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2006/04/20 19:58

우리 서당 설립자께서 4·19때 그 유명한 교수단 데모에 나가셨다고 한다. 거의 주동자 급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우리 서당은 설립자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4·19에는 기념공원에서 참배를 한다. 올해도 우리 서당은 참배하고 왔다. 어제. 참배 끝나고 손만두 집에서 손만두를 먹었다.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셨다는 설립자께서 수업을 제끼고 참배를 올 정도였다면, 이날 4·19 뭔가 아주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럴까?

 

75년생인 나는 4·19의 의의를 몰랐다. 물론 5·18의 의미도 몰랐다. 우리 집은 광주가 아니었고...

 

자라면서 어른들이 계몽적으로 해주는 이야기에 의해, 혹은 교과서를 통해 사전적 의미를, 추상화된 개념적 의의를 주워들었다. 그런데 5·18은 대학 들어와서 간접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좀 있었다. 적당히 진보적인 교수의 수업을 통해, 복권된 무렵에 KBS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리고 과 언론동아리 사람들과 함께했던 5월 광주로의 여행을 통해. 충격이었지. 역사와 내가 언제부턴지 모르게 하나였던듯...80년에 광주에 있었음직한 사람들이 아직은 학교에 좀 있었던 때였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이 1980년도란 시간을 지나쳤지 않았던가. 한국사회에서 5·18의 영향은 컸다고 한다. 미국을 다시보게 되었고, 치열한 사회과학의 시대가 되었고...

 

그런데 4·19는?

내게 4·19는 그다지 사회과학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회과학의 대상으로 안보였다. 대학때 총학생회 주최로 기념식이랑 기념마라톤이란 걸 하긴 했다. 4·19 당시 어떤 학교 학생들의 선언문이란 것도 보았다.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너무 수사적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뛰긴 했을까. 4·19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한국땅에 꽃피기 이전의 전설 같은 이야기, 그래서 지금은 별로 감동적이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독재를 몰아냈다는 것은 봉건왕조를 공화국으로 만들었다는 것 아닌가? 군사독재라는 근대적이기도 한 이야기 저편에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자신을 이씨왕족의 후예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끌어내린 일시적 소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4·19란 것이 다름 아닌 프랑스 혁명에 비견될만한 일이 아닌가. 한국에서는 말이다. 1894년 이후에 한국에 그만한 민중봉기가 있었던가. 1919년이 있었다고 하지만, 국제정세와의 연관에서 본다면 4·19만하진 않을 듯하다. 물론 그 결과로 정권만 조금 바뀌었다는 것, 그건 양자가 좀 비슷하긴 하다.(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정책이 바뀌었고 조선총독이 바뀌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1919년 이후엔 4·19가 최고로 대단하지 않나. 대단한 봉기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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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19:58 2006/04/20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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