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2006/05 | 6 ARTICLE FOUND

  1. 2006/05/30 [펌] '개화기 자유주의' 연구...
  2. 2006/05/24 [펌] 글쓰기에 대한 글
  3. 2006/05/22 행복
  4. 2006/05/05 [펌] '대추리 사태'의 본질은 한반도 평화다_한겨레
  5. 2006/05/05 과동기
  6. 2006/05/01 무제 1.01

특히 끝부분을 유심히 보시기 바람. ㅋㅋ

 

---------------------------------------------------------------------------------

연구동향_'개화기 자유주의' 연구 비판적 검토
하나의 틀에 다양한 사상유파 가둬…모순된 개념, 공동연구의 한계

2006년 05월 29일   이승환 고려대 이메일 보내기

한국 자유주의의 현실은 매우 기형적이다. 냉전체제 아래서 한국의 자유주의는 반공독재나 부국강병을 위한 중상주의적 계획경제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중핵인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수호’라는 이름으로 탄압당했고, 오직 정권과 결탁한 재벌들의 경제적 자유만이 자유주의가 지향해야할 유일한 가치인 것처럼 호도됐다. 냉전이 종식되고 세계화 시대가 되어도 한국의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양심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 같은 핵심가치는 외면한 채 국가보안법 같은 반자유주의적 악법을 옹호하며 ‘시장의 자유’와 ‘소유의 자유’만을 강조하고 있다. 현실의 자유주의가 기형적이라 해서, 우리가 본받을만한 자유주의의 원형이 지구 어느 곳에 표본으로 전시돼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 세계에는 오직 다양한 자유주의의 변종들만 존재할 뿐, 얼마나 ‘더 건강한’ 자유주의를 만들어내는가는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적 합의와 실천적 노력에 달려있다고 본다.


2000년을 전후해 국내 학계에서는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이 활발히 진행됐다. 구한말의 위청척사운동, 동학운동, 개화운동을 자유주의와의 연관 속에서 조명하는 것에서부터 일제시기의 애국계몽운동과 자강운동에 내재된 자유주의적 성격과 그 한계에 대한 고찰, 그리고 제헌과정과 제헌헌법에 나타난 자유주의의 이념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까지 한구 자유주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짧은 기간에 비교적 풍성한 결실을 거뒀다. 그 가운데 특히 구한말의 개화파와 일제시기 계몽운동가들이 지녔던 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은 현대 한국의 기형적 자유주의와 모종의 가족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흥미를 유발한다. 


개화파가 지녔던 자유주의 사상과 관련해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개화파 사상가들이 수용했던 자유주의가 매우 선택적이고 제한적이었다는데 동의한다. 가령, 개화파들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평등과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종국에는 ‘通義’ 또는 ‘天地之理’와 같은 공동체의 도덕원리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이중적 태도를 과연 “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와 전통 문화(유교)의 절충적 융합으로 볼 것인가”. 이와 관련해 연구자들은 평가를 달리한다. 김주성(‘김옥균·박영효의 자유주의정신’(정치사상연구 2집))은 개화파들에게는 자유주의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가 결여돼있으며, 그들의 사상은 정통자유주의에서 일탈한 ‘비자유주의적’인 것이라고 평가한다. 자유주의의 기본원리에 의하면 타인에게 危害를 가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자유가 있으므로, ‘통의’와 같은 도덕원리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은 비자유주의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반면 안외순·장동진·정용화(‘애국계몽운동과 준식민지에서의 자유주의’·‘초기개화파의 자유주의 관념형성의 특질’(한국사상과문화 21집), ‘근대적 개인의 형성과 민족’(한국정치학회보 40집1호)) 등은 개화파의 이중적인 모습을 ‘자유주의와 유교적 가치의 절충적 융합’이라고 평가한다. 즉 자유주의와 유교윤리의 장점을 상보적으로 융합해 보다 나은 사회체제를 모색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더욱이 제국열강의 압박 속에서 새로운 근대국가를 모색해야했던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자유는 무제한으로 허용돼야 하는 종국적 가치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존립을 위해 선택적으로 허용돼야 하는 수단적 가치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고 동정적 이해를 보내는 것이다.


