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끝부분을 유심히 보시기 바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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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 고려대·동양철학 |
| ©2006 Kyosu.net Updated: 2006-05-29 08:25 |
특히 끝부분을 유심히 보시기 바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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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 고려대·동양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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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어느 블로그에서 펀 글임. 글 참 잘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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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강좌 뒷풀이에서....| 내안에 나 있다! 2006년 05월 24일 02:55
기획글쓰기.
한겨레의 이제훈기자가 샘이다.
한시간동안 구라만 풀어놓더니....
한시간은 기획안 써온것 검토.
난 안써가서 그냥 듣기만 하다가, 뒷풀이를 한다는 말에 꾹 참았다.
뒷풀이가서 이사람의 경력에서 묻어나오는 뭔가를 빼먹어야 겠다는 생각에 꾹꾹 참았다.
이 샘, 한때 운동좀 했다.
기자가 꿈도 아니었다.
군대갔다와서 단체에서 활동할 용기는 없고, 취직할 마음도 없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기자가 되었다는....
생각은 쬐까 트여있는듯 하다.
뒷풀이 자리에서 2시간 동안 멀뚱멀뚱 앉아 홀짝홀짝 맥주를 들이키다가....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자신의 고민을 풀어놓는다.
올해 졸업했는데, 백수.
기자셤을 준비한단다.
고민이 많은듯. 대추리, FTA등의 기사들을 읽으며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그냥 신문만 보고는 관점을 못갖겠다는.... 그러한 고민....
나는 그녀에게 달랑 한마디했다. "직접 대추리에 가서 보세요"
이제훈 샘, 이런저런 야그하다가....
조선일보가 어떻구.... 수미일관하지 않다는 비판.
난 속으로 생각한다. 한겨레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대추리에 관한 보도는 더더욱 그렇지 않았던가....?
이 샘, 내가 노힘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내눈치를 보는듯 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왜 그러지?
역시나 대추리와 관련해서 한겨레 내에서도 논쟁이 붙었단다.
그중에서 자신은 보수에 속한다고....
역시나....
그러면서 자기 합리화. "보수라고 해서 모두 나쁜건 아니잖아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목구멍까지 차오는 말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냥 꾹 참았다.
이 강좌의 대부분은 대학생인데, 것도 기자가 되고파하는 이들이다.
그렇다 보니 뒷풀이 자리에서 이 샘에게 묻는 질문들은 '면접을 어케 봐야해요?', '관점은 어떻게 가져야죠?'. '셤은 주로 뭐가 나오나요?'
그 속에서 3시간이 넘게 나는 외부인인양 앉아 있었다.
때마침, 그리고 다행히 KTX가 낼 단식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자리를 떠 농성장으로 향했다. 이 해방감....
그시간에 차라리 집에가서 잠이나 잘껄.....
아님 할말 다하면서 논쟁이라도 붙어볼껄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드네....
에휴....
KTX는 지도부 단식에 들어간단다. 배고파하는 지선동지를 달래고, 농담도 주고 받으며, 긴장을 풀어주고, 삼실에 들어왔다.
단식.... 참 갑갑하면서도 힘든 투쟁방식인데....
어쨋든 하기로 결정했으니, 잘 견뎌내는수 밖에....
글은 생각만 갖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 있어야 생생한 글이 나온다.
그걸 오늘 다시 확인한다.
그렇다.....
말, 글을 안 후부터 줄곧 들려오던 행복론, 모두 요지는 "가까운데서 찾으라"는 것이었지. 그렇지만 내 가까운 곳에 행복이라 할만한게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가끔 식구들이 참 좋게 느껴지고, 우리집도 따지고 보면 참 행복한 집이야, 이렇게 생각되긴 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가깝다'는 말을 나는 가족으로 한정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를 긍정하는 것이 곧 행복의 조건 아닐까.
