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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붕괴의 21가지 징후

[대한민국 붕괴의 21가지 징후] ① 대한민국 불신공화국
 
곽동기  | 등록:2015-02-27 11:03:41 | 최종:2015-02-27 11:06:1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우리나라에는 ‘이웃사촌’이란 정겨운 말이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친지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들이 더 많은 도움이 된다는 이웃사촌이란 말은 정에 넘쳐 서로 돕는 한국사회의 정서를 상징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지난 90년대, <MBC> 일요일 아침드라마 “한지붕 세 가족”이 기억나시는가요? 온 국민이 시청했던 그 드라마는 “순돌 아범”, “말자씨” 등 숱한 화제의 인물들을 낳았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우리들의 ‘이웃’은 그야말로 고향의 친지들보다 소중한,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동반자들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2015년, 한국사회에서 이웃사촌은 어느덧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웃사촌은 고사하고, 우리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이웃과 친하게 지낸다는 분들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같은 동 주민들에게 인사하는 정도입니다. 서로의 이름이 무엇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물어보기도 참 어색합니다. 혹여나 자녀들의 초등학교 행사 때 학급어머니회 등에서 같은 동네 학부모들을 만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학부모들도 자녀의 교육이 관심사일 뿐, 직업이 무엇인지, 취미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은 자칫 “오지랖 넓다”는 소리 듣기 딱 알맞습니다. 저도 우리 아파트 동에서 제가 알고 지내며 인사하는 집은 세 가족에 불과합니다.

옛말에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습니다. 공동체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15년 우리 주변에는 기쁨을 함께 나눌 이웃도 없고 고통을 함께 견뎌 줄 이웃은 더욱 없습니다. 
  
바로, 소통과 공감을 개입과 간섭으로 치부하는 정서. 한국사회에서 끝없이 자라난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자기 세계에 갇힌 우리들

한국사회는 개인주의에 대한 선망이 너무 과도합니다. 오죽하면 차도남(차가운 도시남자)이 인기를 끌 정도이겠습니까. 우리 국민들이 모두 비정상도 아닐텐데 차가운 사람이 왜 끌리는지요. 그것은 바로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개인주의에 심취하면 사람들은 자기와 관계있는 사안에 관심을 가질 뿐 사회적 문제에 소홀해집니다. 이렇게 지낸지가 이제 어느덧 20년째입니다. 지난 20년간, 우리 모두는 사회에 대한 관심은 끈 채로 자기 일에만 매진하다 보니, 우리들의 세계는 갈수록 좁아졌습니다. 이웃이 없고 인간적인 대화가 사라진 지금, 우리들의 친구는 직장동료, 학교선후배 정도로 갈수록 협소해지고 있습니다.

이젠 회사에서나 학교에서나 누구나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하고, “쿨”한 이미지의 사람을 스마트하게 평가합니다. 회사상사에게 자기 집안 사정을 이야기하며 휴가를 부탁하는 사람, 자기 생일이라며 직장 동료들을 술집으로 끌어모으는 사람은 “인간미”있는 사람이 아니라 “피곤한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어느덧 우리가 개입하고 책임지려는 대상은 “사회”가 아니라 “가족”에 국한되었습니다. 그 가족조차도 사춘기 이전의 자녀들에게만 가능할 뿐입니다. 자녀가 사춘기에 들어서면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것”이라는 암묵적 위계가 형성됩니다. 결국 이렇게 사람이 북적대는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우리는 혼자입니다. 그렇게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기세계에 갇혀 대한민국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퇴직한 노인들은 종편TV와 신문기사를 통해 젊은이들의 정서를 판단합니다. 가정주부는 TV와 시장물가지표만으로 정치권을 평가합니다. 학생들은 아르바이트와 고시원 들락거리기 바빠 정치에 관심자체가 없습니다. 공동체가 사라진 지금, 우리가 느끼는 여론은 실제로는 공중파 TV 출연자들의 의견입니다. 그렇게 20년을 살았습니다.


남을 이해할 여유가 없는 우리들

모두가 철저히 고립된 오늘의 모습은 우리가 스스로 원했던 모습은 아닙니다. 한국사회가 너무 각박해지고, 우리들의 삶이 너무 힘들어져서 각자가 외톨이로 된 것입니다.

철저히 고립된 개인주의적 생활 속에서 우리는 남을 이해할 여유도,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자기 일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2015년의 한국사회에서, 이제 남에게 관심을 가지려는 것조차도 하나의 사치로 느껴집니다.

