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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구 선생 회고록3권 ‘수학자의 삶’(7)


할아버지의 항일혁명운동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3권 ‘수학자의 삶’을 연재한다. 1권 ‘가짜 해방’, 2권 ‘찢어진 산하’에 이어진다. 1952년 대학 입학과 재학시절, 그리고 4.19혁명의 격동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독자들은 친일잔재와 분단이 남긴 비극을 한 대학생의 고뇌를 통해 읽게 된다. 특히 군 복무 시기에 맞은 4.19혁명을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 게재된다.[편집자]

 
▲안재구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조부 안병희 선생은 민족해방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운동가로 밀양 지역에서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청년 시절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 항일광복운동과 노농대중의 혁명운동에 헌신하셨다. 망국의 시기에 대한제국 정부의 전라남도 순찰사로 계셨던 종조부와 무관학교 시위연대 보병참위로 활동한 숙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할아버지는 한성학교에 입학했지만 중등과를 중퇴했다.

고향을 떠날 당시 할아버지는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서울로 올라갔다. 집안의 노비문서를 몽땅 불태우고, 그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땅까지 나누어주고는 그 시간부로 모두 해방을 선언했던 것이다. 또한 수산으로 가서는 상투머리를 잘라 백지에 싸서 왜놈 이발사에게 주고는 두암집 어른(아버지)에게 갖다드리라고 했다. 이 때문에 집안은 물론 고향 마을 전체에 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근대수학교육을 받은 할아버지는 한때 측량기사로 호구지책을 마련했으나, 3.1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할아버지의 항일혁명 활동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연구한 학자들의 기록과 일제식민지 고등계 경찰의 수사기록문서와 검찰 행정사무의 수사기록과 증거자료, 당시 동아일보 등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1924년 12월6일 창립된 사회주의자동맹회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또한 적박단(赤雹團)이란 항일테러단체에도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할아버지는 일본 유학생이나 지식인 출신과는 달리 자생적인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사회주의계열 운동의 파벌로 분류하자면 서울파 계열에서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서울파는 1921년 창립된 서울청년회 내부에서 김사국, 이영 등을 중심으로 해서 자생한 사회주의운동 세력으로 북풍회, 화요회, 조선노동당 등과 경쟁했던 그룹이었다. 할아버지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을 강조했고, 또 평생을 그 원칙에서 항일혁명운동을 해오셨다. 그런 면에서 서울파가 내세운 자주적인 통일전선 노선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20년대 중후반의 사회주의운동은 극심한 종파주의로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 좌절하고 실망한 할아버지는 이후 형평사(衡平社)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을 위해 1923년 4월 진주에서 결성된 조선형평사는 백정의 계급해방투쟁과 반일 민족해방투쟁이란 두 가지 투쟁을 함께 벌여나간 조직이었다. 할아버지는 조선형평사 총본부에서 발간한 잡지 <정진(正進)> 창간호(1929년 5월1일 발간)에 ‘형평운동의 정신’이란 글을 게재할 만큼 형평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당시 할아버지가 쓴 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체 형평운동이라 함은 어떠한 의미로 어떠한 일을 하는지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이제 우리 동족이 조선 각지에 대개 40만명이나 있다. 조선 전 인구를 2천3백만이라 하면 2천3백만 분의 40만이라는 민족은 즉 우리 형평계급의 민족일 것이다. 하면 다 같은 조선민족이지마는 ‘백정’이니 ‘피쟁이’니 ‘갖바치’니 ‘천인’이니 하여 그 무엇이 특별한 조건이나 있는 것처럼, 왜 천대를 주며 학대를 주며 멸시를 하는가. 하고 또 우리로서는 그 어떠한 조건이나 있는 것처럼 천대와 박대에 슬픔에 신음하면서 억울한 한을 가지고도 의연히 짓밟히고 살아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중략)

조선 각지의 우리 계급 40만이 한 몸뚱이와 같이 되는 단결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의미로서 형평사라는 조직이 생겼다. ‘형평(衡平)’이라 함은 이 인간세상을, 이 인간사회를 저울대로 달아서 평탄하게 고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 형평사가 남병산에 동남풍이 불 듯 비온 뒤에 죽순처럼, 곳곳마다 자유를 부르짖고 평등을 요구하며 정의의 함성으로 자유를 찾자, 평등을 찾자, 행복을 찾자 하는 것이 즉 형평운동이다.”

또한 할아버지는 일제 경찰의 분열 공작과 잔혹한 고문에 굴복하고 변절하는 등 도탄에 빠진 항일혁명운동 진영에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며 허무당(虛無黨)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허무당은 러시아에서 유래된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무정부주의운동이었다. 허무당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1926년 1월4일 허무당 선언문을 전국적으로 배포했다. 당시 선언문에서는 “혁명은 결코 언어와 문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유혈과 전사의 각오가 없이는 안 된다. 합법적으로 현 질서 내에서 혁명의 가능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저능아”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여러 차례 체포, 구속된 할아버지는 신분이 노출되어 더 이상 서울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종파분열로 점철된 운동에 실망감도 커졌다. 할아버지는 결국 다시 밀양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밀양에서도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1927년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연합해 결성한 통일전선 조직인 신간회에 적극 참여했다. 신간회 밀양지회에서 검사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중단 없는 항일혁명운동을 지속해나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나의 할아버지는 일제의 혹독하고 살인적인 폭압에 맞서 단 한 번도 적들에게 굴복한 일없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줄기차게 해방투쟁을 하셨다. 또한 억압받는 무산대중들을 위해 한 생애를 온전히 해방투쟁으로 일관하셨다. 그런 모습을 통해 내게도 대를 이어 민족해방, 민중해방을 위한 투쟁에 일관하도록, 해방투쟁의 전사로 살도록 가르치셨다.

