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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재가동 1년, 어디까지 왔나

개성공단 재가동 1년, 어디까지 왔나[친절한 통일씨] 개성공단의 역사와 현재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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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14  19: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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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동 10년, 재가동 1년의 개성공단 전경. [자료사진-통일뉴스]

오는 16일은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재가동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개성공단은 2004년 6월 시범단지가 준공된 뒤 부침을 거듭하며 발전해왔다.

2000년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남북 당국과 현대그룹 등 민간기업이 함께 만들어 간 개성공단은 지난 2013년 최대 위기를 맞았다.

'키 리졸브-독수리' 한.미 연합군사연습을 빌미로 3월 북측이 군 통신선을 차단하고, 4월 개성공단 통행을 제한하더니, 급기야 북측 김양건 대남담당 당 비서가 북측 근로자 전원 철수를 선언했다.

그리고 남측도 개성공단 현지 인원의 철수를 결정하면서 10년도 채 못돼 개성공단에서 160여 일, 5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북한 말로 '쉬쿵한' 소리가 멈춘 것이다.

그러나 남북 당국 간 계속된 협의 끝에 지난해 8월 재가동에 합의, 9월 16일 북측 근로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개성공단은 남북 간 경제협력의 상징으로 일컫는다. '5.24조치'로 인한 남북 간 경제협력 중단, 금강산.개성관광 중단 등 남북 간 경색국면 속에서 개성공단은 남북 화합의 마지막 상징이었다.

가동 10년, 재가동 1년의 개성공단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발전해왔는가. 개성공단의 역사와 현재에 대해 살펴보자.

   
▲ 개성공단 내 신발공장에서 근무하는 북측 근로자들. 개성공단 재가동 직후 모습이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개성공단의 출발 배경과 과정

개성공단은 민간기업의 요구와 당국의 뜻이 맞아떨어진 결과물이다. 2000년 6.15선언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6.15선언은 1988년 '7.7선언'과 때려야 땔 수 없으므로 남북 경제협력의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11월 남북 경제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남북 간 경제협력의 다양한 논의가 진행됐지만 1985년 5차 남북 경제회담을 끝으로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1988년 노태우 정부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 뒤이어 1990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7.7선언'에는 경제인을 포함해 남북 주민의 상호 방문과 교류를 허용하고, 남북교역을 민족 내부 교역으로 간주, 문호를 개방해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한 우방국들의 대북교역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분단 이후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개성공단 착공식이 2003년 6월 30일 열렸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이후, 김대중 정부는 남북경제공동체 구축을 핵심으로 담은 '베를린 선언'을 발표, 2000년 6.15선언을 통해 남북 간 대결국면을 화해협력 국면으로 전환, 대표적으로 개성공단 건설의 토대가 됐다.

개성공단 건설 협의는 2000년 8월 현대그룹과 북측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의 합의서 체결로 본격화됐다.

2000년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평양을 방문, 공단 개발사업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북측이 개성지역을 공단 후보지로 제시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0일부터 사흘간 현대의 공단부지 조사단이 개성지역을 조사했다.

이어 현대그룹과 북측 아태위.민경련은 8월 22일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경협사업에 대한 포괄적인 합의서와 함께 '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 개성공단 건설의 남북 민간 합의가 이뤄졌다.

남북 당국도 개성공단 건설을 위해 수차례 당국 간 회담을 가졌다. 2002년 4월 당시 임동원 대통령 특사가 평양을 방문, 개성공단 건설에 대한 협의가 있었고, 2002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제7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개성공단이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 2004년 10월 20일 열린 개성공단 입주기업 건설 착공식 [자료사진-통일뉴스]

그리고 2002년 제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에서 북한의 개성공단지구법 제정을 합의, 2003년 제5차 경추위에서 개성공단 착공식 개최에 합의, 2003년 6월 30일 역사적인 개성공단 착공식이 열렸다.

