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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증유의 초강경 대응전인가 예비적 탐색적 대화인가

 
강태호 2014.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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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시작하며

 

 1차 북핵 위기를 종식시킨 북미 제네바 합의가 체결된 것이 지난 94년 10월이었으니 20년이 지났다. 지난 20년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려던 모든 대북 핵정책은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2008년 12월을 마지막으로 6자회담은 지난 6년 동안 열리지 못하고 있다. 6자회담은 죽었다고 할 수도, 살아있다고 할 수도 없는 빈사상태에 빠져있다. 
  무엇보다도 2015년을 코 앞에 두고 한반도는 다시 기로에 서 있다. 두가지 흐름이 존재한다. 하나는 북한의 핵실험 등 미증유의 전면적 대결 가능성이다. 유엔 총회에서 인권문제를 담당하는 제3위원회가 지난 11월18일(현지시각) 북한 인권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틀 뒤인 11월 20일 성명을 통해 4차 핵실험을 경고하며 ‘전쟁억제력은 무제한 강화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유엔 총회는 12월 18일이나 19일께 이 북한 인권결의안을 채택하고 이때 안보리도 북한 인권 문제를 공식 의제로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북은 이에 맞서 11월 23일 국방위원회 성명에서 “미증유의 초강경 대응전에 진입할 것”이라고 밝혔듯이 미국 한국 등을 겨냥한 군사적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정반대의 다른 흐름 또한 존재한다. 6자회담 재개를 위한 탐색적 대화의 가능성이다. 미국을 방문 중인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지난 12월 10일 한미가 그동안 추진해온 북한의 변화를 위한 압박차원의 공조에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 ‘북한과의 대화를 위한 한미간 협력’이 필요하다고 촉구한 데 이어, 12월12일 성 김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미국이 북한과의 직접대화에 응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베이징에서 중국 정부 고위당국자들과 이틀간에 걸쳐 협의를 마친 뒤 북핵관련 6자회담 재개 조건과 관련해 “북한과 직접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환영할 일”이라고 말했다. 북한도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3주기(12월 17일)를 맞아 12월12일 발표된 외무성 명의의 장문의 보고서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앞으로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북한과 미국은 내년 1월 싱가포르에서 스티븐 보즈워스 전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비롯한 두나라의 전현직 당국자들이 참석하는 1.5 트랙(반관반민) 회의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반도 정세는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섣불리 예측할 수는 없고 어느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큰 흐름은 유엔총회 결의가 구속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권 문제보다는 북핵 문제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세번에 걸쳐 지난 20년 협상과 대결을 거듭해 온 북핵 위기의 궤적을 살펴보고 탐색적 대화를 통한 6자회담 재개의 가능성을 짚어본다. 
 

 목차: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핵궤적 20년 심층분석과 전망

  1. 지난 20년 대북 핵 정책은 실패
 2. 협상 무용론과 군비증강의 안보 딜레마를 넘어
 3. 탐색적 대화와 제재 협상의 ‘병진노선’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가 이뤄진 게 94년 10월이니 20년 전이다. 2014년 10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이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차관보(당시 북핵 특사)가 발표를 했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북한의 (핵)위협을 완화시키기 위한 미국과 한국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북핵 문제를 보건데 그의 이런 평가는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왜 실패했는가? 그 실패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일단 지난 20년에 걸친 북핵의 궤적을 되짚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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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합의 20주년을 맞아 지난 10월 미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합의 주역들의 토론회. 왼쪽에서 네번째가 로버트 갈루치 당시 미 협상대표