할아버지는 왜놈들의 혹독한 사상전향공작을 끝까지 이겨내고 일제 말기에는 식민지 해방을 우리 민족의 역량으로 전취하기 위해 청년들과 함께 밀양의 북부산악지대로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적의 무기를 탈취해 우리 손으로 해방을 맞이하려고 준비하셨다.

민족의 역량을 총결집해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자는 여운형 선생의 호소에 따라 밀양에서도 건국동맹 지부를 조직하셨고, 일제의 최후 발악적인 징용·징집에 반대해 산으로 들어온 청년들을 이끌고 밀양의 북부 화악산 밀림과 계곡에서 해방의 날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제의 패망과 함께 산 속의 청년들과 밀양의 북성거리로 입성했다.

그 길로 할아버지는 겨레의 원성으로 찌든 밀양경찰서를 접수했다. 치안대를 조직해 우리 조선 사람의 손으로 치안을 회복했다. 또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밀양지부를 조직한 뒤 항일운동의 선배인 김병환 선생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할아버지는 부위원장에 선임됐다. 할아버지는 환중인 위원장을 보좌하며 행정을 확보해 일제가 물러간 뒤의 혼란을 정리해나갔다. 일제의 만행을 피해 고향 땅을 떠났던 동포들이 일본에서, 중국과 동북 만주에서, 또 남양에서, 노령 땅에서 돌아오자 그들을 보살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말로 하는 애국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애국이 무엇인지, 운동가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무엇이 참다운 운동가의 모습인지를 할아버지를 통해서 배웠다. 이제 팔십을 훌쩍 넘긴 내가 오늘날까지 후회 없는 삶을 살아온 것도, 또 앞으로 여생을 어떻게 마감해야 할 것인지도 바로 할아버지의 지난한 삶을 통해 배운 셈이다. 아직도 내 눈가에는 해방되던 날, 청년들의 무등을 타고 밀양 거리로 들어오시던 할아버지의 활짝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13살 때의 바로 그 기억이 오늘까지 나를 이끌어온 것이다.

[참고자료]

虛無黨宣言書

 

革命을 앞에 둔 朝鮮은 不安과 恐怖로서 呻吟하고 있는 이때를 當하여 爆破 放火 銃殺의 直接行動을 主張하는 虛無黨은 奮起하였다.

目下 朝鮮은 二重三重으로 暴惡한 敵의 迫害를 受하고 一步도 前進하기에 不可能한 最後의 悽慘한 絶頂에 서 있다.

2千萬 生靈은 危機一髮의 恐怖된 難境에 在하여 彷徨하고 死에 直面한 民衆의 現社會에 對한 呪咀는 衝天한다.

現在의 吾等은 希望도 理想도 將來도 何物도 없고 暴惡한 敵의 搾取와 虐待와 殺戮과 嘲笑와 侮辱이 有할 뿐인 暗黑한 修羅場에서 野望으로 血眼이 된 敵의 亂舞가 있을 뿐이다.

이의 戰慄할 現狀을 打破치 못하면 朝鮮은 永遠히 滅亡될 것이다. 我等의 理想으로 하는 最大多數의 最大幸福도 一種의 空想일 것이다.

暴惡한 敵은 政治 法律 軍隊 監獄 警察 等으로서 滅亡한 朝鮮의 命脈을 刻一刻으로 侵害하고 있다. 이 戰慄할 光景을 그저 黙過할 수 있겠는가 我等은 그냥 殺戮을 當하고 있을 수는 없다. 革命의 烽火를 點하자. 破壞의 義劍을 빼라. 義憤있고 血氣있는 者는 奮起할 時機는 왔다. 何等의 意義 及 價値없고 이 慘酷한 산보람은 얼마나 大衆을 爲해 하는 叛逆의 殉死가 痛快할 것이 아닌가. 我等을 迫害하는 暴惡한 敵을 向해 宣戰을 布告하자. 我等이 否認하는 現在의 이 兇暴 惡毒한 것이 蛇蝎과 如한 政治法律 及 一切의 權力을 根本으로부터 破壞하자. 이 戰慄의 光景을 破壞하는 方法은 直接 行動만이 있을 뿐 革命은 決코 言語와 文字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流血과 戰死의 覺悟가 없이는 안된다. 合法的으로 現秩序 內에서 革命의 可能을 信하는 者 있다면 그것은 低能兒이다. 我等은 死로서 盟約하고 暴力으로서 朝鮮革命의 完成을 期하고자 虛無黨을 組織하고자 한다. 革命 當時의 露西亞의 虛無黨의 行動을 習得하지 않으면 안된다. 我等 積年의 呪咀와 怨恨과 憤은 爆發했다.

我等을 搾取하고 虐待하고 殺戮하는 暴惡한 敵에 對해 復讐의 鬪爭을 開始하자. 朝鮮人이 受하는 虐待 悲哀를 切實히 感知하는 者라면 누구라도 虛無黨의 主張과 一致할 것을 確信할 것이다.

虛無黨의 主張을 反對하는 者는 民衆의 敵이다. 民衆의 敵은 爆破 放火 銃殺의 手段을 呼訴할 뿐이다.

暴惡한 敵의 虐待에 呻吟하는 民衆들이여 虛無黨旗幟 下에 集合하자. 彼의 慘忍兇暴한 敵을 一擧에 擊破하자. 最後의 勝利는 我等에 있다. 虛無黨萬歲 朝鮮革命萬歲

 

丙寅1月 虛無黨

편집국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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