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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원혼이라도 좋은 곳으로 가야지

등록 : 2014.03.07 19:20수정 : 2014.03.0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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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7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신당(神堂)에서 김금화 만신을 만났다. 최근 영화 <만신>의 개봉으로 시사회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한 그는 이날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갈라지면서도 차분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 만신 김금화

오래전 그의 굿을 본 적이 있다. 십수 해 전 다큐멘터리 방송작가로 일하던 때, 후배 작가 하나가 그의 굿판에서 며칠째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몇몇 동료들과 작당해서 “우리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고 밤길을 달려갔다. 경기도 인근이라 만만하게 생각하고 길을 나섰는데 내비게이터도 없던 시절 막상 시골로 들어서니 이 길이 저 길 같고 사방이 똑같아 천지분간을 하기가 어려웠다. 도깨비에 홀린 듯 논두렁 사이를 헤매다가 문득 발견한 불빛들. 검은 들판에 흘러 퍼지던 장구와 피리, 제금 소리…. 그 빛과 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에 그가 있었다. 형형색색 나부끼는 깃발과 무신도(巫神圖) 앞에서 쾌자 자락을 펄럭이며 춤을 추던 김금화.

 

무당의 작두타기가 그냥 바닥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사람 키를 훨씬 뛰어넘는 높이에 정성스레 차린 칠성단을 딛고 올라서는 거라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칠성단에 작두를 타러 오르던 그의 하얀 종아리가 기억에 선명하다. 작두타기가 서커스 기예를 보듯 흥미진진할 줄 알았는데 이상스레 처연하고 서러웠다. 칼날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가장 여린 마음으로 세상의 극심한 고통을 감싸 안는 게 무당의 업이란 뜻일까.

 

최근 그를 소재로 한 영화 <만신>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래전 묻어두었던 질문들이 새삼 떠올랐다. 그는 왜 무당이 되었을까. 그에게 무업이란 무엇일까. 하고많은 무당 가운데 왜 김금화, 그에게만 나라만신이란 별칭이 붙은 걸까. 지난달 27일 서울 이문동 신당(神堂)에서 김금화 만신을 만났다. 

 

 

철물이굿 2박3일, 대동굿 5박6일 
짧아도 하룻밤 하룻낮 걸리지만 
어려서부터 해와 안 잊어버렸어 
미신타파한다며 하도 못 하게 해 
안 하고 넘어가는 대목 생겼지만 

죽은 사람 한풀이하는 게 업인데 
적군묘지의 중공군과 북한군들 
제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다들 좋은 곳 가라고 굿한 거지 
그래야 우리나라도 평안할 거고
 

 

 

열두살 무렵에 찾아온 ‘무병’과 시집살이

 

-요즘 영화 시사회 때문에 바쁘시다고 들었다.

 

“어제도 용산에 다녀왔는데 시사회장에서 (굿)공연도 하고…. 요즘 그렇게 다니느라고 아주 피곤하다. 영화는 보셨나?”

 

 

내가 봤다고 하자 대뜸 영화가 어떻더냐며 감상평을 물어왔다.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이니만큼 좋은 반응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그는 배우 류현경, 문소리 등과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직접 출연한다.

 

 

-키가 무척 크시던데. 극 중에서 다른 여배우들하고 나란히 섰을 때도 전혀 밀리지 않더라. 실례지만 키가 몇이신지?

 

“1미터 67인가? 몰라….”

 

-옛날 미스코리아들보다 더 큰 키다.

 

“그래서인가, 호주를 갔는데 시장님도 오고 무슨 행사가 크게 있었어. 많은 사람들이 쫙 모여 있고 나는 하얀 한복을 입고 서 있는데, 나보다 작은 사람들도 있더라고. 거참 이상하다 했지.”

 

-훤칠한 키에 평생 변함없이 군살 없는 몸매, 무당에게 이런 수려한 용모는 복인가 업인가?

 

“업은 아니지…. 그렇게 외국 나가서 무대 많이 서고 한국에서도 무대 많이 섰는데, 내 키가 쪼그매봐, 땅딸보처럼 쪼그매가지고 거기서 춤을 추고 맴돌고 그러면…. 팍 꺼져서 눈에 얼른 띄지도 않겠지.”

 

-키나 용모는 어머니나 외가 쪽을 닮으신 건가?

 

“어머님이 작은 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어려서부터 (무당)춤을 많이 춰서 그런 것 같애. 자꾸 뛰니까 (성장판에) 자극이 돼서 더 큰 것 같아.”