개화파에 대한 이런 엇갈린 평가는 연구자들의 전공과 학문방법의 차이에서 일정부분 기인한다고 본다. 김주성은 철학전공자로서, ‘불침해의 원리’라는 자유주의의 ‘이념적 틀’로 개화파를 분석한다. 반면, 안외순·장동진·정용화 등은 정치사상전공자로서 19세기후반이라는 역사적 현실 안에서 개화파의 제도개혁 프로그램에 나타난 자유주의적 요소를 재구성하려 한다. ‘철학적 분석’과 ‘사상사적 이해’로 구분되는 양자의 접근방식엔 나름의 장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방식의 차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개인의 가치보다 부국강병을 더 우위에 두고, 도덕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려던 이 시기의 개혁 프로그램은 김주성이 지적한 것처럼 과연 진정한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일합방을 전후로 전개됐던 계몽운동과 자강운동에 나타난 자유주의의 성격과 그 한계에 대해서는 안외순·전재호·장동진·강정민 등의 연구자가 착실히 연구성과를 쌓아왔다. 특히 안외순의 연구는 애국계몽운동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는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과연 이들의 노선이 진정 ‘애국적’이었는지 묻는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이다. 즉 박은식과 같은 계몽운동가들은 원칙적으로는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듯 했지만, 결국은 개인의 자유를 현존하는 국법질서 아래 구속함으로써 그 한계를 노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명백하게 주권을 침해당하며, 문명개화를 명분으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에 편승하기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적극 옹호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노선을 택하는 편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안외순은 술회한다. 안외순의 이런 판단은 당시 계몽운동가들이 지녔던 문명개화론이 그다지 자유주의의 이념에 투철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전재호의 연구(‘동학과 자유주의’(한국사상과문화 21집))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이 시기에 실력양성론을 뒷받침했던 사회이념을 ‘국가중심주의적 자유주의’와 ‘사회진화론’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이 시기 지식인들이 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도 국가와 사회를 위한 개인의 책무를 강조하고 민족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조했던 이유를 식민지적 조선의 현실에서 찾는다. 그러나 과연 ‘국가중심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을까. 국가의 간섭에 대항해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것이 자유주의의 목표라면, ‘국가중심’이라는 개념과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서로 상치되지 않는가. 왜 연구자들은 ‘국가중심적 자유주의’나 ‘반자유주의적 자유주의’라는 모순된 개념을 쓰면서까지 이 시기의 사상을 자유주의의 틀 안에 귀속시키고자 하는가. 


개화기와 식민지 시기의 자유주의에 관한 논문 중 상당히 많은 편수가 “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 연구비지원에 의해 작성됐다”고 밝히는 것으로 봐, 이 작업들은 공동연구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공동연구는 긍정적인 점도 있지만 때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시기의 다양한 사상의 유파들을 자유주의라는 한 틀로 조명하려다 보니, 때로 자유주의와 별 관련이 없는 유파마저도 무리하게 자유주의의 한 유형(또는 변형)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가령, 동학과 자유주의의 관련성을 다룬 한 연구에서는, 동학 경전에서 자유주의에 관한 명시적인 전거를 찾을 수 없었던 탓인지,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식으로 모호하기 그지없는 서술을 한다. 공동연구의 기획의도에 맞추려다보니 ‘반자유주의적 자유주의’와 같은 모순된 개념이 등장할 뿐 아니라, 인민주권이나 보통선거와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자유주의와 구분하지 않은 채 자유주의의 특징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이런 오류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연구자 개인에게 있겠지만, 큰 틀에서 볼 땐 연구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공동연구가 지닌 한계에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이런 주제를 기획한 공동연구 입안자들에게도 약간의 책임이 있겠지만, 공동작업에 참여해 한시적으로나마 생계를 보장받지 않으면 안되는 신진 연구인력의 실존적 조건과 더 큰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향후 학술진흥재단의 연구지원은 공동작업이 절실히 요청되는 토대연구가 아닌 바에는 개별 연구자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승환 / 고려대·동양철학


©2006 Kyosu.net
Updated: 2006-05-29 08:2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5/30 23:58 2006/05/30 23:58

진보넷 어느 블로그에서 펀 글임. 글 참 잘 쓰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글쓰기 강좌 뒷풀이에서....

 
글쓰기 강좌 7강.

기획글쓰기.

한겨레의 이제훈기자가 샘이다.

한시간동안 구라만 풀어놓더니....

한시간은 기획안 써온것 검토.

난 안써가서 그냥 듣기만 하다가, 뒷풀이를 한다는 말에 꾹 참았다.

뒷풀이가서 이사람의 경력에서 묻어나오는 뭔가를 빼먹어야 겠다는 생각에 꾹꾹 참았다.

 

이 샘, 한때 운동좀 했다.

기자가 꿈도 아니었다.

군대갔다와서 단체에서 활동할 용기는 없고, 취직할 마음도 없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기자가 되었다는....

 

생각은 쬐까 트여있는듯 하다.

