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2006/05/05 | 2 ARTICLE FOUND

  1. 2006/05/05 [펌] '대추리 사태'의 본질은 한반도 평화다_한겨레
  2. 2006/05/05 과동기

‘대추리 사태’의 본질은 한반도 평화다
사설
한겨레
어제는 참으로 치욕스런 날이었다. 다시는 없기를 바랐던 민과 군·경의 대규모 충돌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1만5천여 군·경 병력은 제 땅을 지키려던 주민과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열망을 제압했다. 그곳에 높다란 철책을 세워, 한반도 평화를 위한 것인지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위한 것인지 성격이 불분명한 미군기지가 들어서도록 방어벽을 세웠다. 100년 전 부패한 조선 왕실이 동학농민군을 섬멸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당시 처참한 섬멸전은 반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대추리 사태는 주한미군 재편 과정에서 경기도 평택 팽성 쪽에 새로운 통합 미군기지를 세우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면서 발생했다.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 285만평 가운데 200만여평은 소유자의 동의를 받아 매수했지만, 나머지 74만평은 강제로 수용했다. 주민 100여명은 강제수용을 거부하며 지금까지 버텼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번 사태는 강제수용 또는 보상을 둘러싼 정부와 주민의 갈등으로 비친다. 국방부가 보상비 규모를 들먹이며 주민들의 ‘과욕’을 내세웠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아울러 시민사회단체에 대해서는 주민의 과욕을 부채질하며, 미군 철수라는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려 했다고 매도했다.

그러나 대추리 사태의 성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본질은 한반도 평화와 관련돼 있다. 아직까지 정부는 주한미군 재배치의 목적과 평택 미군기지의 구실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과연 한반도 전쟁 억지력인지, 아니면 동북아 유사사태에 개입할 미군의 전진기지인지 알 수 없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한국과 미국이 합의한 것을 보면 평택 미군기지의 구실은 후자에 가깝다. 그렇다면 평택기지는 한반도를 국제분쟁에 휩쓸려들게 하는 ‘인계철선’ 구실을 하게 된다. 이런 논의가 민간 차원에서 널리 일고 있는데도, 군 당국은 함구한다. 오로지 땅값 문제만을 논의하자고 했다. 어떤 국민이 제 나라의 평화를 위협하는 용도에 쉽게 땅을 내줄 것인가?

최근 주일미군 재배치 계획안이 확정됐다. 애초 미군은 도쿄 인근의 자마기지에 들어설 통합작전사령부의 성격을, 동아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와 중동 등 불안정 지대를 관할하는 광역사령부로 상정했다. 그러나 국민이 반발하고 일본 정부가 재조정을 요구하자, 동북아의 유사사태에 대비하는 거점사령부로 한 등급 낮췄다. 논의과정의 투명성이 미국의 애초 구상을 수정·축소하는 쪽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어떠했나.

게다가 군 당국은 그나마 보상과 관련한 대화에서도 불성실하기 짝이 없었다. 협의에 응하지 않은 주민들에 대해서는 설득은커녕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돈은 법원에 공탁했으니 찾아가든지 말든지 하라는 투였다. 돈이나 더 받자고 버틴다고 빈정대기 일쑤였다. 행정 대집행 비용을 지우겠다고 을러대기도 했다. 파장이 커지자 대화하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명분쌓기에 불과했다. 제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은 이들에게 당국은 국민 대접은 고사하고 사람 대접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군경은 대추분교를 접수했다. 평화의 깃발은 꺾였고, 민족적 자존감도 짓밟혔다. 이제 참여정부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꼭두각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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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20:13 2006/05/05 20:13

과동기

2006/05/05 02:45

여기서 과동기는 물론 대학 동창이다. 대학에만 과가 있으니까. 그 친구 나보다 1살 어렸지만(내가 재수를 했으므로)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항상 나보다 한 발 앞섰다고 생각한다. 운동도, 사랑도, 경제적 형편이나 생활능력 등등, 심지어 더 가난하게 지낼수 있는 능력까지. 그래서일까, 나보다 먼저 결혼하게 되었단다. 아니 여기서 나보다 먼저는 중요하지 않다. 이건 전적으로 나를 중심에 두었을 때 그렇단 말이다. 그런 그는 우여곡절 끝에, 그러나 예정된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와서 취직시험 준비를 좀 하다가 연합통신인가 하는 언론사에 들어갔다.

 

95년 늦가을에 역사적인 민주노총이 출범했을 때, 그 전야제를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했는데, 우리, 그러니까 이 친구와 나, 그리고 지금 뭐하는지 모르는 한 여자 동기랑 보러갔다가 같이 돌아 오는 길에 신촌에서 신림동까지 한번 걸어가보자고 아마도 내가 제안해서 그렇게 했던 적이 있다. 여의도를 지나 신대방으로 해서 오면 좀 빠를텐데, 불행히 우리 셋은 모두 지방 출신이어서 길을 잘 몰랐고, 그래서 우리가 신림동에서 신촌 나갈때 애용하던 버스 142번(당시엔 버스번호가 이랬지)이 다니는 길을 따라 오기로 했는데, 그 길은 신촌에서 광화문까지 갔다가 서울역을 지나서 용산으로 노량진으로 이렇게 오는 길이었다. 한마디로 서울의 4분의 1을 돈 것이다. 새벽 1시쯤에 출발했는데 노량진 근처에 오니까 해가 뜨고 환경미화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버스 정류장을 지날 무렵 이 친구가 거기 서있던 아주머니 한 분에게 버스비를 구걸했다. 실상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었던 것이었다. 선량한 아주머니께서 미소를 띠고 토큰 3개를 주셨고, 우린 그걸로 버스를 타고 신림동으로 왔다. 여자 동기가 대견스럽게 말했다. "역시! 이 생활력."

 

나는 나중에 이 친구를 많이 배신했다. 그렇게 11년이 지나갔다. 지금은 2006년. 31살인 그가 결혼을 하고, 32살의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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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02:45 2006/05/05 0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