우리 국민들은 잠을 제대로 잘 시간도 없습니다. 2009년 우리 국민들의 하루 평균수면시간은 7시간 49분으로 <OECD> 최하위였습니다. 7시간 49분이면 많이 자는 것이라고요? 여러분이 얼마나 잠을 못 자며 생활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하루 평균 8시간 50분을 자고 미국사람들은 하루에 8시간 38분을 잔다고 합니다. 독일 사람들도 8시간 12분을 자며 팍팍하다고 소문난 일본인들도 하루 평균 7시간 50분을 잔다고 합니다.

수면부족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1년 전인 2014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수면시간은 하루 평균 5시간 27분으로, 2009년에 비해 1시간이나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고등학생들의 69.5%가 잠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직업의 업무강도가 높기 때문입니다. <월간 마이더스> 2010년 10월호에 따르면,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의 직장인은 자신의 직무에 만족하는 비율이 69%로 OECD 평균 81%에 크게 못 미치게 나타났습니다. 멕시코가 92%에 이르며 미국은 82%인데 반해 한국은 최하위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수행하는 직무에 대해 ‘항상’, ‘자주’, ‘때때로’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직장인은 전체의 87%로 한국이 가장 높았습니다. 멕시코는 60%에 불과하였고, 일본이 72%, OECD 평균도 78% 수준이었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우리 직장인들은 OECD 국가들 가운데 직무만족도는 가장 떨어지며 직업스트레스는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세계에서 잠도 제일 부족하고 자기 일에 만족도도 제일 낮으며 직업스트레스는 가장 많이 받는 한국인들, 우리는 자연히 불신사회, 분노사회로 진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직종 사람들을 믿지 못함

타인에 대한 관심도 없고, 자신에 대한 관심만 늘어난 우리 국민들은 이제 자신과 다른 위치의 사람들을 믿지 못합니다. 각자 자기 직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많다보니, 자기 일이 제일 힘들게 느껴지고 그런 자기를 알아서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에게 불만을 느낍니다. 개개인이 고립된 지 20년, 이제 한국사회는 각종 불신과 분노의 기재가 전면화되고 있습니다.

하루 24시간씩 교대로 근무하는 아파트 경비원들은 저녁마다 꼭꼭 퇴근하는 아파트 상가점주들이 부럽습니다. 하지만 상가점주들은 갈수록 줄어드는 매출 때문에 대출이자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입은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마음 편하게 일하는 듯 보이는 아파트 경비원이 참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편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서로의 고충을 주고 받을 소통의 기회가 있다면 “아 나도 그렇지만 저 사람도 참 힘들구나”하고 서로 힘을 합쳐 나갈테지요. 그러나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 지으며 사생활을 언급하지 않는 것을 하나의 멋으로 여기는 개인주의적 정서가 지속되다보니 우리 국민들은 어느덧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힘들다는 고립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분노와 스트레스를 사회적 지위가 보다 낮은 이에게 해소하는 이른바 “갑질”이 사회적 현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는 우리 국민 모두가 못 견디게 힘든 상황인데 말입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며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 것을 멋있게 느끼다보면, 어느덧 주변 이웃들의 생활의 진면목을 알 수 없습니다. TV에서 화려하게 가공된 사람들만 접하다보면 이 사회 모두가 행복한데 자기만 힘들다, 나만 패배자라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 역시 차도남을 동경한 지 20년 만에 생긴 사회현상입니다.


불신의 골이 깊어지는 악순환

그러다 보니 우리 국민들은 이제 일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범죄자와 그 집단을 분리하지 않고, 집단 전체에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지난 2015년 1월 8일, 인천 한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4살된 여아를 폭행하는 CCTV 영상이 전국적으로 보도되어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습니다. 2015년 1월 28일, 경기도 의왕경찰서는 어린이집 원생의 머리를 때리는 등 상습 폭행한 혐의(아동복지법 위반)로 보육교사 이모(25·여)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아이를 폭행했다며 수많은 부모들이 분노했습니다. “꽃다운 아이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뉴스한국>은 인천 어린이집 학대 사건 후 1달간 전국적으로 아동학대가 800건이나 신고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어머니들은 이제 막상 ‘누군지도 잘 모르는’ 보육교사분들에게 아이들을 맡기기가 아무래도 꺼림직해집니다. 아무 근거도 없는, 그저 막연한 불신감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회적 지도층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되 사회적 약자에게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 계층을 이해하는 이중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일반국민은 다수이지만, 사회지도층은 매우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지도층은 단 한명의 범죄자가 여러 공범을 낳을 수 있으며 사회적 파급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매우 엄격히 다뤄져야 합니다. 청와대 대변인이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성추행 추문에 연루되고, 새누리당에서 친지를 성추행한 의혹을 받는 국회의원이 있는 상황이라면, 이를 단순히 일부의 실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에게서 나타난 일부의 사건·사고는 다릅니다. 한 보육기관에서 아이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시다. 2011년 당시 수치로 전국의 보육기관이 무려 39,842개가 있습니다. 우린 어느덧 이 4만여 개의 보육기관을 모두 잠재적 범죄자처럼 여기지 않나요? 전국에 외국인들이 200만 명이 거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몇몇 외국인들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200만 외국인을 모두 경계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처사입니까?

