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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에 영등포 돌아온 희귀식물 ‘등포풀’

100년 만에 영등포 돌아온 희귀식물 ‘등포풀’

조홍섭 2015. 07. 02
조회수 2081 추천수 0
 

1914년 미국인 의사 밀스가 영등포 습지서 처음 채집, 지난해 밤섬서 자생 확인

여의도와 함께 한 하중도이던 밤섬, 폭파돼 골재로 사라졌지만 등포풀이 기억 이어

 

ba0_P6120067.jpg» 밤섬 물가에 주걱 모양 잎을 지닌 작은 식물인 등포풀이 여의도를 바라보고 있다. 밤섬은 여의도에 몸체를 내어주기 전 여의도와 하나의 하중도를 이뤘다. 사진=조홍섭 기자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병리학 교수였던 랠프 가필드 밀스(1884~1944)는 20세기 초 10년 동안 조선에 머문 미국인 의사였다. 그는 조선인에 흔한 배앓이가 회충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등 기생충, 풍토병, 식생활, 전통의학 등을 주로 연구했다. 
 
특히 식물에 관심이 많아 “짬만 나면 식물채집통을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식물을 채집”해, 무려 1만5000여점의 식물 표본을 남겼다. 그는 소래 해안에서 ‘싸리풀’이라고 불리던 식물이 소금기 많은 미국 황무지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고 보고 채집해 표본과 씨앗을 미국 농업국에 보냈다. 이 풀(둥근잎매듭풀)은 미국의 버려진 땅을 목초지로 바꾸는 데 기여해 밀스는 연방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표본.jpg» 밀스가 1914년 6월12일 서울에서 채집한 등포풀 표본. 도쿄대 표본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이우철 강원대 명예교수 
 
그는 1914년 6월12일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포풀’이라는 식물을 서울에서 채집했다. 고 이영노 박사는 나중에 그 지점을 영등포로 보고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처음 발견된 지 100년 만에 등포풀이 다시 영등포에서 확인됐다. 국내에 드물게 관찰되는 멸종 위기종이 국내 최대 규모로 고향인 서울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ba6_서울시_2009.jpg» 밤섬과 여의도. 한강 하류쪽에서 2009년 촬영한 모습이다. 왼쪽이 윗밤섬이다. 사진=서울시

 
작은 습지식물인 등포풀이 살아남은 곳은 영등포구에 속하는 한강의 윗밤섬이다. 밤섬은 둘로 나뉘어 있는데 서강대교가 지나는 아랫밤섬은 마포구 관할이다.
 
지난 3일과 12일 윤석민 한강유역환경청 전문위원의 안내로 밤섬을 찾았다. 윤씨는 지난해 생태계 변화 관찰 조사 중 등포풀과, 마찬가지로 밀스가 이곳에서 1914년 채집한 희귀식물인 대구돌나물의 자생을 확인했다.

 

P6120042.JPG» 등포풀과 함께 밤섬에서 발견된 대구돌나물. 우리나라에서 매우 희귀한 습지식물로 크기가 아주 작다. 사진=조홍섭 기자

 

여의도 서강대교 남단에서 배를 타고 윗밤섬으로 향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윤씨가 자갈과 모래가 깔린 물가를 가리킨다.

 

ba2-1_P6120193_1.jpg» 등포풀은 아주 작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가운데 위쪽 주걱 모양의 잎에 작은 흰꽃이 달린 식물이 등포풀이다. 사진=조홍섭 기자

 

짐작한 것보다 등포풀은 더 작았다. 물별이끼, 물벼룩이자리, 뚝새풀(둑새풀) 틈에서 새끼손가락만 한 개체를 찾았다. 주걱 모양의 잎겨드랑이에서 지름 2~3㎜의 앙증맞은 흰 꽃이 달렸다.