 북핵 위기의 궤적과 정세 반전의 계기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것은 1993년 3월12일이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비전향 장기수로 북한이 오래전부터 송환을 요구했던 이인모 노인을 송환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북핵 문제는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로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남북한 핵통제공동위가 불시 사찰 문제 등으로 이견을 보이고, 92년 10월 한미 군당국이 93년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방침을 밝힌 데 이어 1993년 2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특별사찰을 결의하자 이에 맞서 한 달 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했다. 1차 핵위기다. 그리고는 북미간 핵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1994년 6월 한반도는 전쟁 일보 직전의 파국으로 치달았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담판은 반전의 계기가 됐으며, 그해 7월 김일성 주석의 급작스런 사망에도 북-미는 3단계 고위급 회담을 통해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라는 정상에 도달했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는 이행을 둘러싼 갈등으로 곧바로 내리막길에 들어섰으며, 1998년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과 북한의 첫 3단계 로켓(대포동 1호) 발사로 큰 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를 협상의 국면으로 반전시킨 것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클린턴 행정부의 '페리 프로세스'다. 이른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으로부터 북미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조명록 차수의 평양 워싱턴 상호 방문을 통한 ‘북-미 공동코뮈니케’, 그리고 임기 말 북-미 미사일 협상을 타결짓기 위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등에 합의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고 클린턴 대통령이 조수석에 앉는 역할분담을 통해 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마침내 제네바 합의의 한계를 넘어서 북핵문제를 최종 해결국면으로 이끌어 가는 듯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2000년 11월 미 대선에서 투개표 문제를 둘러싼 논란 끝에 공화당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자 이 모든 합의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MD)체제와 배치되는 ABM(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 조약의 폐기를 목표로 북미 미사일 합의 등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해 온 정책을 거부(ABC정책, Anything But Clinton)했다. 그리고 2001년 국정연설에서는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의 일원으로 지목했다.  2002년 10월 부시 대통령이 ‘평양에 보낸 특사(제임스 켈리 미 국무차관보 일행)는 북한이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 핵 프로그램을 가동한 증거를 확보했다'며 북한을 몰아붙였다. 북은 ‘그보다 더한 것도 갖고 있다’며 맞받아쳤다. 그해 10월부터 다음해인 2003년 1월까지 대북 중유제공 중단으로부터 시작해 불과 3개월 사이에 제네바 합의는 붕괴됐다. 2003년 1월 10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에서 최종적으로 탈퇴하고, 2월부터는 핵연료봉 재처리 작업에 들어갔다. 2차 핵위기다. 1차 핵위기 때처럼 2003년 2월 북-미는 정면충돌했다. 3월에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북한은 플루토늄 재처리를 강행하며 핵무장화로 나갔고, 미그 21에 의한 미 정찰기 강제착륙 시도 로 위협했다. 미국은 예방공격의 '북폭론'(北暴論)을 검토하며 선제공격에 동원할 F-117A 전폭기 남한 배치, 항공모함의 한반도 해역 전진배치 등 군사력 증강으로 맞대응했다. 한반도는 또 다시 1994년처럼 전쟁 위기에 직면했다. 
  이번엔 중국이 적극 중재에 나섰다. 3월 초 첸치천 중국 부총리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특사로 특별 전용기를 타고 백두산 삼지연으로 날아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담판을 했다. 가까스로 열린 북미중의 베이징 3자회담을 거쳐 2003년 8월 남북 미중러일이 참가하는 6자회담이 처음으로 열렸다. 2005년 2월 북한의 핵보유 선언이라는 고비를 넘어 6자회담은 3년여의 힘겨운 협상 끝에 그해 9월 4차 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이라는 합의를 이뤄냈다. 그러나 이 공동성명 문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미국 내에선 북한의 방코델타아시아(BDA) 불법 금융거래와 초정밀 위조달러인 슈퍼노트 제조 의혹이 터져나왔다.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로 북한의 외환거래는 모두 중단되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북한은 6자회담 거부와 함께 강력한 무력행사로 맞섰다. 2006년 7월 미 본토를 겨냥한 3단계 장거리 로켓인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했으며, 8월 들어 미국이 대북 금융제재를 더욱 확대하자 10월 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미국 주도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1718호) 등 한반도는 또 다시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시 반전이 시작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서울을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을, 탕자쉬엔 중국 특사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설득했다. 부시 대통령은 중국의 적극적 역할을 기대하며 북미 양자 협상에 동의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7년 2월에 열린 5차 6자회담에서 참가국들은 9.19 공동성명에 입각한 일종의 핵폐기를 위한 로드맵으로 3단계 핵폐기 방안과 이 가운데 초기조처를 담은 2.13합의(원제목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Initial Actions for the Implementation of the Joint Statement)를 채택했다. 그리고 영변 핵시설의 폐쇄, 봉인과 IAEA 사찰단의 입북 및 감시활동 재개, 그리고 모든 핵 프로그램 목록의 협의 등의 초기조처가 마무리되면서 2007년 10월 3일엔 2단계 북핵 불능화 합의가 이뤄졌다. 초기조처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남북은 2차 정상회담에 합의함으로써 북핵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의 이른바 선순환구조가 가능해졌다. 
  2단계 불능화 합의 직후 열린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공동선언(10·4 선언) 가운데 6.25 전쟁의 종식을 공식화 하는 종전선언은 3단계 북핵 폐기로의 진입을 위해서 북한이 요구한 한반도 평화체제의 동시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공동커뮤니케가 동시에 진행됐던 것과 같이 북핵 해법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줬다.  
 그러나 2000년 미국 대선이 문제였듯이 2007년엔 남한 대선이 합의를 뒤흔들었다. 북-미 공동 코뮈니케가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무산됐듯이, 이명박 정부 들어 10·4 선언은 실종됐다.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인공위성) 발사로 촉발된 위기는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이어졌고, 6자회담은 사실상 실종됐다. 양시위 중국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2차 핵실험에 대해  중국은 이례적으로 ‘제멋대로’라는 표현과 함께 매우 강한 어조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표현은 중국 역사상 자국의 주권 침해나 국제법 위반을 규탄하기 위해 총 7차례 사용되었는데 그 7번째가 북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에 찬성표를 던졌다. 2012년 4월과 12월 북한의 두 번에 걸친 인공위성 발사와 유엔의 보다 강력한 대북 제재결의(2087호)가 잇따르고  2013년 1월 북은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에 사망선고를 내림과 동시에 2월12일 3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처럼 큰 흐름에서 보면 1993년의 1차 핵 위기는 10년 만인 2003년에 2차 위기로, 다시 10년 만인 2013년에 3차 핵위기로 묘하게도 10년 주기설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93년 김영삼, 2003년 노무현, 2013년 박근혜 등 새 정부가 출범하는 2~3월에 북핵 위기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새 정부 출범의 시기가 한반도 정세를 위기로 반전시키는 전환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왜 그런가? 시기적으로 보면 누적된 갈등과 대결이 팀스피리트 키리졸브 등 한미 군사연습을 앞둔 상황에서 정면대결의 힘겨루기로 치달은 측면도 있다. 아울러 새 정부 출범에 따른 정책 전환이 기존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권 교체에 따라 정책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기존 합의가 부정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2000년의 미 대선과 2007년 남한의 대선으로 이뤄진 정권교체가 기존 합의를 붕괴시킨 원인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북핵 합의의 실패는 상당부분 기존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북한과 한미간의 이견 대립 못지 않게, 상당부분 한국 또는 미국의 정권교체에 따른 정책의 지속성과 일관성 결여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성·김정일의 사망과 정세의 불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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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28일 김정일 위원장의 영결식

