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공신들 시첩 처음 공개
예술의전당 ‘데라우치문고’전
한겨레 노형석 기자
곽재우, 김천일, 유성룡, 서산대사 등 임진왜란 당시 공신들이 지은 시첩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예술의전당과 경남대학교는 25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개막한 ‘〈데라우치문고〉 보물 시, 서, 화에 깃든 조선의 마음’전에서 임란 공신들의 시와 서간문 10여점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시첩은 의병장 곽재우(사진), 김천일, 고경명 장군의 시, 송상현 동래부사의 시고, 서산대사와 유성룡의 편지글 등이다.

개인의 감상을 다룬 시와 달리 편지글에는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의병장 김천일은 한 편지에서 “ 밖의 원군은 기대하기 어렵고 의병의 모집도 여태 거사하지 않고 앉아서 시간만 끌고 있으니, 요사이 걱정스럽고 쫓기는 마음은 붓으로 다 쓰기 어렵습니다”라고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서애 유성룡의 글에서는 노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엿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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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6 10:49 2006/04/26 10:49

약한 황사

2006/04/24 13:35
황사주의보가 있었다던데, 과연 앞산이 약하게 부옇다. 약하게 희미하다. 지독히 부연 것도 그렇다고 선명한 것도 아닌 약한 황사. 약하게 몸을 떠는 앞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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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4 13:35 2006/04/24 13:35

무제

2006/04/23 01:06

정치(政治)는 일종의 투쟁,  정치(精緻)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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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3 01:06 2006/04/23 01:06

4·19

2006/04/20 19:58

우리 서당 설립자께서 4·19때 그 유명한 교수단 데모에 나가셨다고 한다. 거의 주동자 급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우리 서당은 설립자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4·19에는 기념공원에서 참배를 한다. 올해도 우리 서당은 참배하고 왔다. 어제. 참배 끝나고 손만두 집에서 손만두를 먹었다.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셨다는 설립자께서 수업을 제끼고 참배를 올 정도였다면, 이날 4·19 뭔가 아주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럴까?

 

75년생인 나는 4·19의 의의를 몰랐다. 물론 5·18의 의미도 몰랐다. 우리 집은 광주가 아니었고...

 

자라면서 어른들이 계몽적으로 해주는 이야기에 의해, 혹은 교과서를 통해 사전적 의미를, 추상화된 개념적 의의를 주워들었다. 그런데 5·18은 대학 들어와서 간접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좀 있었다. 적당히 진보적인 교수의 수업을 통해, 복권된 무렵에 KBS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리고 과 언론동아리 사람들과 함께했던 5월 광주로의 여행을 통해. 충격이었지. 역사와 내가 언제부턴지 모르게 하나였던듯...80년에 광주에 있었음직한 사람들이 아직은 학교에 좀 있었던 때였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이 1980년도란 시간을 지나쳤지 않았던가. 한국사회에서 5·18의 영향은 컸다고 한다. 미국을 다시보게 되었고, 치열한 사회과학의 시대가 되었고...

 

그런데 4·19는?

내게 4·19는 그다지 사회과학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회과학의 대상으로 안보였다. 대학때 총학생회 주최로 기념식이랑 기념마라톤이란 걸 하긴 했다. 4·19 당시 어떤 학교 학생들의 선언문이란 것도 보았다.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너무 수사적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뛰긴 했을까. 4·19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한국땅에 꽃피기 이전의 전설 같은 이야기, 그래서 지금은 별로 감동적이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독재를 몰아냈다는 것은 봉건왕조를 공화국으로 만들었다는 것 아닌가? 군사독재라는 근대적이기도 한 이야기 저편에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자신을 이씨왕족의 후예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끌어내린 일시적 소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4·19란 것이 다름 아닌 프랑스 혁명에 비견될만한 일이 아닌가. 한국에서는 말이다. 1894년 이후에 한국에 그만한 민중봉기가 있었던가. 1919년이 있었다고 하지만, 국제정세와의 연관에서 본다면 4·19만하진 않을 듯하다. 물론 그 결과로 정권만 조금 바뀌었다는 것, 그건 양자가 좀 비슷하긴 하다.(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정책이 바뀌었고 조선총독이 바뀌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1919년 이후엔 4·19가 최고로 대단하지 않나. 대단한 봉기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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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19:58 2006/04/20 19:58

방법

2006/04/20 14:53

복잡한 현실 속에서 그것을 추동하는 핵심적인 계기를 발견해 내어야만 현실 그것을 제대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100년, 혹은 200년쯤 전부터 진행된 일에 대해서야...