 

ba0-1_윤석민.jpg» 앙증맞은 등포풀 꽃을 확대한 모습. 사진=윤석민 전문위원
 
등포풀은 최근 대구·부산, 경남·북, 제주에서 극소수의 개체가 발견된 현삼과 식물이다. 자생지인 습지가 급속히 사라진데다 워낙 크기가 작아 전국 구석구석을 훑는 아마추어 식물 애호가들도 드물게만 발견한다. 산림청이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한 식물이기도 하다. 
 
썰물로 물이 빠진 윗밤섬과 아랫밤섬 사이 고랑을 따라 섬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강에서 보기 힘든 자연하천과 습지의 모습이 오롯이 펼쳐졌다.

 

ba2-2_P6120130.jpg» 윗밤섬과 아랫밤섬 사이 물골을 따라 치어들이 이동하고 있다. 사진=조홍섭 기자
 
새끼 물고기가 큰 무리를 지어 이리저리 도망쳤다. 고랑 양쪽에 드러난 기슭에서 여러 개체의 등포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랑을 따라가자 키 큰 갈대와 부들에 숨겨진 호수가 나타났다. 팔뚝만 한 잉어들이 물방울을 튀기며 몰려다니며 산란행동에 바빴다.

 

ba1-4.jpg» 두 밤섬 사이에 위치한 작은 호수.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다. 사진=조홍섭 기자

 

ba1-5.jpg» 이 호도에서 밀물 때 물골을 따라 들어온 잉어들이 산란행동을 하고 있다. 사진=조홍섭 기자 

 
섬에는 50~60년은 됨직한 굵은 뽕나무가 많았다. 밤섬에선 오래전부터 양잠을 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있던 뽕나무의 후손인지 모른다. 굵은 오디가 다닥다닥 열려 번식기 여름철새들의 요긴한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커다란 소리로 우는 개개비를 비롯해 새끼를 데리고 있는 꿩, 오색딱따구리, 번식중인 민물가마우지, 제비, 멧비둘기가 눈에 띄었다. 밤섬은 홍수 때 한강에 떠내려온 온갖 식물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P6030254.JPG» 동물이 다닌 흔적 말고는 따로 길이 없는 밤섬은 갈대와 물쑥, 버드나무 등이 무성해 도심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사진=조홍섭 기자
 
고산지대에 사는 가래나무와 애기쐐기풀, 상류에서 온 외래종인 가시박이 자라고 있었다. 관목과 물쑥, 갈대밭에 파묻혀 있노라면 다른 세계에 온 것 같다가 자동차 소음과 앰뷸런스 경적이 도심임을 일깨워줬다.

 

ba7_서울시.jpg» 1968년 여의도 개발 공사 현장에서 김현옥 서울시장이 블도저를 운전하고 있다. 블도저란 별명의 그는 1년 예정의 여의도 윤중제 공사를 4달만에 끝냈다. 건너편에 보이는 언덕이 밤섬이다. 사진=서울시, 권혁희(2012) 재인용.

 
밤섬은 한강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주민 62가구 443명이 강 건너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되고 1968년 2월10일 폭파돼 섬의 형체 자체가 사라졌다. 모래밭이었던 여의도를 돋워 도시로 개발하는데 필요한 단단한 암석과 흙을 가까운 거리에서 얻고, 범람원이던 여의도가 잠기지 않으면서 가로막는 물길을 확보하기 위해 밤섬을 없애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등포풀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등포풀과 대구돌나물 모두 물가에 사는 한해살이풀이어서 생존전략이 덧없으면서도 강인하다. 큰물이 나면 자생지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휴면 상태의 씨앗은 땅속에서 기회를 기다리다 일시에 자라 번식한다.

