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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의 동일함

신영복: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 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이 관계의 최고형태입니다.

 

 

 

신영복 선생께서 미국에 가셨던 모양입니다.

몇 해 전 쓰신 것이지만 지금 읽어도 좋은 기행문입니다.

선생의 통찰이 언제나 큰 자극입니다. -- sabotage.



신영복 / 아메리칸드림

 

우리는 꿈속에서도 이것이 꿈이라는 자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영화의 본고장 헐리우드에 있는 '명성의 거리'(The walk of fame)에는 3천개가 넘는 별이 있습니다. 보도에 박혀 있는 별 하나 하나에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주인공들입니다. 스타들의 싸인과 수족(手足)이 도장(圖章)되어 있는 챠이니즈 극장 앞은 젊은 시절의 우상을 확인하려는 관광객들로 발들여놓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나도 나의 젊은 시절을 사로잡았던 스타를 찾아보다가 새삼스레 헐리우드가 만들어낸 별들의 광휘와 위력에 놀랍니다. 10만개의 전구(電球)로 200미터의 아취터널을 만들어 놓고 펼치는 라스베가스의 라이트 벌 브 쇼(Light bulb show)는 한판의 환상이었습니다. 라이트 쇼가 끝난 거리는 세계각처에서 몰려온 사람들의 꿈같은 탄성으로 다시 한 번 출렁입니다. 나는 라스베가스의 아침거리를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간밤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 러내고 있는 거리의 풍경은 어제 밤의 일들이 꿈같습니다. 꿈이란 무엇인가. 꿈의 벨트 미국 의 서부(西部)는 17시간의 시차(時差)와 함께 내게 심한 현기증으로 다가왔습니다.

미국은 '꿈의 대륙'이고 20세기를 '미국의 세기(世紀)'라 한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곧 20세기 의 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20세기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꿈꾸어온 가치라고 해야 합니다. 20세기 1백년은 미국의 승리와 영광으로 가득찬 세기임에 틀림없습 니다. 동구사회주의의 이상이 좌절된 지금 우리는 이제 유일한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 국의 꿈을 통하여 미래의 꿈을 읽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인류에게는 더 이상의 역사는 없고 더 이상의 꿈도 없는 이른바 '역사의 종말'과 함께 '꿈의 종말'을 선언해야 할 지도 모릅니 다.