뒷풀이 자리에서 2시간 동안 멀뚱멀뚱 앉아 홀짝홀짝 맥주를 들이키다가....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자신의 고민을 풀어놓는다.

올해 졸업했는데, 백수.

기자셤을 준비한단다.

고민이 많은듯. 대추리, FTA등의 기사들을 읽으며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그냥 신문만 보고는 관점을 못갖겠다는.... 그러한 고민....

 

나는 그녀에게 달랑 한마디했다. "직접 대추리에 가서 보세요"

 

이제훈 샘, 이런저런 야그하다가....

조선일보가 어떻구.... 수미일관하지 않다는 비판.

난 속으로 생각한다. 한겨레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대추리에 관한 보도는 더더욱 그렇지 않았던가....?

 

이 샘, 내가 노힘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내눈치를 보는듯 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왜 그러지?

 

역시나 대추리와 관련해서 한겨레 내에서도 논쟁이 붙었단다.

그중에서 자신은 보수에 속한다고....

역시나....

 

그러면서 자기 합리화. "보수라고 해서 모두 나쁜건 아니잖아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목구멍까지 차오는 말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냥 꾹 참았다.

 

이 강좌의 대부분은 대학생인데, 것도 기자가 되고파하는 이들이다.

그렇다 보니 뒷풀이 자리에서 이 샘에게 묻는 질문들은 '면접을 어케 봐야해요?', '관점은 어떻게 가져야죠?'. '셤은 주로 뭐가 나오나요?'

 

그 속에서 3시간이 넘게 나는 외부인인양 앉아 있었다.

때마침, 그리고 다행히 KTX가 낼 단식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자리를 떠 농성장으로 향했다. 이 해방감....

 

그시간에 차라리 집에가서 잠이나 잘껄.....

아님 할말 다하면서 논쟁이라도 붙어볼껄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드네....

 

에휴....

KTX는 지도부 단식에 들어간단다. 배고파하는 지선동지를 달래고, 농담도 주고 받으며, 긴장을 풀어주고, 삼실에 들어왔다.

단식.... 참 갑갑하면서도 힘든 투쟁방식인데....

어쨋든 하기로 결정했으니, 잘 견뎌내는수 밖에....

 

글은 생각만 갖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 있어야 생생한 글이 나온다.

그걸 오늘 다시 확인한다.

그렇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5/24 03:54 2006/05/24 03:54

행복

2006/05/22 09:20

말, 글을 안 후부터 줄곧 들려오던 행복론, 모두 요지는 "가까운데서 찾으라"는 것이었지. 그렇지만 내 가까운 곳에 행복이라 할만한게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가끔 식구들이 참 좋게 느껴지고, 우리집도 따지고 보면 참 행복한 집이야, 이렇게 생각되긴 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가깝다'는 말을 나는 가족으로 한정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를 긍정하는 것이 곧 행복의 조건 아닐까.

 

오늘 아침, 흐리고 이슬비, 좀 서늘함. Beatles, , 시험공부(하기 싫음), 아침밥, , 다방커피 한 모금...그리고 이 곁에 한 사내가 있다...아, 담배 대신 맛동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5/22 09:20 2006/05/22 09:20

‘대추리 사태’의 본질은 한반도 평화다
사설
한겨레
어제는 참으로 치욕스런 날이었다. 다시는 없기를 바랐던 민과 군·경의 대규모 충돌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1만5천여 군·경 병력은 제 땅을 지키려던 주민과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열망을 제압했다. 그곳에 높다란 철책을 세워, 한반도 평화를 위한 것인지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위한 것인지 성격이 불분명한 미군기지가 들어서도록 방어벽을 세웠다. 100년 전 부패한 조선 왕실이 동학농민군을 섬멸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당시 처참한 섬멸전은 반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대추리 사태는 주한미군 재편 과정에서 경기도 평택 팽성 쪽에 새로운 통합 미군기지를 세우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면서 발생했다.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 285만평 가운데 200만여평은 소유자의 동의를 받아 매수했지만, 나머지 74만평은 강제로 수용했다. 주민 100여명은 강제수용을 거부하며 지금까지 버텼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번 사태는 강제수용 또는 보상을 둘러싼 정부와 주민의 갈등으로 비친다. 국방부가 보상비 규모를 들먹이며 주민들의 ‘과욕’을 내세웠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아울러 시민사회단체에 대해서는 주민의 과욕을 부채질하며, 미군 철수라는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려 했다고 매도했다.

