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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2차 국공내전 그리고 6.25에서 중국 공산군의 주역

 
이동훈 2015. 06. 15
조회수 179 추천수 0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자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벌어졌던 달이다. 6.25 하면 북진통일을 눈앞에 뒀던 국군과 UN군이 중국군의 전격 참전으로 물러나야 했던 역사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그 중국군을 누가 지휘했는지 알고 있는가? 세계 최강이던 UN군을 빈약한 장비와 보급을 받는 중국군 앞에 패주하게 했던 명지휘관. 그가 바로 팽덕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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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군 최고위 장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

 

 서구 선진국들의 주요 군사지휘관들을 보면, 사관학교와 국방대학을 졸업한데다 때로는 집안까지 상류층인, 속된 말로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번에 다룰 팽덕회(彭德懷, 중국명 표기는 펑더화이이지만 본고에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해 이를 포함한 거의 모든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한자의 우리음으로 표기)는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군사 교육은 물론 제대로 된 정규 교육 과정도 받지 못했으면서도 다년간의 실전 경험에서 두각을 나타내 중국군 최고위 장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출신 성분은 평등과 노동자 계급 독재를 강조하던 공산국가의 군대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일본군 및 국민당에 맞서 싸워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할 수 있게 해 주고, 한국 전쟁에서 중국의 울타리라 할 수 있는 북한의 함락을 막은 팽덕회. 그러나 그는 말년에 문화대혁명에 휘말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팽덕회는 1898년 10월 24일 중국 호남성 상담현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팽의 아버지는 1.5에이커 정도의 토지에서 농사로 8명의 식구(동거하고 있던 팽의 할머니와 종조부 포함)를 먹여 살렸다. 태평천국 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던 팽의 종조부는 팽이 어릴 적부터 충분한 식량생산, 여성의 전족 철폐, 토지 균배 등의 이념을 설파했다고 한다. 
  팽덕회는 1905~1907년 사이에 동네 서당을 다닌 다음, 1908년에는 현대식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05~1906 연속으로 가뭄이 호남성을 덮친 탓에 팽의 집안 식구 2명이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는 학교를 1년도 못 다니고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1913년 또 가뭄이 들자 데모에 참가해 지역 농산물 상인의 창고를 약탈한다. 경찰이 수배령을 내리자 그는 고향을 떠나 도망쳤다가, 1916년 고향으로 돌아와 국민당의 동맹인 탕향명의 군벌 부대에 이등병으로 입대, 본격적인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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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팽덕회

 

 초기에는 국민당군의 병사로

 

 당시 팽의 이등병 월급은 중국 돈으로 5.5위안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거칠게 계산해보면 요즘 우리 돈으로 65,000원 정도에 해당한다. 그는 매달 월급에서 2위안씩을 떼어 고향에 송금했다. 팽의 지휘관 중에는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이상적 민족주의자도 있었다. 팽은 그 영향을 받아 사회 개혁과 국민 통합이라는 국민당의 목표에 공감하게 된다. 
 이후 중국내에서 벌어지던 내전에 참전해 상당한 군사 경력을 쌓은 그는 1921년 8월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후 그는 남현의 어느 마을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지 않은 지역 지주를 체포해 사형에 처하고 마는데, 그의 소신이 매우 잘 드러난 행동이었다. 이 일로 질책을 당한 그는 이듬해 2월, 이미 자신의 군벌 부대를 떠나 국민당군에 입대하기 위해 무급휴가를 받아 광동으로 갔다. 그러나 국민당군에서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그는 군대를 떠나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향에서도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또 옛 전우들의 설득에 넘어간 그는 1923년 호남성의 지역 사관학교에 입학, 9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후 옛 군벌 부대에 대위 계급으로 복귀한다.  
  1924년 그의 군벌 부대가 정치적 노선을 반국민당 노선으로 바꾸자, 당시 임시 대대장을 맡고 있던 팽덕회는 이듬해 자신의 대대를 이끌고 국민당에 합류했다. 계속 공을 세워 중령 계급의 연대장으로 진급해 있던 1927년의 팽덕회에게 공산주의자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팽덕회를 중국 공산당에 입당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들의 설득에 넘어간 팽덕회는 1928년 2월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2000명으로 구성된 팽덕회의 연대가 평강현을 점령하자, 팽덕회는 해당지역의 고위 공무원과 군벌 장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해버린 뒤, 다음날 <호남성 혁명근거지 정부>의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공산주의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아울러 중국 공산당의 우두머리이던 모택동 및 주덕 진영에의 합류도 선포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공격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낸 팽덕회의 연대는 10월, 병력이 수백 명 수준으로 줄어들자 정강산으로 후퇴해 중국 공산당 게릴라 부대와 합류한다.