 

 

김금화는 1931년 황해도 연백에서 김택근과 이음전 사이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들을 학수고대하던 집안에선 어린 그를, 남동생이 어깨너머에서 들여다보고 있다는 뜻의 “넘세”라는 아명으로 불렀다. 넘세는 열두살 무렵부터 이상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나무나 돌을 보고 얘기를 건네고 같이 놀던 친구한테 “네 아버지는 일찍 가시갔다”는 말을 내뱉곤 했다. 무병(巫病)이었다. 정신대 모집을 피하느라 열네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시어머니 구박과 매질로 상태는 더 나빠졌다. 굶주림에 개밥을 주워 먹기도 하고 장티푸스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결국 매질을 참지 못해 시집 뒷간의 바자울 썩은 틈으로 기어서 도망 나왔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얼마 후 외할머니 김천일로부터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 손녀에게 무업을 물려주지 않으려 마지막 순간까지 안간힘 쓰던 김천일은, “만신이 된다는 건 뭇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고통을 숱하게 참아내는 것”이라며 눈물로 금화의 앞길을 열어주었다.

 

 

-시어머니는 혹시나 그 이후에 혼백으로라도 접하신 적이 있나?

 

“더러…. 꿈에 만나 본다든가, 굿을 할 때 (혼백으로) 만나 본다든가.”

 

-시어머니 혼령을 접하니 어떻던가? 용서가 되던가?

 

“그분이 뉘우쳤지. 당신이 잘못했다고…. 그래도 ‘그 덕에 네가 훌륭하게 잘 커서 잘되고 있다’고 하셨고, 나도 ‘내가 어려서 부족한 게 많았다’고 얘기하고….”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큰무당이 되려면 이런 시련을 반드시 거쳐야 하나? 평탄하게 살면 무당이 못 되나?

 

“그럼. 만신이 되려고 그런 시련을 먼저 겪는 거다. 신령이 선택을 해서 신이 시키는 공부다.”

 

-뭘 배우라는 공부인가?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외로운 걸 다 겪어봐야 남을 이해할 수 있는 거다. 그래야 참다운 마음이 가득하게 생기는 거고. 절에서 수행, 수행 하는데 이런 게 다 수행이다.”

 

-고생을 한다고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성격 자체가 비뚤어진 사람이 만신이 되면 좀 나아지긴 해도 100% 다 바르게 되는 건 아니다. 남한테 악담하고 심술 내고 이런 사람은, 만신이 돼도 그런 근성을 다 버리진 못한단 말이지. 치성 불공드려서 돈이 좀 들어왔어도 어떤 철없는 사람은 남자 만나서 술 먹고 돈 다 뿌리는 사람이 있지. 반면에 어떤 사람은 뉘우치고 깨치면서 아 이건 감사하다,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든가, 쌀을 사준다든가, 그렇게 수행하는 맘으로 살지.”

 

-만신이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만신을 통해서 들어오는 신도 달라지나?

 

“그렇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바른 마음을 가지고 남한테 가슴 아프게 안 하면 그게 복을 짓는 거다. 복을 지어야 복을 받는 거지. 남 나쁘게 해코지하고 가슴 아프게 하면 복을 받을 수가 없는 거야.”

 

자신을 갈고닦으며, 사람들이 서로 복을 베풀도록 권하고, 화해와 용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무당은 여느 종교의 사제와 다를 바 없다.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한국학)는 “무속을 미신이나 사이비 종교로 규정짓는 시각은 자기 종교의 시각으로만 보는 제국주의적 발상”이라고 지적하며 “무교는 한국인의 가장 고유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도올 김용옥도 무속문화가 우리 예술의 원류이고 종교의 원점이었음을 강조하면서 “김금화는 그런 우리 문화의 대맥을 이은 마지막 진짜”라고 헌사를 바친 바 있다. 그러나 김금화가 살아온 세월 동안 무속은 늘 터부와 멸시, 조롱의 대상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무속전통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폄하했고, 해방 후 유입된 기독교와 서구문명은 무속을 사이비 종교로, 새마을운동은 뿌리 뽑아야 할 미신의 잔재로 규정했다.

 

 

※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굿을 따라갔더니 영화가 나오더라”

 

-다른 종교에 경전이 있다면 무속에서는 무가(巫歌)가 있다. 굿에 따라 며칠씩 계속되는 경우도 있는데 가장 긴 판소리보다도 그 사설이 길다. 그 많은 무가를 어떻게 다 외시나? 나이 들면 잊어버리지 않나?

 

“어려서 외운 거라서, 컴퓨터 입력되듯이 (기억에 새겨져) 있다. 사실 더러 잊어버리는 무가도 있는데, 옛날처럼 다 부르지를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 옛날에 가정집 굿 중에서 철물이굿(철 따라 하는 황해도 재수굿)은 2박3일, 대동굿(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은 5박6일, 짧은 것도 하룻밤 하룻낮이 걸리는데, 쭉 해오면 안 잊어버릴 걸, 새마을운동 때 하도 못 하게 하고 미신 타파한다고 경찰에서 나오고 하다 보니 원래 예식을 줄여서 안 하고 넘어가는 대목이 생긴다.”