이제 TV에서 충격적인 사건사고가 보도될 때마다 불신의 골은 깊어집니다. 한 외국인이 강력범죄를 저질렀다는 뉴스가 보도되면 모두들 외국인을 경계합니다. 한 택시기사가 승객의 물품을 훔쳤다고 하면 모두들 주변의 택시기사를 의심하고, 심야의 편의점에 강도가 들었다고 하면 모두들 한밤에 편의점 가기를 꺼립니다. 개인주의에 빠져 소통을 단절한 지 20년 만에, 우린 ‘불신’이라는 커다란 사회적 공포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주의 20년, 불신공화국

자본주의는 이웃의 사랑과 정을 돈으로 대체하는 냉혹한 체제입니다. 동네이웃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이 집 일, 저 집 일을 도와주는 이들을 “오지랖 넓다”고 힐난하였을 때,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웃과 연계를 단절해도 생활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속칭 돈으로 해결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사람들은 이웃과 연계를 단절하면 매우 불편해집니다. 개인주의는 고독과 외로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잠깐 마트에 다녀오려 해도 이웃집 할머니에게 아이 잠깐 봐 달라는 말 한마디가 불편해서 주부 혼자서 애를 들쳐 업고 유모차를 챙기다 보니 저녁식사 준비도 땀을 뻘뻘 흘립니다. 개인 사생활을 절대시하는 개인주의는 이렇듯 종종 한심할만큼 비효율적입니다. 

계약직 근무를 시작한 회사원들은 선임자에게 회사근무 분위기를 물어보면 업무에 참 도움이 되겠지만 말 한 마디 부탁하기가 불편해서 온갖 눈치와 코치를 총동원하는 것이 오늘날의 삶입니다.

노터치, 프라이버시, 개인주의는 한 마디로 생활의 스트레스입니다. 주변과 연계를 끊어버리니까 우리가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나는 주변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지만, 우리 주변인이 나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는지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20년을 살았습니다.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이웃은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간섭하는 사람이 없으니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대한민국은 어느덧 불신공화국이 되어버렸습니다. 10년 전, <현대경제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이 느끼는 국가에 대한 신뢰도가 30.2%에 불과해 OECD 평균인 38.9%를 크게 밑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 만나는 누구도 사람을 믿지 않는 사회를 살게 되었습니다. 불과 100년 전, 사람들이 선량하고 도둑이 없어서 동네 집집마다 대문이 없이 살더라고 이야기되던 ‘인정이 많은 나라.’ 조선은 이제 바로 옆 이웃들도 믿지 못하는 불신 대한민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회가 부식시킨 “남의 문제에 신경끄고 네 할 일이나 하라”는 개인주의는 우리에게 엄청난 고독감과 외로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계속 지고 가야할까요? 아니면 오지랖을 조금 넓혀서 점점 더 공감하고 함께 소통하는 사회로 바꾸어야 할까요? 

인간은 호랑이가 아닙니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입니다. 재산이 많은 자본가가 깐깐해지는 것이야 그들의 업보라고 칩시다. 돈 없는 일반서민이 고독한 까도남을 흉내 내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사생활 침해가 아니라 외로움입니다.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나와, 공동체, 우리의 문제에 눈을 뜰 때, 사회적 불안과 불신의 장벽도 걷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국민들이 사회문제에 눈을 감습니다. 사회와 소통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외로워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렇게 스트레스에 파묻히고, 건강을 잃고, 생을 마감하는 모습. 과연 매력적입니까?

곽동기 상임연구원 / 우리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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