 

  한국과 미국의 정권 교체 못지않게 두 북한 지도자의 죽음 또한 한반도 정세에 극적인 변화 내지 반전을 가져왔다. 물론 이는 정권 교체라기보다는 권력 승계 내지 세습으로 볼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정권 교체라 할 수 있다. 
 두 북한 지도자의 죽음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시점에서 너무나 극적인 방식으로 찾아왔다. 절대 유일의 수령과 그 절대 권력을 이어받은 또 다른 최고 지도자의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그 파장이 북 내부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이 또한 대화와 협상 국면의 한반도 정세를 대결과 위기로 반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죽음은 남북 정상회담을 불과 2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 합의는 김 주석 사망에 대한 조문 문제를 둘러싼 남쪽 내부의 갈등으로 무산됐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공안 정국이 조성되면서 남북대화는 부정됐다. 북미간 협상은 그대로 진행돼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지만,  남북간의 대화 부재와 갈등은 김영삼 정부 내내 지속됐고 이러한 남북의 긴장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파행으로 몰아가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죽음 역시 정세 반전의 분수령이 됐다. 이 부분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3년 이후 전개된 현재의 북핵 상황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과 뒤이은 5·24 조처, 그리고 11월 북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으로 남북의 군사적 충돌은 한마디로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반면에 2010년 5월부터 2011년 5월까지 1년 새 세 번에 걸쳐 이뤄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은 북-중 관계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바꿔놓았다.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와 북-중 협력관계의 극적인 대비 속에서 남북의 갈등과 대결은 서해에서의 군사훈련에 미 항모가 참여하는 문제를 둘러싼 미-중의 갈등과 중첩되면서 2010년 말 한반도를 한국전쟁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런 대결구도를 협상 국면으로 반전시킨 계기가 된 게 2011년 1월19일의 워싱턴 미-중 정상회담이었다. 중국은 후 주석의 방미를 계기로 미국과 견제와 대치가 아닌 대화와 협력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중국의 양제츠 외교부장은 2010년 12월 12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중국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5년내 중국이 직면할 국제정세 가운데 미중관계와 관련, “협력적이고 윈-윈이 돼야 하며 제로섬(zero-sum) 게임이 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즈빙그뉴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2011년 1월 3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칼럼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 국빈방문은 79년 국교정상화 합의에 이른 덩샤오핑의 미국 방문 이래 30여 년 만의 가장 중요한 미·중 외교행사가 될 것이며, 양국 사이에는 여전히 다양한 분야에서 이견이 있지만 양국이 솔직하게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인식하에 풀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0년 12월 남쪽의 연평도 포격훈련 강행 및 대북 군사적 보복을 열어놓은 강경대응은 미 중으로 하여금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한 공동의 이익을 부각시키는 결과로 작용했다. 북의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인 12월 5일 후진타오-오바마 대통령간의 전화통화는 미중의 협력구도로 나아가는 분수령이 됐다. 미국은 12월 7일 한미일 외무장관회담을 통해 공동대응을 모색하면서 동시에 다음날인 8일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을 한국에 급파해 북한의 위협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과시했다. 그러나 멀린 합참의장의 방한은 한국의 모험주의적이고 위험한 자위권 행사(김관진 신임 국방장관의 항공기를 동원한 응징이 초래할 확전방지의 필요성)을 견제하는 이중적 의미가 있었다. 
 중국은 중국대로 다이빙궈 국무위원을 북한에 보내 12월 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을 통해서 연평도 포격 강행에 대한 북한의 추가 도발에 자제한다는 합의를 얻어냈다. 동시에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복귀와 전제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 의사를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제임스 스타인버그 국무부 부장관 제프리 베이더 아시아담당 선임국장 등이 중국을 방문해 다이빙궈 국무위원과 미중 정상회담을 위한 협의과정을 계속하고 이에 맞춰 중국은 천안함 사건 뒤 그동안 거부 태도를 보였던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의 중국방문에 동의하고 미중 군사 협력을 위한 상호교류에 합의했다. 그런 점에서 워싱턴 미중 정상회담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대한 미중의 공동노력을 포함해 광범위한 영역에서 미중 협력이 가능하다는 인식에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대한 응징의 자세로 12월20일의 연평도 실탄사격연습을 감행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분단국가에서 영토방위를 위해 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주권국가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누구도 개의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중국 외교부 장즈쥔 상무부부장이 12월 18일 성명을 내 한국군의 연평도 해상사격훈련 계획에 강력한 반대의 뜻을 천명한 뒤였다. 