 

거인이 개미의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거인이 보았던 개미 전망대란, 사실 개미들과 우주인이 교신하던 첨성대는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거인이 개미와 그 집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단하나, 개미 중에서 거인의 발을 꽉 깨무는 개미 때문일 것이다. 결코 물지 않으리라던 개미 종(種)에 대한 단 하나의 예외. 여기서부터 과학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개미가 미몽 속의 거인을 깨우는 것이다. 비판 혹은 반대사례, 거기에 과학적 재구성의 요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외의 모든 것은 회색빛 이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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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14:53 2006/04/20 14:53

1. KBS1의 대하드라마를 내가 최초로 본 건, 아마도 <<노다지>>가 아닐까 싶다. 내 초등학교때니까 80년대에 만들어진건데, 지금 생각하면 대담하게도, 1894년부터 1950년대까지를 다루었다. 그거 끝나고 나서 <<토지>> 했다. 이것도 노다지랑 거의 비슷한 시기를 다뤘다. 그거 끝나고는 나도 이래저래 KBS1 대하드라마를 멀리하게 됐는데, 나 대학때는 <<용의눈물>>인지 뭔지 이성계 이야기도 다루었다고 하고, 그리고 <<태조 왕건>이라고, 말 그대로 고려태조 왕건을 다루어서 히트를 치기도 했다.

 

2. 이번에 하는 <<서울, 1945>>는 물론 해방전후의 이야기인데, 웃기게도 주인공들은 모두 함흥 출신이다. 그러니까 함흥이라는 '고향' 출신 사람들의 일대기가, 함흥에서 시작해서 '경성'이라고 하는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해방전후사를 다룬 여느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인적 네트워크' 이야기가 하나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해방전후사를 정치사, 혹은 경제사로 볼 때의 상투적인 이야기들, 곧, 일본의 패전과 전후 처리문제를 둘러싼 미소의 대립, 한국전쟁, 친일파 청산 문제 등등은 모두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일텐데, 그런 거시사 말고 사람들의 전형적인 인간관계의 문제, 곧 미시사라고도 할 하나의 사회사가 이 드라마에 있다는 거다.

 

2.1. 말하자면 이렇다. 함흥이 생긴 이래 최고 천재라고 하는 운혁(최수영)이는 부모님과 누님의 희생으로 당시로서는 하층민이 언감생심 꿈꾸기도 힘들었을 경성제국대학까지 진학하게 되고, 또 그 기대를 저버리랴, 재학 중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다. (고등문관시험은 오늘날의 사법시험을 말하는 것 같다. 사법시험의 권위가 수천명이 합격하는 시험으로 하락한 것은 1990년대 이후 사법개혁으로 인한 것이다.) 함흥의 유지 문자작(김영철)의 딸인 석경(소유진)이가 운혁이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정통문법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엄연한 역사의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나아가서 운혁이와 같은 하층민 출신의 개희도 운혁이를 좋아하는데, 여느 멜로드라마처럼 운혁이는 개희를 선택한다. 실상 운혁이 집안과 개희 집안은 모두 문자작 집안에 복속되어 사는 처지. 운혁이가 고등문관시험 합격했을 때 그의 신원보증을 해준 것도 문자작이다. 한편 문자작의 동생 문동기는 사회주의 운동가가 되어 친일파인 형을 등지게 되는데, 운혁이는 문동기를 선생으로 모시면서 사회주의자가 된다. (이외의 인간관계가 너무 많아서 여기 적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해방이 되고 함흥에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 문자작은 동생인 문동기에 의해 체포되는 운명을 겪는다. 그러나 문동기는 형의 처형을 놓고 갈등한다. 기실 이전에 문자작은 문동기를 형제라는 피붙이에 대한 끔찍한 애착으로 대했던 것이다. 물론 문자작이 사회주의를 혐오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도망다니던 문동기에게 문자작이 은밀히 한 말, 곧, "내가 사회주의가 뭔지 모르지만, 네가 원하는 세상이 오면 그땐 내가 죄인이 되겠지. 그땐 네가 나를 봐줘야 한다."라는 말의 울림은 문동기를 옥죈다.