 

 

1995년 김금화는 전통 무가들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자신이 행해 온 6개 굿의 준비 절차와 순서, 내용, 무가와 무구 목록까지 총망라하는 <김금화의 무가집>을 발간했다. 내림굿의 “만세받이” 중 한 대목을 인용하여 <검으나 따에 만신, 희나 백성의 노래>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배연신굿, 대동굿, 진오귀굿(지노귀굿)을 포함해 모두 430여쪽에 이르는 전통 굿의 생생한 복원이자 재현 매뉴얼이다. 이전까지 굿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은 민속학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왔다. 김금화 무가집은 무당에 의해 직접 편찬된 첫 번째 무속백과인 셈이다.

 

 

-예전에 화가 천경자 선생이 “굿을 한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영화가 나오더라”고 했다던데, 정말로 굿에는 다양한 극적 요소들이 섞여 있는 것 같다.

 

“굿이 처음에는 경건하고, 중반까지 엄숙하게 가다가, 중반 지나면 하나의 연희처럼 웃고 떠들고 어우러진다. 모두 거리감 없이 허심탄회하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게 굿이야.”

 

-무속의 원리로 친다면, 그런 과정을 통해서 무당의 접신 체험을 관객하고 공유하는 건가?

 

“그렇지.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거기 와서 스트레스도 풀고, 옛날에는 무슨 춤추는 데가 있나 영화관이 있나. 뭐 어쩌다 서커스나 말광대 뭐 그런 거 일년에 한두번 보기도 힘든데, 그런 굿은 자주 볼 수 있었거든. 마을굿 한번 한다 하면 한 7~8개월 전부터 준비를 했지.”

 

-대규모 라이브 공연팀의 준비 과정이랑 비슷한 모양이다.

 

“굿이 마을 전체의 제사고 잔치야. 마을 남자들이 일편단심 마음을 모아가지고 정성 들여 최선을 다했다. 그때는 주인이 굿의 전체 과정을 뚜르르 꿰고 다 알아서 준비했는데 이제는 만신이 굿 준비도 일일이 해줘야 되고, 그렇게 바뀌었다고.”

 

-요즘 사람들이야 별로 굿을 본 적 없으니까.

 

“그때는 정말 양반이었지. 며칠 굿하고 나서 주인이 ‘만신, 돈 얼마나 나왔나 봅시다!’ 그래. 이게 별비(공연 과정에서 구경꾼으로부터 받은 돈) 나온 게 얼마냐 그 소리야. 그럼 그간 장구에 매달아놨던 거, 자루에 놨던 거, 다 꺼내놓으면, 같이 세어 보는 거야. 그래서 ‘돈 많이 나왔네. 보별(의뢰인이 주는 목돈) 좀 적게 줘도 되겠네’ 하거나, 아님 ‘적게 나왔으니 더 줘야 되겠네’ 그러면 더 주고. 사람들이 아주 순수했어.”

 

 

무(巫)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춤추는 사람”을 형상화한 글자다. 무당은 하늘의 소리를 땅의 사람들에게 전하고 사람들의 기원을 하늘에 고한다. 그 수단은 춤과 노래. 일반적으로 굿은 주변의 잡귀 잡신을 물리치는 ‘부정거리’로 시작하는데, 굿이 거의 끝날 때쯤엔 물리쳤던 잡귀 잡신들마저 다시 불러들여 푸짐한 음식을 대접하는 ‘뒷전거리’로 끝을 맺는다. 춤과 노래로 하늘과 소통하고, 푸짐한 음식으로 잡귀마저 달래는 한국의 굿에는, 박멸해야 할 사탄이나 봉인해두어야 할 악령은 없다. 억울하고 한 맺혀서 배회하는 불쌍한 원혼들만 있을 뿐. 그들은 위로와 연민의 대상이지, 배척과 적대의 대상이 아니다. 김금화는 박정희의 영혼을 위해서도 제를 올리고 김일성의 넋을 받아 공수(혼령이 전하는 말)를 하기도 한다. 천안함 희생자를 위해서 사비를 털어 제를 올린 것처럼, 6·25 때 전사한 북한군을 위해서도 정성을 다해 제를 올린다.

 

 

-나라만신이라고 불리시는데, 특히 전쟁이나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은 넋들을 위로하는 나라굿을 많이 하셨다. 1998년 임진각에서 한 통일기원 굿이나 1996년의 윤이상 진혼제 같은 건, 아무 만신이나 쉽게 마음을 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왜 이런 굿을 시작하셨나?

