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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고급 호텔에 용의자 데리고 간 까닭... 섬뜩하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6/05/25 07:35
  • 수정일
    2026/05/25 07:3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재심: 바로잡은 역사]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으로 고통받은 한삼택씨

26.05.24 19:32최종 업데이트 26.05.24 19:32

2024년 1월 26일, 서울중앙지법은 1971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였던 고 한삼택씨의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하였다.이건희

용의자를 호텔로 모시는 수사관들이 있었다. 경찰서 조사실이 붐비거나 용의자가 특권층 인물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런 데서 수사하지 않으면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1970년 한삼택 간첩조작사건에서도 그런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수사비가 많이 쓰였다는 점은 이 사건의 공동피고인인 제주 김녕중학교 이방택 교장의 항소이유서에서 확인된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23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6권에 따르면, 항소이유서에 이런 대목이 있다.

"70. 9. 25. 제주시 제주호텔에서 취조를 받고, 다음날인 9. 26. 서울중부경찰서 보호실에 수감되었다가 9. 27. 저녁 8시경 서울 아스트리아호텔에서 서울중부경찰서 형사들과 고○○이 동석한 자리에서 고○○이 주도하여 김○○과 한○○이 조련에 간부인 줄 모르냐 하는 대화 도중에 형사들이 퇴실하자 고○○이 사건 무마조로 50만 원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고아무개는 경찰이 아닌 민간인이었다. 제보자 또는 수사 협력자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민간인인 그가 형사들을 제치고 '당신에게 후원을 약속한 김아무개와 한아무개가 조총련 간부인 줄 몰랐느냐'라며 이방택에게 추궁하다가, 형사들이 자리를 비우자 '50만 원만 주면 사건을 무마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수사관들은 용의자를 제주호텔에 모셨다가 서울 아스트리아호텔에 모셨다. 해외 특파원인 신용순 기자가 쓴 1962년 11월 1일 자 <동아일보> 기사는 "대만·월남·캄보디아·말라야 등지의 수도엔 우리나라의 반도·메트로·아스트리아 정도의 호텔이 있다"라고 말한다. 아스트리아호텔은 해외 특파원이 한국의 3대 호텔로 평가한 고급 업소다. 이런 데서 수사관들이 공금을 펑펑 썼던 것이다.

수사관들이 용의자를 서울로 데려갈 때 이용한 교통수단도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 1970년 7월 7일이므로 그해 9월에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6시간 내지 8시간 정도 소요됐다. 그리고 이때는 제주에서 부산까지 최소 12시간이 걸렸다. 1972년 11월 25일 자 <조선일보>는 부산-제주 카페리호가 2년 뒤 개통된다면서 "이 새 도선(渡船)이 취항하면 현재 12시간이 걸리는 부산-제주 간 거리가 8시간으로 좁혀진다"라고 예견했다.

기차로 움직이는 시간만 6~8시간이고 배로 움직이는 시간만 12시간이었다. 그 이외의 소요 시간까지 감안하면, 제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24시간 이상 걸리던 시절이었다.

1970년 9월 25일에 제주호텔에 있었던 사람들이 중간 숙박지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상태에서 다음날 서울중부경찰서에 있었다. 당시의 교통사정을 감안하면, 이들이 제주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데에 특급 열차나 항공편이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사관들이 일류 호텔을 이용한 것을 보면 교통비에도 돈을 많이 썼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고한 국민을 간첩으로

이처럼 수사비가 많이 든 이 사건의 공동피고인인 한삼택은 김녕중학교의 서무주임이었다. 그는 이방택 교장이 김녕리 출신의 재일교포들로부터 교장관사 신축비용 63만 원을 후원받는 일을 처리했다.

그해 7월 23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1969년에 전국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사 9만 5822명의 81.3%가 수령하는 월급 및 수당은 2만 원에서 3만 5천 원 사이였다. 한삼택과 이방택이 처리한 후원금 63만 원은 교사 20~30명의 1개월치 보수에 해당했다. 오늘날로 치면 6000만 원에서 1억 원 정도의 금액이다.