미국의 역사는 아메리칸 드림의 역사였습니다. 신대륙을 찾아나선 청교도의 꿈에서부터 서 부(西部)를 향하여 불태웠던 골드러쉬의 꿈. 실리콘벨리에서 키우는 정보사회의 꿈에 이르기 까지 미국은 꿈의 제국입니다. 미국의 꿈은 이제 아메리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석권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꿈은 헐리우드의 필름이 깔아놓은 '셀룰로이드 고속도로'를 따라 세계의 방방곡곡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맥도널드와 코가 콜라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수많 은 상품과 자본은 막강한 군사력의 계호를 받으며 미국의 꿈을 도처에 심어놓고 있습니다. 미국의 꿈은 이제 세계의 꿈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미국을 찾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이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는 관광객들의 눈길이 꿈 속을 더듬는 듯 합니다. 미국의 꿈은 이제 자유의 꿈으로 승화되어 있는 지도 모릅니다. 반 세기가 넘도록 미국의 꿈을 꾸어온 우리 나라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미국적 가치와 미국의 꿈이 우리의 가치가 되고 우리의 꿈이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도시와 학교에는 미국을 꿈을 찾아온 사람들로 한인타운을 이루어 마치 당제국(唐帝國)시절 의 신라방(新羅坊)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꿈의 도시 헐리우드와 동화의 세계 디즈니 랜드 그리고 환락의 메카 라스베가스 등 아 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되고 있는 '꿈의 벨트'를 통과하면서 내내 꿈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적 가치가 되고 세기적 가치가 되어 있는 미국의 꿈에 대하여 생각했습 니다. 물론 이 꿈의 벨트가 보여주고 있는 상품화된 꿈 을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국의 꿈은 개인에게 열려 있는 '기회(機會)와 가능성'을 일컫는 것 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와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 는 기회이며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는 꿈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을 알기 위하여 그의 과거를 묻는 것에 못지 않게 그의 꿈을 물어봅니다. 그의 꿈을 물 어 그 사람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한사람의 흑인 관광객도 찾아볼 수 없는 꿈동산 디즈니랜드가 보여주는 꿈은 무엇이며, 헐리우드가 생산하고 있는 꿈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라스베가스가 펼쳐 보이는 꿈 은 과연 어떤 내용을 갖는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리콘 벨리가 선도하는 정보 사회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에 버금가는 혁명을 예고한다고 하지만 그 정보사회의 꿈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무엇이 그 꿈을 이끌어 가고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헐리우드의 거리를 걸으며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이름을 읽을 때마다 나는 스타의 꿈이 좌절 된 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븐 일레븐'은 이곳에 햄버거를 사러 왔다가 우연히 영화감독의 눈에 띄어 일약 스타가 된 어느 여배우의 신화가 남아 있는 가게 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스타지망생들이 감독의 눈에 뜨일 때까지 부지런히 '세븐 일레븐'을 찾아와 계속해서 햄버거를 사고 있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한 토막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 으며 에피소드는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어 그 심각함을 희석시켜주기도 합니다. 서부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부의 꿈은 그것을 꿈으로 미화하는 구조를 배후에 감추고 있습니다. 문명과 야만, 카우보이와 인디언, 라이플과 도끼, 법과 무법, 여선생과 매춘부라는 서부극(西部劇)의 도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대륙의 꿈은 더욱 명백한 내용을 갖는 것입니다. 아메리카는 신대륙이 아니라 이미 사람 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은 물론이며 더구나 '발견'이란 가당치도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신대륙의 꿈은 땅과 가족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아메리카 원주민들 의 처지를 완벽하게 사상하지 않는 한 결코 꿈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비극을 '명백한 운명'으로 규정하는 신탁(神託)의 권능을 전제하지 않는 한 그것 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꿈은 암흑의 무대를 필요로 하는 어둠의 언어입니다. 꿈이란 한 개를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몽매(蒙昧)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 뿐만이 아니라 모든 꿈의 구조입니다. 명(明)과 암(暗), 극소(極少)와 대다(大多)가, 심지어는 무(無)와 유(有)가 무차별하게 전도(顚倒)되는 역상(逆像)의 구조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 한 구조가 꿈의 세계가 아닌 우리의 현실에 깊숙히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 나는 내내 시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부의 끝인 샌디에고 에 이르기까지도 시차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계속 밤잠을 설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 다 새벽잠을 얻은 날도 피곤한 아침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꿈이 아름다울수록 더 참담했던 옥방(獄房)의 아침같았습니다. 꿈은 우리들로 하여금 곤고(困苦)함을 견디게 하는 희망의 동의어가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 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꿈은 발밑의 땅과 자기자신의 현실에 눈멀게 합니다. 오늘에 쏟아야 할 노력을 모욕합니다. 나는 이것이 가장 경계해야할 꿈의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세기가 경영해 온 꿈이 재부(財富)와 명성(名聲)과 지위(地位)와 승리(勝利)로 그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꿈의 유무(有無)에 앞서 꿈의 내용을 물 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새로운 세기에는 새로운 꿈을 경작해야 한다는 당신의 주장은 옳습니다. 20세기를 석권해 온 '미국의 꿈'을 반성하고 다시 새로운 세기의 꿈을 설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 는 새로운 꿈을 설계하기 전에 가능하다면 모든 종류의 꿈에서 깨어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모르지 않습니다. 소수의 선각적 노력에 의해 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단적 몽유(夢遊)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겪는 집단적 아 픔이 없이는 깨어나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속에서도 이것은 꿈이 라는 자각(自覺)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걷고 있는 좁은 골목길 에서 우연인 듯 만나는 이 작은 자각에 잠시 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작은 자각 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나고 있을 뿐 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침을 만들어 내는 노력은 적어도 개인의 경우에는 이 작은 자각에 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참담한 아침이 되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나는 샌디에고에서 고난의 땅 멕시코로 넘어 갔습니다.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아나는 비에 젖고 있었습니다. 나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찾아 갔습니다. 시계청소(視界淸掃)로 헐벗 어버린 언덕위로 견고한 철책이 멀리 해안까지 이어져 있고 미국령에는 밀입국자를 감시하 는 순찰차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나는 국경순찰차를 긴장시키면서 천천히 철책을 따라 걸었습니다. 뜻밖에도 도중에 10여명의 라틴아메리카 빈민들을 만났습 니다. 그들은 꿈의 땅 미국으로 밀입국하기 위하여 비내리는 동굴에서 벌써 며칠째 밤을 지새고 있었습니다. 꿈의 경계(境界)에 서 있는 그들의 초췌한 모습이 슬픕니다. 철책은 제1 세계와 제3세계의 견고한 경계선이었습니다. 나는 도로 하나를 경계로 하여 빈(貧)과 부(富) 가 칼로 자른 듯이 격리되어 있는 미국의 도시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꿈이란 양 파와 같다던 당신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이란 껍질로만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외피(外皮)만으로 겹겹이 포장된 구적(球積)이 꿈의 실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미국의 꿈은 미국의 바깥에 있었습니다. 비내리는 맥시코의 국경에 있고, 멀리 지구의 반대 편 낮밤이 바뀌어 있는 우리나라에 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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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와 조선