중국은 다시 이 대통령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12월 20일 추이톈카이 외교부 부부장은 “누구도 한반도 남북한 주민들이 피를 흘리게 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은 어떤가? <워싱턴 포스트>는 12월 21일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직면한 곤경은 한반도의 위험을 증가시키는 두번째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앞서 데니스 블레어 전 미 국가정보국국장도 12월 12일 “한국이 북한에 대한 인내심을 잃고 있다”며 한국 정부가 북에 군사 행동 취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남과 북의 편에 서서 갈등해왔던 미-중은 2011년 1월 이 워싱턴 정상회담을 통해 이른바 ‘동맹의 덫’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공동의 이익에 입각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오바마-후진타오 두 정상은 남북대화를 통한 6자회담 재개라는 상호 이해,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공동의 우려를 바탕으로 협상국면을 열어가는 데 합의했다. 그 뒤 2011년 5월 12일 미-중 전략경제 대화에서 확인된 것이지만, 이는 미국이 중국의 국익을 존중하고 봉쇄하지 않기로 하고, 중국은 미국의 국익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2011년 4월 17일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한국을 방문해 남북대화→북-미 대화→6자회담으로 이어지는 3단계 6자회담 재개 프로세스를 공식화했다. 
  그 결과가 2011년 7월 인도네시아 발리 아세안지역포럼(ARF)에서의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으로부터 시작된 북-미 고위급 대화였다. 5·24 조처를 취한 지 1년 2개월 만에 한반도는 다시 6자회담 재개의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당시 류우익 통일부 장관은 ‘유효한 접근으로 대화 통로를 마련’하겠다고 변화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5·24 조처에 발이 묶인 남은 북과의 대화를 풀어나갈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대화는 북미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이 북미 협상은 중국이 일관되게 요구해온 것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생애 마지막 1년 사이 2010년 5월부터 20111년 5월까지 3번에 걸쳐 중국을 방문해 이런 중국의 6자회담 재개 요구를 수용하면서 협력관계 강화와 대를 잇는 지원을 확약받았다. 중국은 든든한 버팀목을 자임했다. 우라늄 농축 문제의 유엔 안보리 회부를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핵의 평화적 이용 권리는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 미국 등의 탈북자 송환 반대에 대해선 단호한 태도로 북과의 특수관계를 고수했다.
  북-미는 탐색전 성격인 뉴욕에서의 1차 대화를 거쳐 10월 말 2차 제네바 대화에서 실질적인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3차 대화에서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합의를 내놓는다는 암묵적 합의에 따라 움직였다. 특히 제네바 대화에서 북은 우라늄 농축 중단 문제를 협의할 용의를 보임으로써 돌파구를 열었다. 이를 바탕으로 12월 8~15일 글린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한·일·중 세 나라를 방문해 의견을 교환한 뒤 12월 15~16일 미국의 로버트 킹 인권특사와 북한의 리근 미국국장이 베이징에서 식량 지원 모니터링 등 인도적 지원 문제를 매듭지었다. 이에 따라 3차 북-미 대화는 택일만 남았고, 2011년 12월19일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12월 22일 3차 북미대화를 연다고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2월 17일 사망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모든 게 중단되고 다시 모든 게 불확실해졌다. 2011년 12월 30일 국방위원회 성명은 이명박 정부가 장례 기간 중 취한 조처들을 ‘반민족적 대역죄’로 규정하고 상종하지 않는 것은 물론 끝까지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김정일 사망 뒤 김정은을 중심으로 장례절차를 수습한 북한 지도부는 놀랍게도 2012년 초 4월로 예상되는 당대표자회 등 내부적으로 중요한 권력승계 절차를 앞두고 미국과는 대화 재개를 선택했다. 한-미 군사연습 등에 맞서 북이 도발적인 행동으로 나올 것이란 예상을 뒤엎은 것이다. 그건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으로부터의 식량지원을 포함해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든든한 원군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북-미 3차 대화 역시 중국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다. 3차 북-미 대화, 2011년 12월의 식량지원을 위한 북-미 접촉이 베이징에서 열린 것은 장소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중국은 또 이 3차 대화에 앞서 푸잉 외교부 부부장을 평양에 보내 대북 식량지원 확대를 약속했다.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인 오코노기 마사오 일본 게이오대 명예교수도 지적했듯이 2012년 2월23~24일 중국 베이징에서의 3차 북-미 고위급 대화는 전해 12월 하순에 예정돼 진전이 예상됐던 것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2개월 연기된 것이었다. 이 3차 대화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해 식량(영양식)을 지원하고 북한은 핵 실험, 장거리 미사일의 발사 및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영변에서의 핵 활동을 일시 정지하고 영변의 핵 활동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 아래 둘 것(이른바 3+1)을 약속했다. 이 합의는 “북한 정치체제가 최고 지도자의 사후에도 기존의 정책이 계속되며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오코노기 교수는 평가했다. 북·미는 2월29일 워싱턴과 평양에서 이런 합의를 발표했다. 이른바 2.29 합의다. 그러나 북미는 이를 베이징에서 양자가 합의해서 발표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agreement’가 아닌 ‘deal’이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합의 보다는 낮은 수준의 견해를 같이 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것이든 이 2·29 북-미 합의는 오바마 정부 들어 처음으로 6자회담 재개로 가는 길을 연 셈이 됐다.  뉴욕 사회과학원(SSRC)의 한반도 전문가인 리언 시걸은 그동안은 미국이 북한에 뭔가 일방적인 요구를 하는 ‘대화 모드’였다면, 이제 서로 뭔가를 주고받는 ‘협상 모드’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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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3차 북미 대화 결과를 설명하는  글린 데이비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