 

 공산군의 장교로 변신 국공내전에서 활약
 
  이후 팽덕회는 국민당에게 포위된 모택동, 주덕을 구출했다. 모택동과 주덕은 강서성 서금시를 공격해 1929년 1월 강서성 혁명근거지를 창설한다. 같은 해 중순, 정강산에서 팽덕회가 이끌던 병력은 지역 산적들을 규합해 2,0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팽덕회는 이 병력을 이용해 호남성 도처에서 습격을 벌여 보급품을 획득하고 신병들을 모았다. 
  1930년 7월 13일, 당시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당수였던 이입삼은 전국적인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성도 하나를 점령할 것을 전국의 공산군 부대에 지시했다. 팽덕회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7월 25일, 17,000명의 병력과 게릴라 10,000명을 데리고 호남성의 성도 장사를 공격했다. 7월 30일 장사를 점령한 팽덕회는 8월 1일 호남성 혁명근거지 정부를 수립하고, 정부수반으로는 당시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살던 이입삼을 추대, 자신은 부수반을 자임했다. 그러나 8월 5일 국민당군의 반격을 받은 그는 결국 장사를 버리고 후퇴했다. 
   그럼에도 그는 1930년 12월~1931년 5월 사이에 벌어진 강서성 혁명근거지 방어전에서 국민당군의 포위를 3번이나 깨뜨려 중국 공산당 내에서 임표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군사 지휘관이 되었다. 1931년 11월 7일에는 강서성 혁명근거지의 중앙군사위원회 및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정치 지도자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로도 그는 국민당의 공격을 계속 훌륭히 막아냈다. 그러나 1933년 장개석이 약 8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서성의 공산당에 맞서 제5차 포위전을 벌이자, 35,000명에 달하던 팽덕회의 병력은 1934년 10월 1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10월 20일 팽덕회를 비롯한 중국 공산군은 강서를 떠나 대장정에 이른다. 딱 1년 만인 1935년 10월 20일, 목적지인 섬서성에 도달한 팽덕회 부대 병력은 3,000명에 불과했다. 또한 이 때 중국 공산당 내 모택동의 부상을 도운 팽덕회는, 중국 공산군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미국 언론인 에드가 스노우는 1936년 중국 현지에서 팽덕회를 인터뷰한 후, 자신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에 무려 두 장을 할애해 그를 다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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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에 파견된 미군 장교(가운데)와 포즈를 취한 모택동(좌)과 팽덕회(우). 

 

 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를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은 공식적으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본을 격퇴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실시한다. 일본군과의 싸움은 보여주기 정도로 족하고, 국공합작의 진짜 목적은 훗날을 위한 공산군 병력의 건사라고 믿었던 모택동과는 달리, 팽덕회는 공산군이 일본군 격멸에 온 힘을 투자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팽덕회의 의견대로 중국 공산군은 국민당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1940년 7월, 중국 공산군은 일본군에 맞선 사상 최대 규모의 공세인 백단 대전을 벌이게 되었다. 중국 공산군 정규군 병력 20만 명과, 게릴라 병력 20만 명, 도합 40만 명이 참여한 이 공세의 총지휘관은 팽덕회였다. 공산군은 그 해 8월~10월에 걸쳐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끼쳤으며, 10월에 벌어진 일본군의 반격도 대부분 성공리에 물리쳤다. 백단 대전으로 인해 입은 일본 측 손실이 완전 복구된 것은 1942년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전투 후 연안으로 소환된 그는 모택동에 의해 백단 대전의 ‘실책’에 대해 혹독한 자아비판을 강요당해야 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팽덕회는 모택동을 보필하면서 주로 정치지도자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일본의 항복 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갈라져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결전을 벌이게 된다. 1946년 3월 당시 110만 명의 병력을 갖추고 있던 중국 공산군은 현재의 이름인 <인민해방군>이라는 공식 명칭을 얻게 되고, 팽덕회는 17만 5천 명으로 구성된 북서야전군의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북서야전군의 장비 상태는 국민당군에 비해 열악했으나, 그들은 초반에는 후퇴하면서 호종남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군을 공세 한계점까지 몰아붙인 후, 이후 반격하여 1947년 8월 대승리를 얻어내고,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가 국민당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는다. 또한 1948년 2월에는 국민당군을 섬서성에서 내쫓는다. 팽덕회는 1947년부터 1949년 9월 22일까지 호종남, 마보방 등이 이끄는 국민당군을 상대로 계속 승리,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기여했다. 그러나 국민당군 잔여전력을 괴멸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국민당군은 1949년 12월 본토를 떠나 대만으로 철수한다. 
  국민당군의 철수 이후에도 여러 소수민족 게릴라와 공산군 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따라서 팽덕회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북서부 군사 및 행정위원회 위원장 겸 신강 지역 군 총사령관 및 정치장교를 맡게 되었다. 이로서 그는 섬서, 감숙, 영하, 청해, 신강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과 약 3,000만 명의 인구를 책임지게 되었다. 공산군이 이 지역의 적들을 섬멸하고 신강 지역을 완전 정복한 것은 1951년 9월이 되어서였다.  