당시 착공식에 참석한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많은 개성주민의 환대를 받으며 89년 정주영 고 현대 명예회장의 방북 이래 15년여 만에 착공식을 갖게 됐다"고 감회를 표시했고, 북측 최현구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부총국장은 "6.15공동선언이 낳은 뜻깊은 결실이다. 고려 이후 경제 중심지였던 개성에 북남 공동번영의 장이 열렸다"고 말했다.

2004년 6월 시범단지가 조성되고 기업이 본격 입주한 뒤 같은 해 12월 첫 생산제품이 반출된 가운데, 남북 당국은 개성공단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협력해왔다.

남북은 수차례 열린 장관급회담에서 △개성공단의 내실 있는 추진을 위한 협력 및 안정적 투자여건 조성(15차, 2005년 6월), △2단계 개발 조속 추진(16차, 2005년 9월), △경협을 통한 공동번영(17차, 2005년 12월 / 18차, 2006년 4월), △개성공단 활성화(20차, 2007년 2월) 등에 대해 논의했다.

또한, 2차 경추위에서 개성공단 본격협상 개시 이후, 13차 경추위에 이르기까지 남북은 △개성공단의 국제경쟁력 확보 및 이를 위한 법.제도 정비, △통행.통신.통관 간소화, △입주기업 애로사항 해결 등 실질적 합의를 해왔다.

   
▲ 2013년 현재 개성공단 전경. [자료사진-통일뉴스]

그 결과 '개성공업지구법', '개성공업지구 지원에 관한 법률' 등을 비롯하여 4개 합의서와 4개 경협 합의서, 5개 기타 관련 합의서 등 개성공단 발전을 위해 남북은 합의 성과물을 내놨다. 

개성공단은 남측의 필요에만 의한 것이었을까? 당시 북측에서도 개성공단은 중요한 과제였다. 북측은 1984년 합영법과 함께 1991년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 개발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2002년 '7.1경제관리 개선조치'를 통해 경제개발에 나섰고, 2002년 신의주 특별행정구역, 금강산관광지구 등을 지정하면서 경제특구를 마련했다.

이어 2002년 11월 개성공업지구를 지정, '개성공업지구법'을 제정하는 등 개성공단을 중요시했다.

정경분리 원칙이 사라진 개성공단의 위기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발전의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만은 아니다. 남북 간 정치적 문제는 '정치와 경제'는 별개라는 원칙을 벗어나지 못했고, 개성공단도 피할 수 없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인 2008년 6월 북측은 남측의 통행.통신.통관(3통) 합의 불이행을 주장하며 인력.물자 통행 시간제한을 통보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대북전단 살포 등으로 공단 체류 인원을 880명으로 제한, 남북 통행시간대와 통행 인원을 축소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다 2009년 현대아산 소속 유성진 씨가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탈북을 조장했다는 혐의로 136일 동안 억류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직접 데리고 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2010년 천안함 사건 발생으로 남측이 '5.24조치'를 발표, 개성공단 발전의 길이 막혔다. 2단계 개발은 고사하고 신규투자조차 금지됐고, 이에 북측은 육로통행을 전면 차단하겠다고 경고한 뒤, 남북 교류협력 관련 군사적 보장을 전면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5.24조치'이후 갈림길에 선 개성공단은 2013년 한.미 연합군사연습의 빌미로 가동중단이라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 2013년 4월 북측의 근로자 철수조치에 남측도 전원 철수 결정을 내렸다. 당시 개성공단에 있던 남측 근로자들이 차량을 이용, 생산품을 싣고 도라산CIQ를 넘어오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개성공단을 떠나는 남측 차량 위로 수많은 생산품이 바리바리 실려 나오는 장면을 두고 한 언론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과 흡사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남북 당국은 극적으로 협의를 시작, 8월 14일 7차에 걸친 실무회담 끝에 '개성공단 발전적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남북은 합의서에서 △개성공단 중단사태 재발방지 및 정상운영 보장, △신변안전보장 및 투자자산 보호, 통행.통신.통관 문제 해결, △개성공단 국제화,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 설치.운영, △출입.체류, 투자자산 보호 제도적 장치 마련 등 5개 항에 서명했다.

