다. 이게 참 한국 역사의 특이한 점인데, (농지 개혁이) 한국전쟁 전에 실질적으로 시행될 수밖에 없는 점이 있었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방매(放賣)라는 것이다. 5.10선거에서 다들 토지 개혁을 하겠다고 했고, 국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안건으로 논의되지 않았나. (소장파가 힘을 잃기 전까지) 소장파를 중심으로 국회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나. 그러니 지주들이 겁이 나서 막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이것도 장상환 씨가 실증 연구를 했다. 유인호 교수가 1979년에 쓴 논문에도 나오는데, 소작지 144만7000정보(남한 경지의 65퍼센트) 가운데 방매가 이뤄지면서 1949년 6월까지 남은 토지가 83만 정보였다. 이것도 이후에 계속 판다. (농지 개혁법이 시행되기) 그 이전에 실질적으로 거의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 역사의 굉장한 묘미라고 할까,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정의(감) 같은 게 많이 작용한 것이다.

 

프레시안 : 상황이 그러한데도 예전에 '농지 개혁에 문제가 많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그건 (농지 개혁 후에도) 농민이 못살았기 때문이고, 소작농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전쟁이 일어나니까 아주 심한 인플레 때문에도 농민한테 전쟁 부담이 많이 넘어갔다. 다른 데서 전쟁 재정을 염출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이 대통령이 제일 손쉬운 농민에게 많이 부담시킨 거다. 대표적인 것이 (임시)토지수득세였다. 수세 등을 빼고 (임시)토지수득세를 상당히 많이 (그것도 현물로) 부담시켰다. 이게 전쟁 비용으로 많이 활용됐다. 심지어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관련 기사 : '제2 새마을운동' 찬가 속 '이등 국민'들의 절규)

 

현물세, 이게 아주 무서운 것이었다. 자유당도 이걸 없애겠다고 선거 때 이야기했다. 농민의 지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승만 정부 말기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에 없어졌다. 이승만 정권이 재정 문제를 쉽게 풀고자 농민들에게 부담을 씌운 거다.

 

프레시안 : 저곡가 정책도 농민을 괴롭혔다.

 

서중석 : 그렇다. 그건 박정희 정부도 마찬가지다. 1950년대, 1960년대에 아주 심한 저곡가 정책을 쓴다. 미국에서 PL480호에 의해 얼마나 많은 잉여 농산물을 한국에 주나. 이런 것들이 (농산물 가격을 폭락시켜) 농촌을 아주 곤궁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농민들이 당시에 너무나 가난했다. 봄만 되면 춘궁기라고 해서 산과 들을 헤매는 사람이 내가 어렸을 때 꽤 많았다. 이런 사람들의 상당수가 상환액을 갚지 못했다. 상환액이 많은 게 아님에도 이걸 갚지 못하는 농민이 또 생겨났다. 악순환이었다. 여기에 다른 이유도 가세해 농민들이 또 소작농을 하기 시작했다. ('농지 개혁이 잘못됐다'는 주장이 나오는 데에는) 이런 것들이 작용했다.

 

그리고 일부 진보 세력이 주장한 것처럼 북한의 토지 개혁이 정말 농민적인가? 난 이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토지 개혁은 북한의 지주들이 북한에서 살아가는 걸 굉장히 어렵게 만들었다. 무상 몰수였을 뿐만 아니라 거주지를 바꾸게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대거 월남을 해버렸다. 북한에 대해 얼마나 강한 적개심을 가졌겠나. 이 사람들이 내려올 때 토지 문서를 많이 가지고 왔다. 북한이 망하면 다시 찾겠다는 것이다. 무서운 거다. 토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급속한 토지 개혁을 통해) 북한 농민들에게 속 시원한 지지를 받을 수 있어서 북한 정권으로선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좀 더 크게 전망을 하고 한국의 통일 정부 수립 문제를 생각할 때 이건 문제가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해방 후 교육열과 이승만 정부, 그리고 평준화

 