 

 6.25 전쟁에서 북한을 구해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함으로서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벌어지고 만다. 초전에 단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 북한.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UN군이 남한을 돕기 위해 투입되면서 전세는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UN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벌여 성공,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그 달이 지나가기 전에 서울을 수복했다. 그리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 내부로 북진하기에 이른다. 그냥 놔두면 미국이 주도하는 UN군이 중-북 국경에 도달하는 것은 뻔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북경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아닌,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가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 정부로 인정받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UN군이 북한을 괴멸시키고 중국 본토에 침공해 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던 셈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 사태에 대해 의견대립을 보였다. 대부분의 중국 정치 지도자들은 중국 본토가 적의 침공을 받지 않는 한 한국전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택동과 주은래는 중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을 UN군으로부터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한에 파견될 중국군의 사령관으로 임표를 내정했다. 그러나 임표는 건강상의 문제로 이 자리를 수락하지 않았다. 이에 팽덕회가 중국인민지원군의 사령관으로 내정된다.  
 10월 4일 북경에 도착한 팽덕회는 참전 찬성 의견과 반대 의견을 모두 경청한 후, 다음날 모택동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안겨다 준 팽덕회가 찬성을 하자 대세는 참전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1주간 팽덕회는 심양에 사령부를 차리고, 한국 참전 전략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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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왼쪽)와 모택동. 혁명 동지이기는 했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소련의 스탈린 역시 중국의 참전을 승인하자, 10월 19일 밤 제1파 26만 명의 중국군 병력이 중-북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투입되었다. 이들이 처음으로 UN군과 전투를 벌인 것은 10월 25일, 온정과 운산에서였다. 이들 중국군은 11월 4일까지 UN군을 청천강 이남으로 밀어붙였다. 이후 11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팽덕회는 총 38만 명의 중국군을 이끌고 38선 이북의 북한 영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1950년 12월 31일부터 그는 23만 명의 중국군을 38선 이남으로 투입했다.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통해 중국을 위한 확실한 울타리를 확보하려는 모택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서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진격은 UN군의 맹반격에 의해 중지되었고 서울은 3월 14일, 별다른 전투도 없이 다시 UN군에게 수복되었다. 팽덕회는 서울을 빼앗기 위해 54만 8천 명의 병력으로 4월 22일부터 6월 10일까지 마지막 대공세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공산군과 UN군은 더 이상 상대방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고 휴전 시까지 전선의 고착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팽덕회 휘하의 중국군이 한국 전쟁에서 보여준 성과는 당시 중국군의 역량과 한계를 모두 다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군은 UN군 전선의 취약 지역에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해 기습 돌파하는 인해전술을 통해, UN군에게 상당한 심리적 충격과 공포심을 주었다. UN군에게 중국군의 병력이 무한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보급체계 및 기계화 전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전쟁 첫해 중국군의 보급을 책임진 것은 7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인력으로 운반한 보급품들이었다. 때문에 중국군은 보급 부족에 시달려 공세를 1~2주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동계장비의 보급까지 늦어진 바람에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2일 사이에 동사한 중국군 장병의 수만 해도 45,000명에 달할 정도였다. 기갑, 항공, 해상전력으로 가면 UN군과의 격차는 그야말로 비교 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중국군의 사정상 팽덕회는 1951년 여름까지 인해전술에 철저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정권은 중국의 개입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인명피해도 실로 막심한 수준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전사 및 부상을 당한 중국군 병력은 100만 명을 가뿐히 넘었다. 하지만 팽덕회는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종교적이기까지 한 충성심으로 이러한 엄청난 인명 소모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많은 중국이라지만 이 정도의 인명 피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는 힘들었다. 실제로 팽덕회와 주은래, 모택동은 이러한 인명 피해의 심각성과, 이를 줄일 방법, 특히 후진적인 보급체계의 개선에 대해 1951년에 여러 차례 만나 논의했다. 결국 1951년과 1952년 사이의 겨울, 팽덕회는 더 이상 한국 전쟁을 끌었다가는 공산측과 UN측 중 누구도 가까운 장래에 승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52년, 중국의 전쟁 수행을 더욱 원활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취해졌다. 중국인민지원군 병력을 3개 그룹으로 나누어 한국 전쟁에 교대로 투입시키고, 중국 공군 조종사들의 훈련을 가속화하며, 일선에 더 많은 대공포를 배치하고, 소련에서 더 많은 군수품을 도입하며 군의 식량 및 피복 지급량을 늘린다는 것이었다. 군의 보급책임도 중국 중앙정부로 넘어갔다. 팽덕회는 특히 부패와 낭비야말로 중국군의 주적이라고 믿었기에, 부패와 낭비, 관료주의를 척결하자는 3반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2년 4월, 팽덕회는 뇌종양 치료를 위해 중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중국측 대표로 정전 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7월 31일 평양에서 열린 집회에서 북한 김일성 주석은 팽덕회의 공헌을 높이 사 그에게 지난 1951년에 이어 북한 제1급 국기훈장을 다시금 수여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팽덕회는 한국 전쟁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엄청난 인명 손실로 인해 그는 중국군의 현대화와 기계화, 전문화, 신전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정치사상 교육보다 군사훈련이, 정치장교보다 군사지휘관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공산국가들 중 현대전을 치를 대비가 충분히 된 나라는 소련뿐이었기에, 그는 소련군을 중국군이 따라야 할 롤모델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군사적 관점, 그리고 모든 인민들의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을 중국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여겼던 정치적 관점은 모택동의 생각과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1950년대 후반부터 둘의 불협화음은 심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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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시초프(맨 오른쪽)를 만나는 팽덕회(왼쪽 두번째)