조선일보가 한반도 남북을 대표하는 보수매체라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입니다. 아울러 한국에서 벌어지는 '안티조선운동'은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보물급 사회운동중의 하나죠.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안티조선운동에 대해 전부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정상공론의 윤리와 방법내에 있다면 보수에게도 '보수'를 이야기 할 자격과 권리를 인정해 줘야 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안티조선'의 입장에서야 조선일보가 궤도를 한참 벗어나 오른쪽의 맨 귀퉁이에서 게릴라전과 전면전을 병행하는 '꼴통집단'으로 보일테지만 이 또한 매우 정치적인 판단입니다. 이야기가 의도를 다소 벗어났습니다만, 아무튼 흥미로운 현상은 작금의 조선일보(chosun.com)가 가장 급진적인 반정부 매체라는 사실입니다. 조선일보가 창사이래 그런적 있었습니까?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보수신문들간의 선택적 친화랄까 머 그런 이야깁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일보가 북중미 혹은 한미관련 기사를 쓸때 자주 이용하는 미국의 매체는 워싱턴포스트(washingtonpost.com)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내셔날을 카바하는 유력 중앙지가 별로 없는(월스트리트저널-울트라 보수-과 유에스뉴스가 열받을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지방의 신문들이 파워풀하죠. 뉴욕타임즈, 엘에이타임즈, 시카고트리뷴, 워싱턴포스트 등등... 미국의 신문들 또한 이념의 스펙트럼이 다양하죠. 유태인이 소유하고 있어 팔레스타인문제 등에 대해서는 대단히 보수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논조는 뉴욕타임즈에 의해 대표됩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 끝에 워싱턴포스트가 있죠. 이쯤되면 조선일보가 왜 워싱턴포스트의 기사에 친근감을 갖는지 짐작이 되죠.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사히(朝日)가 리버럴이고 산케이(産經, sankei.co.jp)와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가 보수를 대변하며 요미우리(讀賣)와 마이니찌(每日)는 그 중간쯤됩니다. 그중 산케이는 한국 조선일보 자리에 있습니다. 기타조센(북조선) 문제에 있어 조선일보와 시각이 똑같습니다. 지금 산케이 웹에 들어가 보시면 국제기사를 다루는 페이지에 특집으로 두가지 이슈가 있는데 하나가 '북한'이고 다른 하나가 '이라크'입니다.

 

어제 그제 일본의 '조선일보' 산케이신문의 기사 몇 개가 한국사회를 열받게 한 모양입니다. 원문들이 웹에서 소제되는 바람에 아쉽게도 국내신문의 기사만 보았습니다만... 하나가 최근의 논란인 '과거사 재평가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보안법 폐지'논의입니다. 산케이의 시각에서 두가지 문제 모두 '좌파', '공산주의', '반일', 그리고 '북한'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좌파정권이 세를 득하는 바람에 공산주의자들조차 재평가 된다는 논지이고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적의가 약해지게 된다는 것이죠. 남이야!!! ... 하지만 문제는 간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의 내노라하는 프로그레시브들도 한반도의 통일이 가져올 한일관계에의 영향에 대해 매우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헌법까지 뜯어고쳐 자위대의 재무장을 고려하는 것 또한 이러한 한반도 정세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역사가 미래에 대해 뭘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런 와중에 우끼는 기사가 있어 하나 소개합니다. 그리 우낄것 까지는 없지만... 오늘 아침에 뉴스를 뒤적이다 보니 산케이 웹에 조선일보가 신문지면에 기자들의 블로그주소를 병기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실었더군요. '집필기자 블로그의 어드레스를 처음으로 게재한 조선일보'라는 제목으로...'한국의 유력지 조선일보는 27일부터 지면에 게재된 기사에 '블로그'라고 불리는 집필기자의 개인 홈페이지 어드레스를 병기하기 시작했다'고... 제가 지금까지 일본신문에서 읽은 기사 가운데 제일 무가치한 기사였습니다. 연예인 이혼기사보다도 못한!  대단한 연댑(솔리다리티)니다.

 

sabo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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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먹다

술을 먹다.