 
 김정일의 유훈과 인공위성 발사

 

  그러나 북한이 4월 중순 은하 3호 장거리 로켓에 ‘인공위성’(광명성 3호)을 발사하자 2.29 합의는 붕괴됐다. 2.29 합의에 있는 장거리 미사일 발사 잠정 중단과 모순되는 듯한 미국과의 협상을 기대하지 않는 북한의 이런 움직임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2011년 12월28일 <로동신문>은 핵과 미사일은 김정일 위원장이 남긴 ‘최대의 유산’으로 지칭하면서, 그것에 의해 “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민족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핵과 미사일 개발은 김정일의 유훈이며, 그런 점에서 광명성 3호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돼 왔던 것이다. 오코노기에 따르면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것도 김정일의 유훈이며, 이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기본전략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억지력으로서 뿐만 아니라 외교수단으로도 이용하여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우라늄 농축시설의 활동을 일시적으로 동결하거나, 그것을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 하에 두거나 하는 2·29 합의와 인공위성 발사는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양시위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이 합의가 북-미 간 그리고 무엇보다 남북 간의 뿌리 깊은 전략적 불신 때문에 견해 차나 불시의 사고가 발생하면 언제든 탈선할 수 있는 ‘매우 취약한 구조’에 있다고 지적했다. 오코노기 교수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이 북-미 합의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작은 첫걸음”에 지나지 않는다며, 2·29 합의 후에도 북한은 이명박 정권과의 대화를 봉쇄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오바마 행정부에게 2.29 합의는 지난 4년동안 북한과의 유일한 합의였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에 앞서 비밀리에 미 정보 당국자들을 평양에 보내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발사를 강행했다.
 이 2.29 합의가 실패하자 북한과의 대화를 주장하는 협상파는 설 자리를 잃은 게 사실이다. 게다가 그 뒤 북의 젊은 지도자 김정은은 헌법상에 핵보유국을 명기하고 12월 또 다시 인공위성을 발사했으며, 3차 핵실험까지 단행했다. 북한과의 협상은 시간만 벌어줄 뿐이며, 합의는 무의미하다는 협상 무용론이 설득력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북한은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선택했다.    
 
 전면 대결전의 예고

 