그러나 대추리 사태의 성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본질은 한반도 평화와 관련돼 있다. 아직까지 정부는 주한미군 재배치의 목적과 평택 미군기지의 구실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과연 한반도 전쟁 억지력인지, 아니면 동북아 유사사태에 개입할 미군의 전진기지인지 알 수 없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한국과 미국이 합의한 것을 보면 평택 미군기지의 구실은 후자에 가깝다. 그렇다면 평택기지는 한반도를 국제분쟁에 휩쓸려들게 하는 ‘인계철선’ 구실을 하게 된다. 이런 논의가 민간 차원에서 널리 일고 있는데도, 군 당국은 함구한다. 오로지 땅값 문제만을 논의하자고 했다. 어떤 국민이 제 나라의 평화를 위협하는 용도에 쉽게 땅을 내줄 것인가?

최근 주일미군 재배치 계획안이 확정됐다. 애초 미군은 도쿄 인근의 자마기지에 들어설 통합작전사령부의 성격을, 동아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와 중동 등 불안정 지대를 관할하는 광역사령부로 상정했다. 그러나 국민이 반발하고 일본 정부가 재조정을 요구하자, 동북아의 유사사태에 대비하는 거점사령부로 한 등급 낮췄다. 논의과정의 투명성이 미국의 애초 구상을 수정·축소하는 쪽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어떠했나.

게다가 군 당국은 그나마 보상과 관련한 대화에서도 불성실하기 짝이 없었다. 협의에 응하지 않은 주민들에 대해서는 설득은커녕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돈은 법원에 공탁했으니 찾아가든지 말든지 하라는 투였다. 돈이나 더 받자고 버틴다고 빈정대기 일쑤였다. 행정 대집행 비용을 지우겠다고 을러대기도 했다. 파장이 커지자 대화하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명분쌓기에 불과했다. 제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은 이들에게 당국은 국민 대접은 고사하고 사람 대접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군경은 대추분교를 접수했다. 평화의 깃발은 꺾였고, 민족적 자존감도 짓밟혔다. 이제 참여정부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꼭두각시 정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5/05 20:13 2006/05/05 20:13

과동기

2006/05/05 02:45

여기서 과동기는 물론 대학 동창이다. 대학에만 과가 있으니까. 그 친구 나보다 1살 어렸지만(내가 재수를 했으므로)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항상 나보다 한 발 앞섰다고 생각한다. 운동도, 사랑도, 경제적 형편이나 생활능력 등등, 심지어 더 가난하게 지낼수 있는 능력까지. 그래서일까, 나보다 먼저 결혼하게 되었단다. 아니 여기서 나보다 먼저는 중요하지 않다. 이건 전적으로 나를 중심에 두었을 때 그렇단 말이다. 그런 그는 우여곡절 끝에, 그러나 예정된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와서 취직시험 준비를 좀 하다가 연합통신인가 하는 언론사에 들어갔다.

 

95년 늦가을에 역사적인 민주노총이 출범했을 때, 그 전야제를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했는데, 우리, 그러니까 이 친구와 나, 그리고 지금 뭐하는지 모르는 한 여자 동기랑 보러갔다가 같이 돌아 오는 길에 신촌에서 신림동까지 한번 걸어가보자고 아마도 내가 제안해서 그렇게 했던 적이 있다. 여의도를 지나 신대방으로 해서 오면 좀 빠를텐데, 불행히 우리 셋은 모두 지방 출신이어서 길을 잘 몰랐고, 그래서 우리가 신림동에서 신촌 나갈때 애용하던 버스 142번(당시엔 버스번호가 이랬지)이 다니는 길을 따라 오기로 했는데, 그 길은 신촌에서 광화문까지 갔다가 서울역을 지나서 용산으로 노량진으로 이렇게 오는 길이었다. 한마디로 서울의 4분의 1을 돈 것이다. 새벽 1시쯤에 출발했는데 노량진 근처에 오니까 해가 뜨고 환경미화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버스 정류장을 지날 무렵 이 친구가 거기 서있던 아주머니 한 분에게 버스비를 구걸했다. 실상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었던 것이었다. 선량한 아주머니께서 미소를 띠고 토큰 3개를 주셨고, 우린 그걸로 버스를 타고 신림동으로 왔다. 여자 동기가 대견스럽게 말했다. "역시! 이 생활력."

 

나는 나중에 이 친구를 많이 배신했다. 그렇게 11년이 지나갔다. 지금은 2006년. 31살인 그가 결혼을 하고, 32살의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5/05 02:45 2006/05/05 02:45

무제 1.01

2006/05/01 09:43

한반도 야경↑님의 [무제] 에 관련된 글.

政者正也. 정치는 바루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5/01 09:43 2006/05/01 0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