 

ba0-윤석민.jpg» 등포풀. 한해살이 식물인 등포풀은 급변하는 환경에서 끈끈하게 버티는 능력이 있다. 사진=윤석민 전문위원
 
여의도 윤중제를 쌓느라 밤섬의 바위와 토사를 모두 들어냈지만 물에 잠겼다 드러났다 하는 습지가 깡그리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근근이 삶을 이어왔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중에 상류 어딘가에서 떠내려 왔을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 한강 상류에서 등포풀의 자생지가 밝혀진 곳은 없다.

 

1968_서울시사편찬위원회.jpg» 1968년 여의도 모습. 왼쪽 양말산은 나중에 국회의사당 터가 된다. 사진=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밤섬 폭파 당시의 신문 기사는 밤섬 마을을 “500년 동안 수돗물과 전깃불 모르고 살아온 마을” “한강물로 밥 짓는 마을” 등 도심 속 낙후지로 그리고 있다. 요즘 밤섬을 ‘도심 속 무인도’ ‘도심의 생태계 보고’로 묘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밤섬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랐다. 권혁희씨는 2012년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학위 논문에서 조선시대부터 폭파되기까지 밤섬의 역사를 더듬었다.

 

64_시사편찬위.jpg» 폭파 전인 1964년 밤섬 모습. 홍수기 때의 모습으로 보인다. 사진=서울시사편찬위원회

 

ba2_1911_밤섬과 여의도.jpg» 1911년 지도. 밤섬과 여의도가 하나로 이어진 하중도의 일부임이 잘 드러난다. 사진=권혁희(2012)

 

이 논문을 보면, 특히 밤섬과 여의도의 운명적 관계가 흥미롭다. 평상시에 밤섬과 여의도는 한강 하중도에서 연결된 두 지점이었다. 홍수 때만 밤섬의 용바위와 여의도 양말산(현 국회의사당 자리)이 물 위에 드러났다. 
 
밤섬은 조선시대 동안 주점만 700곳에 이르던 조선 최대 포구 마포와, 조선 각지의 세곡이 하역되던 서강 포구 사이에 자리 잡아 드나드는 수많은 배를 고치고 만들던 요충이었다. 반면 여의도는 국가 제사에 쓸 가축을 기르던 곳이었다.

 

ba5_대동방여전도.jpg» 조선시대 대동방여전도에서도 밤섬과 여의도는 범람원에 생긴 커다란 하중도에 위치해 있다. 샛강은 홍수기에만 흘렀고, 일제 때 여의도에 비행장을 만들면서 여의도는 섬으로 고정됐다. 그림=권혁희(2012)
 
최고의 상권과 오랜 전통 속에서 잘나가던 밤섬은 이름 자체가 ‘너나 가져라’란 뜻의 여의도에 몸을 내주고 사라지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권씨 밤섬과 여의도의 운명적 관계를 “문명과 자연의 표상으로 재현되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밤섬과 여의도의 운명적인 관계는 서울의 맨해튼으로 생존하느냐 아니면, 폭파되어 소멸하느냐(물론 이후 신화적인 부활을 거듭했지만)에 이르기까지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며, 도시 역사상의 문명과 자연의 표상으로 재현되어 의미화되고 있다. 여의도가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는 업무지구로 개발되어 한국 도시계획 역사에 기록되는 프로젝트로 회자되고 있는 반면, 밤섬은 그 희생양이 되었으며 이후 다시 한강 속 자연을 대표하는 명소로 부활하는 역사를 연출해 내고 있다.”(56쪽)
 

도시화는 밤섬을 희생양으로 삼았지만 자연은 밤섬을 버리지 않았다. 퇴적물이 쌓여 밤섬은 반세기 만에 몸집을 6배나 불렸다. 생태계도 살아났다.

 

05125762_R_0.jpg» 2014년 8월20일 열린 `밤섬 실향민' 고향방문 귀향제 모습. 사진=김태형 기자

 
밤섬 주민들도 고향을 잊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2년마다 한가위에 밤섬을 찾아 제사를 지낸다. 이제 예전의 밤섬을 기억하는 등포풀이 이들을 반길 것이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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