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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설립 바람, 운영할 수 있는 의식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3/18 10:17
  • 수정일
    2013/03/18 10:1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협동조합 설립 바람, 운영할 수 있는 의식과 문화 만드는 일에 먼저 힘써야

 
이남곡 2013. 03. 17
조회수 256추천수 0
 

 
이남곡1.jpg
 
H형께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이제 이 곳 산골도 봄이 완연합니다. 장독대에 반짝이는 봄햇살하며, 졸졸 흐르는 시냇물소리, 곧 터질 것 같은 새잎들, 농사 준비하는 농부들의 바빠진 움직임들이 봄의 생명력을 느끼게 합니다.
 
평생을 농촌과 협동을 위해 살아오신 H형께서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처럼 협동조합 바람(?)이 분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감회가 남다르면서도 감탄만 할 수 없는 형의 심경에 저도 동감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듯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내부역량과 때맞추어 어미닭의 쪼아줌이라는 외부조건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확실히 지금은 줄(啐)보다는 탁(啄)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을 해오신 분들은 이것을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내부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는 바람이 혹시 일시적인 거품으로 끝나, 오히려 진정한 협동조합의 발전에 장애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지요. 자활이나 사회적 기업과 같이 관이 지원하는 이상한 형태로 되어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줄(啐)과 탁(啄)의 갭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요.
 
협동조합박원순.jpg
 
지금 협동조합을 하려는 사람들, 단체들, 정부관료, 지방자치단체들이 많이 견학을 하러가는 유럽 등 협동조합의 선진국들은 150여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전된 시스템과 함께 그것을 가능케하는 문화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외형적인 시스템이나 규약, 원칙 등은 쉽게 볼 수 있지만, 그것을 가능케하는 의식, 문화, 생활 등은 겉으로만 봐서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사 머리로 이해한다하더라도 그것을 체득하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눈에 안 보이는 부분이 눈에 보이는 부분을 있게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역사에는 협동조합이라는 말이 들어오기 훨씬 전에 상당히 우수하고 정교한 시스템인 두레나 계(契)와 같은 민중에 의한 자발적인 전통이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원래 협동을 잘하지 못하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전통을 발전시키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결국 나라를 군국주의 일본에 식민지로 강점당했던 역사와 해방이 분단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좌우대립이 지배하면서 이런 전통들이 발전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단절의 역사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거의 한 세기 가까우니까요. 그것을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DNA 속에서 꺼내 현재에 살린다는 것이 결코 녹녹한 작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는 원래 개별주체성이 강해서 협동에는 안 맞아’ 하는 부정적이고 비관적 관념이 근거없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요즘 국내외 정세, 특히 남북관계를 보면서 그 질기게 변치 않는 대립적 사고의 완고함에 많이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실 요즘의 협동조합 바람이 북 쪽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남쪽에서만이라도 그 완고한 사고방식들이 근저(根底)에서 변화하는 신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잘 아시다싶이 그간의 완고하고 교조적인 이념대립은 모든 창조성들이 싹을 트지 못하게 한 주된 원인의 하나였지요.
 
협동조합을 보더라도, 이익 즉 탐욕에 눈먼 사람들이나 문화 속에서는 협동조합은 돈벌이 수단으로 왜곡되어버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협동조합은 개량주의 즉 근본적인 변혁을 방해하는 요소로 취급되었던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위기가 여기저기서 노정되는 지금, 양극화, 저성장, 고용없는 성장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양심적인 우파에게도 협동조합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고, 사회주의의 실패가 여실히 보여주듯 제도를 변혁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못한다면 반대만 하지 결국은 낡은 체제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는 합리적인 좌파들에게도 협동조합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대단한 정치적 잇슈는 아니지만,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조용히 우리의 경직된 과거의 사고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정한 좌우 소통과 창조의 계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의 편지에서 얼핏 스치듯 말씀하신 가운데, 협동조합운동을 둘러싸고 좌우 대립의 기미가 보인다는 말씀을 듣고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로 관점이 다른 면은 있겠지요. 또 하루 아침에 생각의 틀이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요. 또 지금의 협동조합 바람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밝은 것만도 아니구요.
또 협동조합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되는 것도 아닌 것이구요.
 
다만 우파에게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격을 높이는데, 상당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좌파에게는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양성되고 여러 가지 현실적 시스템들을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데서 저는 대립보다는 협력할 수 있는 분야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좌우가 협력할 수 있다면, 비록 전체적으로는 미미하게 보일지 몰라도 대단히 뜻 깊은 창조의 장을 시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일단 벌어져 있는 갭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좋아진 외부여건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내부 역량을 키우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빨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체 빠른 국민이니까요.ㅎㅎ
 
러나 눈에 안 보이는 것, 즉 협동조합의 원칙과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를 만드는 일은 그렇게 빨리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실패하거나 왜곡되는 모습들도 많이 나타나겠지요. 그 과정에서 좋은 모델들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개가 실패하더라도 제대로 된 하나의 모델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넓어져 가는 것이지요.
저도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다소라도 도움이 될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 안 보이는 영역, 그 의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일에 미력이라도 힘을 보탤까 합니다. 협동운동과 인문운동의 접합점을 어떻게 실천할지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은 ‘협동조합을 위한 맞춤형 인문(연찬)프로그램’입니다.
 
서울대생협.jpg
*한겨레 자료사진
 
잘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과 함께 다듬어가면서 협동조합 안에 내장(內藏)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형이나 저나 이제 나이가 만만치 않지만, 특히 저보다 연상이신 형께서 아직도 정열이 젊은이 못지 않은 것을 뵈면서 저도 힘을 얻습니다.
노욕(老慾)으로 되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는 있습니다.
세상에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없다(毋必)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볼 생각입니다.
꿈결 같이 지나는 인생이라지만, 이 기적 같이 만나는 순간들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늘 건강하소서!
 
2013. 3. 12
南谷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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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서울대 법대 재학 때부터 민주화에 투신 4년간 징역을 살고 나온 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겸손으로 진리를 향한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정토회 불교사회연구소장을 거쳐 경기도 화성 야마기기마을공동체에 살았으며, 2004년부터 전북 장수의 산골로 이주해 농사를 짓고 된장·고추장 등을 담그며 산다. 서울에서 매주 ‘논어 읽기’ 모임을 이끈다.
이메일 : namgok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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