  2012년 8월 18일 괌 미군기지에서 군용기가 평양을 향해 이륙했다. 이 비행기엔 국가정보국(DNI) 산하 조지프 디트라니 국가비확산센터(NCPC) 소장과 시드니 사일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남북한 담당관이 타고 있었다. 디트라니는 DNI 대량살상무기 부서의 수석 자문관을 거친 베테랑 북한 전문가이고, 현 6자회담 수석대표인 사일러는 당시 글린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보좌하는 한국어가 유창한 전문가였다. 이들은 북한에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과 만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북-미 현안 등을 논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따르면, 디트라니와 사일러는 북한 새 지도부에 김정일 사후 온건한 외교정책을 취할 것을 촉구했다. 디트라니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지 말라고 설득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으며, 나와 다른 전문가들은 처음에 김정은이 온건파를 기용하는 등 아버지보다 온건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 느꼈으나 이런 희망은 곧바로 사라졌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이에 앞서 4월12일 북한이 광명성 3호 인공위성(은하 3호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기 전에도 북한을 방문했다. 디트라니는 “미국 처지에서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 당국자들과의 대화 시도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그들이 비밀 방북에서 무슨 논의를 했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3년 1월 21일 일본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그 일부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NSC와 중앙정보국(CIA) 관계자를 통해 김정은 시대의 조선은 지나간 조(북)-미 회담 역사를 총화하고 그에 기초하여 핵문제와 관련한 최후통첩”을 전달했다는 거다. 최후통첩은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버리지 않을 경우, 조선의 핵보유 장기화는 불가피하고 비핵화 논의도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엘 위트 전 국무부 북한 담당관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대북정책 전문가로 제네바 합의에도 참여한 위트는 2012년 7월 싱가포르 북-미 비공개 투트랙 회의에서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 한성렬 유엔대표부 차석대사 등에게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북한은 미국이 북한에 대해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핵억제력 강화와 미사일 추가 개발 등 2005년 9·19 공동성명의 '동시 행동' 원칙을 폐기할 것이다.”
  위트는 이런 내용을 오바마 행정부에 전달했다. 그리고 당시 오바마 2기 행정부가 직면할 첫 번째 외교정책의 위기는 북한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2013년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당시엔 미 정부의 누구도 그의 경고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북한 외무성은 비망록을 통해 좀더 공개적·공식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 같다. 2012년 8월31일 <중앙통신>을 통해 공개된 이 비망록은 10월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에 공식 문서로 배포됐다. 이 비망록도 앞서 언급된 '최후통첩'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선 대북 적대시 정책의 대표적인 예로 북의 위성 발사를 안보리 결의로 제재하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는 북을 적으로 보는 적대 관념 때문에 나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비망론은 논리적으로 북핵이 먼저인지, 아니면 미국의 적대 정책(관념)이 먼저인지를 묻고 있다. 핵문제 때문에 미국이 북을 적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북을 적대하면서 핵위협을 가중시켜 왔기에 불가피하게 핵을 보유하게 됐다는 말이다. 북한이 적대정책 해소 없이 북핵 해결이 없다는 것은 이런 논리에 근거한다는 주장이다. 거꾸로 말하면 미국이 적대정책을 포기한다면 북도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 될 수 있다. 비망록은 이에 따라 미국의 선택을 요구했다.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고 한반도 평화와 안전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북의 핵 무기고가 계속 확대 강화되는 것을 지켜볼 것인지. 
 북은 이미 2012년 여름부터 그해 12월 12일의 은하 3호 장거리 로켓으로 인공위성(광명성 3호 2호기) 발사와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의 강경대응을 예고한 셈이다. 비망록은 당시엔 주목받지 못했지만 “핵보유는 부득불 장기화할 것이며, 우리의 핵억제력은 미국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화되고 확장될 것”이라고 명시했으니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북은 3차 핵실험을 단행한 뒤인 2013년 2월 12일 발표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도 거듭 미국의 결단을 촉구했다. “미국은 지금이라도 우리의 위성 발사 권리를 존중하여 완화와 안정의 국면을 열겠는지, 아니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끝까지 추구해 정세 폭발을 향한 지금의 잘못된 길을 계속 걷겠는가 하는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북한이 요구하는 적대시 정책의 포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북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 직후인 2012년 11월 10일<조선신보> 시론과 11월 12일 <노동신문>에 실린 개인 필명의 논설을 통해서 ‘조선이 이제껏 주장하는 요구사항’을 언급했다. 그건 “지난 20년 합의가 이행되지 못했던 북-미 협상의 역사를 총괄하고 최종적인 해결에 나서기 위한 담판”이라는 것이다. 기존 합의는 크게 두가지다. 우선 이 논설은 “미국이 20년 전에 채택된 조-미 공동성명(북-미 1단계 고위급 회담을 지칭하며 2000년 북-미 공동 코뮈니케에서 재확인)에서 핵무기 불사용과 핵위협 포기, 자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 조선의 평화통일 지지를 확약했었다”고 상기시켰다. 이는 1994년 3단계 북-미 고위급 회담(제네바 기본합의)에 앞서 1단계 회담에서의 합의와 2000년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에 의해 최종 마무리 지으려 했던 미사일 협상과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지칭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올해(2013년)가 정전협정 체결 60년을 맞이하는 해라며 “과거에 북-남 수뇌(정상)들은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수뇌들이 전쟁 종결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는 데 합의한 바 있다”고 상기시켰다. 2007년 10·4 남북 정상선언을 말하는 것이다. “클린턴 정권과 부시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오바마 정권이 조선과 어렵게 이루게 된 (이들) 합의를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면 20년간에 걸친 조-미 비핵화 대화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2012년 오바마 행정부가 대선을 통해 2기 행정부를 출범시키려는 시기에 즈음해서 북한이 요구한 것은 위험하고 무모한 도박일 수도 있지만 기존의 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최후의 담판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북은 오바마 2기 행정부가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치른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용단”을 내린다면 북한도 “언제든지 그에 기꺼이 화답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신보>의 표현을 빌리면 지금은 ‘최후 결판의 국면’이며, ‘전쟁 방지를 위한 평화회담’에 나서라는 것이다.
 위트 전 북한 담당관은 2013년 2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북한 관리들은 2005년 9·19 공동성명의 ‘동시 행동’ 원칙을 폐기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며, 그들은 미국이 북한에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행동을 취할 것을 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은 북한이 핵 억제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확대할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북한에 먼저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에 먼저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조처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북한이 상황 악화를 개의치 않겠다는 걸 예고한 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3차 핵실험은 이제 협상을 통한 핵포기는 불가능하다는 견해에 힘을 실어줬다. 북한은 협상을 핵무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핵은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이기에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협상무용론만 강화시켜줬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런 최후의 담판을 요구한 북한의 양자택일 요구를 정면 대결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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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봄-'종전'을 향한 전면 대결전’과 ‘플레이북’


  
  2013년 한반도는 94년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전쟁의 먹구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2월12일 3차 핵실험을 감행한 북한은 3월26일 1호 전투근무 태세를 발동시켰다. 인민군 최고사령부 성명은 “지금 이 시각부터 전략 로켓군 부대들과 장거리 포병부대들을 포함한 모든 야전 포병군 집단들을 1호 전투근무태세에 진입시킨다”고 밝혔다. 1호 전투근무 태세는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최종적으로 전략 로켓군의 미 본토 괌 일본 등의 미군기지에 대한 타격계획을 비준했다는 걸 의미했다. 실제로 그 뒤 북은 사정거리 4000km로 추정되는 중거리 미사일 무수단을 동해안으로 이동시켜 발사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총련기관지 <조선신보>에 따르면 이는 2012년 12월12일의 “인공위성 발사를 불법시한 유엔의 안보리 제재 결의에 대응한 북한의 전면 대결전”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2103년 4월3일자)에 따르면 미국은 이른바 ‘플레이북’으로 대응했다. 작전계획의 하위 개념인 플레이북은 2012년 12월 미 태평양 사령부가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응해 새롭게 마련한 일종의 ‘전술교본’이었다. 그 목적은 북이 위협을 가할 경우 훨씬 강력하고 압도적인 무력시위를 통해 북한이 추가 도발에 나서지 못하도록 제압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정부의 지나친 군사적 대응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과 북한은 ‘키 리졸브 연습’이 시작된 3월11일을 기점으로 실제 무기를 동원한 ‘도상(圖上)전쟁’을 벌였다. 미국은 3월19일 B-52 전략폭격기를 한반도에 전개하는 등 3월에만 세 차례 이상 B-52를 출격시켰다. 또 20일엔 전략핵잠수함인 샤이엔을 연습에 참가시켰으며 이런 사실들을 모두 공개해 힘을 과시했다. 그러자 북한은 3월 20일 B-52가 재출격하면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전략로켓군 부대들과 장거리포병 부대들에 1호 전투근무태세를 발동시킨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28일 B-52를 능가하는 스텔스 전략폭격기인 B-2를 미 본토로부터 출격시켰다. 북도 물러서지 않았다. 29일 김정은은 전략미사일 부대의 화력타격 임무에 관한 작전회의를 긴급 소집하고 ‘사격 대기상태’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북한도 이 회의를 언론에 공개했다. 미국은 3월 31일 주일미군의 최신예 스텔스 F-22 랩터를 한반도 상공에 출격시킴으로써 이 또한 무시했다.