그리고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를 통해 개성공단 관련 사항을 논의했으며, 지난 6월 5차 개성공단 공동위원장단 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상황이다.

이 밖에도 개성공단에는 수많은 사건.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설립 이후 2013년 현재 남측 근로자들이 북한 체제를 비판하거나 근로자를 비하하고 음주난동, 문화재 밀반입 등으로 15명이 추방됐다.

그리고 2009년 이후 2013년까지 92건의 산업재해, 27건의 교통사고, 19건의 화재, 4건의 형사사건 등 142건의 각종 사고가 발생했고, 최근에는 개성공단 내 한 공장에서 '벤젠'으로 추정되는 화학물질에 인한 산업재해가 처음 발생했다.

가동 10년, 재가동 1년 개성공단의 현재

개성공단은 2003년 첫 삽을 뜨고, 2004년 본격 가동과 첫 생산품 반출 이후 10년의 역사를 지녔다. 그리고 2013년 가동중단이라는 최대 위기를 겪고 재가동된 지 1년이 됐다. 가동 10년, 재가동 1년의 역사를 지닌 개성공단의 현재 모습은 어떠할까.

남북 간 합의로 터를 잡은 개성공단은 황해북도 개성시와 판문점 평화리 일대 총 66.1km², 약 2천만 평의 부지에 있다. 평양-개성공단 2시간, 개성공단-서울.인천 1시간 거리라는 입지적 조건을 가져 서해 삼각 경제권역으로 불린다.

   
▲ 개성공단 총 계발계획. 3단계 사업이지만 현재 1단계 사업에 그친 수준이다. [자료출처-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총 계발계획은 1단계 3.3km²(1백만 평), 2단계 8.3km²(250만 평), 3단계 18.2km²(550만 평) 사업과 함께 개성시와 확장구역까지 36.3km²(1천1백만 평) 확대개발계획이 있다. 하지만 현재 개성공단은 1단계 사업에 머물러 있으며, 이마저도 시범단지 조성 이외에는 확장되지 못한 상황이다.

2011년 현재 총 210개사가 분양을 받았지만 2014년 현재 125개사가 입주했으며, 나머지 기업은 '5.24조치'로 인해 입주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첫 15개 기업에 비하면 입주업체 수가 늘어난 것이다. 재가동 이후 2개 사가 신규 입주했다.

업체별 개성공단 분양단가는 4만 5천 원/㎡, 평당 14만 9천 원으로 2054년 4월 12일까지 토지사용권을 부여받는다. 이는 구미4단지(39만 원), 시화공단(150만 원), 중국 상해 금교(45만 원), 베트남 딴뚜언(40만 원)에 비해 평당 분양가격이 상당히 낮은 편이다.

업종별로는 섬유가 73개로 가장 많고, 기계금속 24개, 전기전자 13개, 화학 9개, 종이목재 3개, 식품 2개, 비금속광물 1개 등이다.

북측 근로자는 2005년 당시 약 6천 명이었으나 2014년 6월 현재 5만 2천742명, 여성이 70.6%, 평균연령은 37.9세로 20~40대가 대부분이다.

북측 근로자들에게 지급되는 월급은 각종 수당을 합해 평균 130.8달러(약 13만 5천 원)이고, 최저 월급은 60.05달러(약 6만 2천 원) 수준이다. 연간 인건비 총액은 8천7백여만 달러 규모다.

   
▲ 개성공단 생산액 및 북측 근로자 현황 [자료출처-통일부 홈페이지]

개성공단 생산액은 본격 가동이 시작, 첫 집계가 된 2005년 1천491만 달러(약 154억 원)이었으나, 2012년에는 4억 6천 950만 달러(약 4천855억 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개성공단 가동중단 여파로 2013년 2억 2천378만 달러로 반토막났다.