프레시안 : 다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일각에선 이 전 대통령이 의무 교육을 확대한 공적은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이 다른 건 다 잘못했어도 교육은 잘한 것 아니냐고 뉴라이트뿐 아니라 다른 일각에서도 주장한다. 전혀 어긋난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뉴라이트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펴는 주장 중 하나가 일본이 한국에 상당히 많은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방 후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일제 때 교육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지 않느냐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것도 너무 자료를 안 보고 하는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일본 쪽 자료를 제대로 봤느냐 하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예컨대 일제 때 초등학교 교육이란 걸 한국인이 얼마나 받았나를 보자. 일본은 1911년에 적령 아동의 98.1퍼센트가 받았다. 전 세계에서 제일 높은 수준이었다. 서유럽보다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이게 일본이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겠느냐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때 한국은 1.7퍼센트였다. 3.1운동 때 '배워야 한다'며 열화와 같은 민족적 교육열이 일었는데 이때도 3.9퍼센트(1919년)밖에 안 됐다. 한국인들이 새로 서당, 사립학교를 만들었는데도 1929년 적령 아동이 초등학교를 다니는 비율은 18.6퍼센트로 조선총독부 자료에 나온다. 1930년대 전반까지도 얼마 안 된다. 그러나 일제가 대규모의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인을 거기에 대거 끌어들일 필요가 생기는 1930년대 후반 들어 그 비율이 늘어난다.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을 어떻게 징용할 수 있겠나. 그래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 학령 아동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에 30.8퍼센트, 진주만 기습 이듬해인 1942년에 54.5퍼센트를 기록한다. <편집자>)

 

그런데 일제 시기 전체에 걸쳐 중등 교육은 너무나도 낮은 수준에 있었다. 한국인이 다니는 학교는 이름도 고등보통학교라고 폄하했다.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 숫자가 한국인 전체의 60분의 1이거나 많아봤자 1930년대 이후 30분의 1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중등학교에 다닌 숫자가 1910년대에는 일본인이 더 많았고 1920년대엔 거의 엇비슷하다. 1930년대에 가면 한국인이 조금 더 많기는 하다. 이건 얼마만큼 한국인 교육을 억제했느냐(를 잘 보여준다). 한국인들이 그렇게 교육 기회를 달라고 조선총독부에 요구했는데도 잘 안됐다.

 

고등교육은 더 심했다. 1920년대 전반기에 민립대 기성회도 만들고 하면서 싸웠는데도, 일제 시대 내내 한국엔 단 하나의 대학(경성제국대학)밖에 없었다. 일본도 중국도 그때 얼마나 대학이 많았나. 더욱이 그 경성제국대학조차 뽑는 수가 불과 몇 백 명밖에 안 됐고, 그중 조선인이 들어가는 숫자도 20퍼센트 수준이었다. 그렇게 적게 뽑았다. 얼마만큼 고등교육을 억제했느냐를 단적으로 얘기해준다.

 

프레시안 : 해방 후 교육열이 엄청나게 팽창했다.

 

서중석 : 그렇다. 특히 1950년대, 1960년대에 (교육열이) 강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가 굉장히 평준화된 것과 관련 있다. 해방 이전엔 한국인의 무권리 사회였다. 일제가 직접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요직을 다 차지하고 중요 경제도 다 장악하면서 한국 양반이 저절로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 엄청난 사회 혁명, 시민 혁명, 정치 혁명이 일어나면서 지주, 부르주아가 꼼짝 못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평준화가 급속히 이뤄졌다. 아까 이야기한 농지 개혁이 뭔가. 그나마 남아 있던 지주들의 힘을 마저 뺏는 것이었다. 전쟁 와중에 머슴을 했던 사람들이 큰소리쳤다는 말이 의미하듯이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평준화가 아주 강해졌다. 전 세계에서 이만큼 평준화가 잘된 나라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까 교육을 잘 받는 게 더 중요해진 거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은 정실 사회적인 측면이 강하다. '얼마나 지역적으로 같은가. 교육 받은 곳이 같은가', 이런 정실이 많이 작용했고 '어쨌든 좋은 대학 나오면 이 사회에서 쉽게 남을 앞지를 수 있다', 이런 게 대두한 것이다. 그러면서 중학교, 고등학교도 1류, 2류가 생겼다. 도시마다 다 그러다시피 했는데 심지어 초등학교조차 1류, 2류가 생기지 않았나.

 

그런 속에서 전쟁 후에 특히 베이비붐이 막 일어나고 하니까 이승만 정부도 초등학교 같은 것을 많이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산이 빠듯한데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 (이승만 정부가 교육에) 그 정도는 기여했다고 본다. 그만큼 큰 교육열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지만 하여튼 노력은 좀 한 것이다,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른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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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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