 

 무수단 발사 중단- 대화국면으로의 전환 조짐

 

  평양주재 외국공관에 전쟁 가능성을 이유로 철수권고를 내리며 발사단추를 누르겠다던 북이 무수단 발사 중단 움직임을 보인 건 4월12일이었다. 정면충돌에서 벗어나려는 첫 신호였다.  미 <CNN> 방송은 이날 미군 소식통을 인용해 북이 무수단 미사일을 기립 상태에서 아래로 내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신호는 미국이 먼저 보냈다.  앞서의 <월스트리트저널>은 플레이북 전략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미국이 속도조절에 나섰다고 전했다. 실제로 헤이글 국방장관은 4월3일, “복잡하고 불붙기 쉬운 (한반도) 상황”을 악화시키길 원하지 않는다면서 느닷없이 예정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니트맨 III 의 시험발사를 연기했다. 또 한미 군사위원회 회의(MCM)도 연기하는 조처를 취했다. 헤이글 장관은 그 이유를 “한반도 긴장 고조와 북한의 오판에 대한 우려” 때문으로 밝혔다.
 북이 미사일 발사대기 상태 해제에 나선 2013년 4월12일은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서울에서 한미외교장관회담을 한 날이다. 그는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대화를 원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대화의 조건과 목표가 ‘한반도의 비핵화’임도 분명히 했다. 국무장관 취임 뒤 첫 한중일 순방에 나선 케리 장관의 이 발언은 전날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를 할 것”이라고 밝힌 데 이은 것이었다. 한미가 함께 대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케리 장관은 또 오바마 대통령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연기한 것을 상기시키며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몇 개의 군사훈련을 하지 말라고 명령해 긴장 완화에 기여를 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제 선택은 김정은의 것이다. 그는 책임 있는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며 결단을 요구했다. 북은 중국을 통해 그 답을 내놨다. 5월 22일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김정은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전격 방문해 ‘전면 대결전’의 정책전환을 분명히 했다. 그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면담에서 밝힌 ‘6자회담 관련국과의 대화’ 방침은 6월6일 남북 당국간 회담 제의와 6월16일국방위원회 중대 담화를 통한 북미 고위급 회담 제의로 나타났다.
  또 다시 전쟁은 회피됐다. 그러나 대화의 문을 열었을 뿐 본격적인 협상이 전개된 건 아니었다. 북미는 2013년 내내 중국이 적극적 중재에 나섰음에도 6자회담 재개를 둘러싼 공방만 거듭했을 뿐이다. 남북도 개성공단 중단사태의 해결을 위한 대화를 이어갔지만 개성공단 정상화의 원상회복에 그쳤을 뿐이다.

 

중국의 새로운 접근-한반도 재균형 전략

 