어제 그러니까 이곳 극동시간으로 8월 26일 목요일 저녁에 제가 있는 연구소의 과격분자들하고 술을 한잔했습니다. 두가지의 화두가 있었고 간간이 다양한 양념성 소재가 끼어들었습니다. 첫번째는 며칠전 오끼나와 대학내에 떨어져 인명피해까지 발생시킨 미군헬기 추락사건을 뉴스가 거들어 주지 않는다는 성토였습니다. 요즘 테레비 뉴스가 올림픽에 미쳐서 국내의 중요한 현안을 도외시한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저도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찝찝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일본에 왔던 지난 4월부터 참의원 선거가 있던 지난 7월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왔던 뉴스는 북조선에의해 납치된 일본인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납치란 대단히 야만적 폭력임에 분명하고 사건이 실재했다면 지금에라도 원상으로 돌려져야 겠지요. 아시다시피 그 와중에 일부의 피랍자들은 가족들에게로 돌아왔구요. 고이즈미가 한껀 한겁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말이죠. 아무튼...

헌데, 저는 해당 사건을 다루는 일본사회의 경박함에 매우 놀랐습니다. 진보주의자라는 사람들 혹은 과격분자처럼 보이는 래디칼들도 이 문제 앞에서는 껍데기 안을 들여다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 지금 도하 테레비가 이 문제로 이 난리를 치는지, 지민또(자민당)의 정치적 의도와 꼼수는 무엇인지, 고이즈미가 단지 납북자 문제의 해결만을 위해 김정일을 만나는 것인지... 인도주의의 담론이 정치적 썸씽의 음흉함과 냄새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런판에... 일본의 프로그레씨브들은 제게 이럽니다. 강코쿠노 정부는 왜 강코쿠의 납치자들 문제에 침묵하는가? 이런씨!!! ... 애니하우, 오끼나와 미군헬기 추락사건을 테레비가 매일 매시 보여주면 일본 국민들 이라크에서의 미군 만행에 귀기울여 반전대열에 동참할까요? 와타시와 와까라나이!

두번째 화두. 요즘 일본은 아들못나 눈총을 받으며 황궁에 갇혀 거의 정신병 일보전인 외교관 출신의 왕세자비 마사꼬에 관해 관심이 많습니다. 보루나이 왕국의 왕실 혼사에 사절로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상태가 좋지 않아 포기했다는 뉴스를 그저께 신문에서 읽은터라 저도 한마디 거들었죠. 안타까운 일이라는 정도의 코멘트. 왕세자 부부에게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 딸이 영국처럼 국왕의 지위에 오르려면 관련 호릿츠(법률)를 고쳐야 하는데 사회적 비용이 생각보다 큰 모양입니다. 게다가 왕실을 관리하는 최고위가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라 여성의 왕위계승을 결사반대 한다는 군요. 일본에도 유림적 꼴통이 있단말입니다. 그래 제가 제 앞에 있는 과격분자들한테 왕실의 근대화에 대해, 즉 봉건적 유제로 부터의 해방을 제안했단 말입니다. 물론 제게 양 제도에 대한 평가의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 그런데 저쪽 한켠에서 왠 화살이 날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기타조센(북한)의 봉건적 권력세습은 어떻게 생각하냐? 이런 씨!!!

일본의 광범위한 식자층에게 북한은 많은 관심의 대상입니다. 통일후의 한반도와 그로부터의 한일관계를 진단하는 시각도 매우 흥미롭구요. 제 전문영역은 아닙니다만 다음에 기회되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해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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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를 열며

오늘은 2004년 8월 27일입니다. 얼마나 자주 무언가를 써 올릴지 모르지만 오늘 제 블로그 하나를 이곳 진보넷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격과 내용에 관해 정의하지 않았으니 이곳에 뭐가 채워질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세상에 보이지 않는 소리들이 이곳에서 불리워 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1. 화면 우측 상부의 블로그 대표 이미지.

이 이미지는 일본 도쿄의 신주쿠(新宿)에서 제가 찍은 것입니다. 별 생각없이 찍어놓았는데 사진을 열고 보니 아래 붉은 정지 표시(止まれ)위에 반짝이는 좌회전 신호가 대단히 마음에 들어 이 놈을 좋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자고로(오래전부터) 레프트가 상징하는 것은 사악함, 서툼, 비정상 그리고... 볼셰비키. 사정이 많이 나아졌습니다만 아직 우리들 뇌하수에 유유히 흐르는 우편향의 정서와 사상적 편린은 여전합니다. 야만적 폭력의 근원이 항시 오른편에 있음을 상기하면서 이 자리에 멈추어 왼쪽의 세계관과 삶을 다시한번 생각합니다. 어느시점 그대로 주저 앉을지라도...

 

2.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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