2014년 6월 현재 2억 2천895만 달러(약 2천367억 원)로 예년 수준을 회복, 개성공단 가동 10년의 누적 생산액은 23억 685만 달러(약 2조 3천857억 원)이다.

개성공단 내에는 입주기업 외에 철도, 도로, 전력, 통신, 정배수장, 폐수종말처리장, 폐기물처리장 등 인프라가 구축됐으며, 종합지원센터, 기술교육센터, 탁아소, 소방대, 협력병원 등 지원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남북 간 합의에 따라 북측이 부지를, 남측이 설비를 제공했다.

개성공단 운영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위원장 홍양호)가 맡고 있다. 이는 남측에서는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으로 부른다. 그리고 정부 차원에서는 통일부 남북협력지구발전기획단(단장 이강우)이 담당한다.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는 개성공단 내 종합지원센터에 위치, 남측 기업의 창구역할을 일임한다.

북측은 당국 차원에서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이 있으며,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를 통해 남측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와 함께 기업을 관리한다.

하지만 개성공단 가동중단 이후 남북은 '개성공단 공동위원회'를 설치, 당국 간 협의창구로 활용하고 있으며, 통행.통신.통관(3통) 분과위원회, 출입체류 분과위원회, 투자보호 및 관리운영 분과위원회, 국제경쟁력 분과위원회 등을 두고 해당 논의를 진행하며, 사무처를 개성공단 내에 상주, 연락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 재가동 이후 개성공단의 모습. 북측 근로자들이 점심시간에 나오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개성공단 발전을 위한 과제

남북은 개성공단 재가동 이후 개성공단 발전적 정상화를 위해 협의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5.24조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남북 간 논의는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개성공단 발전의 핵심인 통행.통신.통관 문제는 남북출입사무소(CIQ)에 무선인식(RFID) 기계를 설치해 일일단위 상시통행에 대해 합의했지만,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또한, 개성공단 내 인터넷 사용 문제, 통관 간소화 문제 등도 답보상태이다. 심지어 휴대전화 등 반입금지품목에 북측은 벌금부과에 그쳤지만, 최근에는 제재 수위를 높여 개성공단 일시 통행제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여기에 개성공단 내에서 발생하는 분쟁사건을 다룰 남북 공동기구인 '상사중재위원회'가 구성됐지만 지난 3월 첫 회의 이후 만남을 갖지 못하고 있다.

개성공단 국제화를 위해 외국계 기업 투자유치를 위한 '외국인 투자지원센터'가 최근 문을 열었지만, 외국계 기업은 3통 문제를 이유로 투자를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는 분기별 개최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1분기 회의는 열리지 못했고, 지난 6월 7차 회의를 가졌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귀환길에서 개성공단을 둘러봤다. [사진출처-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무엇보다 개성공단 발전의 열쇠는 '정경분리원칙'이다. 그런 점에서 '5.24조치'는 개성공단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인 셈이다.

대북투자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5.24조치'는 개성공단에 대한 신규투자 발목을 잡고 있다. 1단계 사업을 2단계로 확대해야 하지만 1단계 사업마저도 '5.24조치'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기존에 분양받은 업체들은 '5.24조치'로 인해 개성공단에 입주하지 못하고 있고, 북측 근로자를 위한 기숙사 문제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

이는 정부가 구상하는 개성공단 국제화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 기업인과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 발전적 정상화를 외치는 남측의 요구에 '5.24조치' 철회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북측의 입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측 근로자들의 모습.  [자료사진-통일뉴스]

물론, '5.24조치'가 해제되지 않는다고 해서 3통 문제나 신변보장 문제 등이 답보상태에 있을 이유는 없다. 남북이 개성공단을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서로가 통 크게 양보하는 미덕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성공단 운영과 관련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현재 비정상적인 개성공단 상황이 기존 계획대로 정상화되고 국제화가 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가동 10년, 재가동 1년을 맞고 있는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와 국제화는 '5.24조치' 존폐 유무에 달려있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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