 

“199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한국민속제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벽돌담 깨뜨린 베를린 담장에 장구하고 방울 부채 가지고 가서 나도 굿을 한 거리 했다. 한국 무당이 가서 빵 놓고 우유 놓고 포도주도 없이 물 떠놓고 기원했지. 여기 있는 영혼들도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지만 여기서 그냥 떠돌고 헤매지 말고 잘 위로받아서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그리고 그 담장에 매달려서 벽돌을 깨뜨리고 통일을 이룬 그 국민들 기를 받아가지고 와서 우리나라 통일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우리 동향민들, 인천에 주로 거주하던 황해도 이북 사람들하고 뜻을 모아 추렴하고 굿을 한 게 1998년 <통일이여 오라> 굿이다. 그때 불교인이나 천주교, 개신교인 제반 종교인들도 많이 모였어. 내가 작두를 타고 높이 올라가 ‘우리 모두 국민들 마음으로, 통일이여 오라를 외칩시다!’ 하면서 선창을 하니까 자기 종교가 뭐든 너나없이 모두 같이 손들어 ‘통일이여 오라!’를 외쳤다고.”

 

-임진각에서 김일성의 넋과 접신을 하고, 파주 적군묘에서 북한군 영혼을 위로하는 굿을 하기도 하셨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정치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이런 일을 벌이는 게 두렵지 않으셨나?

 

“개인적으로 두려울 게 뭐 있겠나. 우리는 영혼을 달래고 죽은 사람들을 위로해서 한풀이하는 게 업인데. 중공군이며 북한군이며 제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영혼들 어서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라, 원 풀고 한풀이해라, 하면 좋지 뭐. 진주엠비시 의뢰로 죽은 빨치산을 위한 진혼굿을 지리산에 가서 한 적도 있어. 우린 만신이니까 죽은 사람들 위로하고 그 사람들 좋은 곳으로 보내는 게 목적이잖아. 나라의 잘못으로 전쟁에 참여했지, 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한 것도 아니고. 우리 군인들이나 그 사람들이나 나라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냐고. 그러니까 마음 풀고 배들 고픈데 많지 않은 음식이라도 받아가지고 좋은 곳으로 가라, 그런 의미에서 한 거지. 그래야 우리나라도 평안할 거 아니냐고.”

 

 

신의 도움으로 평화통일 굿이나 해보자

 

-누가 거액을 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 가족들이 애걸복걸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사비까지 들여가며 이런 대형 굿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우리는 신하고 대화하면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니까, 그 한 많아 떠도는 영혼들 원 풀어서 자기 가족한테 보내든가 좋은 하늘나라로 보내든가 하면 그 영혼들도 고마워하지 않겠냐고. 우리가 이북 사람이니까 언제나 그저 바라는 건, 삼팔선 빗장 빼고 문 확 열어서 마음대로 오고 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고, 실향민들이 고향을 간절히 그리고 가족들 만나고 싶어하니까 판문점에 8월이나 정월달 되면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조상의 힘으로라도, 빨리 통일을 평화롭게 앞당겼으면 그런 마음으로 하는 거야.”

 

-80년대 이후 무속의 예술적·종교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인정해 준 지식인들이 대개 진보적 학자들이었는데 그들과의 교유가 민족통일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게 한 건 아닌가?

 

“그건 아니야. 옛날에 대동굿이 많았잖아. 대동굿은 마을굿인데, 나라굿이라고 못할 게 뭐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특히 내가 고향이 이북이니까, 정말 신의 도움으로 험한 일 없이 평화통일 굿이나 해보자. 천재지변이 없고, 나라에 험한 일 없이 전쟁도 없고, 만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게 만신이 해야 할 의무라고.”

 

-신령님들은 전쟁을 반대하나?

 

“환영하지 않지.”

 

-어떤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를 위해서라도 전쟁을 해야 한다고….

 

“그건 수양이 덜된 거지. 신당 앞에 꽃이 있는 것도 평화를 상징하는 거야.”

 

김금화의 평화를 위한 기도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나라만신 김금화의 간절한 기구는 오늘도 이어진다.

 

“검으나 따에 희나 백성/ 극히 보살펴 잘 도와줄 때/ 정한 마음으로 원수가 있거든/ 내리 사랑하고 잘 도와주어라./ 불리러 가요 외기러 가요/ 닫은 문을 열러 갈 제 나를 따라 오너라/ 나를 따라올 제/ 험하고 머나먼 길이어라…”(황해도 내림굿, ‘만세받이’ 중에서)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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