  북한의 전면 대결전 공세로 촉발된 군사적 충돌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즈음인 2013년 5월7일 워싱턴에서 박근혜 정부 출범 뒤 첫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두 정상이 이 회담에서 북한에 던진 메시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버마’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받아들여 북한이 ‘핵무기를 버리고 평화와 진전의 길’로 가는 의미 있는 조처를 취한다면 버마처럼 북-미 관계 정상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중국의 4대 ‘국유 상업은행’ 가운데 하나인 중국은행은 이 한-미 정상회담에 호응하듯이 북한의 무역결제은행인 조선무역은행의 계좌를 폐쇄하는 조처를 취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5월7일 <워싱턴포스트>와 한 회견에서 밝힌 “북한이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중국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요청에 화답한 셈이다. 중국은행의 이 조처는 미국과의 사전 교감에 의해 나온 것이기도 하다. 앞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3월13일의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해 “중국이 북한에 대한 정책을 재검토하는 조짐이 보인다”고 밝힌 바 있다.
   2013년 공식 출범한 중국의 시진핑 지도부는 북한에 대한 외교적 경제적 압박과 유엔제재 이행을 공언하면서 북핵 문제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해 왔다. 성균 중국연구소의 이춘복 책임연구원이 중국의 ‘한반도 재균형 전략’이라고 적절히 명명했듯이 이는 “북한의 비핵화와 북한이 우려하는 안보불안-북미, 남북관계를 동시에 고려하는 새로운 접근법이었다. 여기엔 미국의 대중국 견제로 작동하는 아시아 중시전략(Pivot to Asia 또는 재균형 전략)에서 북핵 문제가 한미일의 대중 포위전략에 이용되서는 안된다는 판단과 미중 신형대국관계 추진에서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두 나라간 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3년 9월19일 왕이 외교부장은 워싱턴서 케리 장관과의 회담 뒤 “6자회담을 어떻게 재개할지에 대해 미국과 새롭고 중요한 합의를 도출할 자신이 있다”고 밝히고, 브루킹스 연구소에서의 연설을 통해 북한이 2005년 9월 6자회담 공동성명과 우라늄 농축작업 일시 중단 등을 수용한 2.29 북미 합의에 복귀할 용의가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했다. 이는 6자회담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9.19 공동성명 합의를 거부하는 자세를 보였던 북한의 팔을 비틀어 입장을 바꾸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9월18일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10주년 기념 국제토론회에서 김계관 북 외무성 제1부상은 왕이 외교부장의 발언을 확인해줬다. 그는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비핵화가 북한의 정책목표라고 밝히고, 6자회담의 전제조건 없는 즉각 재개와 9·19공동성명의 이행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는 케리 국무장관이 2013년 10월3일 “북한이 비핵화를 결심하고 진정한 협상에 나선다면 북한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할 준비가 돼 있다”는 발언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북미간 대화는 재개되지 못했다. 앞서의 베이징 토론회에 참석했던 문정인 교수(연대 정외과)에 따르면 한미 두나라를 대표한 참석자들은 6자회담의 선행 조처로서 ‘2·29 합의에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포함해+ α를 추가로 요구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중재는 이 간극을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이에 반발했다. 2013년 10월 12일 국방위원회는 “미국이 진정으로 조.미 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다면 대조선 적대시정책부터 철회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대변인 성명을 발표해 “우리가 핵무기를 내놓으면 대화도 있고 관계 개선도 있으며 불가침도 있다는 감언이설로 감히 그 누구를 흔들어보려고 꾀한 것”이라면서 미국 협상안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후 북미는 서로 상대에게 의지가 없다며 비난에 나섰다.

 

 미국 북한 서로 다른 접근법으로 맞서

 

  북의 핵보유국 논리에 입각한 양자택일의 최후담판은 핵과 적대시 정책의 상호 폐기를 위한 협상을 요구한 것이지만 ‘비핵화 없이는 어떤 대화도 없다’는 미국의 강경대응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2013년 4월 케리 국무장관은 하원 청문회에서 북핵 문제에서 과거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즉 비핵화의 조건 없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경제적 지원 및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하는 방식은 더 이상 안하겠다는 것이다. 2013년 6월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을 제시한 국방위원회 중대 담화에 깔려 있는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한 접근법도 1994년 제네바 합의나 2005년 9·19 공동성명과 같은 비핵화 협상 방식의 거부였다. 예를 들어 2013년 3월말 핵 무력 강화 및 경제건설 동시추진의 병진노선을 채택한 직후인 4월1일 <로동신문>사설은 “미제가 우리를 핵으로 위협하며 경제건설에 제동을 걸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선언했다. 자신들도 이제는 핵보유국이니 주변에서 이를 인정하고, 특히 미국과는 ‘대등한’ 입장에서 핵군축의 구도에서 대화와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이런 북미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은 핵무기는 최후의 보장장치로 일종의 보험(헤징)인데, 그걸 제일 먼저 내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핵물질이나 시설 등은 몰라도 비핵화가 핵의 완전 포기라면 핵군축을 통해서 체제 안보가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한 응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미국은 비핵화를 거부하면서 관계개선을 요구하는 건 기만으로 본다. 전향적이라고 할 수 있는 케리 국무장관 마저도 그것이 전제되지 않고는 풀 수가 없는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북한이 이처럼 과거의 비핵화 협상 방식을 거부하는 까닭은 핵보유라는 현실 말고도 더 이상 에너지 지원과 경수로 건설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변의 실험용 경수로(ELWR) 건설 현장을 위성으로 분석해 온 미국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르면 2014년부터 100㎿t(전기출력용량으로는 25~30MWe) 경수로를 시험가동하기 시작해 이르면 2015년부터는 상업운전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북한 또한 “당의 병진노선이 주체적인 원자력공업에 의거하여 핵무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긴장한 전력 문제도 풀어나갈 수 있게 한다”고 말해 이 경수로가 병진노선의 핵심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이 취한 유례없을 정도의 적극적인 중재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위샤오화 중국 국제문제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연구부 주임은 미국이 “북한에 협상이 아니라 항복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견해를 보였다. “미국이 북한 핵무기에 대해 느슨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북한 핵무기 확산에 따른 위험보다 그것을 이용할 때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중국에 대한 견제 강화, 한국 일본 등과의 군사협력 및 동맹 체제 강화 등 북한 핵무기를 통해 얻는 이익을 보건데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려하기 보다는 중국과 남한에 ‘우리(미국)와 발맞춰 북한을 압박하라’고 강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위 주임은 이런 미국의 태도가 장기적인 측면에서 한반도 비핵화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북한이 최근 경제에 무게를 실을 수 있는 것도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자신감에 근거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핵을 포기하라는 것은 협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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