 

2.2 인민위원회의 서슬이 남한보다 훨씬 심했던 북한 지역의 특성상, 문자작은 자살을 택하게 된다. 이에 따라 문자작의 딸 석경은 울면서 자신의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한 동경으로 떠나기로 하는데... 떠나는 배 앞에서 석경은 운혁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린다. 이때 운혁이가 말하길,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마시오. 당신에겐 피아노가 있지 않소." 실상 석경은 조선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던 것. 그런데 껴안고 있는 두사람을 우연히 개희가 보게 되고...

 

3. 이렇게까지 적고 보니, 역시 여느 드라마와 다름없는 멜로 물이 되고 말았다. 또한 괜히 드라마 광고해준게 되고 말았고. 더이상 쓰는 건 무의미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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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0 01:34 2006/04/10 01:34

<<조선왕조실록>>, <선조 25/05/04 (계해)條 2번> 기사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방어선이 경기도 일대까지 밀렸을 때 조정에서 평양으로 피난가는 절차를 의논하던 중에 선조가 대신들에게 물었다.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

 

원문은 이렇다. "賊兵幾何? 半是我國人云, 然耶?" 여기서 '우리 나라 사람'의 원문이 我國人이란 것이다. 물론 國이란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천하국가'관에서 천자가 다스리는 四海, 곧 天下 다음 가는 영역인 邦, 곧 諸侯國을 지칭하는 개념일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은 중국의 하나의 제후국으로서의 인식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國의 관념이 결정적으로 해체되는 것은 물론 1894년의 청일전쟁과 그 무렵 동아시아가 겪은 '천지변동'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선조가 '我國人'에 대해 매우 섭섭해 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원형적인 民族으로서의 의식의 단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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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6 23:56 2006/04/06 23:56

별로 외국 가보고 싶은 생각은 안드는 편이다. 아직 한국에도 안가본데가 많다고 생각한다는... 그럼에도 외국 중에서 하나 고르라면 독일 가보고 싶다고, 대학 2학년땐가 누구에게 말한 적이 있다. 독일하면 단연 마르크스, 칸트, 헤겔, 하버마스, 베토벤 등등. 왠지 '합리'적일 것 같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니 한 치라도 오차가 있는 분야는 째째하게 손데지 않고, 거대한 것만 하는 나라. 왠지 그럴 것 같은 나라. 근데 왜 사람들은 프랑스를 가보고 싶어 했던 것일까? 패션 같은 거 말고는 별로 유명한 것도 없이, 미완의 혁명들만 널부러져 있는 나라. 올빼미 같은 근엄함도 없는 수탉을 상징씩이나 시켜주는 나라. 도대체 수탉이 뭐가 상징이 되는 것인지? 그런데 마르크스는 올빼미 보다는 프랑스의 상징인 수탉을 더 좋아했었지.('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1843)) 왜 더 좋아했을까? '혁명적 실천'이라고 하는 것은 수탉이 올빼미보다 잘하나?

혁명적 실천이란 것이 다름아닌 수탉의 일상과 같은 것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프랑스가 더욱 싫어지다가 최근에 약간 프랑스가 좋아지고 있다. 선진국 치고 데모도 그쯤 하다니 참 용하네. (물론, 독일이고 프랑스고 가보고 싶지는 않다. 돈도 없고.)



사진: 맨위는 동아일보에서, 두번째는 한겨레에서, 세번째는 밑바닥 보시면 알겠지만, 어떤 네이버 블로그에서 퍼왔다. (이 중 한겨레 것은 AFP 연합 통신에서 구매한 사진이고, 동아일보는 별 설명없이 특파원 이름만 나오는 걸로 볼 때 직접 찍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설마 저 블로거가 직접 찍은 것이겠나?)

 

※ 이번 프랑스 시위사태의 도화선은 최초고용계약법(CPE) 제정이라고 한다. 이 사태에 대해 한국의 보수언론은 프랑스의 경직된 고용구조, 쉽게 말해 종업원을 맘대로 자를 수 없는 고용구조 때문에 프랑스 경제가 악화되었고, 또 이런 시위사태도 일어나게 되었다고 뇌까린다. 뉴욕타임스가 이번 시위사태를 두고 세계화에 의한 충돌이라고 정리한 것과는 대조된다. 아니, 날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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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1 01:46 2006/04/01 0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