 

중국 초대 국방부 부장에 취임

 

  앞서 살펴보았듯이 1952년 건강상의 이유로 귀국한 팽덕회는 1954년 봄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위원장은 모택동)을 맡아 사실상의 중국군 최고위 장교가 된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4일에는 초대 국방부 부장(국방부 장관을 부르는 중국식 호칭)에 취임한다. 그리고 다음달부터, 소련군을 모델로 한 중국군 현대화 계획에 돌입한다.  
  또한 그는 이듬해인 1955년 1월, 국민당이 지키고 있던 저장성의 여러 섬들을 공격해 점령했다. 국민당군은 이 섬에서 멀게는 상해까지 게릴라 공격을 가해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중화민국을 지키기 위해 방위조약을 맺게 된다.
  그는 같은 해 동독, 폴란드, 소련 등 선진 공산국가를 시찰한 다음, 그해 9월 중국군의 4대 주요 제도를 수립, 정비하기에 이른다. 그 주요 제도란 다름 아닌 계급제도, 호봉제도, 상훈 제도, 징병제도였다. 이전의 중국군은 공산주의 사상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계급도 없이 중대장이나 대대장 등의 보직만 존재하는, 그야말로 일개 정당의 정치폭력조직에 더 가까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된 ‘국가의 군대’ 모양으로 바꾸고자 한 것이다. 훈장과 기장, 소련군의 군복을 본뜬 복제도 제정되었다. 그는 그 해 9월 27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2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공이 큰 점을 인정받아 주덕, 임표 등과 함께 중국 10대 원수 중 한 명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1956년에는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바꾸었으며, 이등병에서부터 원수에 이르는 18개 계급에 따르는 호봉이 정해졌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는 정치위원에 대한 지휘관의 우위를 명문화했다. 1956년 9월, 군의 전문화, 실전과 같은 훈련과 엄격한 군기, 현대 기술 장비에 대한 전문성 확보 등 팽덕회가 내세운 강령이 중국군 내에 정착되었다.
  하지만 골수 공산주의자였던 모택동은 이렇듯 공산주의 사상보다 군사적 효율성을 우선시해 군을 경영하려던 팽덕회의 행보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둘은 국공내전 때부터도 이런저런 의견 충돌을 빚어왔지만, 국공내전, 중일전쟁, 한국전쟁이 모두 끝나고 눈앞의 적이 모두 사라지자 그 갈등이 더욱 눈에 띄게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둘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는 그 외에도 많았다. 1958년 금문도 사건에서 팽덕회가 이끌던 중국군은 국민당군에게 처참하게 대패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중국 인민의 영웅으로 신격화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던 모택동에 대한 팽덕회의 혐오 역시 커져갔다. 팽덕회는 북경 군사박물관에 모택동의 흉상이 전시되는 것도 반대했고, 부하 병사들이 “모택동 만세!”를 외치자 “모택동이 정말로 10,000년이나 살 수 있을 것 같나? 그는 100살도 못 살고 죽을 거야. 그런데 만세라니? 그건 개인숭배야!” 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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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 당시 대중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는 팽덕회.