오늘 아침, 흐리고 이슬비, 좀 서늘함. Beatles,
| ‘대추리 사태’의 본질은 한반도 평화다 | |
| 사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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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참으로 치욕스런 날이었다. 다시는 없기를 바랐던 민과 군·경의 대규모 충돌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1만5천여 군·경 병력은 제 땅을 지키려던 주민과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열망을 제압했다. 그곳에 높다란 철책을 세워, 한반도 평화를 위한 것인지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위한 것인지 성격이 불분명한 미군기지가 들어서도록 방어벽을 세웠다. 100년 전 부패한 조선 왕실이 동학농민군을 섬멸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당시 처참한 섬멸전은 반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대추리 사태는 주한미군 재편 과정에서 경기도 평택 팽성 쪽에 새로운 통합 미군기지를 세우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면서 발생했다.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 285만평 가운데 200만여평은 소유자의 동의를 받아 매수했지만, 나머지 74만평은 강제로 수용했다. 주민 100여명은 강제수용을 거부하며 지금까지 버텼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번 사태는 강제수용 또는 보상을 둘러싼 정부와 주민의 갈등으로 비친다. 국방부가 보상비 규모를 들먹이며 주민들의 ‘과욕’을 내세웠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아울러 시민사회단체에 대해서는 주민의 과욕을 부채질하며, 미군 철수라는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려 했다고 매도했다. 그러나 대추리 사태의 성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본질은 한반도 평화와 관련돼 있다. 아직까지 정부는 주한미군 재배치의 목적과 평택 미군기지의 구실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과연 한반도 전쟁 억지력인지, 아니면 동북아 유사사태에 개입할 미군의 전진기지인지 알 수 없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한국과 미국이 합의한 것을 보면 평택 미군기지의 구실은 후자에 가깝다. 그렇다면 평택기지는 한반도를 국제분쟁에 휩쓸려들게 하는 ‘인계철선’ 구실을 하게 된다. 이런 논의가 민간 차원에서 널리 일고 있는데도, 군 당국은 함구한다. 오로지 땅값 문제만을 논의하자고 했다. 어떤 국민이 제 나라의 평화를 위협하는 용도에 쉽게 땅을 내줄 것인가? 최근 주일미군 재배치 계획안이 확정됐다. 애초 미군은 도쿄 인근의 자마기지에 들어설 통합작전사령부의 성격을, 동아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와 중동 등 불안정 지대를 관할하는 광역사령부로 상정했다. 그러나 국민이 반발하고 일본 정부가 재조정을 요구하자, 동북아의 유사사태에 대비하는 거점사령부로 한 등급 낮췄다. 논의과정의 투명성이 미국의 애초 구상을 수정·축소하는 쪽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어떠했나. 게다가 군 당국은 그나마 보상과 관련한 대화에서도 불성실하기 짝이 없었다. 협의에 응하지 않은 주민들에 대해서는 설득은커녕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돈은 법원에 공탁했으니 찾아가든지 말든지 하라는 투였다. 돈이나 더 받자고 버틴다고 빈정대기 일쑤였다. 행정 대집행 비용을 지우겠다고 을러대기도 했다. 파장이 커지자 대화하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명분쌓기에 불과했다. 제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은 이들에게 당국은 국민 대접은 고사하고 사람 대접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군경은 대추분교를 접수했다. 평화의 깃발은 꺾였고, 민족적 자존감도 짓밟혔다. 이제 참여정부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꼭두각시 정부? |
여기서 과동기는 물론 대학 동창이다. 대학에만 과가 있으니까. 그 친구 나보다 1살 어렸지만(내가 재수를 했으므로)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항상 나보다 한 발 앞섰다고 생각한다. 운동도, 사랑도, 경제적 형편이나 생활능력 등등, 심지어 더 가난하게 지낼수 있는 능력까지. 그래서일까, 나보다 먼저 결혼하게 되었단다. 아니 여기서 나보다 먼저는 중요하지 않다. 이건 전적으로 나를 중심에 두었을 때 그렇단 말이다. 그런 그는 우여곡절 끝에, 그러나 예정된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와서 취직시험 준비를 좀 하다가 연합통신인가 하는 언론사에 들어갔다.
95년 늦가을에 역사적인 민주노총이 출범했을 때, 그 전야제를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했는데, 우리, 그러니까 이 친구와 나, 그리고 지금 뭐하는지 모르는 한 여자 동기랑 보러갔다가 같이 돌아 오는 길에 신촌에서 신림동까지 한번 걸어가보자고 아마도 내가 제안해서 그렇게 했던 적이 있다. 여의도를 지나 신대방으로 해서 오면 좀 빠를텐데, 불행히 우리 셋은 모두 지방 출신이어서 길을 잘 몰랐고, 그래서 우리가 신림동에서 신촌 나갈때 애용하던 버스 142번(당시엔 버스번호가 이랬지)이 다니는 길을 따라 오기로 했는데, 그 길은 신촌에서 광화문까지 갔다가 서울역을 지나서 용산으로 노량진으로 이렇게 오는 길이었다. 한마디로 서울의 4분의 1을 돈 것이다. 새벽 1시쯤에 출발했는데 노량진 근처에 오니까 해가 뜨고 환경미화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버스 정류장을 지날 무렵 이 친구가 거기 서있던 아주머니 한 분에게 버스비를 구걸했다. 실상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었던 것이었다. 선량한 아주머니께서 미소를 띠고 토큰 3개를 주셨고, 우린 그걸로 버스를 타고 신림동으로 왔다. 여자 동기가 대견스럽게 말했다. "역시! 이 생활력."
나는 나중에 이 친구를 많이 배신했다. 그렇게 11년이 지나갔다. 지금은 2006년. 31살인 그가 결혼을 하고, 32살의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