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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1/25
    역사는 발전한다.
    180˚
  2. 2004/11/10
    자본주의는 절대 일한 만큼 주지 않는다.
    180˚
  3. 2004/11/04
    되찾은 목소리(1)
    180˚

역사는 발전한다.

해방(벗의 이름이다)은 결국 세상이 망해버리고 말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가 발전시키는 문명이 자동화와 기계화를 가속화시키고 인간성을 상실한 대중은 기계들에게 밀려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가 모든 걸 앗아갈 것이라 했다.

그렇다! 노동자들이 보고만 있는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역사를 믿는다. 노동계급의 힘을 믿는다.

지금은 비록 자본주의가 자기증식을 하면서 먹이를 찾아 날뛰고 있지만 먹을만한 꺼리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끼리 서로 뜯어먹겠다고 설치면서 난동을 부려도 노동자들은 보고만 있을 것인가? 노동자들이 투쟁의 망치로 자본에 맞서야 한다. 투쟁으로 단련된 튼튼한 망치로..

발전한 사회에서 노동력이 생산하는 가치는 이윤이 아니라 자연이나 문화와 교환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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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절대 일한 만큼 주지 않는다.

아직도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긴 국어사전에도 임금을 '노동의 대가로 받는 보수'라고 정의해 놓은 걸 보면 임금에 대한 오해는 단순한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노동의 대가라면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한 보수가 지급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임금은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도 천차만별이다.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것은 '임금'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비정규직이 양산되기 전에도 임금은 노동의 대가로 기능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 24시간이고, 노동시간은 최대 15~16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수천, 수억원대의 임금 차이가 발생하는 자본주의에서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라는 맑스의 정의는 불변의 진리다.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임금으로 생활하는 노동자들이 1백만이 넘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자본가들은 이야기한다. 노동의 질이 다르기 때문에 보수도 다르다고..

그럼 많이 배운 사법고시 출신들이 재벌들 밑에서 그 보다 더 적은 보수를 받고 일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재벌들이 가진 노동의 질은 자동차 범퍼를 교체해주는 정비업소 노동자들의 질보다 훨씬 못하지 않은가?

자본가들은 또 이야기한다. 파이를 키우고 난 후에 나누자고..

파이가 커진다고 노동자들에게 돌아올 몫이 있을 것인가? 그럼 10년 전보다 훨씬 파이가 커졌는데 왜 노동자들의 삶은 자꾸 곤궁해지는가? 파이는 누가 다 먹어버렸나?

자본가들은 파이가 커질수록 더 많은 큰 파이를 가지려고 한다. 이것이 자본의 법칙이다.

한국경제가 성장일로를 달리고 있던 지난 90년대 초반부터 노동자들 중 가장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던 경비직, 청소직을 비정규직화 하고 소사장제, 사내 하청을 도입해 노동자들을 분리하기 시작한 자본가들의 횡포를 보라.  

임금이 노동의 대가로 받는 보수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이 공유되어야 한다. GDP1 만달러면 4인가족의 연간 수입은 4만달러. 여기에서 "일한만큼"의 +-가 주어지면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자본주의가 자본의 공유를 허락하겠는가?

일한 만큼 받을 수 있는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노동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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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목소리

참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

자신을 용서한다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제 용서나 사랑 그런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으려 한다.

그냥 사는 거다.

그냥 해 나가는 거다.

할 일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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