이방택 교장은 그 돈을 개인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한삼택 주임을 통해 공식적으로 처리했다. 일을 투명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화가 됐던 모양이다. 이는 재일교포의 후원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원인이 됐고, 두 사람이 조총련 자금을 받고 간첩 활동을 했다고 누명을 쓰는 결과로 이어졌다.

재일교포 대부분은 조총련 아니면 민단에 가입돼 있었다. 한국인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최소한의 보호를 받으려면 어디든 가입하는 게 유리했다. 조총련에 가입하는 사람들 대부분도 그런 목적을 가졌을 뿐이지, 북한 정권을 도와 남한을 불리하게 할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당시의 남한 냉전세력은 조총련을 대남 공작기구와 등치시키곤 했다. 이 사건에도 그런 편견이 개입됐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인용된 '1970. 9. 30.자 수사보고'에는 재일교포 후원자들의 직업이 신용조합 이사와 상공회 부이사장 등으로 적혀 있었다. 서울중부서가 서울지검에 송부한 '1971. 2. 4.자 사실조사 결과 보고'에는 한아무개가 민단 회원으로 적혀 있고, 외무부가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송부한 '1971. 2. 3.자 사실조회 회보'에는 한아무개가 조총련 탈퇴자, 김아무개가 민단 회원으로 적혀 있다. 두 문건을 종합하면 한 아무개는 조총련을 탈퇴한 민단 회원이었다.

위와 같은 사실이 서울중부서, 서울지검, 서울형사지법에 알려졌다. 기부금 제공자가 조총련 소속이 아님을 경·검과 법원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조총련과 서신을 주고받고 금전을 받았다는 혐의를 쓰고 한삼택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죄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이방택은 국가보안법·반공법·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국가기관들이 진실을 뻔히 알면서 두 사람을 유죄로 몰아갔던 것이다.

베트남과 전쟁을 벌이던 미국은 북한 영해와 영공을 침범하는 방법으로 북한을 견제하다가 1968년에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당하고 1969년에 EC-121기 격추 사건을 당했다. 이로 인해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의 긴장이 고조되자, 북한은 군사분계선보다는 제3국을 간첩침투 루트로 많이 활용했다. 이는 1970년부터 일본을 경유해 남한에 침투하는 북한 간첩이 많아지는 원인이 됐다.

이 같은 새로운 트렌드를 악용한 것이 재일교포 간첩조작 사건들이다. 이 시기에 공안기관들은 일본과의 연관성이 발견되기만 하면 이를 근거로 무고한 국민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1970년에 한삼택과 이방택도 그런 올무에 걸려들었다.

무죄 선고, 하지만 허망하다

1970년 9월 고 한삼택씨가 간첩조작사건으로 불법구금 되던 당시 자녀들. 학교에서 열린 가을운동회에 자녀들만 참석했다. 고한삼택유가족제공

수사기관이 이 사건을 위해 수사비를 많이 투입한 것은 그 같은 불법 수사를 위해서였다. 교장과 서무주임을 압박해 원하는 진술을 확보하기까지 상당 시간 동안 감금하고 고문해야 하므로 경찰서보다는 외부 시설이 더 유리했다. 또 가혹행위를 가하려면 여인숙이나 여관보다는 방음이 더 잘되는 호텔이 더 유리했다. 적법절차에 따른 수사였다면, 용의자를 호텔에 모실 필요도 없고 불필요한 비용을 지출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수사가 엉터리였다는 점은 항소심까지 간 재심 재판의 무죄 선고를 통해 밝혀졌다. 재심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24년 11월 15일의 판결 공시에서 '증거 없음'을 이유로 무죄가 확정됐음을 밝혔다.

간첩 사건에 엮여 고초를 겪은 한삼택이 후유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5년 만에 국가는 처음부터 증거가 없었다는 점을 시인했다. 무죄 선고는 잘된 일이지만, 이는 허망함을 주는 일이다.

일본을 경유하는 간첩 침투가 많아지던 시절에 중학교 교장과 서무주임이 재일교포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았다면,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내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수사관들은 진상을 밝힐 생각은 하지 않고 처음부터 조작할 생각을 품었다.

수사관들은 돈을 준 교포들이 민단 사람들이라는 공식 확인을 받고도 그들을 조총련으로 몰아가며 한삼택과 이방택을 북한 및 조총련 동조자들로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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