 

몰락과 숙청

 

  1958년, 모택동은 중국을 10년 내에 미국 이상의 선진국이자 공업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차다 못해 황당한 목표를 띤 <대약진 운동>을 시작한다. 농부들을 억지로 공장에 밀어 넣어 강제로 중공업에 종사케 한 대약진 운동의 결과는 처참했다. 농가에 일손이 줄어들자 식량생산량이 급감했고, 불과 1년 만에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분개한 사람들은 각지에서 정부의 식량 저장소를 공격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대약진 운동은 군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의 일환으로 기존의 중국군에서 완전 독립되어 공산당의 지시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대규모(무려 수천만 명 규모의!) 민병대를 조직하고자 했다. 당연히 팽덕회의 눈에 이런 정신나간 정책들이 옳게 보일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심각하던 팽덕회와 모택동 사이의 알력은 이로서 극에 달했고, 결국 1959년 9월, 국방부 부장에서 해임되었다. 팽덕회의 후임으로는 평소 그의 라이벌이었던 임표가 임명되었다. 이로서 1916년부터 시작된 팽덕회의 군력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모택동은 1965년 팽덕회에게 중국 남서부 산업 개발 계획인 삼선건설의 지휘를 맡으라고 하여 그를 다시금 공직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66년, 중국 공산당의 친위쿠데타격 사건인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바로 홍위병들의 표적이 되어 북경으로 압송, 옥고를 치르며 고문과 가혹행위 등 고초를 당해야 했다. 평소에 소련군을 중국군의 롤모델로 삼고, 소련과의 군사교류를 통해 중국군의 현대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모택동에게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던 팽덕회는 홍위병들에게 ‘인민의 적 1호’였던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팽덕회의 수감 여건은 그리 좋지 않았고, 그는 감옥에서 결핵과 혈전증을 얻고 만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던 그는 1974년 11월 29일 숨을 거두고 만다. 유해는 화장되어 성도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인 1976년 모택동도 세상을 떠나고, 1978년 12월 제11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등소평은 팽덕회의 사면 복권을 공식 발표했다. 이듬해인 1979년 1월부터 중국 공산당은 팽덕회 추모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고, 1980년에는 1966년 팽덕회 체포를 현장 지휘했던 홍위병 왕다빈에게 9년형이 선고되었다. 1986년에는 그의 자서전이 발간되었으며, 1988년에는 팽덕회 탄생 90주년 기념우표도 발간되었다. 호남성에 있던 팽덕회의 생가는 현재 복원되어 기념관 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민족감정, 냉전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더라도, 분명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인물도 독재자 모택동의 입김 앞에서는 제대로 맥을 추지 못하던 모습에서, 과연 정치와 군사 간의 올바른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떤 정치 체제가 그런 관계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글: 이동훈 객원기자(enitel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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